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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문궤

전라도, 경상도 등을 몰래 체탐(體探)한 왜적(倭敵)의 정보에 대해 조선국왕이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 등에게 보낸 자문(咨文)

27. 密報賊情咨
  • 발신자
    조선국왕
  • 발송일
    1594년 3월 6일(음)(만력 22년 3월 초6일)
발신: 조선국왕
사유: 긴급한 왜적에 관한 일을 은밀히 보고합니다.
 
[조선국왕] 올해 2월 17일, 전라도방어사 이시언(李時言)주 001
각주 001)
이시언(李時言, ?~1624)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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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치계했습니다.
[이시언] 본년 정월 28일, 별장 한명련(韓命璉)의 정(呈)을 받았습니다.
[한명련] 제가 정예병 주의수(朱義壽) 등 64명을 이끌고 김해부(金海府)의 덕교(德橋)와 죽도(竹島), 웅천현(熊川縣)의 웅포(熊浦)와 안골포(安骨浦) 등처에 몰래 가서 두루 체탐하였더니 각처의 왜적이 전과 같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김해부 삼차아(三岔兒)에서 길가에 잠복하고 있다가, 왜적 100여 명을 만나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해 왔습니다. 역심(譯審)하여 얻은 신은질이(信隱叱已)의 공술 내용입니다.
[신은질이] 일본국 우도도(右道島) 사람으로 지난해 정월 중에 평양성(平壤城)에서 패전하고 웅천의 옛 진영으로 도망쳐 돌아와 주둔하고 있다가 지금 잡혀오게 되었습니다. 본영의 병사들은 아직 바다를 건널 기약이 없습니다. 12월에 천장(天將) 1명이 와서 강화하였는데, 대명(大明)의 미소녀를 일본 왕자에게 시집보내기를 허락한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를 올려서 본영의 상관이 미소녀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주 002
각주 002)
1593년 6월(초본은 5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군 사절에게 제시한 이른바 7개 조건 중 첫 번째 조건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1. 화호서약에 틀림이 없다는 것은 천지가 다한다 하더라도 바뀔 수 없다. 이를 (보증하기) 위해 대명 국왕의 현녀(賢女)를 본조(本朝)의 후비(后妃)로 맞이하게 할 것(一. 和好誓約無相違者, 天地縱雖盡不可有改易也, 然則迎大明國王賢女, 可納本朝后妃事)” 명군 사절은 일본 측과의 회담 자리에서 이 조건을 극구 거부하였으며, 따라서 이 조건은 공식적으로 명 조정에 전달되지 않았다. (김경태, 「東京大學 史料編纂所 소장 『江雲隨筆』 내 임진왜란 관련 사료 해제」, 『전쟁과 유물』 7, 20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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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도에 나누어 주둔한 각 영은 아울러 옷과 군량 등 물품을 옮기지 않고 모두 본국의 접제에 따르고 있습니다.주 003
각주 003)
한명련에 의한 신은질이의 공초 내용은 실록에도 나온다(『宣祖實錄』 卷49, 宣祖 27年 3月 丙申(1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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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왕] 이어서 본월 24일 경상도방어사 김응서(金應瑞)가 치계했습니다.
[김응서] 본월 초2일 체탐아병 정승헌(鄭承獻) 등이 보고했습니다.
[정승헌] 차견되어 몰래 좌수영성 내 왜적 둔거지로 가서 왜적의 정세를 체탐하고, 동래(東萊) 지역 소산역(蘇山驛)에 이르러 본국 피로인 1명을 만났는데, (그가) 유인하여 투항시킨 왜적 4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모두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이들을 받아 역심했습니다. 왜노 일명 거요질(居要叱)은 나이가 22세이며 일본의 국도에서 동쪽으로 2일거리인 곤도군(崐都郡)에 거주하는 자입니다. 일명 지여무(知汝武)는 나이가 28세이며 일본국 고물내(古勿乃)에 거주하는 자입니다. 일명 사아가(沙阿加)는 나이가 23세이며 일본국 사금아(沙金阿)에 거주하는 자입니다. 일명 산지(山之)는 나이가 25세이며 일본국 민옥군(閔玉郡)에 거주하는 자입니다. 각 왜적이 같은 말을 했는데 공술한 내용입니다.
[거요질·지여무·사아가·산지] 모두 왜군 장수 화시 파산수(化是怕山守)의 부하로, 바다를 건너 조선을 공격하였고 함경도 북변까지 이르러 노략질했습니다. 지난해 8월에 부산(釜山)으로 돌아왔는데 왜장이 병사했습니다. 저희들은 계속 부산에 유둔하면서 장사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하루는 밥을 하다가 실화하여 불이 번져 군막을 태웠는데 그 죄가 사형이라 살아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듣기로 조선이 투항인을 무휼한다 하니 장차 귀순하고자 하였는데 마침 정승헌을 만나 따라서 오게 되었습니다. 본국(일본)에 있을 때에 관백(關白)이 군사를 일으킨 원인을 들었는데, 먼저 조선을 정벌한 뒤 중원에 침범하여 천하를 요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조선에 침입하여 장차 중원을 범하려고 하는데, 천장 심 참장(沈參將)이라는 자가 평양에 와서 왜장 유키나가(平行長)에게 가서 간곡한 말로, “한 하늘 아래에서 태어나서 이와 같이 서로 싸우는 것은 매우 마땅하지 못한 바이다.”라고 하며 은냥을 뇌물로 많이 주며 화의를 구하였는데, 이로써 경성으로 군병을 물렸고 참장이 또 청하자 군사를 거두었습니다. 이번에 참장이 또 유키나가의 진영에 들어와서 혼인에 대한 일을 상의하며 5월을 기한으로 정했습니다. 여러 우두머리들이 상의하기를, ‘약속이 이행되면 회군하겠지만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새로운 병력을 조발하여 전라도를 거쳐 그길로 중원을 공격할 것이며 또 남만국(南蠻國)에 병력을 청하여 절강(浙江) 등처로 군사를 건너 보내 남북으로 협공하면, 중원은 가히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이같이 말했습니다. 일본 군병이 현재 머물고 있는 수는, 서생포(西生浦)에 5,000, 임랑포(林郞浦)에 3,000, 기장(機張)에 3,000, 동래에 1,000, 부산포에 10,000, 양산(梁山) 지역의 구법곡(仇法谷)에 3000, 좌수영(左水營)에 300, 김해에 18,000, 안골포에 2,000, 가덕(加德)에 700, 웅천·제포(薺浦)에 4,000, 거제(巨濟)에 7,000여 명입니다. 귀국이 2, 3월 전에 기회를 타서 거사한다면 거의 초멸할 수 있겠으나 그때를 놓치면 일본의 정예 병졸이 4, 5월 중에 모두 올 것이니 조선의 병마가 비록 천만이라도 대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조선국왕] 또 본월 25일에 경상도관찰사 한효순(韓效淳)이 치계했습니다.
[한효순] 본월 15일 등에 초탐인 박명선(朴名善) 등이 보고했습니다.
[박명선] 연해의 여러 왜적이 각자 진영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 우도(右道)의 거제 등처에서는 목재를 벌목하여 선척을 만드는 것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으며 성세가 충분히 큽니다. 좌도(左道) 서생포의 옛 진영에도 병사를 많이 증원하고 있습니다.
[조선국왕] 또 본월 27일에 제도도순찰사 권율(權慄)이 치계했습니다.
[권율] 본월 16일에 체탐인 윤이(尹已)가 보고했습니다.
[윤이] 차견되어 삼포(森浦)·웅포·안골포 등처에 잠입해 왜적 우두머리 평의지(平義智)주 004
각주 004)
소 요시토시(宗義智, 1568~1615)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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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주멱관(注覔官) 등을 엿보았는데, 와포(窩鋪)를 더 짓고 군량을 많이 저장하고 있으며, 새로 병사들을 조발하여 날로 조연(操演)을 더하고 있습니다. 또 왜선 50여 척을 고성(固城)·진해(鎭海) 지역으로 보내어 출몰하며 시위하고 있습니다.
[조선국왕] 이를 받고 조사해 보건대, 앞서 본년 2월 중에 각 배신들이 보고한 왜적의 정형은 이미 차례차례 계속 자문으로 올렸습니다. 이러한 조치를 다한 후 이번에 위의 자문을 받았습니다. 살펴보건대, 본 왜적은 강화하는 체하면서 화심(禍心)을 숨기고 요해지에 나누어 웅거하니 흉악한 계책이 더욱 분명합니다. 전항의 각 항왜들의 공초가 대략 같으니 그 간사한 모략과 속이는 계책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낮은 언사로 요청하고 조공을 바친다는 이야기는 아마 끝내 보장할 수 없을 듯합니다. 하물며 병사들을 많이 늘리고 선척을 만들고 있으며, 진영에서 움직이지 않으면서 편리한 정세를 가만히 엿보고 있으니 기필코 그 뜻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귀사에 번거로이 바라건대, 부원(部院)에 정문(呈文)하여 흉모를 통촉하고 병기(兵機)를 깊이 살펴 왜적이 발동하기 전에 속히 제인(制人)의 계책을 시행하며 때에 맞추어 정토를 행하여 초멸함에 남김이 없게 함으로써 큰 공을 이루신다면 실로 만행(萬幸)이겠습니다. 당직이 다시금 소방의 땅을 살펴보니, 계곡과 산림이 십중팔구입니다. 그런데 저 왜적들이 날뛰는 것이 보병을 많이 데리고 있으니, 만약 오로지 기병으로만 대치한다면 지리의 편리함은 전적으로 왜적에게 있게 됩니다. 하물며 평양 전투를 조사해 보면, 남병(南兵)이 가장 먼저 성에 올랐으며 낭선(狼筅)과 조창(鳥鎗)의 기예의 빠르기가 귀신과 같으니, 왜적이 감히 대항하지 못하고 끝내 분패(奔敗)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때부터 저 왜적들은 절강병[浙兵]을 가장 두려워했으니 이는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입니다. 또 소방이 흉화를 입은 때로부터 살펴보면, 창고의 저축이 모두 불타버렸고 전토는 모두 황폐하여 세입이 들어올 길이 없습니다. 단지 충청, 전라 두 도에서 운송되는 것과 요양(遼陽)에서 멀리 운송되는 쌀과 콩에 의지하여 천병(天兵)의 군량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비가 이미 다하여 경성에 저축된 것이 10,000석을 넘지 않으며 그에 더하여 기민들이 사방에서 모여 진구(賑救)가 바야흐로 급하니, 수십 일을 지나지 않아 고갈될 것입니다. 비록 앞의 두 도가 있다 해도 지난해 세량은 조발이 번다했고 경농 또한 피폐하여 납부가 충분하지 못했기에 주둔한 (명) 군병에 공급할 정도에 그쳐 더 남은 것이 없으니 다른 곳에서 운반해 와야만 할 것입니다. 지금 변보(邊報)가 날로 긴급하니 황제의 군대가 강을 건너오면 지급할 비용은 하루가 어려울 것입니다. 군사가 군량이 없다면 무엇으로 접제하겠습니까. 만약 군사를 조발하되 출발에 임하여 바야흐로 군량 지급을 논의한다면 수륙천리에 시세가 서로 미치지 못할 것이며 소방은 이에 이르러 존망이 결정될 것입니다. 다시 귀사에 바라니, 또한 아울러 부원에 전보(轉報)해서 보병과 기병의 다름을 상량하고 마땅히 군량의 당면한 긴급함을 깊이 유념하시어 정예한 보병을 많이 조발하여 필승의 기세를 떨치고 우선 각처의 양향을 운송하여 군사를 일으킬 때의 쓰임에 대비하신다면 그보다 다행함은 없겠습니다. 이에 마땅히 이자하니 청컨대 검토하시길 바랍니다. 자문이 잘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이 자문을 총독병부와 요동도지휘사사에 보냅니다.
 
만력 22년 3월 초6일.

  • 각주 001)
    이시언(李時言, ?~1624)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2)
    1593년 6월(초본은 5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군 사절에게 제시한 이른바 7개 조건 중 첫 번째 조건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1. 화호서약에 틀림이 없다는 것은 천지가 다한다 하더라도 바뀔 수 없다. 이를 (보증하기) 위해 대명 국왕의 현녀(賢女)를 본조(本朝)의 후비(后妃)로 맞이하게 할 것(一. 和好誓約無相違者, 天地縱雖盡不可有改易也, 然則迎大明國王賢女, 可納本朝后妃事)” 명군 사절은 일본 측과의 회담 자리에서 이 조건을 극구 거부하였으며, 따라서 이 조건은 공식적으로 명 조정에 전달되지 않았다. (김경태, 「東京大學 史料編纂所 소장 『江雲隨筆』 내 임진왜란 관련 사료 해제」, 『전쟁과 유물』 7, 2015,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3)
    한명련에 의한 신은질이의 공초 내용은 실록에도 나온다(『宣祖實錄』 卷49, 宣祖 27年 3月 丙申(18日)). 바로가기
  • 각주 004)
    소 요시토시(宗義智, 1568~1615)이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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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경상도 등을 몰래 체탐(體探)한 왜적(倭敵)의 정보에 대해 조선국왕이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 등에게 보낸 자문(咨文) 자료번호 : sdmg.k_0002_0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