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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록·보고서

동궁터 발굴

4) 동궁터 발굴

동궁터에 대한 발굴은 그해 6월 하순에 진행하였다고 생각된다. 동궁터는 궁성안의 동쪽구역을 차지하고 있다. 동궁터는 중궁터보다 16~20m 가량 낮다. 동궁이 있던 북쪽성벽 앞부분에는 발굴 당시까지 주민부락이 있었다. 발굴에 앞서 주민가옥들을 모두 궁성 밖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 부락자리에는 배나무 여러 그루가 자라고 있었는데 지금도 그 배나무들이 남아있다. 당시 북성벽에 있는 북수구문으로는 대성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자그마한 개울을 따라 흘러들어 남수구문으로 빠지고 있었다.
그리고 궁성의 동벽과 남벽이 서로 엇갈려 지나가는 모서리에는 못자리로 전해오는 습지대가 있었다. 나는 안학궁의 규모와 구조형식으로 보아 동궁도 훌륭하게 건설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발굴에 착수하였다. 제일 먼저 동궁터의 앞채로 인정되는 제1호궁전터와 제3호궁전터를 발굴하였다. 나는 여기에 부락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파괴가 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예상 밖에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동궁터는 지면보다 1m 높게 돌을 쌓아올려 만든 대 위에 있었다. 발굴은 궁전건물의 토방선을 찾고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건물의 앞면을 확인한 다음 기둥 기초자릿돌을 하나하나 찾아 나가면서 진행하였다.
● 동궁 제1호궁전터와 제3호궁전터 ●
동궁 제1호궁전터는 정면 3간, 측면 4간짜리 본채를 중심에 놓고 그 서쪽에 정면 3간, 측면 3간짜리 나래채를 달았으며 동쪽에는 정면 2간, 측면 4간짜리 나래채를 본채보다 얼마간 앞으로 나오게 배치하였다. 나래채가 이렇게 앞으로 나오게 처리함으로서 옆에 있는 건물터와 서로 연결된 하나의 큰 건물처럼 보이게 하였다. 이것은 궁전건축에서 같은 규모의 건물을 건설하면서도 시각적으로 2배로 크게 보이게 하기 위한 수법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동궁의 평면은 4채의 건물이 서로 연결된 하나의 독특한 건축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발굴과정에 드러난 기둥 기초형식을 보면 제1호궁전에서는 4각형 기초가 기본으로 되었고, 제2, 3, 4호궁전들에는 모두 원형기초가 있는데 이것도 역시 여러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였다.
● 동궁 제2호궁전터와 제4호궁전터 ●
동궁 제2호궁전터와 제4궁전터는 동궁 뒤채에 해당된다. 이 궁전터에 대한 발굴은 앞채 궁전터들을 조사하는 과정에 앞채 중심에서 뒤뜨락으로 회랑터가 나타난 것을 단서로 하여 진행하게 되었다. 회랑기초는 원형기초이며 기둥자리가 석줄로 나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계속하여 제2호궁전터와 제4호 궁전터를 찾게 되었으며 그에 대한 전면발굴을 진행하였다.
● 동궁 제5호궁전과 제6호궁전터 ●
동궁발굴에 이어 동문터 부근에 대한 조사와 시굴을 진행하였다. 그때 나는 이미 발굴한 동궁터와 동성벽 사이에서 1개 지점, 남궁터와 동성벽 사이에서 1개 지점을 시굴지점으로 정하고 조사를 하였다. 넓은 공지에서 기초자릿돌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무더운 여름날에 하루종일 시굴침을 찌르고나면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어쩌다가 시굴침에 돌이 부딪혀 파보면 기초자릿돌이 아니라 막돌이었다. 이렇게 헛탕을 치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고심끝에 중궁 제1호궁전터와 동성벽 사이의 일직선상에서 건물터 1개를 찾아냈고 남궁 제1호궁전터와 동성벽 사이의 일직선상에서도 역시 건물터 1개를 발견하였다. 이 건물터들이 동궁 제5호궁전터와 제6호궁전터이다. 이 궁전터들 역시 본채에 나래채가 대칭으로 달린 건물형식이었는데 평면구조는 동궁 제2호, 제4호궁전터와 똑같은 형식이었다. 궁전터들을 찾아낸 다음 제5호궁전터 서쪽에서 3개의 원형 기초자릿돌을 찾아냈는데 이것은 서쪽회랑터였을 것이다. 이 발굴은 안학궁터에 대한 발굴에서 마지막을 장식한 뜻 깊은 발굴이었다.
안학궁터에 대한 발굴보고가 세상에 나가고 내외의 많은 연구자들 속에서 그에 대한 연구가 여러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나는 그러한 연구성과들을 볼 때마다 발굴자의 한사람으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게 되며 나이가 많지만 이제라도 안학궁터와 같은 큰 규모의 유적을 다시 한 번 맡아 발굴하여 볼 생각을 해보곤 한다.
우리 학계에서는 안학궁의 성격을 427년 평양천도를 계기로 건설된 고구려의 왕궁으로 규정하고 내외의 많은 학자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일부 일본의 어용학자들은 안학궁이 고구려 왕궁이 아니라는 터무니 없는 망설을 내놓고 있다. 이에 대하여는 이미 여러 기회에 논박을 하였고 이번 공동조사와 관련된 연구논문들에서 언급되겠으므로 여기서는 반복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발굴자의 한 사람으로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속담을 인용하려고 한다. 이 속담은 아마도 유적유물을 대상으로 하는 고고학자들에게 더욱 필요하리라고 생각한다.
오늘 우리는 6·15공동선언의 기치 밑에 온 민족이 단합하여 통일의 새날을 맞이해나가는 뜻 깊은 시대에 살고 있다. 북과 남의 학자들이 고구려의 왕궁터인 안학궁터에서 서로 마주 앉아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논의하는 이 경이적인 현실은 우리 민족끼리의 이념이 얼마나 정당한가를 다시금 가슴 뜨겁게 느끼게 한다. 나는 북과 남의 모든 학자들이 이러한 통일의 새아침을 불러온 6·15공동선언을 적극 옹호하고 빛내어 나가자는 것을 호소하는 것으로 이 글을 끝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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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터 발굴 자료번호 : cr.d_0006_0020_0010_003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