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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한인의 반전활동과 한일연대

2. 재일 한인의 반전활동과 한일연대

일본의 반전운동은 일본에 유학중이던 한인들이 신학문 수용과 국제연대 투쟁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문과 잡지, 각종 책자와 ‘평민대학 강연회’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아나키즘 사상을 접한 유학생들은 일본 아나키스트들과 직접 교류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한국 유학생 나경석(羅景石)과 정태신(鄭泰信) 등은 1913년 오스기 사카에 등 일본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며 아나키즘 사상을 수용하였고, 김철수(金綴洙)와 최익준(崔益俊)등 유학생들은 1916년 중국·대만의 유학생들과 함께 일본제국주의 타도와 새로운 아시아건설을 목표로 비밀결사인 신아동맹회(新亞同盟會)를 결성하였다. 한인 유학생들은 3.1운동의 좌절이후 일본 사상단체에 더욱 적극 참여하여, 정태성(鄭泰成)과 이룡기(李龍基) 등은 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郞]가 주관하는 자유인연맹(自由人聯盟)에 참여하였다(김명섭, 2006: 44).
당시 동경에는 한인 유학생이 1천명이 넘었으며, 이들은 1920년 11월 조선인 고학생과 노동자의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고학생동우회’를 창립하였다. 간부는 박열(朴烈)·김약수(金若水)·백무 등으로 총 회원수가 200명이 넘었다. 박열·원종린·김약수 등은 일본 아나키스트 사상에 공명하여 오스시 사카에·이와사 사쿠타로 등과 접촉하면서 대표적인 한인 아나키스트 되었다.(조세현, 2005: 263) 한인 유학생들은 1920년 12월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를 망 라한 일본사회주의동맹이 창립되자, 직접 참여하여 교류하는 한편 한인조직도 결성하였다.
1921년 11월 동경에서 박열·원종린·황석우·백무 등 재일 아나키스트들 이 흑도회(黑濤會)를 결성하고 기관지 『흑도』를 발행하였다. 『흑도』에는 일본 아나키스트들의 축사와 일본 노동단체의 축하광고도 실어 한일 연대의식을 과시하였다. 이후 흑도회가 분화하면서 1920년대 재일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흑우회(黑友會, 1923)와 흑풍회(黑風會, 1927)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자아의 해방과 민중의 직접행동에 입각하여 일제의 식민통치에 맞서 테러활동으로 저항했고, 상호부조론과 자유연합주의로 지배와 권력이 없는 신사회 건설을 추구하며 독자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김명섭, 2001: 96).
이시기 일본인 중에서 한인 아나키스트와 연대한 대표적인 반전 활동가로는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와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1880~1953]를 들 수 있다. 가네코 후미코는 19세 때 도쿄에 와서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을 접하고,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민족해방에 전념하던 한국인 박열과 만나 함께 흑도회 기관지 『흑도』를 발행하였고, 불령사(不逞社)를 결성하여 조선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일본 천황제 타도를 지향하였다(야마다 쇼지 저·정선 택 옮김, 2003:123).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일본민중을 억압하면서 조선을 식민지화하여 지배하는 천황제에 반대하여 조선민족과의 공동투쟁을 선언하였다. 두 사람은 천황과 황태자에 대한 폭탄투척을 계획하기는 했지만 실현하지 못한 채,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정부에 의해 구속되었다.주 923
각주 923)
1923년 9월 1일 일어난 관동대지진을 빌미로 일제는 사회주의자와 조선인 토벌에나서 9월 3일 이들을 붙잡아 갔고, 일본 아나키스트의 대부 오스기 사카에 부부를총살시켰으며, 조선인 6,000명을 잡아죽였다. 이 과정에서 박열·후미코 부부를 천황 암살을 모의한 대역죄인으로 사형수로 만들었다. 이 일로 박열은 일본 정치범 최장기수로 22년 2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김태준, 「가네코 후미코, 조선의 흙이 된日여인」 『한국일보』, 2010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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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미코는 일본국가 권력의 폭력에 대항하여 법정투쟁을 전개하였고, 우쓰노미야 형무소에 갇힌 후에도 전향공작을 뿌리치고 비전향을 관철하다가 1926년 7월 옥중 자결하였다.
‘한국판 쉰들러’ 라고 불리는 후세 다쓰지는 관동대지진 후에 대역죄로 기소된 재일 한국인 박열을 변호하고, 대심원 특별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하였다.주 924
각주 924)
박열은 1945년 10월, GHQ(연합군사령부)의 지령으로 아키타형무소에서 석방되어1974년에 북한에서 사망하였다. 다테노 아키라 편저, 오정환·이정환 옮김(2006),3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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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네코 후미코가 옥사하자, 그녀의 유골을 인수하여 박열의 고향묘지에 매장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인권 변호사로서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과 타이완에서도 활동하였으며, 의열단사건과 조선공산당사건도 변호하는 등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굳은 의지를 보여주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비판을 통해 그는 한국인에게 법률가·변호사로서의 의무보다 진정한 친구로서의 연대감을 보였다(다테노 아키라 편저 /오정환·이정환 옮김, 2006: 220).
흑우연맹(黑友聯盟, 1928~1936)은 재일 한인 아나키스트들이 결집하고, 일본 아나키즘 단체와 연대하여 3.1운동 기념투쟁, 8월 국치일투쟁 등을 전개 하였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활동가들에 대한 대량 검거와 전향공작 등으로 재일 아나키즘 운동이 침체하고 단체 해산도 속출하였다. 일본과 조선에서 활동이 힘들게 되자, 아나키스트들은 보다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중국으로 진출, 무장투쟁에 가담하는 등 민족해방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주 925
각주 925)
재중 항일무장단체로의 진출과 비밀결사에 의한 무장봉기 계획 등은 민족해방을 최우선과제로 삼았던 한인 아나키즘운동의 전통과 특성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있다. 김명섭(2001), 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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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 후미코
※자료 연계

후세 다쓰지
- ※자료 東洋經濟日報 2009/08/07
박열
※자료 연계

  • 각주 923)
    1923년 9월 1일 일어난 관동대지진을 빌미로 일제는 사회주의자와 조선인 토벌에나서 9월 3일 이들을 붙잡아 갔고, 일본 아나키스트의 대부 오스기 사카에 부부를총살시켰으며, 조선인 6,000명을 잡아죽였다. 이 과정에서 박열·후미코 부부를 천황 암살을 모의한 대역죄인으로 사형수로 만들었다. 이 일로 박열은 일본 정치범 최장기수로 22년 2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김태준, 「가네코 후미코, 조선의 흙이 된日여인」 『한국일보』, 2010년 11월 29일) 바로가기
  • 각주 924)
    박열은 1945년 10월, GHQ(연합군사령부)의 지령으로 아키타형무소에서 석방되어1974년에 북한에서 사망하였다. 다테노 아키라 편저, 오정환·이정환 옮김(2006),353쪽. 바로가기
  • 각주 925)
    재중 항일무장단체로의 진출과 비밀결사에 의한 무장봉기 계획 등은 민족해방을 최우선과제로 삼았던 한인 아나키즘운동의 전통과 특성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있다. 김명섭(2001), 124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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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한인의 반전활동과 한일연대 자료번호 : edeah.d_0005_0040_003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