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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李固)의 견해대로 축량(祝良)을 구진태수로 장교(張喬)를 교지자사로 배수한 뒤 영남이 다시 평정됨

  • 국가
    남월(南越)
영화(永和) 2년(137) 일남상림 외곽의 만이 구련(區憐) 등 수천 명이 상림현을 공격하여 관아를 불태우고 관장과 속리들을 살해하였다. 교지자사 번연(樊演)교지구진 2군의 병사 만여 인을 징발하여 이를 구원하였다. [그러나] 병사들이 장거리 병역을 꺼려하여 마침내 반항하여 그 관부를 공격하였다. 두 군은 비록 반란세력을 격파하였지만, 적당들의 세력은 오히려 더 커졌다. 이때 시어사 가창(賈昌)이 사자로서 일남군에 머물고 있었는데, 주군(州郡)과 힘을 합세하여 이들을 토벌하였으나 사태가 불리하여 마침내는 공격을 받게 되어 버렸다. 1년이 넘게 포위되어 병사와 식량을 공급하지 못하니, 황제가 근심하였다. 이듬해 공경백관과 사부(四府)주 001
각주 001)
四府: 前漢代·丞相·御史·車騎將軍·前將軍의 府를, 後漢에서는 太尉·司徒·司空·大將軍(혹은 太傅)의 府를 일컫는다(『後漢書』 권29, 「趙典傳」 李賢注). 後漢代 大將軍府에는 29인, 태위부는 24인, 사도부는 31인, 사공부는 29인의 속관이 있었는데, 이들 관속의 정식 명칭은 掾屬이라고 한다. 掾屬은 말단의 행정보조가 아니라 핵심적인 막료로써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辟召라고 하는 과정을 거쳐 선발되었는데, 그 대상은 지방의 지식인, 즉 주로 효렴이나 수재들이었다. 四府에서는 辟召를 통해 독자적으로 휘하의 관속을 선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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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속관을 불러 그 방략을 물었다. 모두 대장(大將)을 파견하여, 형주(荊州), 양주(揚州), 연주(兗州), 예주(豫州)에서 4만 명을 징발하여 이들을 구원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대장군주 002
각주 002)
大將軍: 漢代 전쟁이나 반란 같은 유사시에 정벌을 수행할 목적으로 大將軍을 임명하여 軍府를 개설하게 하고 전란이 평정되면 이를 혁파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漢武帝시 霍光이나 哀帝시 王莽 등은 군사활동을 그치고도 여전히 大將軍의 칭호를 유지하면서 幕府를 유지하였지만 제도화된 것은 아니었다. 후한시대에는 安帝 때 황제의 외삼촌인 耿寶가 大將軍에 임명되어 수도에 상주하였고, 順帝 때도 황제의 외조부와 외삼촌이 대장군의 지위를 계승하면서 상설직화하였다. 그리하여 順帝 이후에는 大將軍이 三公을 능가하면서 삼공과 함께 조정의 논의를 주도하는 한 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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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사중랑(從事中郞) 이고(李固)가 이를 반박하여 말하였다. “만약 형주양주에 일이 없다면, 군사를 징발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 이 두 주는 도적들이 이리저리 뭉쳐서 흩어지지 않고 있으며, 무릉군남군(南郡)의 만이들과는 화합하지 못하고 있고, 장사군계양군의 만이들은 자주 징발되었습니다. 만약 또 소동을 벌린다면 필경 다시 우환거리가 생길 것이라는 점이 그 불가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또, 연주예주 사람들은 졸지에 징발되어 멀리 만 리로 부임하라고 한다면, 돌아올 기약이 없어 황제의 조서(詔書)로 위압하더라도 반드시 반란에 이르게 될 것이니, 불가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 남쪽지역주 003
각주 003)
南州: 구체적인 州名이나 지역 명칭이 아니다. 여기서 ‘州’는 행정구역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天下九州’와 같이 독자적인 지역이라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南州’는 단순히 ‘남쪽지방’ 혹은 ‘南方’ 정도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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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기후가 덥고 게다가 풍토병에 걸리게 되면 죽음에 이르는 자가 열에 네다섯은 되니, 불가한 세 번째 이유입니다. 멀리 [타향] 만 리까지 가게 되면 병사들이 피로하게 되니, 영남지방에 이르게 되어서는 다시 감히 전투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니, 불가한 네 번째 이유입니다. 군대의 행군은 30리를 하루의 일정으로 하는데, 일남군까지는 9천여 리로서 3백 일이 되어야 비로소 도착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양식을 하루에 5되로 계산하면 필요한 쌀이 60만 곡(斛)이 됩니다. 이것은 장리(將吏)와 나귀, 말 등의 식량은 계산한 것이 아니고, 갑옷은 (병사) 자신들이 가져왔을 상황에서 비용이 이정도가 되는 것이니, 불가한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군대를 편성하여 임무지역에 도착하였을 때 사망자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이미 적을 방어하기에 부족하여, 분명 다시 징발할 것으로, 이는 심장과 복부를 도려내어 네 팔다리에 붙이는 격이니, 불가한 여섯 번째 이유입니다. 구진군일남군은 거리가 서로 천 리가 떨어져 있는데도, 구진군의 이민(吏民)을 징발하여서도 오히려 감당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더 머리 떨어져 있는] 네 개 주의 병졸을 수고롭게 하여 만 리의 험난한 지역을 돕도록 해서야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한 일곱 번째 이유입니다. 전에 중랑장 윤취(尹就)익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강족(羌族)들을 토벌할 때 익주지방에 “오랑캐들이 왔을 때는 괜찮았는데, 윤씨가 와서는 우리를 죽이는구나.”라는 풍언이 돌았습니다. 후에 윤취가 소환되고 그 병사들은 자사(刺史) 장교(張喬)에 편입되자, 장교는 그 장리들을 동원하여 열흘만에 오랑캐들을 격멸하였습니다.주 004
각주 004)
尹就가 羌族 토벌에 나섰다가 실패한 것은 『後漢書』 「西羌傳」에 의하면 安帝 元初 4년(118)의 일로 『後漢書』에서는 이 일이 자주 언급되는 것을 보면 당시 군사활동의 대표적인 실패사례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後漢書志』「天文志」에 의하면, 尙書 尹就와 尙書郞 姜述이 전투의 실패로 棄市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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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장수를 선발하여 [병사를 징발하는] 것이 효과적이지 못하고 [해당] 주군(州郡)이 맡아야 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새로이 용맹과 지략 그리고 인자함과 은혜로움을 갖춘 장수를 선발하여 자사, 태수로 삼아 모두 함께 교지에 주둔하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 일남의 병사는 양식이 없어서 방비하기도 부족한 상황에서 전투를 벌릴 수는 없습니다. 그 이민(吏民)들을 북쪽으로 사민시켜 교지에 의존하게 하고, 사태가 평정된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게 명하십시오. 역으로 만이들을 모집하여 그들 서로를 공격하게 하고, 금과 비단을 보내 그 자금으로 삼으십시오. 능히 적 내부에 침투하여 우두머리를 끌어들이게 되면 그를 후(侯)로 봉하고 토지를 상으로 내리도록 허락하십시오. 예전 병주(幷州)자사가 된 장사(長沙)축량(祝良)은 성격이 용감하고 결단력이 있고, 남양(南陽)장교(張喬)는 전에 익주에서 오랑캐를 격파한 공이 있어서, 모두 임용될 만한 사람들입니다. 전에 태종 주 005
각주 005)
太宗: 漢 孝文帝. 景帝 원년(전156) 경제 즉위 때 文帝의 廟號를 太宗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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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상(魏尙)을 운중(雲中) 태수로 삼았고,주 006
각주 006)
李賢註에서는 『漢書』를 인용하였다. 槐里사람 魏尙이 雲中太守가 되었는데, 적을 죽이고 사로잡았다는 功을 보고함에 있어 사실대로 하지 않아 면직당했다. 馮唐이 文帝에게 이 일을 아뢰니 황제가 馮唐으로 하여금 부절을 가지고 가서 魏尙을 사면시키고 다시 운중 태수를 삼았다(前書曰, 槐里人魏尙爲雲中守, 以斬首捕虜上功不實免. 馮唐言之於文帝, 帝令唐持節赦尙, 復以爲雲中守.). 이 내용은 현재의 『漢書』 권86, 「王嘉傳」에 실려 있지만, 문장은 동일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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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제(哀帝)공사(龔舍)를 태산(太山) 태수로 배수(拜授)하였습니다.주 007
각주 007)
龔舍: 李賢註에서는 『漢書』를 인용하였다. 龔舍의 자는 君倩이다. 처음에 그를 불러 簡大夫를 삼았으나 병으로 사직하였으며, 다시 그를 불러 박사로 삼으려 하자 병을 이유로 그만두고 떠났다. 얼마 있다가 애제가 초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龔舍를 태산 태수로 삼았다(前書曰, 舍字君倩. 初徵爲諫大夫, 病免; 復徵爲博士, 又病去. 頃之, 哀帝遣使卽楚拜舍爲太山太守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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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량(祝良) 등을 편도지관(便道之官)주 008
각주 008)
便道之官; 곧바로 길을 가는 관이라는 뜻으로, 관리로 임명된 후에 入朝하여 사은을 표할 필요 없이 바로 현지로 부임하는 관리를 의미한다. 祝良을 幷州刺史에서 조정으로 귀환하지 않고 곧바로 交州刺史로 부임하도록 하자는 의미이다. 『史記』 「酷吏列傳」 “孝景帝 乃使使持節拜都爲雁門太守, 而便道之官, 得以便宜從事.”; 宋 程大昌, 『考古編』 「便道之官」, “便道云者 猶曰卽行, 不得入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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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교지의 지방관]에 배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부(四府)가 모두 이고의 견해에 따르니, 곧바로 축량을 구진 태수로, 장교를 교지자사로 배수(拜授)하였다. 장교가 [교지에]에 이르러 위무(慰撫)와 회유를 보이기 시작하자 모두 항복하거나 해산하였다. 축량구진에 이르러 단신으로 적중에 들어가 대책을 논의하면서, 위엄과 신뢰로 불러들이자 항복한 자가 수만으로서 모두 축량을 위해 관부의 청사를 축조하였다. 이로서 영남이 다시 평정되었다.

  • 각주 001)
    四府: 前漢代·丞相·御史·車騎將軍·前將軍의 府를, 後漢에서는 太尉·司徒·司空·大將軍(혹은 太傅)의 府를 일컫는다(『後漢書』 권29, 「趙典傳」 李賢注). 後漢代 大將軍府에는 29인, 태위부는 24인, 사도부는 31인, 사공부는 29인의 속관이 있었는데, 이들 관속의 정식 명칭은 掾屬이라고 한다. 掾屬은 말단의 행정보조가 아니라 핵심적인 막료로써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辟召라고 하는 과정을 거쳐 선발되었는데, 그 대상은 지방의 지식인, 즉 주로 효렴이나 수재들이었다. 四府에서는 辟召를 통해 독자적으로 휘하의 관속을 선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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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大將軍: 漢代 전쟁이나 반란 같은 유사시에 정벌을 수행할 목적으로 大將軍을 임명하여 軍府를 개설하게 하고 전란이 평정되면 이를 혁파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漢武帝시 霍光이나 哀帝시 王莽 등은 군사활동을 그치고도 여전히 大將軍의 칭호를 유지하면서 幕府를 유지하였지만 제도화된 것은 아니었다. 후한시대에는 安帝 때 황제의 외삼촌인 耿寶가 大將軍에 임명되어 수도에 상주하였고, 順帝 때도 황제의 외조부와 외삼촌이 대장군의 지위를 계승하면서 상설직화하였다. 그리하여 順帝 이후에는 大將軍이 三公을 능가하면서 삼공과 함께 조정의 논의를 주도하는 한 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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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南州: 구체적인 州名이나 지역 명칭이 아니다. 여기서 ‘州’는 행정구역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天下九州’와 같이 독자적인 지역이라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南州’는 단순히 ‘남쪽지방’ 혹은 ‘南方’ 정도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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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尹就가 羌族 토벌에 나섰다가 실패한 것은 『後漢書』 「西羌傳」에 의하면 安帝 元初 4년(118)의 일로 『後漢書』에서는 이 일이 자주 언급되는 것을 보면 당시 군사활동의 대표적인 실패사례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後漢書志』「天文志」에 의하면, 尙書 尹就와 尙書郞 姜述이 전투의 실패로 棄市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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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太宗: 漢 孝文帝. 景帝 원년(전156) 경제 즉위 때 文帝의 廟號를 太宗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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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李賢註에서는 『漢書』를 인용하였다. 槐里사람 魏尙이 雲中太守가 되었는데, 적을 죽이고 사로잡았다는 功을 보고함에 있어 사실대로 하지 않아 면직당했다. 馮唐이 文帝에게 이 일을 아뢰니 황제가 馮唐으로 하여금 부절을 가지고 가서 魏尙을 사면시키고 다시 운중 태수를 삼았다(前書曰, 槐里人魏尙爲雲中守, 以斬首捕虜上功不實免. 馮唐言之於文帝, 帝令唐持節赦尙, 復以爲雲中守.). 이 내용은 현재의 『漢書』 권86, 「王嘉傳」에 실려 있지만, 문장은 동일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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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龔舍: 李賢註에서는 『漢書』를 인용하였다. 龔舍의 자는 君倩이다. 처음에 그를 불러 簡大夫를 삼았으나 병으로 사직하였으며, 다시 그를 불러 박사로 삼으려 하자 병을 이유로 그만두고 떠났다. 얼마 있다가 애제가 초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龔舍를 태산 태수로 삼았다(前書曰, 舍字君倩. 初徵爲諫大夫, 病免; 復徵爲博士, 又病去. 頃之, 哀帝遣使卽楚拜舍爲太山太守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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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便道之官; 곧바로 길을 가는 관이라는 뜻으로, 관리로 임명된 후에 入朝하여 사은을 표할 필요 없이 바로 현지로 부임하는 관리를 의미한다. 祝良을 幷州刺史에서 조정으로 귀환하지 않고 곧바로 交州刺史로 부임하도록 하자는 의미이다. 『史記』 「酷吏列傳」 “孝景帝 乃使使持節拜都爲雁門太守, 而便道之官, 得以便宜從事.”; 宋 程大昌, 『考古編』 「便道之官」, “便道云者 猶曰卽行, 不得入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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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구련(區憐), 번연(樊演), 가창(賈昌), 이고(李固), 윤취(尹就), 윤취, 장교(張喬), 장교, 축량(祝良), 장교(張喬), 태종, 위상(魏尙), 애제(哀帝), 공사(龔舍), 축량(祝良), 이고, 축량, 장교, 장교, 축량, 축량
지명
일남, 상림, 상림현, 교지, 교지, 구진, 일남군, 형주(荊州), 양주(揚州), 연주(兗州), 예주(豫州), 형주, 양주, 무릉군, 남군(南郡), 장사군, 계양군, 연주, 예주, 일남군, 구진군, 일남군, 구진군, 익주, 익주, 교지, 일남, 교지, 병주(幷州), 장사(長沙), 남양(南陽), 익주, 교지, 교지, 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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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李固)의 견해대로 축량(祝良)을 구진태수로 장교(張喬)를 교지자사로 배수한 뒤 영남이 다시 평정됨 자료번호 : jo.k_0003_0116_0020_00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