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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판상대숙녜(坂上大宿禰; 사카노우헤노오스쿠네)

#한(漢)
판상대숙녜(坂上大宿禰; 사카노우헤노오스쿠네)
 후한(後漢) 영제(靈帝)의 아들 연왕(延王)으로부터 나왔다.
 
【주석】
1. 판상대숙녜(坂上大宿禰)
판상(坂上)의 씨명은 『만엽집(萬葉集)』 권4 「대반전촌가지대양증매판상대양가사수(大伴田村家之大孃贈妹坂上大孃歌四首)」(759)에 대반숙녜마려 어머니 거주지인 판상리(坂上里)가 보인다. 이 판상대숙녜의 씨명은 바로 판상리라는 지명에서 유래한다.
판상대숙녜(坂上大宿禰)의 옛 성은 한직(漢直), 동한직(東漢直), 왜한직(倭漢直), 동한판상직(東漢坂上直), 판상직(坂上直) 등으로 나오고, 후에 연(連), 기촌(忌寸), 대기촌(大忌寸) 등으로 개성하였다. 『일본서기』 웅략기(雄略紀) 16년(472) 10월조에 한사주(漢使主) 등이 직(直) 성을 받았다는 전승이 있다. 〈판상계도〉에 인용된 『신찬성씨록』 일문에도 아지사주(阿智使主)와 아들 도가사주(都加使主)가 웅략의 시대에 사주(使主)에서 직(直)으로 개성하였고, 그 자손들의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일본서기』 천무기(天武紀)11년(682) 5월조에는 왜한직(倭漢直) 등이 연(連) 성을 받았다고 한다. 『신찬성씨록』 일문에도 갑유(甲由)는 판상직(坂上直) 등의 조상이고, 그의 후손인 판상웅모(坂上熊毛)등은 천무 10년에 직(直)에서 연(連)으로 개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한직(倭漢直)은 천무 14년(685) 6월에 기촌(忌寸)으로 개성하였다. 『신찬성씨록』 일문에도 궁속(弓束)의 후손 태양(犬養)이 천무 14년에 거족적으로 연(連)에서 기촌(忌寸, 伊美吉)으로 개성했다고 한다. 『속일본기』 천평보자 8년(764) 9월조에는 판상기촌예전마려(坂上忌寸苅田麻呂)가 판상대기촌(坂上大忌寸)으로 개성한 사실이 있고, 동 연력(延曆) 5년(786) 정월 무술조에 실린 그의 훙전에도 보인다.
판상대숙녜씨(坂上大宿禰氏)의 일족으로 동한직, 왜한직을 칭하는 인물로서는 『일본서기』 에 동한직국(東漢直掬, 웅략기 7년 시세조), 동한씨직강아(東漢氏直糠兒, 흠명기 31년4월 是月條), 동한판상직자마려(東漢坂上直子麻呂, 흠명기 31년 7월 是月條), 왜한직복인(倭漢直福因, 추고기 16년 9월 신사조), 왜한직비라부(倭漢直比羅夫, 대화 원년 7월 경진조), 동한장직아리마(東漢長直阿利麻, 제명기 5년 7월 무인조 「伊吉連博德書」), 동한초직족도(東漢草直足島, 제명기 7년 5월 정사조 「伊吉連博德書」) 등이 있다. 또 『영락유문(寧樂遺文)』(下-872) 추고천황(推古天皇) 30년 2월부 「천수국수장(天壽國繡帳)」 과 동 「상궁성덕법왕제설(上宮聖德法王諸說)」 에 동한말현(東漢末賢), 『평안유문(平安遺文)』 (5-2038)에 판상대직구자(坂上大直駒子) 등이 나온다.
『일본서기』 대화(大化) 3년(654) 시세조(是歲條)에 “공인(工人) 대산위(大山位) 왜한직황전정비라부(倭漢直荒田井比羅夫)는 수로를 잘못 파서 난파의 물을 끌어들여 다시 파게 되어 백성을 힘들게 하였다. 그래서 상소하여 간언하는 사람이 있었다. 천황이 ‘경솔하게 비라부의 잘못된 말을 듣고 잘못 수로를 판 것은 짐의 과실이다’라고 하여 그날 요역은 중지되었다”라고 한다. 동 백치(白雉) 5년(647) 10월조에는 “궁궐 지을 터에 포함되어 무덤이 파헤쳐진 사람과 이주하게 된 사람에게 물건을 각기 차등 있게 주었다. 곧 장작대장(將作大匠) 황전정직비라부(荒田井直比羅夫)를 보내 궁궐의 경계에 표를 세웠다”라고 하여 황전정직비라부의 이름이 보인다. 동 제명기 7년 5월 정사조에는 동한초직족도(東漢草直足島)에 대해 「이길련박덕서(伊吉連博德書)」 를 인용하여 “지흥(智興)의 시종 동한초직족도의 참소로 당 조정으로부터 은혜로운 칙을 받지 못하였다. 사신들의 원망이 상천의 신에게 통하여 족도는 벼락에 맞아 죽었다”라고 하여 견당사의 기록에서 그의 행적이 보인다.
판상씨 일족으로 훙전(薨傳), 졸전(卒傳)을 남긴 인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속일본기』 문무(文武) 3년(699) 5월 신유조에서는 판상기촌노(坂上忌寸老)에 대하여 “훈공에 대해서 논하자면, 전대로부터 시작되었고, 공을 세운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은 대대로 중요한 일이었다. 생각하건대 이것은 오로지 남자의 절조를 밝히는 일로서 후대까지 불후의 이름을 남기는 것이다. 판상기촌노 그대는 임신년 싸움에 종군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국가의 위급한 상황에 몸을 바쳐 죽음에 이르는 위험한 곳에 나아가 국가의 어려움에 맞섰다. 그러나 고위 관위와 봉록을 더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고인이 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의 혼령을 위로하고 명복을 빌려고 한다. 직광일의 위를 추층하고 아울러 물품을 내린다”라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임신의 난의 공로를 칭송하고 포상하고 있다.
『속일본기』 영귀 2년(716) 4월 계축조에 임신년의 공신 대금하 판상직웅모(坂上直熊毛)의 아들에게 정6위하의 관위와 전지를 내렸다고 한다. 또 동 천평보자(天平寶字) 원년(757) 12월 임자조의 태정관주(太政官奏)에는 역대 공신들에게 포상하는데, 임신의 난의 공신인 판상직웅모의 후손에게 공전(功田) 6정을 내리고 2대 상속을 명하고 있다. 특히 임신의 난이 80여 년이 지난 시점인데 후손들에게 포상하는 것을 보면, 당시 천무계 왕권의 정통성이 얼마나 강조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속일본기』 천평보자 8년(764) 12월 을해조의 판상기촌견양(坂上忌寸犬養) 졸전(卒傳)에 그는 뛰어난 무예로 성무천황(聖武天皇)의 총애를 받아 봉사했는데, 성무의 사망 시에 산릉지기를 자청하여 효겸천황(孝謙天皇)의 마음을 사서 조동대사(造東大寺) 장관과 식봉 100호를 받았고 한다. 그는 파마수(播磨守), 대화수(大和守) 등 경력을 거쳐 8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판상기촌견양(坂上忌寸犬養)의 아들 판상대숙녜예전마려(坂上大宿禰苅田麻呂)에 대해서는 『속일본기』 연력(延曆) 5년(786) 정월 무술조에서 좌경대부(左京大夫) 종3위 겸 우위사독(右衛士督)·하총수(下總守) 판상대숙녜예전마려가 죽었고, 정5위상 판상기촌견양의 아들이라는 계보를 밝히고 있다. 그는 천평보자 8년(764)에 혜미중마려(惠美仲麻呂)의 반란 시에 세운 공으로 종4위하, 훈2등과 대기촌(大忌寸)의 성을 받았다. 그 후 육오진수장군(陸奧鎭守將軍)을 비롯하여 단파수(丹波守), 이예수(伊豫守) 등을 역임하고 정4위하에 제수되었다. 또 그의 가문은 무예에 뛰어나 대대로 궁중을 호위하는 직에서 조정에 봉사해 왔고, 환무천황(桓武天皇)의 총애를 받아 별도로 봉호 50호를 지급받았다. 연력 4년(785)에는 종3위와 좌경대부에 보임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후기』 홍인(弘仁) 2년(811) 5월 병진조에 기록된 판상대숙녜전촌마려(坂上大宿禰田村麻呂) 훙전에는 그를 판상기촌견양의 손자이자 판상대숙녜예전마려의 아들이고, 선조는 후한 영제의 증손인 아지사주라고 특기하고 있다. 그는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어 에미시[蝦夷] 정토에 대한 공로로 종3위를 받고 공경의 반열인 대납언에 올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판상대숙녜광야(坂上大宿禰廣野)에 대해서는 그의 졸전이 실려 있는 『유취국사(類聚國史)』 천장(天長) 5년(828) 윤3월 갑오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병위독(右兵衛督) 종4위하 훈7등 판상대숙녜광야가 죽었다. 대납언 종2위 판상대숙녜전촌마려의 2자이다. 홍인(弘仁) 초에 종5위하 우병위좌(右兵衛佐)에 임명되었다. 이어 우근위소장(右近衛少將)으로 전직하였다. 아버지 상을 당해 파직하자 다시 우위문좌(右衛門佐)에 임명되었고 이세수(伊勢守)를 겸직하였다. 출오수(陸奧守)에 나아갔고, 우병위독은 만기까지 채웠다. 소년 시절부터 무용이 뛰어나다는 소리를 들었다. 다른 재주는 없었으나 강직하고 절조가 있어 칭찬할 만하였다. 음주가 과도하여 발병해 죽었다. 나이 42세였다”라고 하여 그의 관력과 품행 등을 기록하고 있다.
판상대숙녜전촌마려의 동생이자 판상대숙녜응주(坂上大宿禰鷹主)의 아들인 판상대숙녜정수(坂上大宿禰貞守)에 대해 『일본삼대실록』 정관(貞觀) 18년(876) 9월 계미조의 졸전에는 전 단파수(丹波守) 종5위상 판상대숙녜정수의 사망 사실을 전하고, 승화(承和)원년(834)에 우마조(右馬助), 동 5년에 좌마조(左馬助), 인수(仁壽) 2년(852)에 단마개(但馬介)가 되고, 인수 3년에 종5위상에 올랐다고 한다. 이어 제형(齊衡) 2년(855)에 단파권개(丹波權介), 천안(天安) 2년(858)에 우마두(右馬頭), 동 3년에 미농권수(美濃權守), 정관 8년(866)에 단파권수(丹波權守)에 보임되었고, 그의 유골은 태어난 곳에 묻었으며 졸년 시의 나이는 72세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삼대실록』 원경(元慶) 5년(881) 11월 계축조에 실려 있는 판상대숙녜농수(坂上大宿禰瀧守)의 졸전에는 정4위하 행대화수(行大和守) 판상대숙녜농수의 사망과 그의 가계 및 관력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우경인으로 종4위하 판상대숙녜응양(坂上大宿禰鷹養)의 손이며 정6위상 판상대숙녜씨승(坂上大宿禰氏勝)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무예를 좋아하고 궁마를 익혔으며 활을 잘 쏘았고, 그의 가문은 대대로 무장의 집안으로 가풍이 추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좌근위장조(左近衛將曹), 장감(將監), 좌마조(左馬助), 백기개(伯耆介), 준하개(駿河介), 산성개(山城介), 우병위권좌(右兵衛權佐), 우근위소좌(右近衛少佐)가 되고, 정관 11년 12월에 대재소이(大宰少貳)가 되었다고 한다. 그해에 신라 해적이 대재부의 공면(貢綿)을 약탈하자 조정에서 그를 보내 후방을 방어하였고, 대재부 경비를 겸임시켰다. 그는 정관 16년에 좌근위권소장(左近衛權少將)을 거쳐 동 18년에 정5위하, 동 19년에 근강개(近江介), 원경 3년(879)에 정4위하, 동 4년에 대화수(大和守)의 직에 올랐다. 졸년 시의 나이는 57세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판상씨(坂上氏) 가문은 누대에 걸쳐 정사의 훙전과 졸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씨족의 번영을 읽을 수가 있다.
『일본후기』 서문에는 판상기촌금계(坂上忌寸今繼)에 대해 종5위하 훈7등 행대외기(行大外記) 겸 기전박사(紀傳博士) 판상기촌금계(坂上忌寸今繼)라고 하여 『일본후기』 편찬자의 1인으로 이름이 나온다. 한편 『일본삼대실록』 정관 4년(862) 7월 을미조에는 “좌경인전월후개(越後介) 외종5위하 판상이미길능문(坂上伊美吉能文) 대학소윤(大學少允)종6위상 판상이미길사문(坂上伊美吉斯文) 등 9인은 판상숙녜(坂上宿禰) 성을받았다. 후한 효령왕(孝靈皇)의 4세손 아지사주(阿智使主)의 후예이고, 판상대숙녜(坂上大宿禰)와 동조(同祖)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2. 후한영제(後漢靈帝)
중국 후한의 제12대 황제로, 재위 기간은 168~189년까지이다. 영제 시대는 환관 중용과 과중한 부역으로 민심이 이반되었다. 황건적의 난으로 황제권이 쇠퇴하고, 지방 호족 세력의 대두로 삼국 시대의 전 단계가 만들어졌다. 황건적의 난의 후유증, 권력 암투와 중병으로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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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상대숙녜(坂上大宿禰; 사카노우헤노오스쿠네) 자료번호 : ss.k_0002_0020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