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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팔호사(八戶史; 야베노후히토)

팔호사(八戶史; 야베노후히토)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손자 장제(章帝)로부터 나왔다.
 
【주석】
1. 팔호사(八戶史)
『일본삼대실록』원경(元慶) 3년(879) 10월조 무인조에 하내국(河內國) 고안군(高安郡)사람 상징숙녜추웅(常澄宿禰秋雄) 등 6인에게 고안숙녜(高安宿禰)의 성을 하사하였다. 이때 추웅(秋雄) 등이 자신들에 대해 “선조인 후한 광무황(光武皇)의 손 효장황제(孝章皇帝)의 후예입니다. 그 후예의 손 고안공양배(高安公陽倍)는 천만풍일천황(天萬豐日天皇, 孝德)의 치세에 고안군(高安郡)을 설치하였습니다. 양배(陽倍; 야베) 2자음과 팔호(八戶; 야베) 양자어는 서로 통합니다. 그래서 후에 팔호사(八戶史)의 성을 주었습니다. 승화(承和) 2년(835)에 팔호사(八戶史)를 상징숙녜(常澄宿禰)로 개성하였습니다. 바라건대 팔호와 상징 2성을 고쳐서 본성인 고안(高安)으로 복구해 주십시오”라고 아뢴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고안씨는 원래 팔호사에서 상징숙녜로 개성하고 다시 자신들의 거주지명에 따라 고안숙녜로 개성해 줄 것을 청원하여 승인받았음을 알 수 있다.
좌백유청(佐伯有淸)은 팔호(八戶; 야베)의 씨명이 하내국(河內國) 고안군(高安郡)에 거주하던 도래인 집단인 팔호(八戶)의 관리자에서 유래한다고 지적한다. 한편 『속일본후기』 승화 3년(836) 3월 임인조에는 목공료산사(木工寮筭師) 팔호사의익(八戶史礒益) 등 20인이 상징숙녜의 씨성을 받았고, “그 선조는 고구려인이다(其先高麗人也.)”라고 하듯이 고구려 출신임을 주장하고 있다. 중국 출자를 주장하는 씨족들의 대부분은 진 시황제, 한 고조, 후한 광무제 등에서 시조의 출자를 구하고 있지만, 획일성이 강해 조작의 혐의가 짙다. 이들 씨족은 하내국 고안군을 본관으로 하던 고구려계 씨족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 출자와 한반도계 출자가 병존하는 것은 한반도계일 가능성이 높다.
2. 후한광무제(後漢光武帝)
후한의 초대 황제로 재위는 서기 25~57년까지 32년간이다. 광무제에 대해서는 『속일본기』 양로(養老) 원년(717) 11월조에 “후한 광무제 때에 온천수가 나와 이를 먹고 고질병이 모두 나았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속일본후기』 승화 원년(834) 정월 정묘조에 “광무제는 후한을 흥하게 했으면서 사적을 널리 기록하는 것은 하지 않았다”라고 하고, 동 3년윤5월조에는 “하내국인(河內國人) 미농국(美濃國) 소목하(少目下) 촌주씨성(村主氏成)이 ……그 선조는 후한 광무제의 후손”이라는 등의 기록이 있다. 『일본삼대실록』 정관(貞觀) 14년(872) 8월조에는 “씨주숙녜부의(氏主宿禰富依)가 천장(天長) 3년 가원련(家原連)성을 받던 날에 부의(富依)의 선조가 후한 광무황제(光武皇帝)라고 했는데, 지금에 보니 선조는 선화천황(宣化天皇)의 제2황자다. 연력 18년에 「본계장」 을 제출하던 날에 후한 광무제가 조상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삼대실록』 의 기록은 중국 출자를 주장하는 씨주숙녜씨가 천황가로 부회하기 위해 허위 주장을 한 것이다. 원래 주장하는 후한 광무제 출자설도 후에 개변된 출자이다.
3. 장제(章帝)
후한의 제3대 황제로, 재위 기간은 서기 75~88년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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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호사(八戶史; 야베노후히토) 자료번호 : ss.k_0003_0010_0040_0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