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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소장 근대한국문서

역사적 사실들을 보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개 전쟁 발발의 진정한 원인을 그릇되게 해석하고 있다. 서서히, 때로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각 전쟁에 대한 외교적인 사전 준비 사항이 모두 상세히 밝혀지며, 그때가 되어야만 전쟁의 진정한 원인들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때, 그 원인들은 신문이나 여론에서 접했거나 동시대인들이 관찰한 그런 떠도는 설명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일반 보도용으로 발표되는 왕복 외교문서로는 충돌하고 있는 이해관계의 본질을 전혀 해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문서는 사태의 겉모습만 보여줌으로써 현안의 주변만 맴돌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현안이라는 것은 선전포고에 가장 적당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 어떤 한 측면을 가지고 대개는 의식적으로 첨예화시킨 것이다.
이는 갖가지 대규모 전쟁을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다.
가령, 크림전쟁에 대해 동시대인들은 분명 성지(聖地) 때문에 생긴 분쟁에서 기인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영국 정부 내의 한 파벌(캐닝,주 001
각주 001)
스트라트포드 캐닝(Stratford Canning, 1786~1880). 영국의 외교관이자 정치가. 오토만제국 주재 영국 대사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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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머스턴주 002
각주 002)
헨리 존 템플, 파머스턴 자작 3세(Henry John Temple, 3rd Viscount Palmerston, 1784~1865). 영국의 정치가. 외무장관과 총리를 역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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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라자레프주 003
각주 003)
미하일 표도로비치 라자레프(Михаил Федорович Лазарев, 1788~1851). 러시아 해군제독으로 세바스토폴(Севастополь)과 니콜라예프니콜라옙스크(Николаев) 주지사를 역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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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창설한 흑해함대를 영국의 국익에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하여 이 분쟁을 이용한 것뿐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캐닝은 터키 술탄에게 영국의 지원을 약속함으로써(이에 대해 그는 심지어 영국 정부의 승인을 받지도 않았다) 외교 상황을 인위적으로 악화시켰던 것이다. 나폴레옹 3세에게는 전쟁을 시작한 나름의 이유가 있었지만, 자신이 주요 정책을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실수였다. 사실상 그는 영국 외교술의 도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꼭 마찬가지로 보불전쟁의 원인도 당시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이해하였다. 비스마르크가 자기에게 온 엠스급보(Эмская депеша)주 004
각주 004)
프로이센은 1870년 7월 프로이센 왕실과 인척관계에 있던 레오폴트 대공에게 스페인 왕위를 넘겨주려고 시도하였다. 이에 프랑스 대사는 엠스(또는 바트엠스) 온천에서 휴양중인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를 방문하여 레오폴트 대공의 왕위 포기를 공식적으로 다짐받으려 하였다. 빌헬름 1세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그 전말을 비스마르크에게 급보로 알렸고,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격분시켜 전쟁을 도발할 목적으로 7월 14일 급보를 자극적으로 조작하여 발표하였고 이로 인해 보불전쟁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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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이용해 의도적으로 외교 분쟁을 악화시켜 프랑스가 프러시아에게 전쟁을 선포하도록 만들려고 했다는 사실이 전쟁이 끝나고 이미 한참이 지나서야 알려진 것이다.
최근에 우리가 터키와 벌인 전쟁의 발발 원인은 아직까지 아주 정확하게 해명되지는 않았다. 아마도 이 전쟁은 캐닝과 파머스턴의 유훈을 따른 디스라엘리주 005
각주 005)
벤자민 디스라엘리(Benjamin Disraeli, 1804~1881). 영국 보수당의 정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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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사전 준비를 했을 것이다. 남아 있는 사실은 이런 것이다. 즉, 1876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 초대를 한 것은 영국이었다는 것, 그리고 바로 이 회담은 오스만 제국 정부가 열강들의 요구에 공개적으로 저항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전환을 의미했는데, 이 열강들 중 러시아는 당시 발칸 민족들에 대해 차지하고 있던 위상 때문에 자연스럽게 전면에 나섰다가 [열강들의] 공동 제안에 대한 터키의 오만한 답변으로 남다른 정신적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는 것 등이다.
당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일본이 우리에게 전쟁을 선포한 진정한 원인은 전혀 모른다. 다만, 여러 열강은 일본이 지속적으로 전쟁을 준비한 일과 영국이 9년에 걸쳐 일본의 정책에 조직적 지지를 보낸 일을 자국의 실질적인 국익을 위해 정당화해 주었을 수 있으므로, 우리는 일본과 그 동맹국인 영국의 관점에 서서 열강들의 그 실질적인 국익이 무엇인지 찾아내면서 추측한 것만을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좀 더 심오한 원인들을 탐구하기 전에 먼저 신문·잡지에서 이미 지적한 적이 있거나 또는 여론에서 지금도 지적하고 있는 원인을 검토해야 한다. 즉, 일본이 지나치게 높은 자국의 인구밀도 때문에 한국에서 출구를 찾아야만 했던 상황, 우리의 만주철도 부설과 여순항 점령, 극동총독부 설치, 러시아 삼림조합 활동주 006
각주 006)
러시아 삼림조합(русское лесопромышленное товарищество)은 압록 강변 삼림이권 사업으로 원래 개인의 이권사업이었던 것을 베조브라조프(А.М. Безовразов) 주도 하에 러시아 정부가 인수하여 민간기업의 형태를 띠고 활동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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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전반적으로 우리의 공격적인 극동정책 등이 그것이다.
또한, 전쟁의 원인에 대한 다음의 설명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설명은 전쟁 초반에 이른바 영국의 청서(靑書)와 일본의 백서(白書)에 게재된 영국과 일본의 왕복 외교문서에 나와 있는 것으로, 즉 러시아는 중국과 1902년 3월 26일 조약을 체결한 후에도 1904년 9월 26일까지 만주에서 완전히 철군한다는 약속을 정해진 기한 내에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마치 만주를 무기한 장악하려는 듯한 의도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들 중 단 한 가지도 전쟁의 실제 원인을 전혀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음의 단순한 이유를 통해 쉽게 밝혀진다.
전쟁 경험 자체로 이미 현재 잘 드러났듯이, 일본은 오랜 시간 면밀하게 조직적으로 전쟁을 준비해 왔다. 대체 언제부터 전쟁 준비가 시작되었는가? 그것은 1896년 일본 의회의 결의로 승인된 10개년 계획에 따라 진행되어 1906년경 끝났음이 확인되었다. 중국의 전쟁배상금 3억4천1백만 엔 중에서 1896년경 남아 있던 것은 2억6천1백만 엔이었는데, 1896년의 계획에 따라 해군을 강화하는 데 2억2천6백5십만 엔, 육군을 강화하는 데 8천9백만 엔, 총 3억1천5백5십만 엔이 책정되었다. 이 자금으로 일본 육군은 틀림없이 청일전쟁 시기의 규모에 비해 두 배, 일본 해군은 세 배가 증강되었다. 분명한 것은, 중국의 허약함이 증명된 후에는 그와 같은 일본의 전투력 증강이 새로운 공격 전쟁 같은 다른 의미를 갖지 않았고 오직 러시아만이 유일한 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러시아와 전쟁을 하게 된 원인은 바로 시모노세키 조약의 파기였다. 때문에 일본에게는 여순항 점령이 어떤 특별하고도 엄청난 중요성을 지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만일 이것이 일본의 실질적인 국익을 위해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줄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을 통해 일본이 현재의 전쟁을 일으킨 진정한 원인도 밝혀지게 될 것이다.
현재 전쟁의 발발 원인에 대해 위에서 설명한 내용들을 검토해 보자.
 

1. 일본이 자국의 과잉 인구를 한국으로 이주시켜야만 하는 상황

우리가 일본의 한국 식민화를 아무리 방해하고 싶어도 우리에게는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 일본이 완전히 자유롭게 식민화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일본과 한국의 지리적 근접성과 한국 정부의 허약함 때문이다. 사실 일본은 이런 측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기도 했다. 한국에서 일본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대단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는 다음의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일본은 가치 없는 니켈 주화를 한국에 강제로 유통시켰고, 서울-부산 간 철도 부설 이권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전신선과 심지어 무장한 소규모 부대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전쟁 초반의 경험은 한국이 일본에게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무 조약(문서)을 통해서든 일본의 한국 식민화를 방해할 어떤 현실적인 장애물을 만들 수 있었다고 진지하게 문제제기를 할 수 있을까? 사실은 정반대였다. 러일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 측은, 조약상으로 일본에게 한국에서의 군사행동의 자유를 완전히 허용한다고 약속할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다고 밝혔던 것이다(백서, 1903년 12월 12일자, 문서 №34). 다만 우리는 한국 북부와 관련해 유일하게 단서를 달았다. 그것은 식민화의 자유 문제가 아니라 단지 중립지대(39도 선까지)를 설정하자는 것으로, 일본도 러시아도 상대방의 동의 없이는 자국군을 들여놓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2. 러시아 삼림조합의 활동

러시아 삼림조합은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활동을 확장하였고, 정식으로 법에 따라 활동하면서 일본이 우리에게 위험스러운 전략적 도로를 한국 북부에 건설하는 것을 저지하는 국가적 차원의 과제를 안게 됐다. 전략적 도로 중 특히 우리에게 위험스러운 것은 아마도 압록강에서부터 모아산(Маооршан)주 007
각주 007)
帽兒山. 마오얼산이라고도 함.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 자치구에 위치한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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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하얼빈을 통과하는 도로일 것이다.
이 활동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공격적 성격을 부여한 것과 관련해 말하자면, 이 활동이 아주 조심스럽게 진행된 것처럼 그 이야기도 아주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1898년 획득한 삼림이권은 1902년까지 전혀 이용되지 않다가 1903년 6월쯤 아주 소박한 규모로 행사되었는데, 정확한 조사에 따르면 고무라주 008
각주 008)
고무라 슈타로(小村壽太郞). 일본 외무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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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이 이 일로 근심을 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손수 인정할 만큼 작은 규모였다(청서, 문서 №134).
만일 1902년 3월 26일 조약이 일본과 영국이 우리에게 우호적이던 시기에 체결된, 우리에게 완전히 자유로운 조약이었다면, 이 열강들이 우리에게 보인 적대적 태도나 이후 전반적으로 일어난 모든 분규가 정말로 우리가 조약을 이행하지 않은 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영국 청서의 모든 문서는 [만주 철군] 기한이 극히 짧게 정해진 3월 26일 조약 자체도 일본과 영국이 1900년 말부터 압력을 가해 우리가 서명을 했다고 아주 확고하게 증언하고 있다(신력 1901년 1월 3일, 문서 №2). 조약 체결 후 우리는 첫 번째 기한 안에 양심적으로 철군을 했고, 이 사실은 중국 정부도 공식 확인해 준 바이다(문서 №66). 그런데도 영국과 일본은 우리의 이익을 차단할 목적으로 중국 정부가 우리를 방해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계속해서 외교적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우리에게는 자연스럽게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를 좀 더 빨리 내쫓고 그 빈 자리를 자신들이 차지하는 것 아닐까? 청서에는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문서가 있는데, 우리의 의심이 근거가 있음을 전적으로 인정해 줄 만한 내용이다(문서 №111). 만일 실제로 일본이 우리의 철군에 발맞춰 만주로 뻗어 나갔다면(전쟁 경험을 통해 일본인들의 성격을 알게 된 지금으로서는 이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극동에서의 우리의 모든 입지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태평양의 모든 점령지도 잃었을 것이다. 여순항은 봉쇄 한 번으로 점령될 게 뻔하므로, 육지로부터 수송되는 식료품 차단 임무를 띤 일개 사단이면 충분할 것이다. 우리가 아직 아무르 강에 있었다면, 일본은 하얼빈에 나타나 우리 철도를 장악한 후 [러시아]제국의 나머지 영토에서 블라디보스토크와 여순항을 동시에 떼어놓았을 것이다. 때문에 당연히 우리는 나머지 부대가 만주에서 최종적으로 철수하기 전에 중국에 대해 만주에서의 우리 이익이 보호받도록 보장해 줄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만일 영국이 양심적으로 러시아 군의 신속하고 최종적인 만주 철군에만 뜻을 두었다면, 우리가 보장을 받는 데 어떤 식으로든 훼방을 놓을 생각은 안 했을 것 같다. 우리가 받을 보장이라는 것이 본질상 영국이 아닌 일본을 대적하기 위한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게다가, 그 보장이 무엇이었든 간에 어쨌든 외교적 압력만으로 만주의 나머지 지역에서 [러시아]군을 철수시켰다면 그것은 이미 대영제국 외교의 탁월한 성과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와 중국의 협상에 관심을 갖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영국으로서는 참다운 계산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청서가 확고하게 증언하고 있는바, 영국은 우리가 보장을 받는 것에 훼방을 놓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모든 상황은 확실히 꼬여만 갔다. 이렇듯 대영제국의 외교는 영국의 압력 하에 체결된 1902년 3월 26일 조약을 우리가 이행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 영국이 그렇게 미숙하게 행동한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지만, 모든 정황으로 볼 때 여기서 [영국이] 진정으로 기대한 것은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를 첨예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일본의 이해관계에 대해 말하자면, 만주에서 우리 군이 완전히 철수한 후에는 만주에서 우리가 차지하고 있던 위상 때문에 생긴 위험이 소위 한국의 독립성, 즉 한국에서의 일본의 원래 위상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이 우리에게 만주에서의 신속한 철군을 서둘러 강요한 것은 자국에 가장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전쟁을 시작하려는 야욕 때문이라고 아주 간단히 설명된다. 일본은 우리의 1898년 함대 건설 계획이 끝나게 되어 있는 1905년까지 기다릴 생각은 당연히 없었을 것이란 얘기다. 바로 이 때문에 일본은 1896년의 무장계획을 1906년이 아니라 2년 앞당겨 서둘러 끝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전쟁 전의 정황이 이제 모두 윤곽을 드러낸 한에서 볼 때 1902년 3월 26일 조약은 전쟁이 도래하는 데 다음과 같은 역할을 했다. 즉, 우리가 조약 결정사항의 (3부 가운데) 제1부를 이행한 것은 일본이 선전포고를 결심하는 데 도움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상실한 우위를 되찾으려는(제2차 묵덴 점령) 목적으로 나머지 2, 3부를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일본에게 우리의 남만주 철군 이후 유리해진 상황을 잃지 않으려면 지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측에는 유리한 면이 남아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단지 2차, 3차 시한의 철군을 이행하지 않은 덕분으로 일본의 공격은 묵덴 앞에서 멈췄고, 우리는 적군의 3분의 1이 여순항으로 차출되도록 그곳을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4.주 009
각주 009)
원문에 3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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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항 점령

1898년 우리의 여순항 점령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보면, 중국의 허약함이 이미 입증된 데다가, 우리가 일본과 전쟁을 할 경우 중국은 여순항과 만주에서 중립을 지킬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아래에도 나오겠지만, 만일 여순항을 차지하는 것이 일본에게 본질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면, 우리가 그곳을 미리 점령한 것은 일본의 대러 전쟁 수행을 어렵게 할 뿐이지 결코 전쟁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5. 만주철도 부설

우리는 만주에 철도를 부설함으로써 블라디보스토크와 여순항 모두에서 입지가 강화되었다. 이 철도가 없었다면, 비록 우리는 여순항에 최고의 요새가 있을지라도 그곳을 점령한 것이 전혀 쓸모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필시 전쟁이 블라디보스토크의 포위에서 시작될 정도로 지금 일본의 군사적 우위가 뚜렷해졌을 것이며, 태평양 연안의 우리 영토도 보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부 지선의 부설로 우리의 방어선은 남쪽으로 전진하였는데, 이는 당연히 우리에게 이로운 일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1) 일본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장악한 다음 동해주 010
각주 010)
원문 표현대로 하면 ‘일본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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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을 자신들의 내부 기지로 사용하는 것을 저지하였고, 2) 적이 공격해올 경우 파괴될 수밖에 없는 연해주의 우리 정착촌을 그 공격으로부터 지켜냈던 것이다. 철도 교통은 양날의 칼이 된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벌써 전쟁의 원인을 우리의 철도 부설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만일 일본이 우리가 하얼빈에 집결하는 것보다 앞서서 블라디보스토크를 [러시아]제국의 나머지 영토와 분리시키는 데 성공했다면, 바로 이 철도는 그들이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일본 측에서도 부산에서 서울까지 한국의 철도 건설에 착수한 상태였고, 러일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한국의 철도와 동청 철도를 연결시키는 데 우리 측의 방해를 받지 않았다(백서, 문서 №34).
 

6. 극동총독부 설치

총독부가 설치된 것은 일본 정부가 우리에게 협상에 임할 것을 제안한 후였다. 협상은 단지 분쟁을 일으키고 군사행동을 시작할 형식적 구실을 만들려는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는 중대한 전쟁의 문제가 우리의 최후 답변이 몇 시간 지체된 것에 좌우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합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본은 우리가 체계적인 양보의 뜻을 보이자 답변 내용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위에 열거한 여섯 가지 정황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내적인 의미에서나 특히 외적인 상황에서나 현재의 대규모 전쟁에 대한 실제 원인을 합리적으로 설명해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각 상황은 모두 일본이 이미 우리와의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한 후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의 실제 원인은 과거 청일전쟁 규모에 비해 육군은 두 배, 해군은 세 배를 증강시키는 [일본의] 1896년 의회 결의가 있기 전 시기에서 찾아야만 한다. 그 이유는 여순항이 일본에서 갖는 의미를 보면 완전히 해명된다.

  • 각주 001)
    스트라트포드 캐닝(Stratford Canning, 1786~1880). 영국의 외교관이자 정치가. 오토만제국 주재 영국 대사 역임. 바로가기
  • 각주 002)
    헨리 존 템플, 파머스턴 자작 3세(Henry John Temple, 3rd Viscount Palmerston, 1784~1865). 영국의 정치가. 외무장관과 총리를 역임함.  바로가기
  • 각주 003)
    미하일 표도로비치 라자레프(Михаил Федорович Лазарев, 1788~1851). 러시아 해군제독으로 세바스토폴(Севастополь)과 니콜라예프니콜라옙스크(Николаев) 주지사를 역임함. 바로가기
  • 각주 004)
    프로이센은 1870년 7월 프로이센 왕실과 인척관계에 있던 레오폴트 대공에게 스페인 왕위를 넘겨주려고 시도하였다. 이에 프랑스 대사는 엠스(또는 바트엠스) 온천에서 휴양중인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를 방문하여 레오폴트 대공의 왕위 포기를 공식적으로 다짐받으려 하였다. 빌헬름 1세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그 전말을 비스마르크에게 급보로 알렸고,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격분시켜 전쟁을 도발할 목적으로 7월 14일 급보를 자극적으로 조작하여 발표하였고 이로 인해 보불전쟁이 일어났다.  바로가기
  • 각주 005)
    벤자민 디스라엘리(Benjamin Disraeli, 1804~1881). 영국 보수당의 정치가.  바로가기
  • 각주 006)
    러시아 삼림조합(русское лесопромышленное товарищество)은 압록 강변 삼림이권 사업으로 원래 개인의 이권사업이었던 것을 베조브라조프(А.М. Безовразов) 주도 하에 러시아 정부가 인수하여 민간기업의 형태를 띠고 활동하였음. 바로가기
  • 각주 007)
    帽兒山. 마오얼산이라고도 함.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 자치구에 위치한 산. 바로가기
  • 각주 008)
    고무라 슈타로(小村壽太郞). 일본 외무대신.  바로가기
  • 각주 009)
    원문에 3이 없음.  바로가기
  • 각주 010)
    원문 표현대로 하면 ‘일본해’임.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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