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전(和闐)은 한(漢)·송(宋)때 중국과 통교하여 영락 연간 계속하여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고 조정에서는 채폐 등을 하사하여 보답한 내용
우전(于闐)
주 001
각주 001)
은 고대의 나라 이름인데, 한(漢)나라로부터 송(宋)나라에 이르기까지 줄곧 중국과 통교하였다. 영락 4년(1406)에 사신을 보내어 내조하여 공물을 바쳤다.주 002 사신이 하직인사를 하고 돌아갈 때 지휘 신충모살(神忠母撒)
주 003 등에게 명하여 새서를 가지고 함께 가도록 하고, 그 추장에게 직금문기를 하사하였다.주 004 그 추장 타노왜역불랄금(打魯哇亦不剌金)
주 005이 사신을 보내어 옥박(玉璞)주 006을 바치자, 지휘 상형(尙衡) 등에게 명하여 새서와 폐백을 가지고 가서 위로토록 하였다. [영락] 18년(1420)에 합렬·팔답흑상 등 여러 나라와 함께 말을 바치니, 참정(參政) 진성·중관 곽경 등에게 명하여 채폐로 보답토록 하였다.주 007 [영락] 20년(1422)에 미옥(美玉)을 공물로 바치니, 더 많은 상을 내려주었다.주 008 [영락] 22년(1424)에 말과 방물을 바쳤다. 당시 인종(仁宗)이 막 즉위한 때였는데, 연회를 베풀고 상을 내려준 다음 귀국하도록 하였다.于闐: Khotan을 일컫는다. 호탄은 于塡·于置·于殿 등으로도 불리며, 塔里木(Tarim)분지 남부, 즉 지금의 新疆 위구르自治區 和闐(和田)縣에 있던 古代 西域王國 중 하나이다. 호탄(于闐)은 실크로드의 중요 거점 지역에 위치해 무역품의 집산지로서뿐 아니라 동서문화교류의 요충지로서 크게 번성했다. 漢·魏·晉代에 모두 于闐이라 칭해졌고, 唐代에는 安西 4鎭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곳에 毗沙都督府가 설치되었다. 『元史』에서는 斡端이라 칭했다. 11세기에 들어와 인종과 언어가 점차 回鶻化되어 갔다. 漢朝가 西域으로 진출한 이후 于闐은 西域都護에 예속되었다. 東漢 초에는 莎車에게 병합되었다. 漢 明帝 永平 4년(61)에 귀족 廣德이 왕이 되어 莎車를 멸망시켰다. 16년(73)에 漢軍司馬 班超가 于闐에 이르니, 廣德이 匈奴의 使者를 죽이고 漢에 투항하였다. 班超는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서역에 대한 공략에 나섰는데, 于闐이 병사를 내어 도왔다. 魏晉南北朝 시대에도 계속 중원의 왕조에게 進貢하였다. 唐 太宗 貞觀 연간에는 于闐의 왕이 아들을 唐廷에 인질로 보내었다. 高宗 顯 慶 3년(658)에는 安西 4鎭 가운데 하나로서 실크로드 南道의 가장 중요한 軍政의 중심지가 되었다. 9세기 중엽에 남방의 吐藩이 세력을 확대하면서 于闐을 李域 혹은 江熱木布라 칭했다. 北宋 초에 于闐의 使臣과 승려가 몇 차례에 걸쳐 來朝하여 進貢하였다. 明朝 永樂 6년에 使者를 보내어 進貢하였다. 한편 于闐은 11세기 초에 黑汗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그 후 점차 이슬람화 되었다. 후에는 西遼, 蒙古, 察合台 汗國 및 准噶爾(Jungar)部의 통치를 받다가 淸朝 乾隆 24년(1759)에 淸朝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光緖 9년(1883)에는 和闐直隷州가 설치되었다. 于闐은 농업을 위주로 하는데, 서역의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먼저 중원의 양잠 기술을 전수받은 나라이다. 따라서 手工 방직업이 발달했다. 특히 특산물인 玉石으로 유명하다. 于闐은 2세기 말에 불교가 들어온 이후 점차 대승불교의 중심이 되었다. 魏晉에서 隋唐에 이르기까지 于闐은 줄곧 中原佛敎의 원천 가운데 한 곳이었다. 于闐 사람들은 음악과 희극을 즐기고, 繪畵 방면에서는 인도와 이란의 요소가 혼합되었다. 화가 尉遲乙僧은 唐初에 長安에 이르러 많은 벽화를 남겼는데, 唐人 吳道子, 閻立本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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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于闐: Khotan을 일컫는다. 호탄은 于塡·于置·于殿 등으로도 불리며, 塔里木(Tarim)분지 남부, 즉 지금의 新疆 위구르自治區 和闐(和田)縣에 있던 古代 西域王國 중 하나이다. 호탄(于闐)은 실크로드의 중요 거점 지역에 위치해 무역품의 집산지로서뿐 아니라 동서문화교류의 요충지로서 크게 번성했다. 漢·魏·晉代에 모두 于闐이라 칭해졌고, 唐代에는 安西 4鎭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곳에 毗沙都督府가 설치되었다. 『元史』에서는 斡端이라 칭했다. 11세기에 들어와 인종과 언어가 점차 回鶻化되어 갔다. 漢朝가 西域으로 진출한 이후 于闐은 西域都護에 예속되었다. 東漢 초에는 莎車에게 병합되었다. 漢 明帝 永平 4년(61)에 귀족 廣德이 왕이 되어 莎車를 멸망시켰다. 16년(73)에 漢軍司馬 班超가 于闐에 이르니, 廣德이 匈奴의 使者를 죽이고 漢에 투항하였다. 班超는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서역에 대한 공략에 나섰는데, 于闐이 병사를 내어 도왔다. 魏晉南北朝 시대에도 계속 중원의 왕조에게 進貢하였다. 唐 太宗 貞觀 연간에는 于闐의 왕이 아들을 唐廷에 인질로 보내었다. 高宗 顯 慶 3년(658)에는 安西 4鎭 가운데 하나로서 실크로드 南道의 가장 중요한 軍政의 중심지가 되었다. 9세기 중엽에 남방의 吐藩이 세력을 확대하면서 于闐을 李域 혹은 江熱木布라 칭했다. 北宋 초에 于闐의 使臣과 승려가 몇 차례에 걸쳐 來朝하여 進貢하였다. 明朝 永樂 6년에 使者를 보내어 進貢하였다. 한편 于闐은 11세기 초에 黑汗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그 후 점차 이슬람화 되었다. 후에는 西遼, 蒙古, 察合台 汗國 및 准噶爾(Jungar)部의 통치를 받다가 淸朝 乾隆 24년(1759)에 淸朝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光緖 9년(1883)에는 和闐直隷州가 설치되었다. 于闐은 농업을 위주로 하는데, 서역의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먼저 중원의 양잠 기술을 전수받은 나라이다. 따라서 手工 방직업이 발달했다. 특히 특산물인 玉石으로 유명하다. 于闐은 2세기 말에 불교가 들어온 이후 점차 대승불교의 중심이 되었다. 魏晉에서 隋唐에 이르기까지 于闐은 줄곧 中原佛敎의 원천 가운데 한 곳이었다. 于闐 사람들은 음악과 희극을 즐기고, 繪畵 방면에서는 인도와 이란의 요소가 혼합되었다. 화가 尉遲乙僧은 唐初에 長安에 이르러 많은 벽화를 남겼는데, 唐人 吳道子, 閻立本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색인어
- 이름
- 신충모살(神忠母撒), 타노왜역불랄금(打魯哇亦不剌金), 상형(尙衡), 진성, 곽경, 인종(仁宗)
- 지명
- 우전(于闐), 한(漢), 송(宋), 중국, 합렬, 팔답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