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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 진행과정

4.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 진행과정

1951년 7월 미국과 영국이 공동으로 각국에 강화회의 초청장을 발송했다. 8월에는 프랑스의 요구를 받아들여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등 인도차이나 3개국에게도 초청장을 발송했다. 초청장을 받고도 회의에 불참한 국가는 인도·버마·유고슬라비아 등 3개국이다. 1951년 9월 4일부터 8일까지 샌프란시스코 중심부에 소재한 오페라하우스에서 일본을 포함하여 52개국이참가한 가운데 강화회의가 열렸다. 일본에서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수상을 포함하여 6명이 대표단으로 참석했다. 베트남 대표로는 프랑스가 인정하는 사이공의 바오다이(Bao Dai) 정권에서 4명이 참석했다.
이틀째 9월 5일 아침부터 실질적인 회의에 들어갔다. 의사진행 규칙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소련의 안드레이 그로미코(Andrei Andreevich Gromyko) UN안전보장이사회 대표가 등단하여 중화인민공화국 대표를 초청하지 않은 것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고 중국 대표를 초청하자고 긴급 제의했다. 그의 제안 이유는 중국을 제외해서는 동아시아 지역의 영속적인 평화를 확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소련의 제안에 대해 표결에 부친 결과 체코와 폴란드만이 소련을 지지하여 35대 3으로 부결되었다.
같은 날 오후에 소련은 강화조약 초안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추가되어야 한다고 하며 수정 의견을 제시했다. 만주·타이완·펑후제도에 대한 중화인민공화국 주권을 승인할 것, 남부 사할린과 쿠릴열도에 대한 소련 주권을 인정할 것, 일본이 어떠한 국가와도 연합국에 대적하는 동맹관계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규정을 신설할 것, 육군 규모를 15만 명으로 하는 등 일본의 재군비에 상한선을 규정할 것, 핵무기·세균화학무기·미사일·인간어뢰 등을 건조하거나 실험하는 것을 금지시킬 것, 일본 본토의 국제 해협을 비무장화 하고 모든 국가의 상선 통과에 대해서는 언제나 개방하며 군함에 대해서는 연안국에게만 통과를 허용하도록 규정할 것 등이다. 이러한 소련의 주장에는 소련의 영유권이나 패권을 강조하는 내용도 있었지만, 전시 연합국 구상을 재확인하면서 강화조약 초안에 과거 구상이 구체화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한 내용도 있었다.
덜레스는 강화회의 준비과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과거 전쟁에 대하여 잊을 수도 없으며 용서할 수도 없지만, 연합국은 전대미문의 자제력을 발휘하여 분노 없이 평화를 제공하고자 한다고 하는 관대한 강화 방침을 강조했다. 배상 문제를 둘러싸고 만약 일본에게 거액의 금전 배상 청구권을 요구한다면 일본의 대외적 신용이 떨어지고, 일본인의 노동 의욕도 상실되어 비참한 지경에 이르고 독재자나 혁명가나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일본에 대한 청구권은 가공품이나 서비스 등으로 요구할 것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한국이 초청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했는데 그는 2차 대전 발발 훨씬 이전에 한국이 독립을 상실했고 일본이 항복한 이후에 독립을 회복했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그는 강화회의에서 한국의 임시정부나 독립운동가의 투쟁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영국의 대표로 참가하여 연단에 오른 케네스 영거(Kenneth GilmourYounger)는 무엇보다 강화조약 초안에 영연방 국가와 식민지 국가의 견해가 반영되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일본의 침략행위에 따른 잔학행위를 결코 잊지 않고 있다고 하면서 말레이와 홍콩 주민들이 일본의 점령에 따른 타락성과 야수성을 직접 경험한 것에 대해 결코 잊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인도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는 일치하여 평화 해결을 위하여 증오와 복수를 지양해야 하며, 과도하게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향하여 눈을 돌리자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수락연설을 담당하기 위해 등단한 요시다 수상이 두루마리원고를 천천히 읽어나갔다. 그는 이 강화조약이 복수를 의미하는 조약이 아니고 화해와 신뢰의 문서라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고 하고 공정하고 관대한 조약을 흔쾌히 받아들인다고 했다. 다만 인도와 버마가 불참한 것에 대해서 유감을 표명하면서 일본이 아시아에 속해 있는 만큼 아시아 국가들과 긴밀한 우호와 협력관계를 열어가겠다고 했다. 아울러 그는 아시아 국가와 일본은 예로부터 전통이나 문화, 사상을 함께 해 왔다고 하면서 아시아와의 유대관계를 강조했다.
마지막 날인 9월 8일 오전 강화조약에 대한 조인식이 열렸다. 강화회의 참가국 가운데 소련과 체코, 폴란드 대표가 조인식에 결석하여 조약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나머지 49개국이 국가별 영어 명칭의 알파벳 순으로 서명을 진행했다. 아르헨티나를 필두로 하여 베트남에 이르기까지 서명을 마친 후 일본 대표가 마지막 서명을 했다. 미국은 모든 서명국에게 새로운 만년필을 준비하고 각 대표들이 서명을 마친 후 그것을 기념으로 가져가도록했다. 요시다 수상은 자신이 가지고 간 만년필로 서명하고 기념 만년필을 받아왔다. 이렇게 하여 강화회의 일정이 모두 끝났다.
그날 오후 요시다 수상은 샌프란시스코 북부 작은 군부대로 자리를 옮겨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Dean Gooderham Acheson), 덜레스 등과 함께 미일안보조약 문서에 서명했다. 이 조약은 미일동맹 조약으로 불리는 것으로 미국에게 육해공군을 일본 열도와 그 부근에 배치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안보조약 체결을 통해 일본은 중립 국가나 비동맹 국가가 아니라 미국의 위성국으로서 전후 새로운 출발에서 첫 발을 내딛게 되었음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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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 진행과정 자료번호 : edeah.d_0006_0010_002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