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요시자네(宗義眞)의 경과보고와 아베 분고노가미(阿部豊後守)의 의견
10월 5일, 태공(太公)은 에도에 도착하자,주 001
“다케시마(울릉도)에 관한 조목은 先 태수께서 명을 받드신 이래로 사신을 파견하여 논의한 지가 지금 3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 나라가 그들의 경계라고 고집을 부리므로 결코 말로 해서는 얻을 수 없겠습니다. 어떻게 하여야겠습니까? 9년(1696) 병자 정월 9일.”
아베 분고노카미가 平田眞賢를 불러서 친히 의논하여 말하였다.
“다케시마 땅은 원래 이나바(因幡)에 속했다고 할 수 없고,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주했던 일도 없다. (의문을 제기한 두 번째 서신에서, 우리나라 백성들이 이 섬에 거주한 사실이 본주[本州]의 기록에 기재되어 있다는 말을 했던 것은 잠시 거주했던 것을 가리켜 한 말이다.) 일찍이 台德大君 주 004의 시대에 요나고(米子) 마을 사람들이 그 섬에 가서 고기잡이 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허가했을 뿐이다. 지난 번 그 땅의 소재를 물어 보았더니 이나바에서는 160리 가량 거리가 떨어져 있다고 하고, 조선에서는 단지 40리 정도만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원래 저들의 경계였음은 아마도 의심할 나위가 없는 것 같다. 나라에서 만약 군대의 위세를 써서 공격한다면 구해서 얻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다만 아무 소용없는 작은 섬 때문에 이웃나라와의 화평하고 좋은 관계를 잃는 것은 옳은 계책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 애초에 저들에게서 취하지 않은 즉 지금도 또한 그들에게 돌려줄 수 없다고 한 말은 다만 마땅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기잡이 하러 가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는 것일 뿐이니, 모름지기 이런 뜻으로 조선을 타일러야 한다. 오늘의 처분(處分)이 전날과 비교하여 다른 점이 있으나, 그러나 주장을 펼쳐 서로 다투는 것이 어찌 서로 함께 아무 일도 없는 것만 하겠는가?”주 005
이윽고 태공(太公)이 올라가 작별을 할 때에 다시 전날의 의견을 말씀하시고 4월 8일 번(藩)으로 돌아왔다.
각주 001)
平田眞賢(直右衛門이라고 부른다)으로 하여금 미자와 요시자에몬(三澤吉左衛門[阿部家의 幸臣이다])주 002에게 부탁하여 아베 분고노카미(阿部豊後守)주 003에게 이렇게 말하도록 하였다.조선과의 교섭이 점차 고착상태에 빠져 원하던 답변을 얻지 못한 채 다다 요자에몬이 2차 使行에서 1695년 6월 귀국하자 쓰시마번은 일단 그간의 교섭 경과를 막부에 보고한 뒤 막부의 지시를 받아 조선과 교섭하기로 했다. 이에 소 요시자네는 1695년 8월말에 쓰시마를 출발, 10월 에도에 도착하였다. 요시자네는 그간 조선과 주고받은 왕복문서들을 제출하고 로주 아베 분고노카미(아베 마사타케: 阿部正武)와 교섭방침에 관한 협의에 들어갔다. 로주 아베 마사타케에 대한 정황보고는 본문에 보이는 ‘平田眞賢’, 즉 쓰시마번 가로 히라타 나오에몬(平田直右衛門)을 통해 이루어졌다.
“다케시마(울릉도)에 관한 조목은 先 태수께서 명을 받드신 이래로 사신을 파견하여 논의한 지가 지금 3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 나라가 그들의 경계라고 고집을 부리므로 결코 말로 해서는 얻을 수 없겠습니다. 어떻게 하여야겠습니까? 9년(1696) 병자 정월 9일.”
아베 분고노카미가 平田眞賢를 불러서 친히 의논하여 말하였다.
“다케시마 땅은 원래 이나바(因幡)에 속했다고 할 수 없고,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주했던 일도 없다. (의문을 제기한 두 번째 서신에서, 우리나라 백성들이 이 섬에 거주한 사실이 본주[本州]의 기록에 기재되어 있다는 말을 했던 것은 잠시 거주했던 것을 가리켜 한 말이다.) 일찍이 台德大君 주 004의 시대에 요나고(米子) 마을 사람들이 그 섬에 가서 고기잡이 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허가했을 뿐이다. 지난 번 그 땅의 소재를 물어 보았더니 이나바에서는 160리 가량 거리가 떨어져 있다고 하고, 조선에서는 단지 40리 정도만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원래 저들의 경계였음은 아마도 의심할 나위가 없는 것 같다. 나라에서 만약 군대의 위세를 써서 공격한다면 구해서 얻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다만 아무 소용없는 작은 섬 때문에 이웃나라와의 화평하고 좋은 관계를 잃는 것은 옳은 계책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 애초에 저들에게서 취하지 않은 즉 지금도 또한 그들에게 돌려줄 수 없다고 한 말은 다만 마땅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기잡이 하러 가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는 것일 뿐이니, 모름지기 이런 뜻으로 조선을 타일러야 한다. 오늘의 처분(處分)이 전날과 비교하여 다른 점이 있으나, 그러나 주장을 펼쳐 서로 다투는 것이 어찌 서로 함께 아무 일도 없는 것만 하겠는가?”주 005
이윽고 태공(太公)이 올라가 작별을 할 때에 다시 전날의 의견을 말씀하시고 4월 8일 번(藩)으로 돌아왔다.
-
각주 001)
조선과의 교섭이 점차 고착상태에 빠져 원하던 답변을 얻지 못한 채 다다 요자에몬이 2차 使行에서 1695년 6월 귀국하자 쓰시마번은 일단 그간의 교섭 경과를 막부에 보고한 뒤 막부의 지시를 받아 조선과 교섭하기로 했다. 이에 소 요시자네는 1695년 8월말에 쓰시마를 출발, 10월 에도에 도착하였다. 요시자네는 그간 조선과 주고받은 왕복문서들을 제출하고 로주 아베 분고노카미(아베 마사타케: 阿部正武)와 교섭방침에 관한 협의에 들어갔다. 로주 아베 마사타케에 대한 정황보고는 본문에 보이는 ‘平田眞賢’, 즉 쓰시마번 가로 히라타 나오에몬(平田直右衛門)을 통해 이루어졌다.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색인어
- 이름
- 平田眞賢, 直右衛門, 미자와 요시자에몬, 三澤吉左衛門, 아베, 아베, 平田眞賢, 台德大君, 태공(太公)
- 지명
- 에도, 다케시마(울릉도), 다케시마, 이나바(因幡), 요나고(米子), 이나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