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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부여 논티리 유적

  • 저필자
    최재도(한성백제박물관 백제학연구소)
  • 날짜
    1997
  • 시대
    원삼국
  • 위치
  • 원소장처
    충청남도 부여군 구룡면 태양리 동쪽의 고갯마루 일대
  • 시대
    상고사
  • 유형
    기타
입지
1997년도 4번국도 선형개량 및 확장공사 시 훼손되어 지금은 남아있지 않음.
유적개관
당초 이 유적은 백제시대 산성으로 알려졌으나, 수습조사 이후 일종의 제사유적으로 드러났다. 유적의 규모는 표고 75m 구릉 정상부 평탄지에 그 면적은 약 500×1000m 달한다. 출토유물은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철기 가운데는 철 소재인 철정을 비롯하여 도끼, 낫 등이 있으며, 특히 실용 농기구를 축소한 모형 철제품이 있었다. 모형 철제품의 용도나 성격은 분명하다.
출토유물
* 대형 저장옹(옹), 솥으로 사용되던 장란형토기, 깊은 바로토기 등, 철정, 도끼, 낫 등
해설
충청남도 부여군 구룡면 태양리 동쪽의 고갯마루 일대에 위치하는 원삼국시대의 유적이다. 이 유적은 4번 국도와 40번 국도가 나뉘어지는 구룡면 태양리 동쪽의 고개마루 일대의 구릉 정상부에 입지하고 있었으나, 1997년 4번 국도 선형개량 및 확장공사에 의해 훼손되어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이 일대는 해발 75m 구릉 정상부의 평탄지였으며 그 면적은 약 500×1,000m에 달했으나 200×800m 가량 되는 대부분의 지역이 공사에 의해 훼손되고 나머지 극히 제한된 면적만을 조사하였다. 처음에는 백제시대 산성으로 이해되어왔으나 수습조사에 통해 일종의 제사유적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한정된 구역만을 조사한 것에 불과하므로 그 결과로 이 유적 전체의 성격을 규정하기는 어렵다.
출토 유물은 원삼국시대의 대형독[대옹(大甕)], 솥으로 사용되던 긴알모양토기[장란형토기(長卵形土器)], 그리고 소형 조리용기로 추정되는 깊은바리모양토기[심발형토기(深鉢形土器)] 등의 토기와 더불어 각종 철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철기 가운데는 철 소재인 덩이쇠[철정(鐵鋌)]를 비롯하여 쇠도끼[철부(鐵斧)], 쇠낫[철겸(鐵鎌)] 등이 있으며, 특히 실용 농기구를 축소한 모형 철제품이 포함되어 있어 주목된다. 모형 철제품의 용도나 성격은 분명하지 않으나 무덤에의 부장 등 각종 제사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형 철제품은 그동안 5세기 전반경 낙동강 유역의 대가야 지방인 경상북도 고령 등지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었던 것이나 최근 충남 서천 오석리 등지에서 이미 4세기 초~전반경에 무덤 부장품으로 나타나고 있음이 확인되어 금강유역에 그 기원이 있는 것임이 밝혀졌다. 출토유물로 볼 때 논티리유적의 연대는 대체로 3세기 후반~4세기 초로 비정할 수 있다.
한강유역에서 백제가 국가로 성립되던 3세기 중엽 이후 어떤 형태로든 그 영향은 주변지역에 나타나기 마련일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아직 자세하지 않다. 다만 이 무렵 이후 마한지역의 취락이 보다 높은 곳에 입지하는 등의 일련의 움직임이 최근 각지 발굴조사 결과 감지되고 있어 백제와 마한지역과의 일종의 긴장관계가 형성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논티리유적 역시 이러한 당시의 사정을 반영한 고지(高地) 취락의 하나일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성격으로 인식되는 구룡면 구봉리 유적은 해발 95m 구릉 정상부 평탄면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표조사결과 원삼국~백제시대에 걸친 유물이 수습되어 논티리 유적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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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논티리 유적 자료번호 : isea.d_0001_0030_0140_007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