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成化) 연간, 해실간(偕實干)의 추장과 함께 사자 두 마리를 바치면서 대신이 영접할 것을 주청하자 황제가 환관을 보내 영접한 설명
성화(成化)주 001 연간(1465~1487)에 살마아한의 쇄노단 아흑마(阿黑麻, 재위 1478~1504)주 002가 세 차례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성화] 19년(1483)에 역사한(亦思罕)의 추장(酋長)과 함께 사자 2마리를 바치면서 숙주(肅州)
주 003에 이르렀는데, 그 사신이 대신(大臣)이 와서 영접할 것을 주청(奏請)하였다. 직방낭중(職方郞中)주 004
육용(陸容)
주 005
각주 005)
이 아뢰기를, “이 사자는 쓸데없는 동물로서 교사(郊祀)와 종묘(宗廟) 시에 희생(犧牲)으로 쓸 수 없고, 수레를 타는 데 곁마로 쓸 수도 없으니, 마땅히 받지 말아야 합니다”라 하였다. 예관(禮官)주 006
주홍모(周洪謨)
주 007陸容(1436~1497): 字는 文量, 號는 式齋이며, 南直隷 蘇州府 太倉 사람이다. 英宗 正統 원년(1436)에 태어나 弘治 9년(1497)에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효성이 지극하고, 독서를 즐겼으며, 張泰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婁東三鳳이라 불렸다. 詩才는 張泰에 미치지 못했으나 博學은 그를 능가하였다. 成化 2년(1466)에 進士로 급제하여 南京主事에 除授되었는데, 兵部 職方郎中으로 승진하였다. 후에 浙江右參政이 되었는데 政績을 쌓았으나 결국 權貴에게 노여움을 사 낙향하고 말았다. 저서로는 『菽圓雜記』 15권이 있는데, 『四庫總目』에서 王鏊는 明代의 記事書 가운데 최고라고 칭하였다. 그 외에 『式齋集』도 간행되었다.
각주 007)
등도 가서 영접하는 것은 예제(禮制)에 맞지 않는다고 아뢰었으나, 성화제는 끝내 환관을 보내어 그들을 영접하도록 하였다. 사자는 매일 살아있는 양 2마리, 식초·항(酐)·밀낙(蜜酪) 2병씩을 먹어치웠다. 사자를 기르는 사람에게는 광록(光祿)주 008周洪謨(1421~1492): 字는 堯弼이고, 四川 長寧縣 사람이다. 正統 10년(1445) 進士에 及第하였는데, 특히 殿試에서 榜眼으로 합격하였고, 翰林院編修가 되었다. 후에 『寰宇通志』 修撰에 참여하였다. 景泰 원년(1450)에 황제에게 上疏하여 經筵에 임할 것을 권했고, 「時務十二事」를 올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侍讀으로 승진되었다. 『英宗實錄』과 『憲宗實錄』의 修撰에도 참여하였다. 憲宗 成化帝의 繼位 이후 周洪謨는 황제의 면전에서 時務를 直言하였는데, 成化帝는 크게 賞讚하고 아울러 그의 建言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成化 12년(1476)에 禮部右侍郞으로 승진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左侍郞으로 轉任되었고, 成化 17년(1481)에는 禮部尙書로 승진했으며, 후에는 太子少保를 겸임하였다. 弘治 원년(1488)에 致仕하였는데, 고향인 長寧으로 낙향하지 않고, 叙州府에서 翠屛書院을 창건하였으며, 『叙州府志』 修撰을 주도하였다. 임종 시에 그는 「安中國定四裔十事」란 제목으로 上疏하여 弘治帝를 감동시켰다고 한다. 弘治帝는 특별히 관원을 파견하여 제사를 지내주도록 했고, 아울러 文安이라는 諡號를 내렸다.
각주 008)
에서 매일 주식(酒食)을 지급하였다. 성화제는 이미 상을 두터이 내려주었는데, 그 사신 파륙만(怕六灣)은 적다고 생각하여 영락 연간(1403~1424)의 예(例)를 끌어들여 [상을 내려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예부의 관원은 정통 4년(1439)의 예에 따라 채폐 5표리를 추가하자고 건의하였다. 사신은 그래도 적다고 말하여, 이에 정사와 부사에게 각각 2표리씩 더하고, 수행원에게는 그 반을 주었으며, 중관(中官) 위락(韋洛)과 홍려서승(鴻臚署丞)주 009
해빈(海濱)에게 명하여 호송하여 귀국하도록 하였다. 그 사신이 [원래의] 옛길로 가지 않고 광동(廣東)
주 010으로 갔고, 또 양가(良家)의 아녀자들을 다수 사들여 처첩(妻妾)으로 삼았는데, 위락 등이 이를 금지시키지 못하였다.주 011 얼마 후에 위락이 상소(上疏)하여 죄를 해빈에게 돌리니, 해빈이 연좌되어 옥리(獄吏)에게 내려졌다. 그 사신이 바다를 건너 만랄가(滿剌加)
주 012光祿: 光祿寺를 일컫는다. 吳 元年(1364)에 宣徽院으로 설치되었으나 洪武 元年(1368)에 光祿寺로 고쳤다. 다시 洪武 8년(1375)에 光祿司로 개칭했다가 洪武 30년(1397)에 재차 光祿寺로 고쳤다. 從三品인 卿 1명, 正五品인 少卿 2명, 從六品인 寺丞 2명의 관직을 두었다. 洪武 원년(1368)에 供需庫, 洪武 4년(1371)에 法酒庫, 萬曆 2년(1574)에 銀庫를 두었으며, 祭享·宴勞·酒醴·膳羞 등의 일을 관장하였고, 이에 필요한 식량과 그 밖의 물자를 거두어 저장하였다. 『明史』 卷74 「職官」3 光祿寺條 및 『(萬曆)明會典』 卷217 「光祿寺」條 등 참조.
각주 012)
에 가서 산예(狻猊)주 013를 매입하여 진헌할 것을 청하자, 시박사(市舶司)주 014滿剌加: 말라카(Malacca) 왕국을 일컫는다. 팔렘방(Palembang)의 왕자인 파라메스와라(Parameswara)에 의하여 1400년경에 건국되었다고 하는데, 그가 스리위자야(SriVijaya) 왕실 가계의 왕자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377년에 마자파힛(Majapahit) 왕국의 공격으로 팔렘방이 패하자 파라메스와라와 그의 추종자들은 해상으로 탈출하여 말레이 반도 방향으로 이동하였는데, 처음 정착한 곳이 트마섹(Temasek)섬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파라메스와라는 사자를 보았다고 하여 이 지역을 ‘사자의 도시’ 또는 ‘사자의 나라’라는 뜻의 싱가푸라(Singapura)라고 불렀는데, 여기에서 싱가포르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 이후 이들은 1402년에 다시 말라카로 이동하여 말라카 왕국을 세우고 스리위자야를 잇는 해상 국가로서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말라카의 지배자들은 국제 교역상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데 주력하고, 교역 기반시설을 확충했으며, 매우 정교하고 효율적인 법과 행정체계를 세움으로써 해상 왕국으로 흥기할 수 있었다(최병욱, 2006: 290~292). 말라카 왕국은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1470년경에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여, 말레이 반도 전역과 수마트라 중동부 지역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후 말라카 왕국은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특히 16세기에 접어들어 말라카 왕실은 내분에 휩싸이고 있을 때인 1511년에 인도 고아(Goa)를 점령한 포르투갈의 아퐁소 드 알부케르케(Afonso de Albuquerque)가 군대를 이끌고 말라카를 공격하는데, 결국 여기에서 패배함으로써 멸망하였다.
각주 014)
의 중관 위권(韋眷)
주 015이 이를 [허락할 것을] 주장했으나, 포정사(布政使)주 016
진선(陳選)
주 017市舶司: 해상무역 관계의 사무를 담당한 관청으로 市舶提擧司의 약칭이다. 무역세의 징수, 상품 판매허가증의 교부, 番舶의 送迎 등의 일을 담당하였다. 관명으로서의 시박사는 唐 開元 연간(713~741)에 처음 나타나지만, 제도로서 실질적인 정비가 있었던 것은 南海무역이 크게 발전한 宋代 이후였으며, 廣州를 비롯하여 泉州, 溫州, 明州(즉 寧波), 杭州 등지에 증설되었다. 長官도 처음에는 소재지의 州知事나 轉運使가 겸임했으나, 진귀한 사치품을 다루는 남해무역은 정부수입을 위해서도 그 중요성을 더하게 되었으므로, 1102년 남해무역을 전담하는 提擧市舶司가 설치되었고, 元代에도 그 사무가 인계되었다. 明代에는 海禁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에 자연 밀무역 중심이 되었으므로, 市舶司 제도가 활성화되지는 않았으나, 明初부터 중엽까지 宦官 주도로 운영되었다. 明 後期 倭寇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明 중엽에 철폐된 市舶司 제도는 淸朝가 시작된 이후에도 회복되지 않다가, 康熙 연간(1662~1722)에 廣州와 寧波 등 4개 지역에 海關이 설치되면서 이름을 바꾸어 그 명맥을 이어갔다.
각주 017)
이 힘써 불가함을 아뢰어 이에 그만두었다.陳選(1429~1486): 字는 士賢, 號는 克庵이며, 臨海 城關 사람으로서 부친은 陳員韜이다. 英宗 天順 4년(1460)에 會試에서 會元, 즉 제1등으로 합격하였고, 進士 급제 이후 御史를 除授받아 江西를 巡按하였다. 성격은 강직하여 貪官을 내쫓고 大臣을 탄핵하는 데 거리끼는 바가 없었다. 南直隷에서 提督學政을 역임할 때 禮儀規矩를 반포하고 항상 學舍를 巡査하였으며, 직접 生員의 敎材를 지었다. 成化 6년(1470)에 河南按察副使를 이어 提督學政을 거친 후에는 按察使로 승진했는데, 집무를 하면서 가벼운 죄를 지은 자 수백 명을 석방했지만 贓吏만은 무겁게 처벌하였다. 모친상을 당하여 離任할 때는 士民들이 號泣하며 生祠를 지어 그를 기렸다. 服喪을 마치고 廣東 布政使로 부임했는데, 당시 그는 외출할 때도 나귀 한 마리만을 타고 시종도 대동하지 않아 그 청빈함이 寒士와 다름없었다고 한다. 특히 관내의 肇慶에 홍수가 들자 上奏할 겨를도 없이 적극적으로 구제활동을 펼쳤다. 한편 당시 환관 韋眷이 廣東 市舶司에서 거액을 착복하려 하였는데, 이에 番禺知縣 高瑤가 조사 후 이를 籍沒하여 充公하려 하자, 陳選이 이를 장려하였다. 이 일로 韋眷은 그에 대한 원한을 뼈에 사무치도록 가지게 되었다. 결국 韋眷은 陳選과 高瑤가 上奏 없이 救恤활동을 벌였다는 것을 빌미로 삼아 서로 結黨하여 부정행위를 획책하였다고 무고하였다. 陳選 등이 체포되어 京師로 압송된다는 소식을 들은 士民들은 號泣하며 길을 막았다. 陳選은 울분으로 병이 들어 압송 도중 南昌에서 病死하고 말았는데, 당시 나이가 58세였다. 弘治 초에 陳選의 억울함이 밝혀져 詔書를 내려 官禮로 다시 葬禮를 치러주도록 했고, 후에 恭愍이라는 諡號를 내렸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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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5)
陸容(1436~1497): 字는 文量, 號는 式齋이며, 南直隷 蘇州府 太倉 사람이다. 英宗 正統 원년(1436)에 태어나 弘治 9년(1497)에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효성이 지극하고, 독서를 즐겼으며, 張泰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婁東三鳳이라 불렸다. 詩才는 張泰에 미치지 못했으나 博學은 그를 능가하였다. 成化 2년(1466)에 進士로 급제하여 南京主事에 除授되었는데, 兵部 職方郎中으로 승진하였다. 후에 浙江右參政이 되었는데 政績을 쌓았으나 결국 權貴에게 노여움을 사 낙향하고 말았다. 저서로는 『菽圓雜記』 15권이 있는데, 『四庫總目』에서 王鏊는 明代의 記事書 가운데 최고라고 칭하였다. 그 외에 『式齋集』도 간행되었다.
-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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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7)
周洪謨(1421~1492): 字는 堯弼이고, 四川 長寧縣 사람이다. 正統 10년(1445) 進士에 及第하였는데, 특히 殿試에서 榜眼으로 합격하였고, 翰林院編修가 되었다. 후에 『寰宇通志』 修撰에 참여하였다. 景泰 원년(1450)에 황제에게 上疏하여 經筵에 임할 것을 권했고, 「時務十二事」를 올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侍讀으로 승진되었다. 『英宗實錄』과 『憲宗實錄』의 修撰에도 참여하였다. 憲宗 成化帝의 繼位 이후 周洪謨는 황제의 면전에서 時務를 直言하였는데, 成化帝는 크게 賞讚하고 아울러 그의 建言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成化 12년(1476)에 禮部右侍郞으로 승진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左侍郞으로 轉任되었고, 成化 17년(1481)에는 禮部尙書로 승진했으며, 후에는 太子少保를 겸임하였다. 弘治 원년(1488)에 致仕하였는데, 고향인 長寧으로 낙향하지 않고, 叙州府에서 翠屛書院을 창건하였으며, 『叙州府志』 修撰을 주도하였다. 임종 시에 그는 「安中國定四裔十事」란 제목으로 上疏하여 弘治帝를 감동시켰다고 한다. 弘治帝는 특별히 관원을 파견하여 제사를 지내주도록 했고, 아울러 文安이라는 諡號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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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8)
光祿: 光祿寺를 일컫는다. 吳 元年(1364)에 宣徽院으로 설치되었으나 洪武 元年(1368)에 光祿寺로 고쳤다. 다시 洪武 8년(1375)에 光祿司로 개칭했다가 洪武 30년(1397)에 재차 光祿寺로 고쳤다. 從三品인 卿 1명, 正五品인 少卿 2명, 從六品인 寺丞 2명의 관직을 두었다. 洪武 원년(1368)에 供需庫, 洪武 4년(1371)에 法酒庫, 萬曆 2년(1574)에 銀庫를 두었으며, 祭享·宴勞·酒醴·膳羞 등의 일을 관장하였고, 이에 필요한 식량과 그 밖의 물자를 거두어 저장하였다. 『明史』 卷74 「職官」3 光祿寺條 및 『(萬曆)明會典』 卷217 「光祿寺」條 등 참조.
- 각주 009)
- 각주 010)
- 각주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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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2)
滿剌加: 말라카(Malacca) 왕국을 일컫는다. 팔렘방(Palembang)의 왕자인 파라메스와라(Parameswara)에 의하여 1400년경에 건국되었다고 하는데, 그가 스리위자야(SriVijaya) 왕실 가계의 왕자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377년에 마자파힛(Majapahit) 왕국의 공격으로 팔렘방이 패하자 파라메스와라와 그의 추종자들은 해상으로 탈출하여 말레이 반도 방향으로 이동하였는데, 처음 정착한 곳이 트마섹(Temasek)섬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파라메스와라는 사자를 보았다고 하여 이 지역을 ‘사자의 도시’ 또는 ‘사자의 나라’라는 뜻의 싱가푸라(Singapura)라고 불렀는데, 여기에서 싱가포르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 이후 이들은 1402년에 다시 말라카로 이동하여 말라카 왕국을 세우고 스리위자야를 잇는 해상 국가로서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말라카의 지배자들은 국제 교역상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데 주력하고, 교역 기반시설을 확충했으며, 매우 정교하고 효율적인 법과 행정체계를 세움으로써 해상 왕국으로 흥기할 수 있었다(최병욱, 2006: 290~292). 말라카 왕국은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1470년경에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여, 말레이 반도 전역과 수마트라 중동부 지역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후 말라카 왕국은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특히 16세기에 접어들어 말라카 왕실은 내분에 휩싸이고 있을 때인 1511년에 인도 고아(Goa)를 점령한 포르투갈의 아퐁소 드 알부케르케(Afonso de Albuquerque)가 군대를 이끌고 말라카를 공격하는데, 결국 여기에서 패배함으로써 멸망하였다.
- 각주 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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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4)
市舶司: 해상무역 관계의 사무를 담당한 관청으로 市舶提擧司의 약칭이다. 무역세의 징수, 상품 판매허가증의 교부, 番舶의 送迎 등의 일을 담당하였다. 관명으로서의 시박사는 唐 開元 연간(713~741)에 처음 나타나지만, 제도로서 실질적인 정비가 있었던 것은 南海무역이 크게 발전한 宋代 이후였으며, 廣州를 비롯하여 泉州, 溫州, 明州(즉 寧波), 杭州 등지에 증설되었다. 長官도 처음에는 소재지의 州知事나 轉運使가 겸임했으나, 진귀한 사치품을 다루는 남해무역은 정부수입을 위해서도 그 중요성을 더하게 되었으므로, 1102년 남해무역을 전담하는 提擧市舶司가 설치되었고, 元代에도 그 사무가 인계되었다. 明代에는 海禁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에 자연 밀무역 중심이 되었으므로, 市舶司 제도가 활성화되지는 않았으나, 明初부터 중엽까지 宦官 주도로 운영되었다. 明 後期 倭寇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明 중엽에 철폐된 市舶司 제도는 淸朝가 시작된 이후에도 회복되지 않다가, 康熙 연간(1662~1722)에 廣州와 寧波 등 4개 지역에 海關이 설치되면서 이름을 바꾸어 그 명맥을 이어갔다.
- 각주 015)
- 각주 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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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7)
陳選(1429~1486): 字는 士賢, 號는 克庵이며, 臨海 城關 사람으로서 부친은 陳員韜이다. 英宗 天順 4년(1460)에 會試에서 會元, 즉 제1등으로 합격하였고, 進士 급제 이후 御史를 除授받아 江西를 巡按하였다. 성격은 강직하여 貪官을 내쫓고 大臣을 탄핵하는 데 거리끼는 바가 없었다. 南直隷에서 提督學政을 역임할 때 禮儀規矩를 반포하고 항상 學舍를 巡査하였으며, 직접 生員의 敎材를 지었다. 成化 6년(1470)에 河南按察副使를 이어 提督學政을 거친 후에는 按察使로 승진했는데, 집무를 하면서 가벼운 죄를 지은 자 수백 명을 석방했지만 贓吏만은 무겁게 처벌하였다. 모친상을 당하여 離任할 때는 士民들이 號泣하며 生祠를 지어 그를 기렸다. 服喪을 마치고 廣東 布政使로 부임했는데, 당시 그는 외출할 때도 나귀 한 마리만을 타고 시종도 대동하지 않아 그 청빈함이 寒士와 다름없었다고 한다. 특히 관내의 肇慶에 홍수가 들자 上奏할 겨를도 없이 적극적으로 구제활동을 펼쳤다. 한편 당시 환관 韋眷이 廣東 市舶司에서 거액을 착복하려 하였는데, 이에 番禺知縣 高瑤가 조사 후 이를 籍沒하여 充公하려 하자, 陳選이 이를 장려하였다. 이 일로 韋眷은 그에 대한 원한을 뼈에 사무치도록 가지게 되었다. 결국 韋眷은 陳選과 高瑤가 上奏 없이 救恤활동을 벌였다는 것을 빌미로 삼아 서로 結黨하여 부정행위를 획책하였다고 무고하였다. 陳選 등이 체포되어 京師로 압송된다는 소식을 들은 士民들은 號泣하며 길을 막았다. 陳選은 울분으로 병이 들어 압송 도중 南昌에서 病死하고 말았는데, 당시 나이가 58세였다. 弘治 초에 陳選의 억울함이 밝혀져 詔書를 내려 官禮로 다시 葬禮를 치러주도록 했고, 후에 恭愍이라는 諡號를 내렸다.
색인어
- 이름
- 아흑마, 阿黑麻, 육용(陸容), 주홍모(周洪謨), 성화제, 성화제, 파륙만(怕六灣), 위락(韋洛), 해빈(海濱), 위락, 위락, 해빈, 해빈, 위권(韋眷), 진선(陳選)
- 지명
- 살마아한, 역사한(亦思罕), 숙주(肅州), 광동(廣東), 만랄가(滿剌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