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평양 정오동 고분군

平壤貞梧洞古墳群
  • 저필자
    문수균(미래문화재연구원)
  • 시대
    초기철기
  • 위치
  • 원소장처
    평양시 낙랑구역 정백동 일대
  • 시대
    상고사
  • 유형
    무덤
유적개관
대동강 남안에서 오봉산의 동편으로는 이 산에서 동북쪽으로 뻗은 2개의 구릉이 거의 평행을 이루며 마주하고 있음. 정오동고분군은 목곽묘와 전축분이 중심이 되는 낙랑시대의 고분군으로 입지조건이나 내부의 매장주체시설, 축조시기, 특성 등 많은 부분이 정백동고분군과 비슷함.
출토유물
* 벽옥, 대금구, 천조각, 비녀, 이식, 빗, 칠반, 칠기, 동경, 청동호, 토기류, 은반지, 귀걸이, 철제장검, 대도, 벼루 등.
참고문헌
「조선유적유물도감2」
해설
평양시 낙랑구역 정백동에 있는 낙랑시대의 고분군이다. 유적의 입지는 대동강 남안에서 남쪽으로 약 2.5㎞ 거리에 있는 오봉산(五峰山)의 동편으로 이 산에서 동북쪽으로 뻗은 2개의 구릉이 거의 평행을 이루며 마주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서북쪽 구릉이 정백동고분군의 중심선을 이루고 있으며 동남쪽의 것이 정오동 고분군의 주분포선이 된다. 기본적으로 정오동 고분군은 목곽묘(木槨墓)와 전축분(塼築墳)이 중심이 되는 낙랑시대의 고분군이다. 입지조건이나 내부의 매장주체시설, 축조시기, 특성 등 많은 부분이 정백동 고분군과 비슷하다.
제1호분은 전형적인 낙랑군 시기의 토광목곽묘(土壙木槨墓)이다. 남북으로 긴 능선 위에 묘광(墓壙)을 깊게 파고 목곽을 설치하였다. 이를 흙으로 덮어 지표면에서 묘광을 중심으로 주변에 점토를 약 5㎝ 두께로 굳게 다지고 숯을 깔았다. 그 위로 다시 흙을 쌓아올려 봉분(封墳)을 만들었다.
내부의 매장주체시설은 주곽(主槨)부곽(副槨)으로 구성되었다. 주곽은 길이 2.8m, 너비 2.1m, 높이 약 80㎝의 장방형이다. 그 안에는 남북을 장축(長軸)으로 2개의 목관(木棺)을 동서로 나란히 안치하였다. 부곽은 주곽의 북쪽에 설치하였다. 크기는 주곽보다 동서로 각각 80㎝ 정도 더 넓어 전체적인 평면은 T자형을 이룬다. 부곽이 주곽보다 약 50㎝ 정도 더 깊게 축조되어 있다.
부장품은 주곽에서는 서쪽 목관 안에서 벽옥(碧玉)·대금구(帶金具)·천조각(布片) 등이, 동쪽 목곽 안에서 비녀·이식(耳飾)·벽옥·빗(櫛) 등을 비롯한 약간의 장신구가 수습되었다. 부곽에서는 칠반(漆盤)을 비롯한 각종 칠기(漆器), 동경(銅鏡)·청동호(靑銅壺) 등의 청동기, 환호(丸壺)를 비롯한 각종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축조연대는 대체로 1세기 초기로 추정된다.
제5호분은 방형의 묘광을 판 후, 목곽을 설치하였다. 묘광의 남쪽 벽 중앙에는 무덤길을 설치해 목곽의 상부와 일치하도록 하였다. 목곽 내에는 중앙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굵은 각재(角材)를 이용해 남북으로 막아 동서 2개의 곽을 만들었다. 서쪽 곽은 다시 중앙에서 남쪽으로 치우친 곳에 각재로 동서로 연결하여 격벽(隔壁)을 설치해 남북 2개의 곽을 만들었다. 따라서 목곽은 북쪽에 있는 주곽 외에 남쪽 곽과, 동쪽의 격벽을 이용해 구역을 나눈 2개의 작은 곽까지 합하면 모두 4개의 곽이 있는 셈이다.
주곽이 되는 서북쪽의 구역은 동서 2.4m, 남북 2.3m의 규모이다. 여기에는 목관 2개가 남북을 장축으로 안치되어 있었다. 목관에는 굵은 모시천을 나무에 붙이고 그 위에 칠(漆)을 한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서쪽 관에는 동경·장단검(長短劍)·옥(玉)을 비롯한 약간의 장신구가 있었다. 동쪽 관에서는 동경·팔찌(釧)·화장품곽 등이 출토되었다. 이로써 서쪽 관이 남자, 동쪽 관이 여자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주요 부장품으로는 돼지모양으로 조각한 길이 10㎝의 옥 2개와 닭모양의 장신구(鷄形裝身具), 쇠뇌(弩), 마면(馬面)을 비롯한 각종의 청동제 혹은 철제 마구(馬具), 각종 칠기와 토기, 옥류(玉類) 등 비교적 많은 유물이 있다. 축조연대는 대략 1세기 중기로 추정된다.
제11호분은 각 변이 4m의 원형에 가까운 묘광의 바닥과 네 벽을 점토로 굳게 다진 다음, 그 안에 목곽을 설치하고 목곽과 묘광 사이의 틈에는 강돌을 채워 넣었다. 목곽은 한 변의 길이가 3m 정도인 정방형(正方形)이며 높이는 75㎝ 정도였다. 목곽은 동남쪽 구석에 남북을 장축으로 2개가 동서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대금구(帶金具)만 발견된 서쪽 관이 남자, 은반지·귀걸이 등이 나온 동쪽의 관이 여자의 관으로 생각된다.
묘광의 북벽에서는 배수로의 흔적이 확인되었고, 그 안에 강돌을 넣어 배수를 원활하게 하였다. 목곽 내의 서쪽에는 철제장검·대도(大刀)·가지창(戟) 등 무기류와 벼루(硯)·동경 등 일상용품이 있었고, 북쪽에는 각종 토기류가 놓여 있었다. 축조연대는 대략 1세기 초기로 추정된다.
제2호분은 목곽묘에서 전축분으로의 이행과정을 보여준다. 장방형의 묘광을 서북·동남방향으로 길게 파고 바닥에 벽돌을 두 차례에 걸쳐 깐 다음 다시 벽돌 바닥 위에 판자를 깔았다. 그 위에 각재를 사용해 목곽을 설치하였다. 목곽 안으로는 동남쪽에 치우쳐서 남북으로 2개의 목관을 가지런히 안치하였다. 그 밖의 남은 공간에는 부장품을 놓았다. 유물은 귀걸이〔耳飾〕를 비롯한 각종 장신구와 오수전(五銖錢) 및 동경, 그 밖에 각종 칠기와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축조연대는 대략 2세기 초로 추정된다.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평양 정오동 고분군 자료번호 : isea.d_0001_0040_0010_001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