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계(地界)에 대한 논의와 황제의 조서(詔書)
또 조서를 내려 강회등로발운사(江淮等路發運使) 장힐(張頡)주 001
각주 001)
이 오로지 입공(入貢)한 고려 사신들을 접대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이전에 이 일을 담당했던 발운사는 나증(羅拯)이었는데, 나증이 이미 파직되었기 때문이다.張頡 : ?∼1090. 북송의 관인. 鼎州 桃源 사람으로 字는 仲擧이다. 皇祐 元年(1049)에 진사가 되었고, 神宗 시기에 提點江西刑獄, 廣東轉運使, 權發遣江淮等路發運使, 廣南西路轉運使, 知桂州 등의 직책을 역임했다. 元豐 6年(1083)에는 宜州의 蠻人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고 하여 知均州로 落職되었다. 哲宗이 즉위하면서 여러 차례 승진하여 戶部侍郞이 되었다. 右司諫 蘇轍이 그의 아홉 가지 죄를 논했지만, 집정자들은 그가 비록 덕은 없으나 재주는 활용할 만하다고 여겨 응하지 않았다. 元祐 5年(1090)에 湖北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그를 知荊南府로 삼아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부임하고 난 이후 갑자기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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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張頡 : ?∼1090. 북송의 관인. 鼎州 桃源 사람으로 字는 仲擧이다. 皇祐 元年(1049)에 진사가 되었고, 神宗 시기에 提點江西刑獄, 廣東轉運使, 權發遣江淮等路發運使, 廣南西路轉運使, 知桂州 등의 직책을 역임했다. 元豐 6年(1083)에는 宜州의 蠻人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고 하여 知均州로 落職되었다. 哲宗이 즉위하면서 여러 차례 승진하여 戶部侍郞이 되었다. 右司諫 蘇轍이 그의 아홉 가지 죄를 논했지만, 집정자들은 그가 비록 덕은 없으나 재주는 활용할 만하다고 여겨 응하지 않았다. 元祐 5年(1090)에 湖北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그를 知荊南府로 삼아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부임하고 난 이후 갑자기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