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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제국주의 침략과 아편전쟁

1. 서구 제국주의 침략과 아편전쟁

19세기 제국주의국가들은 자본의 이윤 획득을 위해 활발한 대외팽창과 해외식민지 확대를 전개하였다. 식민지에 대한 경쟁을 통해 이들 국가들은 독점자본주의 형태를 띠며 발전하였다. 이들은 국내에 축적된 잉여자본을 유리하게 투자하고 잉여생산물을 소비할 지역을 해외에서 찾아 나섰다. 자국의 이익과 세력팽창을 목적으로 획득한 식민지를 정치·경제적으로 지배하고자 하였다.주 776
각주 776)
박지향 (2000), 『제국주의의 신화와 현실』,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13~22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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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가리켜 흔히 제국주의(Imperialism) 라 부른다. 식민지 사회경제구조를 영구적(永久的)으로 서구열강의 종속물로 만들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식민지에 대한 ‘약탈’ 에 수준에 그쳤던 이전시대와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주 777
각주 777)
박지향 (2000), 『제국주의의 신화와 현실』,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13~22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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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당시 서구제국주의 국가들 가운데 주도적 위치에 있는 국가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해외시장개척에 가장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18세기말 이후 서양열강들 국가들 가운데 청국과 대외무역을 주도하였다. 무역확대를 원하는 영국은 광동성 일대에 대한 개항을 청 정부에 요구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이 채택한 방법은 군사적 조치였다. 당시 서구제국들이 패쇄적 정책을 펼치는 해당국을 강제 개항시키는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해당국과 개항협상을 추진하고, 협상이 좌절되면 ‘충돌’ 사건을 유발시켜 압도적인 군사적 대응을 행사하여, 결국에는 군사 수단을 통한 해당국과의 전쟁승리에 기초한 불평등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중국에 대한 아편 밀무역을 통해 무역역조현상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이에 은이 외국으로 대량 유출되었고, 중국인의 건강에 큰 위협이 되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청 정부는 린쩌쉬[林則徐]를 광저우[廣州]에 파견하였다. 1839년 린쩌쉬는 압수한 아편을 불태우고 영국인 뱃사람이 중국인 뱃사람을 살해한 사건을 계기로 마카오를 봉쇄해 버렸다. 이를 구실로 영국은 무력대응을 하고 나섰다. 대규모 원정군을 청국에 파견한 영국은 전쟁을 개시하였고, 압도적 군사적 우세 속에 광저우를 침략하였다. 이에 청 정부가 굴복함으로써 1842년 난징[南京]조약이 체결되었다.주 778
각주 778)
권선홍 (2006),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95~100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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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조약은 철저하게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조약의 핵심내용은 5개 항구 개항, 개항장의 영사주재, 전쟁비용 배상, 공행의 무역독점 폐지, 그리고 홍콩의 할양 등이었다.주 779
각주 779)
우에하라 카즈요시 외 저·한철호·이규수 역 (2000), 『동아시아 근현대사』, 서울: 옛 오늘, 24~25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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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기대했던 만큼 중국에 대한 수출이 늘지 않자, 영국은 또다시 전쟁을 일으킬 좋은 기회를 찾았다. 1856년 광동성 광저우에서 일어난 애로우(Arrow) 호 사건을 구실로 영국은 프랑스를 끌어 들여 광저우를 점령하였다. 북상하여 톈진에 이르러 조약개정을 요구하였고, 미국과 러시아도 여기에 합세함에 따라 1858년 결국 톈진조약(天津條約)이 체결되었다. 1860년에는 톈진조약의 비준을 거부한 청 정부에 대해 영국과 불란서 연합군이 베이징 부근까지 진격하여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고, 베이징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톈진조약과 베이징조약은 다른 조약에 없던, 개항장을 북방과 창강유역, 타이완 등으로 늘리는 것과 아편무역을 공인하는 항목이 들어 있었다. 서구 제국주의의 이해관계를 상당히 충족시켜 주는 내용들이었다.
이른바 ‘아편전쟁’은 청국과의 무역확대와 이윤획득을 원하는 서구 열강 들이 군사력을 동원해서 해결한 전형적인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청국 측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불평등한 조약을 맺도록 강요된, 정치·군사적으로 확대 된 침략전쟁이었다. 이는 이후 거대한 중국대륙이 서구제국주의국가들의 이권쟁탈지와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 전쟁은 단순히 청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가 무역확대와 이윤획득을 목표로 하는 서구제국주의 힘 앞에 직면하게 되었음을 상징 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청국을 제압한 서구제국주의 힘이 동아시아의 국가들에게 직접적으로 행사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초 일본은 나가사키[長琦]만을 개항하는 쇄국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일본에게 청국의 패배는 큰 충격이었고, 이것을 직접 체험하게 된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853년 통상을 요구하는 미국 함대의 무력시위에 놀란 일본의 에도막부[江戶幕府]는 대세를 받아들이고 이듬해 일방적으로 불리한 미일화친조약(美日和親條約)을 체결하였다.주 780
각주 780)
피터 두으스 저·김용덕 역 (1983), 『일본근대사』, 서울: 지식산업사, 69~73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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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영국(1854), 러시아(1855), 네덜란드(1856)등과도 조약을 체결하였다. 1858년에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는데, 말 그대로 불평등한 조약 그 자체였다. 그해 6월 체결된 톈진조약과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 이 해에 일본은 네덜란드·러시아·영국·프랑스 등과도 거의 동일한 내용의 불평등조약을 맺었다.
아편전쟁의 충격은 베트남도 비켜가지 않았다. 아편전쟁이 이후 서구 제국주의가 베트남에도 닥쳐올 것으로 예상한 베트남 왕조는 서구의 통상요구를 거부하였다.주 781
각주 781)
송정남 (2010), 『베트남 역사 읽기』, 서울: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330~340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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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베트남에 대한 침략의 구실을 찾고 있던 프랑스는 이를 구실로 1860년부터 1862년 걸쳐 남부의 자딘성[嘉定省]을 비롯한 베트남 동부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베트남 정부는 마침 북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어쩔 수 없이 1862년 6월 12개 항목을 내용으로 하는 제1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프랑스는 서부 3성의 근거지마저 점령하여 남부를 손에 넣었다. 프랑스는 1870~80년대에 걸쳐 또 침략하였다. 이번에는 북부지역에 대한 침략을 감행하여 베트남 전체를 식민지화 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1873년 제2차 사이공조약, 1883년 이른바 아르망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의해 베트남은 청국과의 종주권을 부정하고 프랑스 보호국임을 인정하며, 대외관계는 프랑스를 통해서만 하기로 약속하는 등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처럼 아편전쟁 이후 서구 제국주의세력의 힘은 중국대륙과 함께 일본 및 베트남 등으로 확대되었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 지역은 제국주의 국가의 상품시장으로 전락하고, 유린당하기 시작하였다. 국가적 무역확대와 이윤 획득을 목표로 하는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으로 동아시아 사회는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역사적 고난에 처하게 되었다.

  • 각주 776)
    박지향 (2000), 『제국주의의 신화와 현실』,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13~22 쪽. 바로가기
  • 각주 777)
    박지향 (2000), 『제국주의의 신화와 현실』,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13~22 쪽. 바로가기
  • 각주 778)
    권선홍 (2006),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95~100 쪽. 바로가기
  • 각주 779)
    우에하라 카즈요시 외 저·한철호·이규수 역 (2000), 『동아시아 근현대사』, 서울: 옛 오늘, 24~25 쪽. 바로가기
  • 각주 780)
    피터 두으스 저·김용덕 역 (1983), 『일본근대사』, 서울: 지식산업사, 69~73 쪽. 바로가기
  • 각주 781)
    송정남 (2010), 『베트남 역사 읽기』, 서울: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330~340 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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