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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문궤

유격장군(遊擊將軍) 주홍모(周弘謨)에 남쪽 지방의 왜적 실상과 왜호(倭戶) 등을 알리는 게첩(揭帖)

36. 周遊擊前揭
대인은 총독부원의 명을 받아 천 리를 건너오셔서 소방을 구원하기를 기필하였으니 이야말로 이미 근면하신 것입니다. 잠시나마 얼굴을 뵙고 말씀을 들으니, 소방을 위해서 염려하심이 지극하십니다.주 001
각주 001)
주홍모가 선조(宣祖)를 접견한 내용은 『선조실록』에 실려 있다. 『宣祖實錄』 卷49, 宣祖 27年 3月 癸巳 (1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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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격함이 심중에 새기어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다만 돌아와서는 문득 말하고 싶은 바를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있습니다. 왜적이 비록 책봉을 청한다거나 조공을 청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무리를 모아 소굴로 되돌아가 천조의 처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남쪽 변방 여덟아홉 읍에 나누어 둔거하면서 한편으로는 교대로 나와 침략하여 천병도 살상을 당했고 한편으로는 오만하게 이런 설을 만들어 싸우는 군사의 마음을 흐트러뜨리고 있습니다. 천병의 재출병을 늦추고 자신들의 힘을 두텁게 결집해서 왕사(王師)에게 저항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임은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옛 사람이 말했듯이 아무 일이 없음에도 화친을 청하는 것은 모략이라고 했으니, 아마도 이것에 가깝습니다. 전후로 변경에서 온 보고를 보면 실로 왜적 중 우리의 변경에 둔거하는 자들이 곳곳에 설치한 성책이 매우 견고하다고 합니다. 또한 소방의 섬인 거제현(巨濟縣) 지역에 둔취하고 있는데, 거제에서는 선박용 목재가 많이 생산됩니다. 왜적이 이에 여러 해 동안 이곳을 점거하고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고 있습니다. 더구나 본현은 전라도와 서로 마주 보고 있어 큰 바람을 타고 가면 하루 만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적들이 둔거하는 곳마다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으니 오래 주둔하려는 계략입니다. 그리고 김해부(金海府) 지역은 (저들이) 모종하고 있는 것이 아득하게 끝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또한 본토로부터 군량을 운반하고 병력을 증원하는 것이 계속 이어져 적들의 세력이 더욱 장대해지고 있습니다. 이 계략은 장차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성심으로 봉공을 청한다고 하면서 감히 군사력을 끼고서 요청합니까. 그 사정을 살피건대, 다시 소방을 삼키려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결코 소방으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다치고 쇠잔하여 파리한 군사들은 이미 저 작은 (왜적의) 흉봉을 살펴보기조차 어렵고, 천병 중 방수하고 있는 병력은 겨우 5천의 새로 조발한 군사들인 데다 또 멀리 수천 리 밖에서는 힘이 서로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적이 만약 호흡지간에 전력을 극대화해서 먼저 전라도를 함몰시키고 또 길을 나누어 서쪽으로 항한다면, 승승장구하는 기세를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책봉과 조공 논의가 끝나기 전에 소방은 엎어져 망하여 다시 구원할 틈도 없을까 두렵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방의 군신이 잠을 못 이루고 먹지 못하며 날로 천병이 강을 건너기를 기다림이 큰 가뭄에 비구름을 기다림과 같을 뿐만이 아닌 것입니다. 천조가 소방을 불쌍히 여기시어 이미 끊임없이 보전에 힘쓰시니 깊은 은혜가 충만하여 동토(東土)를 뒤덮습니다. 소방은 오직 문드러져 가루가 되어야 (명에 대한) 보답을 기약할 수 있기에 감히 다시는 다른 말로 총명을 흐리게 하지 못하나, 일이 긴급함에 관계되기에 형세상 끝내 묵묵히 입 다물고만 있기 어려워 감히 말한 것입니다. 천병은 또한 소방의 일로 인해서 먼 곳에서 와서 애쓰고 있습니다. 일단 소방의 경내로 들어오면 무릇 지나가는 길과 머무는 곳의 군향을 본디 소방이 접제해야 했었는데, 군사가 움직인 3년 동안 백성들이 농사짓지 못하고 탕패한 나머지 벌써 세입이 들어오지 않고 창고도 고갈돼 대병의 군량 공급에 관해서는 대책이 전혀 없습니다. 전에 듣기를 황제께서 소방에 하사하신 산동(山東) 양미가 많게는 10만 석이라고 합니다. 바라건대, 즉시 총독군문에 알리어 먼저 곡식을 운반하고 대병(명군)이 그 뒤를 잇게 하신다면 군량 공급에 결핍됨이 없어 바야흐로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기에 하릴없이 간절히 바라는 지경입니다. 또한 총독의 방문(榜文)을 보니 부산(釜山)의 왜호(倭戶)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전에 선왕께서 다스리시던 때에 일찍이 왜노에게 해로를 따라 왕래하며 무역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웅천현(熊川縣)의 제포(薺浦) 혹은 동래현(東萊縣)의 부산포·제포(薺浦) 등지에 와서 정박하게 했습니다. 인하여 초방을 짓고 머물러 거주한 왜노가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이러한 상황에서 거주하며 관시(關市)의 이익을 위한 편의로 삼았을 뿐입니다. 정덕(正德) 5년 경오년(1510)에 이전 왕이신 공희왕(중종) 시절 부산첨사 이우증(李友曾)이 왜노를 엄하게 문책하는 일로 저들의 분노가 쌓여 부산포와 제포의 왜노들이 공모해 난을 일으켜 밤을 틈타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조정에서는 안윤덕(安閏德)을 도원수로, 황형(黃衡)과 유담년(柳聃年)을 좌우방어사로 삼아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초략하여 진멸했습니다. 윤덕(안윤덕)이 승리를 보고한 서신에서 언급한 「제포의 바다가 모두 붉게 물들었습니다.」라는 일은 후세까지 전하여 통쾌하게 여기며 소방에서는 지금까지 경오년 전투로 칭하고 있습니다.주 002
각주 002)
1510년의 삼포왜란과 진압과정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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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왜노가 지은 초방을 모조리 불태워 철거해 하나도 남은 것이 없게 했고 다시는 거주하거나 머무르지 못하도록 한 것이 지금까지 80여 년입니다. 소방에서 출간한 『여지승람(輿地勝覽)』은 신본과 구본이 있는데주 003
각주 003)
각각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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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이 경오년 이전에 편찬됐기에 부산 항목 아래에 왜호라는 설명이 있는 것입니다. 신본은 경오년 이후에 편찬됐기에 신증한 『여지승람』에는 「왜노가 공모하여 난을 일으켜 밤에 성을 함락시키자 장수를 파견하여 토벌케 하고 마침내 그들의 거주를 허락하지 않았다.」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습니다.주 004
각주 004)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3 경상도 동래현 관방 부산포진 부분에 ‘신증’된 내용이다. 조선에서는 『동국여지승람』과 『신증동국여지승람』을 근거로 삼아 이른바 부산왜호설(釜山倭戶說)을 해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선조실록』 1594년 3월의 기사에서 해당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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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사실에 의거한 것이니 책을 펼쳐 읽어 보면 쉽게 살펴보실 수 있는 것으로 속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조께서 소방을 자식과 같이 보시어, 이미 한 가족과 같은데 지금 이 방문은 소방의 사정을 완전하게 드러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왜적이 이를 보고 스스로 다행으로 여길까 두렵습니다. 아울러 총독군문에 전품(專稟)하여 그렇지 않음을 밝혀 주시길 바랍니다. 우러러 남의 위급함을 구하는 높은 의리에 의지하여 감히 마음속에 있는 말을 펼쳐 보였습니다. 양찰하여 주시고 불쌍히 살펴 주신다면 크게 다행이겠습니다.

  • 각주 001)
    주홍모가 선조(宣祖)를 접견한 내용은 『선조실록』에 실려 있다. 『宣祖實錄』 卷49, 宣祖 27年 3月 癸巳 (15日). 바로가기
  • 각주 002)
    1510년의 삼포왜란과 진압과정을 가리킨다. 바로가기
  • 각주 003)
    각각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가리킨다. 바로가기
  • 각주 004)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3 경상도 동래현 관방 부산포진 부분에 ‘신증’된 내용이다. 조선에서는 『동국여지승람』과 『신증동국여지승람』을 근거로 삼아 이른바 부산왜호설(釜山倭戶說)을 해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선조실록』 1594년 3월의 기사에서 해당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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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격장군(遊擊將軍) 주홍모(周弘謨)에 남쪽 지방의 왜적 실상과 왜호(倭戶) 등을 알리는 게첩(揭帖) 자료번호 : sdmg.k_0002_03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