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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한원

주의 왕업이 바야흐로 융성하였으니, 희송(주 성왕)은 숙신이 입조하여 하례한 것을 새겼고,

주의 왕업이 바야흐로 융성하였으니, 희송(주 성왕)은 숙신이 입조하여 하례한 것을 새겼고,
『숙신기』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옛날에 무왕주 001
각주 001)
주 무왕 희발은 문왕 희창의 차남으로, 기원전 1046년에 상을 멸망시키고 주 왕조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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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을 이기고, 구이주 002
각주 002)
「夷」는 동쪽의 오랑캐를 일컫는다. 『禮記』에는 ‘九夷, 八蠻, 六戎, 五狄’으로 등장하고, 『爾雅』에는 ‘九夷, 八狄, 七戎, 六蠻’으로 나와, 「九」가 실제 ‘아홉’을 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따라 구이의 구체적인 명칭으로, 『後漢書』에서는 畎夷·于夷·方夷·黃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 등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반면, 『論語』의 ‘子欲居九夷’, 『肅愼記』가 인용한 『國語』 및 『史記』의 ‘通道於九夷百蠻’, 『韓非子』의 ‘大難攻 小易服 不如服衆小易劫大 乃攻九夷 而商蓋服矣’ 등에서는 「九」가 실제 ‘아홉’의 의미가 아니라 ‘많다’는 뜻의 형용사로 쓰였다. 특히, 『韓非子』에서는 「九」가 「衆」의 의미로 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도 「九夷」 뒤의 「百蠻」과 함께 ‘많은 오랑캐’의 의미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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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백만주 003
각주 003)
「蠻」은 남쪽의 오랑캐를 일컫는다. 「百」은 ‘많다’는 뜻의 형용사로 많이 쓰였으므로, 앞의 「九夷」와 함께 ‘많은 오랑캐’의 의미로 해석된다. 한편, 『尙書』는 『肅愼記』가 인용한 『國語』와 비슷한 내용을 전하면서도, 이 부분을 「八蠻」으로 적고 있다. 『周禮』의 ‘四夷, 八蠻, 八閩, 九貉, 五戎, 六狄’과, 『禮記』의 ‘九夷, 八蠻, 六戎, 五狄’에도 「八蠻」이 등장하는데, 이 경우 「八」은 실제 ‘여덟’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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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길이 통하게 하여, 그들에게 각각 방회주 004
각주 004)
방회는 그 지방에서 산출되는 재화와 방물을 가리킨다. 『國語』에 주를 단 韋昭는 방회를 ‘各以所居之方所出貨賄 爲貢也(각기 거주하는 지방에서 나는 재화를 바쳤다)’라는 주를 달아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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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가져와 바치게 함으로써, 직분과 본업을 잊지 않게 하였다. 이에 숙신은 호시와 석노를 바쳤는데, 그 길이가 한 자 여덟 치였다. 선왕이 그 아름다운 덕이 멀리까지 이르렀음을 밝히고, 후인에게 보여, 길이 거울삼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그 오늬(화살에 활시위를 끼우는 부분)주 005
각주 005)
括은 ‘오늬’를 말하는데, 오늬는 화살에 활시위를 끼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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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새겨 말하길, ‘숙신씨가 공납한 화살[肅愼氏之貢矢]’이라고 하였다. 왕이 또 진호공주 006
각주 006)
주 무왕이 상을 멸망시킨 후 舜의 후손을 찾아 큰 딸 大姬와 혼인시키고 陳에 봉하였는데, 그가 진호공이다. 『國語』의 해당 부분은 ‘以分大姬 配虞胡公而封諸陳 古者 分同姓以珍玉 展親也 分異姓以遠方之職貢 使無忘服也 故分陳以肅愼氏之貢’으로 되어 있다. 즉, 진호공에게 「숙신씨지공시」가 새겨진 화살을 하사한 이유는 먼 지방의 직공을 나누어 줌으로써 복속됨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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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이를 하사하였다.주 007
각주 007)
“옛 무왕이 ~ 하사하였다.” 이 부분은 『國語』 卷5 魯語下의 「孔子論楛矢」와 『史記』의 「孔子世家」, 『說苑』 및 『孔子家語』의 「辨物」, 『漢書』 卷27 「五行志」에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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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 때 다시 들어와 하례하니, 왕이 영백주 008
각주 008)
영백은 주 성왕대의 기내제후로, 경대부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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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회숙신지명주 009
각주 009)
『史記』 「周本紀」의 해당 부분은 ‘賄息愼之命’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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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짓게 하였다주 010
각주 010)
“성왕 때 ~ 짓게 하였다.” 이 부분은 『尙書』 「周官」과 『史記』의 「周本紀」에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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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은 성왕의 이름이다.
 
• 참고
『國語』 卷5 魯語下 仲尼在陳 有隼極于陳侯之庭而死 楛矢貫之 石砮其長尺有咫 陳惠公使人以隼如仲尼之館聞之 仲尼曰 隼之來也遠矣 此肅慎氏之矢也 昔武王克商 通道于九夷百蠻 使各以其方賄來貢 使無忘職業于是肅慎氏貢楛矢石砮 其長尺有咫 先王欲昭其令德之致遠也 以示後人 使永監焉 故銘其栝曰 肅慎氏之貢矢以分大姬 配虞胡公而封諸陳 古者 分同姓以珍玉 展親也 分異姓以遠方之職貢 使無忘服也 故分陳以肅慎氏之貢 君若使有司求諸故府 其可得也 使求 得之金櫝 如之
『尙書』 「周官」 武王旣伐東夷 肅愼來賀 王俾榮伯作賄肅愼之命
『史記』 卷4 「周本紀」 成王旣伐東夷 息愼來賀 王賜榮伯作賄息愼之命
『晉書』 卷97 肅愼氏 周武王時 獻其楛矢石砮 逮於周公輔成王 復遣使入賀
『太平御覽』 卷784 肅愼 所引 『肅愼國記』 其檀弓三尺五寸 括矢長尺有咫 石砮皮骨申

  • 각주 001)
    주 무왕 희발은 문왕 희창의 차남으로, 기원전 1046년에 상을 멸망시키고 주 왕조를 세웠다. 바로가기
  • 각주 002)
    「夷」는 동쪽의 오랑캐를 일컫는다. 『禮記』에는 ‘九夷, 八蠻, 六戎, 五狄’으로 등장하고, 『爾雅』에는 ‘九夷, 八狄, 七戎, 六蠻’으로 나와, 「九」가 실제 ‘아홉’을 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따라 구이의 구체적인 명칭으로, 『後漢書』에서는 畎夷·于夷·方夷·黃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 등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반면, 『論語』의 ‘子欲居九夷’, 『肅愼記』가 인용한 『國語』 및 『史記』의 ‘通道於九夷百蠻’, 『韓非子』의 ‘大難攻 小易服 不如服衆小易劫大 乃攻九夷 而商蓋服矣’ 등에서는 「九」가 실제 ‘아홉’의 의미가 아니라 ‘많다’는 뜻의 형용사로 쓰였다. 특히, 『韓非子』에서는 「九」가 「衆」의 의미로 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도 「九夷」 뒤의 「百蠻」과 함께 ‘많은 오랑캐’의 의미로 해석된다. 바로가기
  • 각주 003)
    「蠻」은 남쪽의 오랑캐를 일컫는다. 「百」은 ‘많다’는 뜻의 형용사로 많이 쓰였으므로, 앞의 「九夷」와 함께 ‘많은 오랑캐’의 의미로 해석된다. 한편, 『尙書』는 『肅愼記』가 인용한 『國語』와 비슷한 내용을 전하면서도, 이 부분을 「八蠻」으로 적고 있다. 『周禮』의 ‘四夷, 八蠻, 八閩, 九貉, 五戎, 六狄’과, 『禮記』의 ‘九夷, 八蠻, 六戎, 五狄’에도 「八蠻」이 등장하는데, 이 경우 「八」은 실제 ‘여덟’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방회는 그 지방에서 산출되는 재화와 방물을 가리킨다. 『國語』에 주를 단 韋昭는 방회를 ‘各以所居之方所出貨賄 爲貢也(각기 거주하는 지방에서 나는 재화를 바쳤다)’라는 주를 달아 설명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5)
    括은 ‘오늬’를 말하는데, 오늬는 화살에 활시위를 끼는 부분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6)
    주 무왕이 상을 멸망시킨 후 舜의 후손을 찾아 큰 딸 大姬와 혼인시키고 陳에 봉하였는데, 그가 진호공이다. 『國語』의 해당 부분은 ‘以分大姬 配虞胡公而封諸陳 古者 分同姓以珍玉 展親也 分異姓以遠方之職貢 使無忘服也 故分陳以肅愼氏之貢’으로 되어 있다. 즉, 진호공에게 「숙신씨지공시」가 새겨진 화살을 하사한 이유는 먼 지방의 직공을 나누어 줌으로써 복속됨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7)
    “옛 무왕이 ~ 하사하였다.” 이 부분은 『國語』 卷5 魯語下의 「孔子論楛矢」와 『史記』의 「孔子世家」, 『說苑』 및 『孔子家語』의 「辨物」, 『漢書』 卷27 「五行志」에도 전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8)
    영백은 주 성왕대의 기내제후로, 경대부를 지냈다. 바로가기
  • 각주 009)
    『史記』 「周本紀」의 해당 부분은 ‘賄息愼之命’으로 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10)
    “성왕 때 ~ 짓게 하였다.” 이 부분은 『尙書』 「周官」과 『史記』의 「周本紀」에도 전한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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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왕업이 바야흐로 융성하였으니, 희송(주 성왕)은 숙신이 입조하여 하례한 것을 새겼고, 자료번호 : hw.k_0002_0090_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