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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스키노발해성

동북아시아 네트워크의 중심지

4. 동북아시아 네트워크의 중심지

발해가 8~10세기 동아시아의 교류에서 했던 가장 큰 역할은 무엇보다도 동아시아 네트워크의 완성 내지 완결을 이루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전형적인 예가 唐 越州에서 819년에 신라선으로 일본에 간 周光翰의 자취이다. 博多에 도착한 주광한은 일본에서의 활동뒤에 820년 이승영을 대사로 하는 발해 사절단의 귀국선에 편승하여 발해로 건너 갔다.大唐越州人周光翰 言升則等 乘新羅人船 問唐國消息 光翰等對日……(『日本紀略』 前篇14 弘仁 10년 6월 壬戌); 唐越州人周光翰 言升則等告請歸鄕 仍隨渤海使以放還(『日本紀略』 前篇14 弘仁 11년 정월 乙未).발해 입국 후 주광한은 압록강을 따라 요동반도를 경유하여 발해만을 가로질러 산동반도에 도착하여 월주로 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중국 남부 -일본(규슈) - 동해 - 발해 - 요동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네트워크가 기능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산동반도와 일본 규슈를 연결하는 발해 상인들과 동해를 건너 일본 동북 지방과 교섭하던 발해 사절단에 의해서도 연결되었다고 보여진다.
발해에 의한 기술·지식의 교류는 주로 일본과의 사이에 이루어졌다.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철 생산 기술이다. 발해인은 철 생산에 고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新唐書』에는 발해인과 철에 관해서 位城縣의 산물이 철이라는 것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지만, 『契丹國志』나 『遼史』에는 발해인이 철 생산에 관련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기사가 몇 군데 보인다.『遼史』卷60, 志29, 食貨 下; 『遼史』卷37, 志7 地理志1; 『契丹國志』卷24, 王沂公行程錄.
일본 北陸 지방에서의 철 생산을 고려할 때에 중요한 것은, 809년에 도착한 14차 발해 사절단이 다음해 귀국할 때 高多佛이 남아 越中國에서 학생들에게 발해어를 가르쳤다는 『日本紀略』의 기사『日本紀略』前篇 14 弘仁 元年 5월 丙寅.이다. 그 동기의 하나는 8~9세기대의 射水丘陵에서 융성했던 철 생산의 기술 혁신이 고려된다.
즉 8세기 후반 일본의 철 생산은, 古墳時代 후기 이래의 鍛造鐵을 생산하던 상자형 화로에서 銑鐵을 생산하여 鑄物을 제조하는 竪形爐로 변하였다. 발해에서는 수형로에 의한 철 생산이나 주조가 성행하였다. 발해 시대의 제철 유적은 아직 조사된 적이 없지만,발해 시기 최대 온돌 유구가 발굴된 크라스키노 성터 34구역에서 주물용 쇠집게, 송풍관 등이 출토되었다. 아울러 34구역의 바로 북쪽 27구역에서 철 제련 과정에서 나오는 철 슬래그(찌꺼기)가 나왔다. 철 슬래그는 39cm(가로)×24~33cm(세로)×5~6cm(두께)의 크기로 대략 30~40kg 정도의 무게이다. 아직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끝나지 않아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제철 유적으로 추정된다.遼代 발해인이 조업했을 가능성이 있는 제철로가 중국 河北省 承德市 灤平縣에서 발견되었다. 양쪽에 풀무 시설이 있던 수형로로 보고서에서는 『契丹國志』卷24, 王沂公行程錄조에 나오는 柳河館에 관련된 유적이라 하고 있다. 『契丹國志』에는 柳河館 근처 富谷館에서 많은 발해인이 수레를 제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車軸등의 주물 생산이 발해인의 손에 의해 성행했다고 생각된다. 越中國에서 高多佛이 발해어를 가르친 배경에는, 발해로부터의 鐵鑄造 기술 도입을 목적으로 하는 일본 정부의 방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대해서 실증적인 연구를 진척시킬 필요가 있지만, 발해와의 교류 가운데 竪型爐에 의한 주철 기술이 일본에 도입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秋田城터 출토 鐵製羽釜나 『新猿樂記』에 기록된 能登釜는, 발해와의 교류가 단순히 정치적·문화적인 외교 의례가 아니라 기술 이전도 포함한 다면적·실질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小島芳孝, 1997, 앞의 논문, 36~39쪽.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은 宣明曆의 전래이다. 859년 정월에 能登國에 도착하였으나 入京을 허가 받지 못한 채로 加賀國에서 放還된 烏孝愼을 대사로 하는 발해 사절단은, 『日本三代實錄』卷2, 貞觀 원년 정월 22일; 『日本三代實錄』卷3, 貞觀 원년 6월 21일.일본에 宣明曆을 가져다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宣明曆은 861년에 일본에서 그때까지 사용되던 大衍曆을 대체하여 채용되었다. 이후 1684년에 貞享曆이 채택될 때까지 800년 이상 사용되었다.大日方 克己, 2003, 「宣明曆と日本·渤海·唐をめぐる諸相」, 『日本と渤海の古代史』(山川出版社), 79쪽.기존 연구 성과에서는 발해 사절단에 의한 唐文化 전달의 예로서만 언급되는 경우가 많았다.朱國忱·魏國忠, 1984, 『渤海史稿』(黑龍江省文物出版社); 濱田耕策, 2000, 『渤海國興亡史』(吉川弘文館); 上田雄, 2002, 『渤海使の硏究』(明石書店).하지만 발해 사절단이 宣明曆을 전한 그 자체의 의미나 주변 상황에 대해서는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못했다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일본에서는 中國曆이 없었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일본인들도 唐에서 비교적 용이하게 입수할 수가 있었다. 예컨대 『入唐求法巡禮行記』에 의하면, 開元寺에 체재하던 엔닌이 838년(開成 3년) 12월 20일에 다음해인 839년(開成 4년)의 曆을 구입했다고 한다.『入唐求法巡禮行記』卷1, 開成 承和 5년 12월 20일. 당시 唐에서는 淮南지방에서 인쇄된 私板曆書가 팔리고 있었다(엔닌지음·김문경 역주, 2001,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89쪽).따라서 엔닌과 같은 求法曾들이 귀국 시에 唐의 曆을 휴대하고 왔을 가능성이 크다. 아울러 9세기에는 많은 신라인·발해인들이 일본과의 교역 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세기 당시 일본에서 最新曆인 당의 宣明曆을 사용하지 못한 것은, 曆을 사용하는 메뉴얼인 曆經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大日方 克己, 2003, 앞의 논문, 80~82쪽.
발해가 일본에 전해 준 것은 바로 宣明曆이 아니라 그 메뉴얼인 宣明曆經이었다. 발해 사절단은 동해를 횡단하는 항로를 이용했고, 李延孝·李英覺·李光玄 등의 발해 상인들은 9세기 중엽 이후 중국 산동반도에서 큐슈로 가는 직항로를 이용했다. 발해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항해의 필수 조건인 시간의 불일치, 즉 宣明曆을 쓰고 있던 唐·渤海·新羅와 宣明曆을 사용하지 않던 일본과의 괴리를 없애기 위해 일본에 宣明曆經을 전해 준 것으로 생각된다.
세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불경이다. 일본 石山寺에 소장되어 있는 『佛頂尊勝陀羅尼經』의 跋文에 의하면, 이 경전은 861년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李居正이 전해 준 것이라고 한다.田島公, 1991, 「海外との交涉」, 『古文書の語る日本史』2-平安-(筑麻書房), 256~258쪽.내용으로 보아 원래 당에서 필사되었던 불경이 발해에 유입되었다가 다시 일본으로 전해졌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다라니경은 밀교의 경전이므로 중국의 밀교 경전이 일본에 전파되었던 경로를 밝혀줄 뿐만 아니라, 일본 밀교가 발해 밀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사실도 추측할 수 있게 해 준다.宋基豪, 1992, 「佛頂尊勝陀羅尼經 跋文」,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신라2·발해편(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5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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