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예국(芮芮國)의 풍속과 공헌(貢獻)
예예국(芮芮國)은 아마도 흉노(匈奴)의 별종(別種)이다. 위·진시기에 흉노는 수백 수천의 부(部)로 나뉘어 각기 명호가 있었는데, 예예는 그 중 한 부이다. 원씨(元氏)의 위(魏)가 남쪽으로 옮겨온 뒤, 이어서 예예가 그 옛 땅을 독점하였다. 성곽(城郭)이 없고, 물과 풀을 따라 옮겨다니며 가축을 먹였으며, 궁려(穹廬)를 거처로 삼았다. 머리카락을 땋았으며[辮髮], 비단으로 옷을 해 입고, 작은 소매의 솜 외투[小袖袍]와 입구가 작은 바지를 입고, 깊은 옹기 모양의 가죽신[深雍靴]을 신는다. 그 땅의 기후는 매우 추워서 7월에도 얼었던 강물이 녹아 떠다니는 얼음이 강을 채운다. 유송 승명 연간(昇明, 477∼478)에 [조정에서] 왕홍궤(王洪軌)
주 001를 사자로 보내어 그들을 이끌고 함께 위(魏)를 치도록 하였다. 제(齊) 건원(建元) 원년(479)에야 왕홍궤가 비로소 그 나라에 이르렀고, 예예의 국왕이 30만 기를 이끌고 연연산(燕然山) 동남쪽으로 3천여 리를 나오니, 위(魏) 나라 사람들이 관(關)을 닫아걸고 감히 싸우지 못하였다. 나중에 점차 조금씩 약해졌다. 영명 연간(永明, 483∼493)에 정녕(丁零)에게 패하여 다시 소국(小國)이 되어, 남쪽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천감 연간(天監)에 비로소 정녕(丁零)을 깨뜨리고 그 옛 땅을 수복하였다. 비로소 성곽을 쌓고, 이름을 붙여 목말성(木末城)이라 하였다. 14년(515)에 사자를 보내 검은 담비 갖옷[烏貂裘]을 바쳤다. 보통(普通) 원년(520)에 다시 사자를 보내, 그 지역의 특산물을 바쳤다. 이 이후 몇 해에 한 번씩은 사자를 보내왔다. 대동(大同) 7년에 다시 말 한 필과 금(金) 한 근을 바쳤다.
그 국(國)에는 능히 주술(呪術)로써 하늘에 제(祭)를 올려 바람과 눈을 부를 수 있는 자들이 있었다. 바로 전에 밝은 해를 대하였는데, 바로 뒤에 흙탕물이 흥건하게 흐르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싸워서 패배시켜도 그들을 추격할 수 없었다. 혹여 중원에서 그것을 하게 하면, 음산하게 구름이 끼게는 하여도 비가 내리게는 못하였다. 그 까닭을 물으면 따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 국(國)에는 능히 주술(呪術)로써 하늘에 제(祭)를 올려 바람과 눈을 부를 수 있는 자들이 있었다. 바로 전에 밝은 해를 대하였는데, 바로 뒤에 흙탕물이 흥건하게 흐르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싸워서 패배시켜도 그들을 추격할 수 없었다. 혹여 중원에서 그것을 하게 하면, 음산하게 구름이 끼게는 하여도 비가 내리게는 못하였다. 그 까닭을 물으면 따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색인어
- 이름
- 왕홍궤(王洪軌), 왕홍궤
- 지명
- 예예국(芮芮國), 위, 진, 예예, 위(魏), 예예, 유송, 위(魏), 제(齊), 예예, 연연산(燕然山), 위(魏), 정녕(丁零), 정녕(丁零), 목말성(木末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