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 지역의 거란의 번창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는 추밀부사(樞密副使) 한기(韓琦)의 상소
추밀부사(樞密副使)주 001 한기(韓琦)주 002
각주 002)
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한문제(漢文帝)주 003는 고조(高祖)주 004와 혜제(惠帝)주 005의 평화로운 시대를 이어받은 이후에 몸소 절약을 실천하여 국가는 잘 다스려지고 백성은 부유해지고 형벌은 쓰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가의(賈誼)주 006가 글을 올려 사안을 말하면서 오히려 통곡을 하고 크게 탄식을 하였으니, 어찌 잘못이겠습니까? 무릇 깊이 근심하고 멀리 생각하여 장구한 계책을 도모하는 것은 대한(大漢)의 기업을 천만세에 드리워 끝이 없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세 성인의 아름다운위엄을 이어 인(仁)과 덕(德)은 멀리까지 미치고 천하가 크게 평정되었으니, 백성들이 자신의 생업을 즐긴 것이 80여년입니다. 그러나 신이 가만히 요즘의 일을 보니 밤낮으로 피눈물이 흐른다고 할 만한데도 똑바로 통곡하고 크게 한숨을 짓지 않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무릇 서쪽과 북쪽의 두 적 때문에 전화(戰禍)로 인한 피해가 이미 일어났는데도 상하가 모두 태연(泰然)하여 조정이 장차 위험하고 종사(宗社)가 편안하지 않음을 알지 못합니다. 신은 지금 매우 자세히 인용할만한 겨를이 없으므로, 청컨대 간략히 대강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거란(요)은 큰 사막에 있으면서 요동에 걸치고는 전체 연 지역의 수십 군에 웅거한 큰 세력으로, 동으로는 고려를 복속시키고 서로는 이원호를 신하로 삼았으며, 오대(五代) 시기로부터 지금까지 백 여 년간 중원과 대항하면서 날로 번창하고 있습니다. 법과 제도 문물과 음식, 의복의 성장(盛裝)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漢)의 풍습을 익혔으며, 그렇기 때문에 적의 기세가 매우 교만하여 스스로 옛날 북위(北魏)주 007와는 같지 않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거란이) 한의 흉노, 당의 돌궐과는 같지 않다고 해도 본래 오랑캐가 자처하는 것은 중국이 좋아하거나 숭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근래 다시 조정이 서방으로 군대를 일으키려 한다며 맹약을 어기고는 사신을 보내 관남의 땅을 요구하여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조정이 생민(生民)을 아끼고 생각하여 그들을 위해 숨기고 참아 해마다 (보내는) 돈과 비단의 수를 더해주면서 또 이전의 맹약을 굳게 하였는데, 그러나 오히려 헌납한다는 명분을 강요하면서 스스로를 크게 높였습니다. 중국을 가벼이 여기는 사정이 볼만합니다.”라고 하였다.韓琦 : 1008~1075. 북송의 관인. 相州 安陽 사람으로, 字가 稚圭이다. 일찍이 진사에 합격, 知州按撫使, 절도사 등으로 지방행정에 두각을 나타내고, 서하의 침입을 격퇴함으로써 30세에 문무에 명성을 떨쳐 추밀부사가 되었다. 자청하여 지방관을 역임하고 인종 嘉祐 연간에는 재상에 올라 10여 년간 국정에 참여하였다. 신종 즉위 후 다시 지방으로 갔으며, 왕안석의 靑苗法 실시를 비난하고, 거란(요)의 할지에 대해서도 왕안석과 대립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일생 동안 많은 저작과 시문을 지었으며, 문집으로 『安陽集』이 있다. 시호는 忠獻이고, 후에 魏郡王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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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2)
韓琦 : 1008~1075. 북송의 관인. 相州 安陽 사람으로, 字가 稚圭이다. 일찍이 진사에 합격, 知州按撫使, 절도사 등으로 지방행정에 두각을 나타내고, 서하의 침입을 격퇴함으로써 30세에 문무에 명성을 떨쳐 추밀부사가 되었다. 자청하여 지방관을 역임하고 인종 嘉祐 연간에는 재상에 올라 10여 년간 국정에 참여하였다. 신종 즉위 후 다시 지방으로 갔으며, 왕안석의 靑苗法 실시를 비난하고, 거란(요)의 할지에 대해서도 왕안석과 대립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일생 동안 많은 저작과 시문을 지었으며, 문집으로 『安陽集』이 있다. 시호는 忠獻이고, 후에 魏郡王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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