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를 거쳐 진(秦)의 시황제 때 몽염이 흉노를 쳐서 하남 땅을 모두 차지함
그 이후로 백여 년이 지나주 001
진(晉)나라의 도공(悼公)
주 002이 위강(魏絳)
주 003을 사신으로 보내어 융적과 화친하자 융적[의 군장]이 진(晉)나라에 입조했다. 그 후 백여 년이 지나주 004
조양자(趙襄子)
주 005가 구주[산](句注山)
주 006을 넘어 대(代)
주 007[의 땅]을 격파하여 병합해서주 008호(胡)주 009와 맥(貉)주 010과 맞붙게 되었다. 그 이후 [조양자가] 이미주 011
한(韓)나라
주 012
이후에 진(秦)나라가 여섯 나라를 멸망시키고 시황제(始皇帝)가 몽염(蒙恬) 주 052에게 십만의 군사를 주어주 053북으로 흉노[胡]를 치게 해 하남(河南) 주 054땅을 모조리 손에 넣었다. 황하를 이용해 요새를 만들고 황하를 따라 44개의 현에 성을 쌓고 죄수[適]주 055로 [구성된 군사를] 이주시켜 [방어에] 충당하게 했다. 그리고 직도(直道)를 통하게 해 구원[군](九原郡) 주 056에서 운양[현](雲陽縣) 주 057에 이르렀는데,주 058험준한 산의 능선을 국경으로 삼고 골짜기를 이용해 참호로 삼고 수선할 수 있는 것을 손보아주 059 임조[현](臨洮縣) 주 060에서 요동[군](遼東郡)까지 만 여리에 이르렀다. 게다가 황하를 건너 양산(陽山) 주 061과 북가(北假) 주 062사이에 근거지를 두었다.
각주 012)
, 위(魏)나라
주 013韓 : 戰國七雄의 하나이다. 그의 조상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晉나라를 섬기던 유력한 世族으로 春秋時代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韓武子의 3대손 韓厥(獻子) 및 아들 韓起(宣子)가 함께 晉나라의 6卿 중 하나가 되었다. 그 이후 전453년에 韓康子가 趙氏, 魏氏와 함께 晉나라의 知伯을 내쫓고 영토를 삼분하였다. 그리고 전403년에 周나라의 威列王으로부터 諸侯로 승인받았다. 도읍은 平陽이었으나 이후 宜陽으로 옮겼다고, 전375년에 哀侯가 鄭國을 멸한 뒤 다시 新鄭으로 천도하였다. 전 355년 昭侯가 申不害를 재상으로 삼아 관료체제를 정비하고 富國强兵策을 취하여 중원의 강국으로 발전했다.
각주 013)
와 함께 지백(智伯)
주 014魏 : 戰國七雄의 하나이다. 그의 조상은 周나라 왕실과 동족인 畢公高인데, 그의 자손 畢萬이 晉나라의 獻公에게서 魏(山西省) 땅을 받고 大夫가 되었다. 이후 魏絳은 卿에 임명되어 晉나라 6경의 한 사람으로 정권을 쥐었다. 전453년 魏의 桓子가 韓, 趙와 더불어 실질적으로 晉나라를 3분하였다. 그리고 전403년에는 周나라 威烈王에게서 諸侯로 인정받았다. 魏는 安邑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지금의 山西省, 河北省, 山東省에 걸친 영역을 지배했다. 초대 文侯(斯)는 李悝, 魏成子, 翟璜 등을 재상으로 삼아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부국강병에 힘을 기울이고 농업생산력의 증진을 위해 관개사업을 크게 벌였다. 또한 명장 吳起를 등용해 秦나라의 河西 지방을 빼앗고 中山과 大梁(河南省 開封)을 차지했다. 그리고 楚나라를 공격하는 등 戰國 初期에 최강국으로 성장했다.
각주 014)
을 멸망시키고 진나라 땅을 나누어 갖게 되니주 015
조(趙)나라는 대(代)와 구주[산]의 북쪽을 차지하였고, 위나라는 하서(河西)
주 016와 상군(上郡)
주 017을 차지하게 되어 [모두] 융과 경계를 접하게 되었다. 그 후 의거(義渠)의 융이 성곽을 쌓고 스스로 지켰으나 진(秦)나라가 [이를] 점점 먹어 들어갔다. 혜왕(惠王)
주 018에 이르러서는 의거의 25개 성을 차지하였다.주 019
혜왕이 [또] 위(魏)나라까지 공격하여주 020
위나라의 서하[군](西河郡)
주 021과 상군을 모두 진나라로 집어넣었다.주 022
진나라
소왕(昭王)
주 023의 시기에 의거의 융왕과 모친 선태후(宣太后)
주 024가 사통하여 두 아들을 낳는 일이 생겼다. [그러나] 선태후는 감천궁(甘泉宮)주 025에서 의거 융왕을 속여 죽이고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 의거를 쳐서 죽여 버렸다.주 026이에 진(秦)나라가 농서[군]
주 027, 북지[군]
주 028, 상군을 차지하게 되었고 장성까지 쌓아 흉노[胡]를 막았다. 그리고 조나라
무령왕(武靈王)
주 029智伯 : 晉나라의 大夫로 이름은 瑤인데, 智襄子라고도 불렸다. 晉나라 내부에서 異姓 世族 간에 갈등이 심화되어 전497년에 智伯이 韓康子, 魏桓子, 趙襄子 등과 함께 定公을 받들고 范氏, 中行氏 등을 제거하였다. 이후 국정을 장악한 智伯이 范氏, 中行氏로부터 빼앗은 토지 배분을 두고 여타 世族과 갈등을 벌이는 과정에서 趙襄子를 공격했다. 하지만 趙襄子는 오히려 韓康子, 魏桓子와 결탁하여 智伯을 무찌르고 그의 후사를 단절시켰다. 이로 인해 전453년에 晉나라는 三分되었다. 趙襄子는 그를 원수로 여겨 그의 두개골에 칠을 해서 그릇으로 사용했다(주125) 참조).
각주 029)
은 또한 풍속을 바꾸어 호복(胡服)주 030을 입고 말을 타며 활 쏘는 것을 익혀 북쪽으로 임호와 누번을 격파한 다음 장성을 구축한주 031뒤 대(代)와 음산(陰山)[산맥]
주 032기슭으로부터 고궐(高闕)
주 033에 이르기까지 요새를 만들어 운중[군](雲中郡)
주 034, 안문[군](雁門郡)
주 035, 대군(代郡)
주 036을 두었다. 그 이후에 연나라에는 진개(秦開)
주 037라는 현명한 장군이 있어 흉노[胡]주 038에 볼모가 된 적이 있었는데, 흉노[胡]가 [그를] 매우 믿었다. [진개는 그때에 정세를 잘 파악해 두었다가] 귀국하자마자 동호를 격파해 도망가게 만들었다. 동호주 039는 이때 천 리나 물러났다. 형가(荊軻)와 함께 진나라의 왕 정(政)을 암살하러 떠났던 진무양(秦舞陽)이 바로 [진]개의 손자였다.주 040
연나라는 또한 장성을 조양(造陽)
주 041에서 양평(襄平)
주 042趙 武靈王(재위 전325 ~ 전299) : 이름은 趙雍이다. 戰國 중기에 강대해지기 시작한 秦나라가 遠交近攻策이라는 외교술을 통해 주변 나라들을 압박하자 趙나라가 이에 대응하였다. 趙나라의 원래 위치가 북방민족에 가까웠으므로 그들과 싸워 북방으로 국토를 확대시켜 갔고, 그들과의 교류 역시 빈번했다. 이런 과정에 武靈王은 군제를 개혁해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19년(전307) 북방민족 고유의 ‘胡服騎射’를 전격적으로 도입하였다. 武靈王은 주변 사람들의 반대를 물리치기 위해 본인 스스로 솔선수범하여 胡服으로 갈아입고 말을 타면서 활쏘기를 익혔다. 이것은 북방 유목민들의 탁월한 군사기술을 수입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는 이런 새로운 군사기술의 도입을 기초로 발전을 도모하였고, 이후 秦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왕위를 惠文王에게 물려주고 은퇴한 다음 스스로 主父라 불렀다. 그리고 군대를 지휘하여 이민족의 땅을 지나 秦나라를 공격하기도 했다(『史記』 권43 「趙世家」 : 1803 ~ 1812).
각주 042)
까지 쌓았고, 상곡[군](上谷郡)
주 043, 어양[군](漁陽郡)
주 044, 우북평[군](右北平郡)
주 045襄平 : 읍의 명칭으로 지금의 遼寧省 遼陽 북쪽 70리 정도 떨어진 곳이다. 燕나라 장성의 동쪽 기점이다. 현재의 赤峰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두 줄의 長城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이 장성은 赤峰 남쪽의 美麗河 공사에서 동서로 횡단하여 赤峰 북쪽에 있는 장성과 대체로 약 50㎞ 거리를 두고 평행하게 존재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昭盟 喀喇沁旗, 赤峰縣 남쪽, 建平縣 북쪽, 敖漢旗 중부에 분포되어 있으며 老哈河, 蹦河, 盟克河, 敎來河 등을 통과한다. 이 유적에서 발견된 魚骨盆, 明刀, 繩紋板瓦, 山字紋·獸紋 半瓦當 등의 출토를 통해 이 장성이 燕代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기 燕나라가 설치한 5군이 모두 이 장성 이내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고 보았다.
각주 045)
, 요서[군](遼西郡)
주 046, [그리고] 요동[군](遼東郡)
주 047을 설치해 흉노[胡]를 막았다. 이 무렵 의관(衣冠)과 속대(束帶)주 048를 할 줄 아는 [예제(禮制)의 문명국이] 전국[시대]에 일곱주 049이었는데, [그 중에서] 세 나라주 050가 흉노와 경계를 맞대고 있었다. 그 이후 조나라 장군 이목(李牧)
주 051이 [지키고 있는] 시기에는 흉노가 감히 조나라의 변경을 넘볼 수가 없었다.右北平 : 郡의 명칭으로 戰國時代 燕나라에서 설치하였다. 秦나라 때 治所는 無終縣(지금의 天津市 薊縣)이고, 前漢시대 治所를 平剛縣(지금의 遼寧省 凌源市 서남)으로 옮겼다. 하지만 燕代의 治所는 河北省 平泉, 遼寧省 凌源縣 安杖子村 古城, 內蒙古自治區 寧城縣 甸子鄕 黑城 古城, 寶坻 古城 등의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고고학적인 발굴 성과에 따르면, 黑城 내지는 寶坻 古城에서 燕나라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는 점에서 전자를 戰國時代, 그리고 후자를 말기의 治所로 보기도 한다. 관할 구역은 지금 河北省 承德, 天津市 薊縣 이동(長成 남부 灤河 유역과 그 이동은 제외), 六股河 이남지역이다. 後漢시대에는 治所가 土峎縣(지금의 河北省 豊潤縣 동남)으로 옮겼다. 현재는 점차 영역이 축소되어 長城 이남으로 경계가 바뀌었다.
이후에 진(秦)나라가 여섯 나라를 멸망시키고 시황제(始皇帝)가 몽염(蒙恬) 주 052에게 십만의 군사를 주어주 053북으로 흉노[胡]를 치게 해 하남(河南) 주 054땅을 모조리 손에 넣었다. 황하를 이용해 요새를 만들고 황하를 따라 44개의 현에 성을 쌓고 죄수[適]주 055로 [구성된 군사를] 이주시켜 [방어에] 충당하게 했다. 그리고 직도(直道)를 통하게 해 구원[군](九原郡) 주 056에서 운양[현](雲陽縣) 주 057에 이르렀는데,주 058험준한 산의 능선을 국경으로 삼고 골짜기를 이용해 참호로 삼고 수선할 수 있는 것을 손보아주 059 임조[현](臨洮縣) 주 060에서 요동[군](遼東郡)까지 만 여리에 이르렀다. 게다가 황하를 건너 양산(陽山) 주 061과 북가(北假) 주 062사이에 근거지를 두었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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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010)
- 각주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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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2)
韓 : 戰國七雄의 하나이다. 그의 조상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晉나라를 섬기던 유력한 世族으로 春秋時代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韓武子의 3대손 韓厥(獻子) 및 아들 韓起(宣子)가 함께 晉나라의 6卿 중 하나가 되었다. 그 이후 전453년에 韓康子가 趙氏, 魏氏와 함께 晉나라의 知伯을 내쫓고 영토를 삼분하였다. 그리고 전403년에 周나라의 威列王으로부터 諸侯로 승인받았다. 도읍은 平陽이었으나 이후 宜陽으로 옮겼다고, 전375년에 哀侯가 鄭國을 멸한 뒤 다시 新鄭으로 천도하였다. 전 355년 昭侯가 申不害를 재상으로 삼아 관료체제를 정비하고 富國强兵策을 취하여 중원의 강국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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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3)
魏 : 戰國七雄의 하나이다. 그의 조상은 周나라 왕실과 동족인 畢公高인데, 그의 자손 畢萬이 晉나라의 獻公에게서 魏(山西省) 땅을 받고 大夫가 되었다. 이후 魏絳은 卿에 임명되어 晉나라 6경의 한 사람으로 정권을 쥐었다. 전453년 魏의 桓子가 韓, 趙와 더불어 실질적으로 晉나라를 3분하였다. 그리고 전403년에는 周나라 威烈王에게서 諸侯로 인정받았다. 魏는 安邑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지금의 山西省, 河北省, 山東省에 걸친 영역을 지배했다. 초대 文侯(斯)는 李悝, 魏成子, 翟璜 등을 재상으로 삼아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부국강병에 힘을 기울이고 농업생산력의 증진을 위해 관개사업을 크게 벌였다. 또한 명장 吳起를 등용해 秦나라의 河西 지방을 빼앗고 中山과 大梁(河南省 開封)을 차지했다. 그리고 楚나라를 공격하는 등 戰國 初期에 최강국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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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4)
智伯 : 晉나라의 大夫로 이름은 瑤인데, 智襄子라고도 불렸다. 晉나라 내부에서 異姓 世族 간에 갈등이 심화되어 전497년에 智伯이 韓康子, 魏桓子, 趙襄子 등과 함께 定公을 받들고 范氏, 中行氏 등을 제거하였다. 이후 국정을 장악한 智伯이 范氏, 中行氏로부터 빼앗은 토지 배분을 두고 여타 世族과 갈등을 벌이는 과정에서 趙襄子를 공격했다. 하지만 趙襄子는 오히려 韓康子, 魏桓子와 결탁하여 智伯을 무찌르고 그의 후사를 단절시켰다. 이로 인해 전453년에 晉나라는 三分되었다. 趙襄子는 그를 원수로 여겨 그의 두개골에 칠을 해서 그릇으로 사용했다(주125) 참조).
- 각주 015)
- 각주 016)
- 각주 017)
- 각주 018)
- 각주 019)
- 각주 020)
- 각주 021)
- 각주 022)
- 각주 023)
- 각주 024)
- 각주 025)
- 각주 026)
- 각주 027)
- 각주 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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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29)
趙 武靈王(재위 전325 ~ 전299) : 이름은 趙雍이다. 戰國 중기에 강대해지기 시작한 秦나라가 遠交近攻策이라는 외교술을 통해 주변 나라들을 압박하자 趙나라가 이에 대응하였다. 趙나라의 원래 위치가 북방민족에 가까웠으므로 그들과 싸워 북방으로 국토를 확대시켜 갔고, 그들과의 교류 역시 빈번했다. 이런 과정에 武靈王은 군제를 개혁해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19년(전307) 북방민족 고유의 ‘胡服騎射’를 전격적으로 도입하였다. 武靈王은 주변 사람들의 반대를 물리치기 위해 본인 스스로 솔선수범하여 胡服으로 갈아입고 말을 타면서 활쏘기를 익혔다. 이것은 북방 유목민들의 탁월한 군사기술을 수입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는 이런 새로운 군사기술의 도입을 기초로 발전을 도모하였고, 이후 秦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왕위를 惠文王에게 물려주고 은퇴한 다음 스스로 主父라 불렀다. 그리고 군대를 지휘하여 이민족의 땅을 지나 秦나라를 공격하기도 했다(『史記』 권43 「趙世家」 : 1803 ~ 1812).
- 각주 030)
- 각주 031)
- 각주 032)
- 각주 033)
- 각주 034)
- 각주 035)
- 각주 036)
- 각주 037)
- 각주 038)
- 각주 039)
- 각주 040)
- 각주 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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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42)
襄平 : 읍의 명칭으로 지금의 遼寧省 遼陽 북쪽 70리 정도 떨어진 곳이다. 燕나라 장성의 동쪽 기점이다. 현재의 赤峰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두 줄의 長城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이 장성은 赤峰 남쪽의 美麗河 공사에서 동서로 횡단하여 赤峰 북쪽에 있는 장성과 대체로 약 50㎞ 거리를 두고 평행하게 존재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昭盟 喀喇沁旗, 赤峰縣 남쪽, 建平縣 북쪽, 敖漢旗 중부에 분포되어 있으며 老哈河, 蹦河, 盟克河, 敎來河 등을 통과한다. 이 유적에서 발견된 魚骨盆, 明刀, 繩紋板瓦, 山字紋·獸紋 半瓦當 등의 출토를 통해 이 장성이 燕代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기 燕나라가 설치한 5군이 모두 이 장성 이내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고 보았다.
- 각주 043)
- 각주 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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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45)
右北平 : 郡의 명칭으로 戰國時代 燕나라에서 설치하였다. 秦나라 때 治所는 無終縣(지금의 天津市 薊縣)이고, 前漢시대 治所를 平剛縣(지금의 遼寧省 凌源市 서남)으로 옮겼다. 하지만 燕代의 治所는 河北省 平泉, 遼寧省 凌源縣 安杖子村 古城, 內蒙古自治區 寧城縣 甸子鄕 黑城 古城, 寶坻 古城 등의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고고학적인 발굴 성과에 따르면, 黑城 내지는 寶坻 古城에서 燕나라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는 점에서 전자를 戰國時代, 그리고 후자를 말기의 治所로 보기도 한다. 관할 구역은 지금 河北省 承德, 天津市 薊縣 이동(長成 남부 灤河 유역과 그 이동은 제외), 六股河 이남지역이다. 後漢시대에는 治所가 土峎縣(지금의 河北省 豊潤縣 동남)으로 옮겼다. 현재는 점차 영역이 축소되어 長城 이남으로 경계가 바뀌었다.
- 각주 046)
- 각주 047)
- 각주 048)
- 각주 049)
- 각주 050)
- 각주 051)
- 각주 052)
- 각주 053)
- 각주 054)
- 각주 055)
- 각주 056)
- 각주 057)
- 각주 058)
- 각주 059)
- 각주 060)
- 각주 061)
- 각주 062)
색인어
- 이름
- 도공(悼公), 위강(魏絳), 조양자(趙襄子), 조양자, 지백(智伯), 혜왕(惠王), 혜왕, 소왕(昭王), 선태후(宣太后), 선태후, 무령왕(武靈王), 진개(秦開), 진개, 형가(荊軻), 진무양(秦舞陽), [진]개, 이목(李牧), 시황제(始皇帝), 몽염(蒙恬)
- 지명
- 진(晉)나라, 진(晉)나라, 구주[산](句注山), 대(代), 한(韓)나라, 위(魏)나라, 진나라, 조(趙)나라, 대(代), 구주[산], 위나라, 하서(河西), 상군(上郡), 진(秦)나라, 위(魏), 위나라, 서하[군](西河郡), 상군, 진나라, 진나라, 진(秦)나라, 농서[군], 북지[군], 상군, 조나라, 대(代), 음산(陰山)[산맥], 고궐(高闕), 운중[군](雲中郡), 안문[군](雁門郡), 대군(代郡), 연나라, 진나라, 연나라, 조양(造陽), 양평(襄平), 상곡[군](上谷郡), 어양[군](漁陽郡), 우북평[군](右北平郡), 요서[군](遼西郡), 요동[군](遼東郡), 조나라, 조나라, 진(秦)나라, 하남(河南), 황하, 황하, 구원[군](九原郡), 운양[현](雲陽縣), 임조[현](臨洮縣), 요동[군](遼東郡), 황하, 양산(陽山), 북가(北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