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신의 연회에 대한 한림학사 전유연(錢惟演)의 상언
한림학사(翰林學士)주 001 전유연(錢惟演)주 002
각주 002)
이 상언하기를, “엎드려 보건대 거란(요), 고려의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어주실 때마다 그 악인의 가사 다수가 매우 조잡합니다. 청컨대 지금부터 외국사신에게 주연을 베풀 때에는 그 악인의 말을 교방(敎坊)주 003이 사인원(舍人院)주 004으로 하여금 짓고, 경부아전(京府衙前)주 005이 관각관(館閣官)주 006으로 하여금 짓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것을 따랐다. 곧바로 지제고(知制誥)주 007 안수(晏殊)주 008錢惟演 : 962∼1034, 북송의 관인. 杭州 錢塘(치소는 현재 중국 浙江省 杭州) 사람으로 字는 希聖이다. 吳越王 錢俶의 차남이다. 아버지를 따라 송에 귀부하여 여러 차례 발탁의 과정을 거쳐 右神武軍將軍이 되었다. 진종 시기에 直秘閣, 知制誥, 翰林學士, 樞密副使 등의 직을 역임했다. 인종이 즉위한 이후에 樞密使로 승진했다. 당시 권신 丁謂와 혼인 관계를 맺었고, 丁謂와 함께 寇準을 축출하기도 했다. 乾興 元年(1022)에는 태후와 혼인한 가문이라는 이유로 保大軍節度使 겸 知河陽府가 되었다. 同中書門下平章事의 호칭이 더해졌고, 判許州 등의 직을 역임하고 崇信軍節度使로 관직 경력을 끝맺었다. 이후에 文僖라는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金坡遺事』, 『家王故事』 등이 있다.
각주 008)
등이 글을 올려 전례와 고사를 인용하여 그 폐단을 힘써 비판했다. 이에 조칙을 내려 교방이 글 짓는 것을 멈추고 사인원이 책을 바치게 했다.晏殊 : 991∼1055. 북송의 관인. 撫州 臨川(현재 중국 江西省 撫州) 사람으로 字는 同叔이다. 景德 2年(1005)에 同進士出身을 하사받고 秘書省正字에 발탁되었다. 天禧 연간에 여러 번 승진하여 知制誥, 翰林學士가 되었다. 인종이 즉위하고, 명을 받들어 『眞宗實錄』을 함께 찬수했다. 天聖 3年(1025)에는 樞密副使에 발탁되었다. 天聖 5年(1027)에 탄핵되어 知宣州로 좌천되었고 곧 知應天府가 되었다. 여기에서 학교를 일으켜 范仲淹에게 학생들을 가르쳐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明道 元年(1031)에 參知政事까지 되었지만, 인종이 親政을 하면서 知亳州로 좌천되었다. 寶元 元年(1038)에는 三司使에 제수되었고, 康定 元年(1040)에는 知樞密院事로 발탁되었다가 곧 樞密使가 되었다. 慶曆 4年(1044)에는 탄핵을 받아 知潁州로 좌천되었다. 이후 병이 들어 京師로 돌아왔고, 사망한 이후 司空 겸 侍中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元獻이다. 저술로는 『珠玉詞』, 『元獻遺文』 등이 있다.
-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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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2)
錢惟演 : 962∼1034, 북송의 관인. 杭州 錢塘(치소는 현재 중국 浙江省 杭州) 사람으로 字는 希聖이다. 吳越王 錢俶의 차남이다. 아버지를 따라 송에 귀부하여 여러 차례 발탁의 과정을 거쳐 右神武軍將軍이 되었다. 진종 시기에 直秘閣, 知制誥, 翰林學士, 樞密副使 등의 직을 역임했다. 인종이 즉위한 이후에 樞密使로 승진했다. 당시 권신 丁謂와 혼인 관계를 맺었고, 丁謂와 함께 寇準을 축출하기도 했다. 乾興 元年(1022)에는 태후와 혼인한 가문이라는 이유로 保大軍節度使 겸 知河陽府가 되었다. 同中書門下平章事의 호칭이 더해졌고, 判許州 등의 직을 역임하고 崇信軍節度使로 관직 경력을 끝맺었다. 이후에 文僖라는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金坡遺事』, 『家王故事』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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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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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8)
晏殊 : 991∼1055. 북송의 관인. 撫州 臨川(현재 중국 江西省 撫州) 사람으로 字는 同叔이다. 景德 2年(1005)에 同進士出身을 하사받고 秘書省正字에 발탁되었다. 天禧 연간에 여러 번 승진하여 知制誥, 翰林學士가 되었다. 인종이 즉위하고, 명을 받들어 『眞宗實錄』을 함께 찬수했다. 天聖 3年(1025)에는 樞密副使에 발탁되었다. 天聖 5年(1027)에 탄핵되어 知宣州로 좌천되었고 곧 知應天府가 되었다. 여기에서 학교를 일으켜 范仲淹에게 학생들을 가르쳐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明道 元年(1031)에 參知政事까지 되었지만, 인종이 親政을 하면서 知亳州로 좌천되었다. 寶元 元年(1038)에는 三司使에 제수되었고, 康定 元年(1040)에는 知樞密院事로 발탁되었다가 곧 樞密使가 되었다. 慶曆 4年(1044)에는 탄핵을 받아 知潁州로 좌천되었다. 이후 병이 들어 京師로 돌아왔고, 사망한 이후 司空 겸 侍中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元獻이다. 저술로는 『珠玉詞』, 『元獻遺文』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