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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동이전

고구려의 역사와 중국의 관계

동이 고구려국주 001
번역주 001)
高句驪 : 『宋書』에서는 高句驪·高驪·高麗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특히 ‘高麗’라는 국명은 『宋書』·『魏書』 등의 사서에서부터 확인되기 시작하는데, 기사 연대로만 따지면 『魏書』 帝紀 太祖 天興 元年(398) 正月조에 “辛酉 車駕發自中山 至于望都堯山 徙山東六州民吏及徒何 高麗雜夷三十六萬 百工伎巧十萬餘口 以充京師”라는 기사에서 처음 ‘고려’가 확인된다. 그러나 사서의 성서 연대로 따졌을 때 高麗 국호가 처음 등장하는 중국 사서는 『宋書』로서, 『송서』에서는 고구려를 ‘高句驪’, ‘高驪’, ‘高麗’ 등으로 표기하였고, 같은 책 本紀 少帝 景平 元年(423) 3월조에 “三月壬寅 孝懿皇后祔葬于興寧陵 是月 高麗國遣使朝貢”이라는 기사에서 ‘高麗’ 국호가 처음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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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지금에 와서는 한대의 요동군[에 해당했던 지역을] 다스리고 있다.주 002
번역주 002)
遼東郡 : 『漢書』 卷28下, 地理志 第8下, “遼東郡 秦置 屬幽州 戶五萬五千九百七十二 口二十七萬二千五百三十九 縣十八 襄平 有牧師官 莽曰昌平 新昌 無慮 西部都尉治 望平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莽曰長說 房 候城 中部都尉治 遼隊 莽曰順睦 遼陽 大梁水西南至遼陽入遼 莽曰遼陰 險瀆 居就 室僞山 室僞水所出 北至襄平入梁也 高顯 安市 武次 東部都尉治 莽曰桓次 平郭 有鐵官·鹽官 西安平 莽曰北安平 文 莽曰文亭 番汗 沛水出塞外 西南入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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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왕 고련(장수왕, 재위: 413~491)주 003
번역주 003)
高璉 : 고구려 20대 왕인 장수왕의 이름이다. 사후에는 북위로부터 “康”이라는 諡號를 받았다. 『宋書』·『南齊書』·『梁書』·『魏書』·『周書』에는 ‘璉’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三國史記』에서는 巨連 혹은 巨璉·璉이라고 하였다. 한편 『신찬성씨록』과 『일본서기』에 기록된 ‘夫連王’을 장수왕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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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 안제(재위: 397~419)주 004
번역주 004)
安帝 : 東晋 10대 황제로서 諱는 司馬德宗이며, 자는 安德이다. 태원 7년(382) 孝武帝 司馬曜와 安德太后 陳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太元 12년(387) 8월 태자에 책봉되고, 태원 21년(396) 9월, 사마요가 죽자 즉위하였다. 즉위 시에 나이가 어려 숙부 회계왕 司馬道子가 섭정하였다. 무능하고 개인적으로도 결점이 많았던 황제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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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희 9년(413)에 장사주 005
번역주 005)
長史 : 長史·司馬·參軍 등의 관직은 본래 막부를 연 장군이 설치하던 속료들이었는데, 4세기 이후 중국과 주변국의 책봉·조공 관계가 장군직을 매개로 전개되면서 책봉을 받은 주변국 국왕도 막부를 개설하고 그 속료를 설치하여 주로 외교사절에 활용하였다(坂元義種,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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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익을 보내 표를 올리고 자백마주 006
번역주 006)
赭白馬 : 몸통에 붉은색과 흰색 털이 섞여 있는 말을 뜻한다. 당대 자백마는 고아한 털 빛깔로 귀한 종이자 명마로 알려져 있었는데 특히 慕容鮮卑의 지도자 慕容廆가 타던 자백마가 유명하였고(『晉書』 권110, 慕容雋載記), 남조 황실에서는 자백마를 기르며 천자의 수레를 끌게 하였다고 한다(池田溫,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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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바쳤다.주 007
번역주 007)
고구려 사신 파견은 동진과 백제·왜의 연결에 대한 대응이었다는 의미에서 논의가 진행되었는데(江畑武, 1968 ; 池田溫, 1977 ; 坂元義種, 1981 ; 武田幸男, 1989 ; 梁起錫, 2005 ; 大庭脩, 1981 ; 川本芳昭, 1988 ; 石井正敏 編, 2010), 함께 간 倭人은 동반 사신(橋本增吉, 1956 ; 今西春秋, 1972 ; 池田溫, 2002 ; 川本芳昭, 1992), 개별 사신(노중국, 2005 ; 주보돈, 2005 ; 김인홍, 2009), 고구려 포로(坂元義種, 1981 ; 강종훈, 2011) 등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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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련을 사지절주 008
번역주 008)
使持節 : 漢代에 皇帝의 명령을 받들고 나갈 때 황제가 節杖을 주어 그 권위를 높인 데서 유래하였다. 군사 지휘관에게 使持節·指 節·假節을 더해주는 ‘加節之制’는 군사 지휘권의 자율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장치였고, 일반화된 것은 魏晉代부터였다. 『宋書』에 따르면, ‘使持節을 上으로 하고, 指節을 다음으로, 假節을 下로 하였다. 使持節은 2千石 이하[의 모두]를 처형할 수 있으며, 指節은 관위가 없는 자만을 처형할 수 있으나, 軍事일 경우에는 사지절과 같은 권한을 갖는다. 假節은 오직 軍事일 경우에만 軍令을 범한 자를 처형할 수 있다.’고 한다. “使持節爲上 指節次之 假節爲下 使持節得殺二千石以下 指節殺無官位人 若軍事得與使指節同 假節唯軍事得殺犯軍令者”(『宋書』 卷39, 百官志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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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독영주주 009
번역주 009)
營州 : 遼西 지역의 한 행정구역으로서 『後漢書』 卷74, 列傳 64下, 袁紹劉表列傳 下, “初平元年 乃分遼東爲遼西·中遼郡 幷置太守 越海收東萊諸縣 爲營州刺史 自立爲遼東侯·平州牧 追封父延爲建義侯”라 하여 初平 元年(190)에 公孫度이 영주자사가 되었다는 기사에서 처음 확인된다. 東晉 시기에는 요서 지방을 지배하던 後趙의 石季龍과 後燕의 慕容熙가 平州를 설치하였으며, 또 前燕의 慕容儁은 고구려 故國原王을 營州諸軍事 征東大將軍 營州刺史 樂浪公 高句麗王(『晉書』 卷110, 載記 第10, 慕容儁)로 임명한 사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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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군사주 010
번역주 010)
都督營州諸軍事 : 都督營州諸軍事는 營州 일대에 대한 제반 군사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都督은 지휘관이 군사권을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말한다. 諸軍事에는 세 등급이 있었는데, 都督諸軍事·監諸軍事·督諸軍事의 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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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장군주 011
번역주 011)
征東將軍 : 장군호 가운데 四方 방위를 붙이는 장군호의 위계는 四征, 四鎭, 四安, 四平의 순이었으며, 그중 四征將軍의 위계가 가장 높았다. 征東將軍은 四征將軍의 하나로서 漢獻帝 初平 시기 처음 설치되었는데, 東西南北의 방위 중 首席에 해당하였으며 대개는 東方 정벌을 담당하였다. 송대 품계로는 3품에 해당하였다(金鍾完, 1995). 『文獻通考』 職官에서 “四征將軍 皆漢魏以來置 加大者始曰方面 征東將軍 征西將軍 征南將軍 征北將軍各一人 魏黃初中位次三公 後魏加大 則次衛將軍 唐無”라고 하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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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왕·낙랑공으로 삼았다.
[宋] 고조(宋 武帝, 재위: 420~422)주 012
번역주 012)
高祖 : 420년 宋을 건국한 武帝(재위 : 420~422)를 말한다. 이름은 劉裕, 자는 徳輿이며 묘호는 高祖이다. 시호는 武皇帝이다. 399년 병사를 일으킨 하급군인 출신 유유는 할거세력이던 손은·환현 등을 물리치고 東晉의 安帝를 복위시키며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후 유유는 북으로 후연의 침공을 격퇴하는 한편, 북벌을 감행하여 南燕과 後秦 등을 멸망시켰다. 420년 동진의 恭帝로부터 정권을 이양받고 建康城에 도읍하여 국호를 宋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南朝 국가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나, 劉裕는 재위 3년 만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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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즉위하여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사지절·도독영주제군사·정동장군·고구려왕·낙랑공 [고]련과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장군·백제왕주 013
번역주 013)
『宋書』 권97, 列傳57, 夷蠻列傳 東夷 百濟國 조를 보면 東晉 義熙 12년(416)에 백제왕을 ‘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 濟王’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腆支王 12년 12월조에도 동일한 기록이 확인된다. 본 고구려전에서는 ‘督百濟諸軍事’이라 하고 있지만, 같은 책 백제전에서는 ‘都督百濟諸軍事’로 기록하고 있어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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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영주 014
번역주 014)
映 : 腆支王(재위 : 405~420)의 이름이다. 전지왕의 명칭에는 각기 다른 기록이 있다. 『日本書紀』에는 直支王, 『三國遺事』에는 眞支王으로 기록되었다. 한편 전지왕의 이름에 대하여 「汲古閣本」·「南監本」·「冊府元龜本」·『梁書』의 百濟傳과 『南史』의 百濟傳에는 ‘映’으로, 「百衲本」, 『梁書』百濟傳은 ‘眏’으로, 『三國史記』에는 ‘腆支’로, 『翰苑』 所引의 『宋書』나 梁의 『職貢圖』에는 ‘睓’으로, 『通典』에는 ‘腆’으로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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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모두 해외에서 의리를 지키며 멀리서 조공을 바쳐왔다. 생각건대 새롭게 [왕조의] 시작을 알리고 마땅히 나라의 경사를 함께 나누려 한다. [고]련을 정동대장군주 015
번역주 015)
征東大將軍 : 魏代에 四征將軍에 ‘大’를 加號한 四征大將軍이 설치되면서 처음 만들어졌다. 장군호 가운데 四方 방위를 붙이는 장군호의 위계는 四征, 四鎭, 四安, 四平의 순이었으며, 四征大將軍은 그중 가장 위계가 높았다. 征東大將軍은 四征大將軍 중에서도 首席의 지위에 해당하는 장군호였으며, 대개 東方 정벌을 담당하였다. 송대 품계로는 2품에 해당하였다(金鍾完, 1995). 『文獻通考』 職官에서 “四征將軍 皆漢魏以來置 加大者始曰方面 征東將軍 征西將軍 征南將軍 征北將軍各一人 魏黃初中位次三公 後魏加大 則次衛將軍 唐無”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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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올리며 [여]영은 진동대장군주 016
번역주 016)
鎭東大將軍 : 後漢代 이후로 장군호 가운데 四方 방위를 붙이는 장군호는 四征, 四鎭, 四安, 四平의 위계 순으로 설치되었는데, 四鎭大將軍은 四征大將軍 바로 아래 위계에 해당하는 장군호였다. 宋代 鎭東大將軍의 품계는 2품에 해당하였다(金鍾完,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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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올리며, 지절·도독·왕·공은 예전과 같게 한다.”라고 하였다.주 017
번역주 017)
『宋書』 권3, 武帝 永初 원년(420) 7월에 “征東將軍高句驪王高璉進號征東大將軍 鎮東將軍百濟王扶餘映進號鎮東大將軍”라 한 기록이 있다. 위 기록은 義熙12년(416) 책봉기록과 그 이후 420년 책봉기록이다. 하지만 전지왕은 420년 3월에 사망하였고, 그해 3월에 구이신왕이 즉위하였다. 송나라에서는 백제 전지왕의 사망 사실을 모르고 책봉한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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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초] 3년(422)에는 [고]련에게 산기상시주 018
번역주 018)
散騎常侍 : 散騎職은 御駕에 陪乘했던 秦代의 ‘散騎’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魏晉代에 이르러 ‘散騎常侍’를 두었으며, 남북조시대에는 문하성의 侍中과 함께 궁중에서 시립하는 황제의 측근이었다. 산기상시 외에 通直散騎常侍·員外散騎常侍·散騎侍郎·通直散騎侍郎·員外散騎侍郎 등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정치의 득실을 헌납하고 상주문과 조서를 처리하였다. 이런 면에서 산기직이 사절의 관직이 될 수 있었다. 황제의 칙사로서 가장 적합한 직임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만 사절의 관직이 산기직일 경우, 대개는 사절로 선발된 자에게 그의 본래 관직의 관품에 상당하는 산기직을 임시로 준 것이다. 宋代에는 集書省에 속하였으나, 후에는 구체적인 사무가 없어 加官職으로 변하게 되었다. 송대 품계로는 5품에 해당하였다(金鍾完,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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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독평주제군사의 직을 더하여 주었다.
소제(재위: 422~424)주 019
번역주 019)
少帝 : 宋의 2대 황제 劉義符(재위 : 422~424)를 말한다. 劉宋을 건국한 劉裕와 武敬皇后 臧愛親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나, 劉裕가 죽자 그 뒤를 이어 15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폭정과 실정을 거듭하다 재위 3년 차에 신하들에 의해 폐위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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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평 2년(424)에 [고]련이 장사 마루 등을 보내어 궐에 이르러 방물을 바쳤다.주 020
번역주 020)
『宋書』 卷4, 本紀 4, 景平二年春二月 조를 보면 “二年 春二月 … 乙巳 … 高麗國遣使貢獻”라는 기록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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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는] 사신을 보내 위로하면서 말하였다. “황제가 안부를 묻는다. 사지절·산기상 시·도독영평이주제군사·정동대장군·고구려왕·낙랑공은 왕위를 동방에서 이어 선대의 업적을 계승하였고, 그 순종하는 마음이 이미 뚜렷하고 극진한 정성 역시 드러났다. 요수를 넘고 바다를 건너와 본조에 공물을 바쳤다. 짐은 부덕한 몸으로 분에 넘치게 대통을 이었지만, 선대의 자취를 오래도록 마음에 품었고, [선대가] 남긴 은택을 깊이 생각하였다. 지금 알자주 021
번역주 021)
謁者 : 朝會, 儐贊, 奉使 등 사무를 담당한 관직이다. 송대 품계로는 7품에 해당하였다(金鍾完,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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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백과 부알자 왕소자 등을 보내어 짐의 뜻을 알리고 그 수고로움을 고맙게 여기고자 한다. 그대는 어진 정치에 힘써 그 공은 오래도록 융성하게 하고 옛 가르침을 본받아 짐의 뜻에 부합하도록 하라.”
이에 앞서 선비 모용보(재위: 396~398)주 022
번역주 022)
慕容寶 : 後燕을 건국한 慕容垂의 넷째아들로서 後燕의 제2대 황제에 오른 인물이다. 자는 道祐이며 묘호는 烈宗, 시호는 惠愍帝이다. 394년에 모용수가 후연을 건립하자 아들 모용보를 태자로 삼았다. 396년 4월 모용수가 죽자, 황제에 즉위하면서 연호를 永康이라고 하였다. 즉위한 이후로 북위의 공격을 받았는데, 하북 일대를 석권한 북위에 의해 信都가 함락되는 등 수세에 몰렸다. 이에 반격을 노리던 모용보는 397년 2월 滹沱水에서 북위와 일전을 벌였으나 크게 패하고 中山으로 물러났다. 397년 3월 대장군 慕容麟이 모용보를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도주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모용보는 中山을 버리고 다시 요서 지역의 龍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용성으로 옮겨가던 중에 차남 慕容會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馮跋의 도움으로 겨우 용성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용성을 중심으로 세력을 보전하던 모용보는 다시 慕容鎭의 반란에 직면하였고, 간신히 반란을 진압했지만, 곧이어 일어난 蘭汗의 반란으로 398년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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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중산주 023
번역주 023)
中山 : 오늘날 중국 河北省 鄭州市 일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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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도읍을 두었다가 색로주 024
번역주 024)
索虜 : 鮮卑族 拓跋氏가 건립한 北魏를 일컫는 말이다. 『宋書』 열전을 보면 索虜傳(권55)이 立傳되어 있다. 당시 남북조의 대립 속에서 정권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宋은 北魏에 대해 멸칭의 의미로서 ‘索虜’라는 표현을 썼다. 『宋書』를 보면 索頭虜·北虜·虜 등의 표현도 보이는데, 색두로라는 표현에서 북방 유목민족이 변발을 하는 모습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추정된다. 5호16국시대로부터 남북조시대로 이행하면서 남조와 북조는 각각 정통성을 주장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남조는 북조를 索虜로, 북조는 남조를 島夷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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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격파당하고, 동쪽으로 황룡주 025
번역주 025)
黃龍 : 黃龍은 前燕의 수도였으며, 일명 和龍城이라고도 한다. 咸康 8년(342)에 慕容皝이 棘城으로부터 柳城으로 천도한 이후 龍城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오늘날 중국 遼寜省 朝陽市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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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도망하였다. 의희 초에 [모용]보의 동생 [모용]희(재위: 401~407)주 026
번역주 026)
慕容熙 : 後燕의 제5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이다. 자는 道文이며 시호는 昭文帝이다. 慕容垂의 8남이자 慕容寶의 동생으로 모후는 황후 段氏이다. 398년, 용성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하여 慕容寶가 죽고 蘭汗이 권력을 잡았다. 하지만 곧이어 慕容盛이 난한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모용성은 모용희를 河間公으로 봉하였다. 이때 모용희의 활동과 관련하여서는 400년 고구려 침공 당시 선봉장으로 종군한 사실이 『三國史記』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401년 일어난 반란으로 모용성이 죽자 모용희는 군신들이 후원했던 慕容元(모용성의 동생)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16세의 나이로 즉위한 모용희는 연호를 元始라 하였다. 모용희는 황후 苻氏와 昭儀 苻氏를 총애하여 龍騰苑 건립 등 각종 토목공사를 추진하면서 국력을 낭비하였다. 광개토왕시대 고구려에게 402년에는 燕郡이, 404년에는 宿軍城이 점령당하자, 그 보복으로 405년 고구려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407년, 극진히 사랑했던 황후 부씨가 죽고 그 무덤이 완성되자, 모용희는 맨발로 황후 부씨를 들고 무덤 안에다 묻어두고 장례를 치렀다. 이때를 틈타 용성에서 馮跋이 모반을 일으켜 慕容雲을 추대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모용희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용성 북문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모용희는 달아나 용등원에 숨어있다가 사로잡혀 처형되니 향년 2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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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그 신하 풍발(재위: 409~430)주 027
번역주 027)
馮跋 : 北燕의 2대 황제이다. 義熙 3년(407) 後燕의 신하였던 馮跋은 慕容熙를 폐위하고 慕容雲을 추대하여 나라를 세우고 ‘大燕’이라 하였다. 이를 ‘北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처음엔 高句麗 유민의 후손인 高雲(慕容雲)을 帝位에 옹립하였으나, 고운이 측근에게 살해당하자 이를 수습한 뒤 스스로 天王에 올랐다. 풍발은 龍城(지금의 遼寧省 朝陽市)을 수도로 삼고, 요서 지방을 지배하였다. 430년 馮跋이 죽자 그 동생인 馮弘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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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살해당하였다. [풍]발은 스스로 즉위하여 연왕이라 일컬었고, 그 도읍을 황룡성주 028
번역주 028)
黃龍城 : 馮弘이 다스리던 北燕의 도읍을 말한다. 본래 명칭은 和龍城이었으며, 일명 龍城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前燕의 慕容皝이 342년에 棘城으로부터 柳城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龍城이라고 불렀다. 이와 관련하여 遼寧省 朝陽市 중심부 朝陽北塔 부근에서 용성 관련 성벽유적이 조사된 바 있다. 한편 朝陽市 동쪽으로 4km 지점에 龍山이 소재한다. 이곳에 용이 나타난 것을 보고 새로운 궁성을 짓고 和龍城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용성은 前燕·後燕·北燕의 수도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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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두었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황룡국이라고 불렀다. [풍]발이 죽고, 아들 [풍]홍(재위: 430~436)주 029
번역주 029)
馮弘 : 北燕의 마지막 군주로서 馮宏 또는 馮文通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430년 馮跋이 죽자 그 아들 馮翼을 죽이고 帝位에 즉위하여 연호를 太興이라고 하였다. 436년 고구려로 망명할 때까지 北燕을 통치하였다. 馮弘을 馮跋의 아들이라고 기록하였으나 『宋書』의 찬자인 沈约이 잘못 기록한 것이다. 『晉書』·『魏書』 등 대부분의 사서에서는 馮弘을 馮跋의 동생으로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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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즉위하였다. 여러 차례 색로에게 공격을 받았음에도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宋 文帝, 재위: 424~453)주 030
번역주 030)
太祖 : 宋의 3대 황제 文帝 劉義隆(407~453)을 말하며 廟號는 太祖이다. 高祖 劉裕의 셋째아들로서 424년에 즉위하여 29년의 재위 기간 동안 이른바 ‘元嘉의 治’를 일구며 劉宋 전반기의 역사를 이끌었던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말년에 자신의 장남이었던 劉劭를 太子에서 폐하려다 도리어 공격을 받아 453년 3월 16일 시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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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에 해마다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원가 12년 (435)에는 [풍홍의 관작을] 더하여 제수하였다.주 031
번역주 031)
『南史』 本紀 卷2, 宋文帝 元嘉 12년 春正月조 기록을 보면 “癸酉 封馮弘爲燕王”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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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 15년(438) 다시 색로에게 공격을 받자, [풍]홍은 패하여 달아나 고구려 북풍성주 032
번역주 032)
北豊城 : 北豊城의 유래는 北豊에 있다. 北豊은 三國時代 魏 및 晉 시기 遼東郡의 屬縣이었다. 北豊은 〈광개토왕릉비〉 永樂 5년조에서도 보이는데, 稗麗를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통과한 지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북풍은 적어도 광개토왕대에는 고구려 영역에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중국 遼寧省 瀋陽 서북방(『讀史方輿紀要』) 혹은 遼寧省 本溪 부근(孫進己·馮永謙 主編, 1989), 遼寧省 蓋州 부근(南滿洲鐵道株式會社, 1913) 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한편, 240년 汶縣·北豐縣 유민이 山東 반도로 이주한 사실(『三國志』 卷4, 魏書4, 齊王芳紀 正始 元年 2月條, “正始元年春二月 … 丙戌 以遼東汶北豐縣民流徙渡海 規齊郡之西安臨菑昌國縣界爲新汶南豐縣 以居流民”)로 보아 바다에서 가까운 遼東 반도 남부의 魏覇山城(王綿厚·李健才, 1990)이나 요동 반도 서부의 해안가로 보기도 한다(武田幸男, 1989 ; 여호규, 2005). 436년 고구려는 영입해 온 풍홍을 평곽에 두었다가 북풍으로 옮겼다(『三國史記』 卷18, 高句麗本紀6, 長壽王 26年, “二十六年 春三月 初燕王弘至遼東 王遣使勞之曰 龍城王溤君 爰適野次 士馬勞乎 弘慙怒 稱制讓之 王處之平郭 尋徙北豊”). 이와 관련하여 당시 북위가 풍홍의 송환을 요구하고 있었고, 또 그가 고구려의 대우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상황으로 보아, 평곽에서 옮겼던 지역은 바다 가까운 곳이 아니라 접근이나 탈출이 어려운 요동 반도 내륙 지역이라는 이해도 있다(임기환, 1998 ; 이성제,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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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도망하였고,주 033
번역주 033)
馮弘의 고구려 망명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魏書』 卷4 上, 世祖 太武帝 太延 2年 3월조를 보면 “(三月) 辛未 平東將軍娥清安西將軍古弼 率精騎一萬討馮文通 平州刺史元嬰又率遼西將軍會之 文通迫急 求救於高麗 高麗使其大將葛蔓盧以步騎二萬人迎文通”라고 하여 魏軍 精騎 1만이 馮弘을 토벌하고자 진군하니, 馮弘은 비밀리에 高麗에 영입해 줄 것을 청하였으며, 高麗는 장군 葛蔓盧에게 步騎 2만을 주어 풍홍을 맞아오도록 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고구려로 망명한 풍홍의 상황에 대해서는 『三國史記』 卷18, 高句麗本紀6, 長壽王 26년(438) 봄 3월에 “初燕王弘至遼東 王遣使勞之曰 龍城王溤君 爰適野次 士馬勞乎 弘慙怒 稱制讓之 王處之平郭 尋徙北豊 弘素侮我 政刑賞罰 猶如其國 王乃奪其侍人 取其太子王仁爲質 弘怨之 遣使如宋 上表求迎”라고 하였다. 여기서 稱制는 황제가 아닌 이가 황제의 명인 제를 내렸을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 북연의 天王이었던 풍홍은 자기 나라 안에서 황제의 명인 제와 詔를 내려왔고 여기에서도 그렇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송과 북위의 책봉을 받고 蕃臣이 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풍홍은 제를 내릴 자격이 없는 이라고 보아 『위서』의 편찬 과정에서 이를 칭제라고 표현했던 것이다(시노하라 히로카타,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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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를 올려 [자신을] 맞아들여줄 것을 요청하였다. 태조는 왕백구와 조차흥을 보내 그를 맞이하게 하고, 아울러 고구려에게 [송환에 필요한] 제반 준비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고]련은 [풍]홍을 남쪽으로 보내려 하지 않아, 장수 손수와 고구 등을 보내 그를 습격하여 살해하였다. [왕]백구 등이 7,000여 인을 이끌고 [손]수 등을 갑자기 공격하여 치니, [손]수를 생포하고 [고]구 등 2인을 죽였다. [고]련은 [왕]백구 등이 [고구려 장수를] 멋대로 살해하였으므로, 사신을 보내 [그들을] 잡아 [송으로] 보내왔다.주 034
번역주 034)
遣使執送之 : “사신을 보내 [백구 등을] 잡아서 [고구려에] 보내달라고 하였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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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멀리 떨어진 나라[와의 우호를 고려하여] 그 뜻을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왕]백구 등은 하옥되었다가 풀려났다. [고]련은 해마다 사신을 보내왔다.주 035
번역주 035)
『宋書』 本紀 卷5, 文帝紀를 보면 元嘉 13년(436)·元嘉 15년(438)·元嘉 16년(43)·元嘉 18년(441)·元嘉 20년(443)·元嘉 28년(451)에 고구려가 宋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친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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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 16년(439) [송] 태조는 북방을 토벌하고자, [고]련에게 조서를 내려 말을 보내도록 하니, [고]련이 말 800필을 바쳤다.주 036
번역주 036)
『宋書』 本紀 卷5, 文帝紀 元嘉 16년에 “是歲 武都王河南王林邑國高麗國並高麗國幷遣使獻方物”이라는 기사가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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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宋 孝武帝, 재위: 453~464)주 037
번역주 037)
世祖 : 宋 4대 황제로서 휘는 劉駿, 字는 休龍이며, 諡號는 孝武帝이다. 宋 文帝 劉義隆의 3남으로 아버지가 큰형 劉劭와 둘째 형 劉濬에게 죽임을 당하자 그들을 주살하고 즉위하였다. 다른 종실 황족을 압박하고 황제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재위 12년인 大明 8년(464) 윤5월 35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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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건 2년(455)에 [고]련이 장사 동등을 보내 표를 올려 국상 2주기를 위로하고 아울러 방물을 바쳤다.주 038
번역주 038)
『宋書』 本紀 卷6, 孝武帝紀 孝建 2년 11월조에 “辛亥 高麗國遣使獻方物”이라는 기록이 있다. 아마도 이때의 관련 기록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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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 3년(459)에 다시 숙신씨의 호시와 석노를 바쳤다.주 039
번역주 039)
楛矢·石砮 : 楛矢와 石砮는 북방 肅愼氏의 특산물이다. 호시는 광대싸리 나무로 만든 화살을 말하며, 석노는 돌로 만든 화살촉을 말한다. 楛矢는 중국에서 石砮와 함께 숙신의 상징인데, 이는 단순한 조공품이 아니라 천자의 성덕에 九夷가 복종하는 의미, 곧 천자의 통치가 四海에 미치는 구체적 상징으로 이해되었다(여호규, 2017). 石砮는 돌로 만든 화살촉을 말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挹婁와 『後漢書』 卷85, 東夷, 挹婁에 “靑石爲鏃”이라는 기록이 있다. 『宋書』 本紀 卷6, 孝武帝紀 大明 3년 11월조를 보면, “十一月 己巳 高麗國遣使獻方物 肅慎國重譯獻楛矢石砮”라는 기록이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숙신씨가 고구려 사신을 따라와 宋에 호시와 석노를 바쳤던 것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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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 7년(463)에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사지절·산기상시·독평영이주제군사·정 동대장군·고구려왕·낙랑공 [고]련은 대대로 충성스러운 뜻으로 섬기며 바다 건너의 번병이 되었다. 진실로 본조에 귀부[係屬]하여 잔악한 무리를 없애는 데에 뜻을 함께 하였다. 사표주 040
번역주 040)
沙表 : 본래 ‘사막의 바깥’, ‘막북’을 뜻한다. 흔히 ‘먼 나라’, ‘먼 해외 지역’을 가리켰다. 여기서 ‘沙表’는 오늘날 중국 고비사막 북쪽에 있었던 국가인 柔然(蠕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노태돈, 1984). 즉 본문의 이 대목은 宋이 유연과 연결하는 데에 고구려가 협조한 것에 대한 고마움을 전달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고구려 또한 송 및 유연과의 협력을 통해 북위를 견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三國史記』 卷25, 百濟本紀3, 蓋鹵王 18年 條 및 『魏書』 卷100, 列傳 88, 百濟傳을 보면, 474년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國書에서 고구려에 대해 말하기를 “남쪽으로는 劉氏(宋)와 내통하기도 하고, 북쪽으로는 蠕蠕과 맹약을 맺어 힘써 결탁함으로써 폐하의 정책을 배반하려 하고 있습니다(或南通劉氏 或北約蠕蠕 共相脣鹵 謀凌王略).”라고 하였다(金鍾完, 2002). 이와 달리, 沙表를 ‘외진 곳’, ‘먼 곳’이라는 의미로 보고, 해당 구절은 459년 고구려가 遠夷인 숙신의 입조를 주도한 일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백다해,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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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통역하며 짐의 계책[王猷]을 널리 펴주었다. 마땅히 관작을 더하고 포상하여 아름다운 절의를 기리고자 한다. [이에] 거기대장군주 041
번역주 041)
車騎大將軍 : 漢代에 처음 설치한 최고 武官織 중 하나이다. 宋代에는 大將軍과 驃騎大將軍 다음 가는 第3位 장군직이였으며, 품계는 2품에 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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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부의동삼사주 042
번역주 042)
開府儀同三司 : 漢代 처음 설치하였다. ‘開府’는 고급관리가 府署를 개설할 수 있음을 지칭한다. ‘三司’는 ‘三師’의 최고 대우를 받음을 뜻한다. 漢魏시대 ‘三公(太尉·司徒·司空)’은 ‘三師’의 최고 대우를 누렸기 때문에 ‘開府儀同三司’의 대우를 받은 셈이다. ‘開府’는 屬官을 둘 수 있었다. 漢代의 將軍 가운데 ‘開府儀同三司’의 대우를 받는 자도 있었다. 兩晉時代에 이르러 諸州의 刺史들은 대개 ‘將軍’으로서 府를 열고[開府] 都督諸軍事의 지위를 겸하였으나 ‘儀同三司’의 대우는 받지 못하였다. 將軍에게 ‘開府儀同三司’가 덧붙여지면 府를 개설하고 三師, 혹은 三公의 대우를 받음을 나타냈으며, 정해진 品階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北魏시대 처음으로 품계가 정해졌다. 이후 唐宋時代 開府儀同三司는 1品의 文散官의 품계가 되었고, 元代에도 통용되다가 明代에 폐지되었다. 開府儀同三司 이외에 儀同三司의 관명이 있었는데, 지위는 최고관계의 바로 다음이었다(동북아역사재단 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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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올리고, 지절·상시·도독·왕·공 은 이전과 같게 한다.”라고 하였다.주 043
번역주 043)
『宋書』 本紀 卷6, 孝武帝紀를 보면, 大明 7년 6월에 “高麗國遣使獻方物” 기사가 있고, 이어 7월에 “乙亥 征東大將軍高麗王高璉 進號車騎大將軍·開府儀同三司”라는 기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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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宋 明帝, 재위: 465~472)주 044
번역주 044)
太宗 : 劉宋 7대 황제인 明帝 劉彧을 말한다. 劉宋 6대 황제 前廢帝 劉子業의 숙부로서 465년 12월 폭정을 일삼던 유자업을 암살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재위 기간 중 전폐제의 동생 劉子勳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하였다. 재위 초반에는 吏部尙書 蔡興宗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대 황제의 폭정을 일소하고 관대한 정치로 인심을 안정시켰으며 學館을 설치하는 등 선정을 펼치기도 하였으나, 점차 독단적이고 잔혹한 인물로 바뀌어 갔으며, 사치와 부패로 재정을 궁핍하게 만드는 등 실정을 거듭하다 472년 3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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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시 연간(465~471)과 후폐제(재위: 472~477)주 045
번역주 045)
後廢帝 : 宋 7대 황제 유욱(劉昱, 463~477)을 말한다. 宋 明帝의 맏아들로서 즉위한 뒤 종실에서 분란이 발생하였는데, 숙부인 劉休範과 建平王 劉景素가 반란을 일으켰다. 모두 훗날 南齊를 건국하는 蕭道成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유욱은 권력을 잡은 소도성에게 살해당하였고 蒼梧郡王으로 격하되었다. 諡號는 없으며 4년여 기간을 재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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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휘 연간(473~477) 중에도 공물을 바치는 것이 끊이지 않았다.주 046
번역주 046)
『宋書』 明帝紀와 後廢帝紀를 보면 고구려가 宋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泰始 3년(467)·泰始 6년(470)·泰豫 元年(472)·元徽 3년(475)에 보인다. 뿐만 아니라 宋의 마지막 황제인 順帝 昇明 元年(477)에도 조공기사가 확인된다. 또한 『三國史記』에서는 장수왕 66년(478)에 宋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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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역주 001)
    高句驪 : 『宋書』에서는 高句驪·高驪·高麗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특히 ‘高麗’라는 국명은 『宋書』·『魏書』 등의 사서에서부터 확인되기 시작하는데, 기사 연대로만 따지면 『魏書』 帝紀 太祖 天興 元年(398) 正月조에 “辛酉 車駕發自中山 至于望都堯山 徙山東六州民吏及徒何 高麗雜夷三十六萬 百工伎巧十萬餘口 以充京師”라는 기사에서 처음 ‘고려’가 확인된다. 그러나 사서의 성서 연대로 따졌을 때 高麗 국호가 처음 등장하는 중국 사서는 『宋書』로서, 『송서』에서는 고구려를 ‘高句驪’, ‘高驪’, ‘高麗’ 등으로 표기하였고, 같은 책 本紀 少帝 景平 元年(423) 3월조에 “三月壬寅 孝懿皇后祔葬于興寧陵 是月 高麗國遣使朝貢”이라는 기사에서 ‘高麗’ 국호가 처음 확인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遼東郡 : 『漢書』 卷28下, 地理志 第8下, “遼東郡 秦置 屬幽州 戶五萬五千九百七十二 口二十七萬二千五百三十九 縣十八 襄平 有牧師官 莽曰昌平 新昌 無慮 西部都尉治 望平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莽曰長說 房 候城 中部都尉治 遼隊 莽曰順睦 遼陽 大梁水西南至遼陽入遼 莽曰遼陰 險瀆 居就 室僞山 室僞水所出 北至襄平入梁也 高顯 安市 武次 東部都尉治 莽曰桓次 平郭 有鐵官·鹽官 西安平 莽曰北安平 文 莽曰文亭 番汗 沛水出塞外 西南入海”바로가기
  • 번역주 003)
    高璉 : 고구려 20대 왕인 장수왕의 이름이다. 사후에는 북위로부터 “康”이라는 諡號를 받았다. 『宋書』·『南齊書』·『梁書』·『魏書』·『周書』에는 ‘璉’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三國史記』에서는 巨連 혹은 巨璉·璉이라고 하였다. 한편 『신찬성씨록』과 『일본서기』에 기록된 ‘夫連王’을 장수왕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安帝 : 東晋 10대 황제로서 諱는 司馬德宗이며, 자는 安德이다. 태원 7년(382) 孝武帝 司馬曜와 安德太后 陳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太元 12년(387) 8월 태자에 책봉되고, 태원 21년(396) 9월, 사마요가 죽자 즉위하였다. 즉위 시에 나이가 어려 숙부 회계왕 司馬道子가 섭정하였다. 무능하고 개인적으로도 결점이 많았던 황제로 알려져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5)
    長史 : 長史·司馬·參軍 등의 관직은 본래 막부를 연 장군이 설치하던 속료들이었는데, 4세기 이후 중국과 주변국의 책봉·조공 관계가 장군직을 매개로 전개되면서 책봉을 받은 주변국 국왕도 막부를 개설하고 그 속료를 설치하여 주로 외교사절에 활용하였다(坂元義種, 1978).바로가기
  • 번역주 006)
    赭白馬 : 몸통에 붉은색과 흰색 털이 섞여 있는 말을 뜻한다. 당대 자백마는 고아한 털 빛깔로 귀한 종이자 명마로 알려져 있었는데 특히 慕容鮮卑의 지도자 慕容廆가 타던 자백마가 유명하였고(『晉書』 권110, 慕容雋載記), 남조 황실에서는 자백마를 기르며 천자의 수레를 끌게 하였다고 한다(池田溫, 2002).바로가기
  • 번역주 007)
    고구려 사신 파견은 동진과 백제·왜의 연결에 대한 대응이었다는 의미에서 논의가 진행되었는데(江畑武, 1968 ; 池田溫, 1977 ; 坂元義種, 1981 ; 武田幸男, 1989 ; 梁起錫, 2005 ; 大庭脩, 1981 ; 川本芳昭, 1988 ; 石井正敏 編, 2010), 함께 간 倭人은 동반 사신(橋本增吉, 1956 ; 今西春秋, 1972 ; 池田溫, 2002 ; 川本芳昭, 1992), 개별 사신(노중국, 2005 ; 주보돈, 2005 ; 김인홍, 2009), 고구려 포로(坂元義種, 1981 ; 강종훈, 2011) 등으로 보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8)
    使持節 : 漢代에 皇帝의 명령을 받들고 나갈 때 황제가 節杖을 주어 그 권위를 높인 데서 유래하였다. 군사 지휘관에게 使持節·指 節·假節을 더해주는 ‘加節之制’는 군사 지휘권의 자율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장치였고, 일반화된 것은 魏晉代부터였다. 『宋書』에 따르면, ‘使持節을 上으로 하고, 指節을 다음으로, 假節을 下로 하였다. 使持節은 2千石 이하[의 모두]를 처형할 수 있으며, 指節은 관위가 없는 자만을 처형할 수 있으나, 軍事일 경우에는 사지절과 같은 권한을 갖는다. 假節은 오직 軍事일 경우에만 軍令을 범한 자를 처형할 수 있다.’고 한다. “使持節爲上 指節次之 假節爲下 使持節得殺二千石以下 指節殺無官位人 若軍事得與使指節同 假節唯軍事得殺犯軍令者”(『宋書』 卷39, 百官志上)바로가기
  • 번역주 009)
    營州 : 遼西 지역의 한 행정구역으로서 『後漢書』 卷74, 列傳 64下, 袁紹劉表列傳 下, “初平元年 乃分遼東爲遼西·中遼郡 幷置太守 越海收東萊諸縣 爲營州刺史 自立爲遼東侯·平州牧 追封父延爲建義侯”라 하여 初平 元年(190)에 公孫度이 영주자사가 되었다는 기사에서 처음 확인된다. 東晉 시기에는 요서 지방을 지배하던 後趙의 石季龍과 後燕의 慕容熙가 平州를 설치하였으며, 또 前燕의 慕容儁은 고구려 故國原王을 營州諸軍事 征東大將軍 營州刺史 樂浪公 高句麗王(『晉書』 卷110, 載記 第10, 慕容儁)로 임명한 사례가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0)
    都督營州諸軍事 : 都督營州諸軍事는 營州 일대에 대한 제반 군사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都督은 지휘관이 군사권을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말한다. 諸軍事에는 세 등급이 있었는데, 都督諸軍事·監諸軍事·督諸軍事의 순이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1)
    征東將軍 : 장군호 가운데 四方 방위를 붙이는 장군호의 위계는 四征, 四鎭, 四安, 四平의 순이었으며, 그중 四征將軍의 위계가 가장 높았다. 征東將軍은 四征將軍의 하나로서 漢獻帝 初平 시기 처음 설치되었는데, 東西南北의 방위 중 首席에 해당하였으며 대개는 東方 정벌을 담당하였다. 송대 품계로는 3품에 해당하였다(金鍾完, 1995). 『文獻通考』 職官에서 “四征將軍 皆漢魏以來置 加大者始曰方面 征東將軍 征西將軍 征南將軍 征北將軍各一人 魏黃初中位次三公 後魏加大 則次衛將軍 唐無”라고 하 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2)
    高祖 : 420년 宋을 건국한 武帝(재위 : 420~422)를 말한다. 이름은 劉裕, 자는 徳輿이며 묘호는 高祖이다. 시호는 武皇帝이다. 399년 병사를 일으킨 하급군인 출신 유유는 할거세력이던 손은·환현 등을 물리치고 東晉의 安帝를 복위시키며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후 유유는 북으로 후연의 침공을 격퇴하는 한편, 북벌을 감행하여 南燕과 後秦 등을 멸망시켰다. 420년 동진의 恭帝로부터 정권을 이양받고 建康城에 도읍하여 국호를 宋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南朝 국가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나, 劉裕는 재위 3년 만에 죽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3)
    『宋書』 권97, 列傳57, 夷蠻列傳 東夷 百濟國 조를 보면 東晉 義熙 12년(416)에 백제왕을 ‘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 濟王’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腆支王 12년 12월조에도 동일한 기록이 확인된다. 본 고구려전에서는 ‘督百濟諸軍事’이라 하고 있지만, 같은 책 백제전에서는 ‘都督百濟諸軍事’로 기록하고 있어 차이가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4)
    映 : 腆支王(재위 : 405~420)의 이름이다. 전지왕의 명칭에는 각기 다른 기록이 있다. 『日本書紀』에는 直支王, 『三國遺事』에는 眞支王으로 기록되었다. 한편 전지왕의 이름에 대하여 「汲古閣本」·「南監本」·「冊府元龜本」·『梁書』의 百濟傳과 『南史』의 百濟傳에는 ‘映’으로, 「百衲本」, 『梁書』百濟傳은 ‘眏’으로, 『三國史記』에는 ‘腆支’로, 『翰苑』 所引의 『宋書』나 梁의 『職貢圖』에는 ‘睓’으로, 『通典』에는 ‘腆’으로 나타나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5)
    征東大將軍 : 魏代에 四征將軍에 ‘大’를 加號한 四征大將軍이 설치되면서 처음 만들어졌다. 장군호 가운데 四方 방위를 붙이는 장군호의 위계는 四征, 四鎭, 四安, 四平의 순이었으며, 四征大將軍은 그중 가장 위계가 높았다. 征東大將軍은 四征大將軍 중에서도 首席의 지위에 해당하는 장군호였으며, 대개 東方 정벌을 담당하였다. 송대 품계로는 2품에 해당하였다(金鍾完, 1995). 『文獻通考』 職官에서 “四征將軍 皆漢魏以來置 加大者始曰方面 征東將軍 征西將軍 征南將軍 征北將軍各一人 魏黃初中位次三公 後魏加大 則次衛將軍 唐無”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6)
    鎭東大將軍 : 後漢代 이후로 장군호 가운데 四方 방위를 붙이는 장군호는 四征, 四鎭, 四安, 四平의 위계 순으로 설치되었는데, 四鎭大將軍은 四征大將軍 바로 아래 위계에 해당하는 장군호였다. 宋代 鎭東大將軍의 품계는 2품에 해당하였다(金鍾完, 1995).바로가기
  • 번역주 017)
    『宋書』 권3, 武帝 永初 원년(420) 7월에 “征東將軍高句驪王高璉進號征東大將軍 鎮東將軍百濟王扶餘映進號鎮東大將軍”라 한 기록이 있다. 위 기록은 義熙12년(416) 책봉기록과 그 이후 420년 책봉기록이다. 하지만 전지왕은 420년 3월에 사망하였고, 그해 3월에 구이신왕이 즉위하였다. 송나라에서는 백제 전지왕의 사망 사실을 모르고 책봉한 것으로 이해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18)
    散騎常侍 : 散騎職은 御駕에 陪乘했던 秦代의 ‘散騎’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魏晉代에 이르러 ‘散騎常侍’를 두었으며, 남북조시대에는 문하성의 侍中과 함께 궁중에서 시립하는 황제의 측근이었다. 산기상시 외에 通直散騎常侍·員外散騎常侍·散騎侍郎·通直散騎侍郎·員外散騎侍郎 등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정치의 득실을 헌납하고 상주문과 조서를 처리하였다. 이런 면에서 산기직이 사절의 관직이 될 수 있었다. 황제의 칙사로서 가장 적합한 직임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만 사절의 관직이 산기직일 경우, 대개는 사절로 선발된 자에게 그의 본래 관직의 관품에 상당하는 산기직을 임시로 준 것이다. 宋代에는 集書省에 속하였으나, 후에는 구체적인 사무가 없어 加官職으로 변하게 되었다. 송대 품계로는 5품에 해당하였다(金鍾完, 1995).바로가기
  • 번역주 019)
    少帝 : 宋의 2대 황제 劉義符(재위 : 422~424)를 말한다. 劉宋을 건국한 劉裕와 武敬皇后 臧愛親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나, 劉裕가 죽자 그 뒤를 이어 15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폭정과 실정을 거듭하다 재위 3년 차에 신하들에 의해 폐위되어 죽임을 당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0)
    『宋書』 卷4, 本紀 4, 景平二年春二月 조를 보면 “二年 春二月 … 乙巳 … 高麗國遣使貢獻”라는 기록이 확인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21)
    謁者 : 朝會, 儐贊, 奉使 등 사무를 담당한 관직이다. 송대 품계로는 7품에 해당하였다(金鍾完, 1995).바로가기
  • 번역주 022)
    慕容寶 : 後燕을 건국한 慕容垂의 넷째아들로서 後燕의 제2대 황제에 오른 인물이다. 자는 道祐이며 묘호는 烈宗, 시호는 惠愍帝이다. 394년에 모용수가 후연을 건립하자 아들 모용보를 태자로 삼았다. 396년 4월 모용수가 죽자, 황제에 즉위하면서 연호를 永康이라고 하였다. 즉위한 이후로 북위의 공격을 받았는데, 하북 일대를 석권한 북위에 의해 信都가 함락되는 등 수세에 몰렸다. 이에 반격을 노리던 모용보는 397년 2월 滹沱水에서 북위와 일전을 벌였으나 크게 패하고 中山으로 물러났다. 397년 3월 대장군 慕容麟이 모용보를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도주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모용보는 中山을 버리고 다시 요서 지역의 龍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용성으로 옮겨가던 중에 차남 慕容會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馮跋의 도움으로 겨우 용성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용성을 중심으로 세력을 보전하던 모용보는 다시 慕容鎭의 반란에 직면하였고, 간신히 반란을 진압했지만, 곧이어 일어난 蘭汗의 반란으로 398년 사망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3)
    中山 : 오늘날 중국 河北省 鄭州市 일대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24)
    索虜 : 鮮卑族 拓跋氏가 건립한 北魏를 일컫는 말이다. 『宋書』 열전을 보면 索虜傳(권55)이 立傳되어 있다. 당시 남북조의 대립 속에서 정권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宋은 北魏에 대해 멸칭의 의미로서 ‘索虜’라는 표현을 썼다. 『宋書』를 보면 索頭虜·北虜·虜 등의 표현도 보이는데, 색두로라는 표현에서 북방 유목민족이 변발을 하는 모습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추정된다. 5호16국시대로부터 남북조시대로 이행하면서 남조와 북조는 각각 정통성을 주장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남조는 북조를 索虜로, 북조는 남조를 島夷라 불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5)
    黃龍 : 黃龍은 前燕의 수도였으며, 일명 和龍城이라고도 한다. 咸康 8년(342)에 慕容皝이 棘城으로부터 柳城으로 천도한 이후 龍城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오늘날 중국 遼寜省 朝陽市에 해당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26)
    慕容熙 : 後燕의 제5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이다. 자는 道文이며 시호는 昭文帝이다. 慕容垂의 8남이자 慕容寶의 동생으로 모후는 황후 段氏이다. 398년, 용성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하여 慕容寶가 죽고 蘭汗이 권력을 잡았다. 하지만 곧이어 慕容盛이 난한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모용성은 모용희를 河間公으로 봉하였다. 이때 모용희의 활동과 관련하여서는 400년 고구려 침공 당시 선봉장으로 종군한 사실이 『三國史記』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401년 일어난 반란으로 모용성이 죽자 모용희는 군신들이 후원했던 慕容元(모용성의 동생)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16세의 나이로 즉위한 모용희는 연호를 元始라 하였다. 모용희는 황후 苻氏와 昭儀 苻氏를 총애하여 龍騰苑 건립 등 각종 토목공사를 추진하면서 국력을 낭비하였다. 광개토왕시대 고구려에게 402년에는 燕郡이, 404년에는 宿軍城이 점령당하자, 그 보복으로 405년 고구려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407년, 극진히 사랑했던 황후 부씨가 죽고 그 무덤이 완성되자, 모용희는 맨발로 황후 부씨를 들고 무덤 안에다 묻어두고 장례를 치렀다. 이때를 틈타 용성에서 馮跋이 모반을 일으켜 慕容雲을 추대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모용희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용성 북문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모용희는 달아나 용등원에 숨어있다가 사로잡혀 처형되니 향년 23세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7)
    馮跋 : 北燕의 2대 황제이다. 義熙 3년(407) 後燕의 신하였던 馮跋은 慕容熙를 폐위하고 慕容雲을 추대하여 나라를 세우고 ‘大燕’이라 하였다. 이를 ‘北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처음엔 高句麗 유민의 후손인 高雲(慕容雲)을 帝位에 옹립하였으나, 고운이 측근에게 살해당하자 이를 수습한 뒤 스스로 天王에 올랐다. 풍발은 龍城(지금의 遼寧省 朝陽市)을 수도로 삼고, 요서 지방을 지배하였다. 430년 馮跋이 죽자 그 동생인 馮弘이 뒤를 이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8)
    黃龍城 : 馮弘이 다스리던 北燕의 도읍을 말한다. 본래 명칭은 和龍城이었으며, 일명 龍城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前燕의 慕容皝이 342년에 棘城으로부터 柳城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龍城이라고 불렀다. 이와 관련하여 遼寧省 朝陽市 중심부 朝陽北塔 부근에서 용성 관련 성벽유적이 조사된 바 있다. 한편 朝陽市 동쪽으로 4km 지점에 龍山이 소재한다. 이곳에 용이 나타난 것을 보고 새로운 궁성을 짓고 和龍城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용성은 前燕·後燕·北燕의 수도로 기능하기도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9)
    馮弘 : 北燕의 마지막 군주로서 馮宏 또는 馮文通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430년 馮跋이 죽자 그 아들 馮翼을 죽이고 帝位에 즉위하여 연호를 太興이라고 하였다. 436년 고구려로 망명할 때까지 北燕을 통치하였다. 馮弘을 馮跋의 아들이라고 기록하였으나 『宋書』의 찬자인 沈约이 잘못 기록한 것이다. 『晉書』·『魏書』 등 대부분의 사서에서는 馮弘을 馮跋의 동생으로 전하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30)
    太祖 : 宋의 3대 황제 文帝 劉義隆(407~453)을 말하며 廟號는 太祖이다. 高祖 劉裕의 셋째아들로서 424년에 즉위하여 29년의 재위 기간 동안 이른바 ‘元嘉의 治’를 일구며 劉宋 전반기의 역사를 이끌었던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말년에 자신의 장남이었던 劉劭를 太子에서 폐하려다 도리어 공격을 받아 453년 3월 16일 시해당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31)
    『南史』 本紀 卷2, 宋文帝 元嘉 12년 春正月조 기록을 보면 “癸酉 封馮弘爲燕王”이라는 기록이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32)
    北豊城 : 北豊城의 유래는 北豊에 있다. 北豊은 三國時代 魏 및 晉 시기 遼東郡의 屬縣이었다. 北豊은 〈광개토왕릉비〉 永樂 5년조에서도 보이는데, 稗麗를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통과한 지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북풍은 적어도 광개토왕대에는 고구려 영역에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중국 遼寧省 瀋陽 서북방(『讀史方輿紀要』) 혹은 遼寧省 本溪 부근(孫進己·馮永謙 主編, 1989), 遼寧省 蓋州 부근(南滿洲鐵道株式會社, 1913) 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한편, 240년 汶縣·北豐縣 유민이 山東 반도로 이주한 사실(『三國志』 卷4, 魏書4, 齊王芳紀 正始 元年 2月條, “正始元年春二月 … 丙戌 以遼東汶北豐縣民流徙渡海 規齊郡之西安臨菑昌國縣界爲新汶南豐縣 以居流民”)로 보아 바다에서 가까운 遼東 반도 남부의 魏覇山城(王綿厚·李健才, 1990)이나 요동 반도 서부의 해안가로 보기도 한다(武田幸男, 1989 ; 여호규, 2005). 436년 고구려는 영입해 온 풍홍을 평곽에 두었다가 북풍으로 옮겼다(『三國史記』 卷18, 高句麗本紀6, 長壽王 26年, “二十六年 春三月 初燕王弘至遼東 王遣使勞之曰 龍城王溤君 爰適野次 士馬勞乎 弘慙怒 稱制讓之 王處之平郭 尋徙北豊”). 이와 관련하여 당시 북위가 풍홍의 송환을 요구하고 있었고, 또 그가 고구려의 대우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상황으로 보아, 평곽에서 옮겼던 지역은 바다 가까운 곳이 아니라 접근이나 탈출이 어려운 요동 반도 내륙 지역이라는 이해도 있다(임기환, 1998 ; 이성제, 2012).바로가기
  • 번역주 033)
    馮弘의 고구려 망명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魏書』 卷4 上, 世祖 太武帝 太延 2年 3월조를 보면 “(三月) 辛未 平東將軍娥清安西將軍古弼 率精騎一萬討馮文通 平州刺史元嬰又率遼西將軍會之 文通迫急 求救於高麗 高麗使其大將葛蔓盧以步騎二萬人迎文通”라고 하여 魏軍 精騎 1만이 馮弘을 토벌하고자 진군하니, 馮弘은 비밀리에 高麗에 영입해 줄 것을 청하였으며, 高麗는 장군 葛蔓盧에게 步騎 2만을 주어 풍홍을 맞아오도록 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고구려로 망명한 풍홍의 상황에 대해서는 『三國史記』 卷18, 高句麗本紀6, 長壽王 26년(438) 봄 3월에 “初燕王弘至遼東 王遣使勞之曰 龍城王溤君 爰適野次 士馬勞乎 弘慙怒 稱制讓之 王處之平郭 尋徙北豊 弘素侮我 政刑賞罰 猶如其國 王乃奪其侍人 取其太子王仁爲質 弘怨之 遣使如宋 上表求迎”라고 하였다. 여기서 稱制는 황제가 아닌 이가 황제의 명인 제를 내렸을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 북연의 天王이었던 풍홍은 자기 나라 안에서 황제의 명인 제와 詔를 내려왔고 여기에서도 그렇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송과 북위의 책봉을 받고 蕃臣이 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풍홍은 제를 내릴 자격이 없는 이라고 보아 『위서』의 편찬 과정에서 이를 칭제라고 표현했던 것이다(시노하라 히로카타, 2009).바로가기
  • 번역주 034)
    遣使執送之 : “사신을 보내 [백구 등을] 잡아서 [고구려에] 보내달라고 하였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35)
    『宋書』 本紀 卷5, 文帝紀를 보면 元嘉 13년(436)·元嘉 15년(438)·元嘉 16년(43)·元嘉 18년(441)·元嘉 20년(443)·元嘉 28년(451)에 고구려가 宋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친 기록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36)
    『宋書』 本紀 卷5, 文帝紀 元嘉 16년에 “是歲 武都王河南王林邑國高麗國並高麗國幷遣使獻方物”이라는 기사가 확인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37)
    世祖 : 宋 4대 황제로서 휘는 劉駿, 字는 休龍이며, 諡號는 孝武帝이다. 宋 文帝 劉義隆의 3남으로 아버지가 큰형 劉劭와 둘째 형 劉濬에게 죽임을 당하자 그들을 주살하고 즉위하였다. 다른 종실 황족을 압박하고 황제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재위 12년인 大明 8년(464) 윤5월 35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38)
    『宋書』 本紀 卷6, 孝武帝紀 孝建 2년 11월조에 “辛亥 高麗國遣使獻方物”이라는 기록이 있다. 아마도 이때의 관련 기록으로 추정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39)
    楛矢·石砮 : 楛矢와 石砮는 북방 肅愼氏의 특산물이다. 호시는 광대싸리 나무로 만든 화살을 말하며, 석노는 돌로 만든 화살촉을 말한다. 楛矢는 중국에서 石砮와 함께 숙신의 상징인데, 이는 단순한 조공품이 아니라 천자의 성덕에 九夷가 복종하는 의미, 곧 천자의 통치가 四海에 미치는 구체적 상징으로 이해되었다(여호규, 2017). 石砮는 돌로 만든 화살촉을 말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挹婁와 『後漢書』 卷85, 東夷, 挹婁에 “靑石爲鏃”이라는 기록이 있다. 『宋書』 本紀 卷6, 孝武帝紀 大明 3년 11월조를 보면, “十一月 己巳 高麗國遣使獻方物 肅慎國重譯獻楛矢石砮”라는 기록이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숙신씨가 고구려 사신을 따라와 宋에 호시와 석노를 바쳤던 것으로 해석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40)
    沙表 : 본래 ‘사막의 바깥’, ‘막북’을 뜻한다. 흔히 ‘먼 나라’, ‘먼 해외 지역’을 가리켰다. 여기서 ‘沙表’는 오늘날 중국 고비사막 북쪽에 있었던 국가인 柔然(蠕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노태돈, 1984). 즉 본문의 이 대목은 宋이 유연과 연결하는 데에 고구려가 협조한 것에 대한 고마움을 전달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고구려 또한 송 및 유연과의 협력을 통해 북위를 견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三國史記』 卷25, 百濟本紀3, 蓋鹵王 18年 條 및 『魏書』 卷100, 列傳 88, 百濟傳을 보면, 474년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國書에서 고구려에 대해 말하기를 “남쪽으로는 劉氏(宋)와 내통하기도 하고, 북쪽으로는 蠕蠕과 맹약을 맺어 힘써 결탁함으로써 폐하의 정책을 배반하려 하고 있습니다(或南通劉氏 或北約蠕蠕 共相脣鹵 謀凌王略).”라고 하였다(金鍾完, 2002). 이와 달리, 沙表를 ‘외진 곳’, ‘먼 곳’이라는 의미로 보고, 해당 구절은 459년 고구려가 遠夷인 숙신의 입조를 주도한 일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백다해, 2020).바로가기
  • 번역주 041)
    車騎大將軍 : 漢代에 처음 설치한 최고 武官織 중 하나이다. 宋代에는 大將軍과 驃騎大將軍 다음 가는 第3位 장군직이였으며, 품계는 2품에 해당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42)
    開府儀同三司 : 漢代 처음 설치하였다. ‘開府’는 고급관리가 府署를 개설할 수 있음을 지칭한다. ‘三司’는 ‘三師’의 최고 대우를 받음을 뜻한다. 漢魏시대 ‘三公(太尉·司徒·司空)’은 ‘三師’의 최고 대우를 누렸기 때문에 ‘開府儀同三司’의 대우를 받은 셈이다. ‘開府’는 屬官을 둘 수 있었다. 漢代의 將軍 가운데 ‘開府儀同三司’의 대우를 받는 자도 있었다. 兩晉時代에 이르러 諸州의 刺史들은 대개 ‘將軍’으로서 府를 열고[開府] 都督諸軍事의 지위를 겸하였으나 ‘儀同三司’의 대우는 받지 못하였다. 將軍에게 ‘開府儀同三司’가 덧붙여지면 府를 개설하고 三師, 혹은 三公의 대우를 받음을 나타냈으며, 정해진 品階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北魏시대 처음으로 품계가 정해졌다. 이후 唐宋時代 開府儀同三司는 1品의 文散官의 품계가 되었고, 元代에도 통용되다가 明代에 폐지되었다. 開府儀同三司 이외에 儀同三司의 관명이 있었는데, 지위는 최고관계의 바로 다음이었다(동북아역사재단 편, 2010).바로가기
  • 번역주 043)
    『宋書』 本紀 卷6, 孝武帝紀를 보면, 大明 7년 6월에 “高麗國遣使獻方物” 기사가 있고, 이어 7월에 “乙亥 征東大將軍高麗王高璉 進號車騎大將軍·開府儀同三司”라는 기사가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44)
    太宗 : 劉宋 7대 황제인 明帝 劉彧을 말한다. 劉宋 6대 황제 前廢帝 劉子業의 숙부로서 465년 12월 폭정을 일삼던 유자업을 암살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재위 기간 중 전폐제의 동생 劉子勳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하였다. 재위 초반에는 吏部尙書 蔡興宗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대 황제의 폭정을 일소하고 관대한 정치로 인심을 안정시켰으며 學館을 설치하는 등 선정을 펼치기도 하였으나, 점차 독단적이고 잔혹한 인물로 바뀌어 갔으며, 사치와 부패로 재정을 궁핍하게 만드는 등 실정을 거듭하다 472년 3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45)
    後廢帝 : 宋 7대 황제 유욱(劉昱, 463~477)을 말한다. 宋 明帝의 맏아들로서 즉위한 뒤 종실에서 분란이 발생하였는데, 숙부인 劉休範과 建平王 劉景素가 반란을 일으켰다. 모두 훗날 南齊를 건국하는 蕭道成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유욱은 권력을 잡은 소도성에게 살해당하였고 蒼梧郡王으로 격하되었다. 諡號는 없으며 4년여 기간을 재위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46)
    『宋書』 明帝紀와 後廢帝紀를 보면 고구려가 宋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泰始 3년(467)·泰始 6년(470)·泰豫 元年(472)·元徽 3년(475)에 보인다. 뿐만 아니라 宋의 마지막 황제인 順帝 昇明 元年(477)에도 조공기사가 확인된다. 또한 『三國史記』에서는 장수왕 66년(478)에 宋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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