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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光武帝)때 만이가 번성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함

  • 국가
    남만(南蠻)
평왕(平王) 주 001
각주 001)
平王: 周 제13대 왕으로서 기원전 770~720년 동안 재위하였는데, 즉위와 함께 도읍을 宗周에서 洛邑(현 河南省 洛陽市)으로 천도하여, 이른바 東周시대를 열었다. 西周의 마지막 왕 幽王은 后妃 褒姒를 총애하여 正后인 申后와 태자 宜臼를 폐하고, 대신 褒姒를 正后로 褒姒의 아들 伯腹을 태자로 삼았다. 이에 申后의 아버지 申侯는 曾國 犬戎과 연합하여 幽王을 공격하여 驪山에서 죽였다. 申侯 및 여러 제후들은 이전의 태자인 宜臼를 옹립하여 申(현재의 河南省 南陽市 북쪽)에서 즉위하도록 하였는데, 이가 平王이다. 즉위 후 王子 余臣을 추대한 携王와 대립하다가 晋文侯의 도움을 받아 携王을 살해하고 周王의 정통을 확보하였다. 이때 도읍인 宗周 鎬京은 犬戎에 의해 빈번하게 침입을 받는 등, 불안정해졌는데, 平王은 이를 피해 도읍을 동쪽의 成周인 낙읍으로 천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周王의 권위는 현저하게 실추되어 몇 명의 제후들이 정치를 장악하는 상황이 되는데, 이후를 東周 혹은 春秋시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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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쪽으로 천도하자, 만들은 드디어 상국(上國)주 002
각주 002)
上國: 춘추전국시대에는 吳나 楚 등 주변의 제후나 민족과 비교하여 中原의 제후국을 가리키는 칭호. 이는 중원의 국가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결국 ‘中國’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左傳』 「昭公」 27年條, “吴子使延州來, 季子聘于上國, 遂聘于晉, 以觀諸侯.” [孔颖達疏] “服虔曰: 上國, 中國也. 蓋以吴辟在東南, 地勢卑下, 中國在其上流, 故謂中國爲上國也.”; 『國语』 「吴語」, “越滅吴, 上征上國.” 韋昭注: “上國, 中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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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침략하였다. 진문후(晉文侯) 주 003
각주 003)
晉文侯: 이름이 姬仇이고, 晉의 11대 國君으로서 기원전 780~746년 재위. 文侯는 원래 晉穆侯의 太子였는데, 穆公 사후 그 숙부가 自立하여 文侯를 방출하였으나, 4년 후 무력으로 숙부를 물리치고 諸侯位에 올랐다. 文侯 11년에 幽王이 죽자 平王 宜臼와 携王 余臣이 각각 王을 칭하여 周에 2王이 병립하게 되었는데, 晉文侯가 21년 携王을 처형하여 周王室을 통일시켰다. 晉文侯는 이 공으로 平王으로부터 ‘秬鬯’과 ‘圭瓚’을 사여받고, 平王은 〈文侯之命〉을 지어 그 공덕을 칭찬하였다(『尙書』 「周書」 〈文侯之命〉). 文侯는 35년간 재위하면서 平王의 周王室 정치를 사실상 장악하다가 기원전 746年에 사망하였다. 여기서 晉文侯가 周王室을 輔政하였다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떠한 지위나 직책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또, ‘輔政’은 秦代까지는 사용된 개념이 아니었다. 漢武帝시기 설명적인 표현으로 ‘輔政’이 처음 나타나는데, 皇帝를 보좌한다는 의미가 강하였다. 그러나 前漢末 霍光이나 王莽이 실권을 장악하면서 ‘輔政’이라는 지위가 생겨났고, 이후 魏晋南北朝 기간에 輔政將軍이라는 직책으로 구체화되어, 사실상 황제권을 대신 행사하는 의미로 사용되게 된다(金翰奎, 1997: 120~231). 따라서, 范曄은 자신의 시대에 자주 사용되는 개념과 지위를 周代의 상황으로 가차하고 있는데, 輔政이 왕조교체시기 새로운 실권자들이 주로 이 직함을 가졌다는 점에서 周王室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 晉文侯의 상황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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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보정(輔政)하고 있었는데, 채공후(蔡共侯) 주 004
각주 004)
蔡共侯: 이름은 姬興이고 춘추시기 蔡의 國君으로 기원전 761~760년 재위. 平王 東遷 후 蠻의 침입과 晉文侯와 蔡共侯의 활약에 관해서는 『後漢書』 외에 다른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단지, 『史記』 「周本紀」에 “平王立, 東遷于雒邑, 辟戎寇”라는 구절이 있는데, 戎이 蠻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설명은 없다. 이후 史書에도 『後漢書』의 기록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後漢書』의 내용을 가장 많이 이용하였던 『通典』 「邊防典」에서도 平王시기의 사실은 제외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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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이끌고 이들을 격파하였다. 초무왕(楚武王) 주 005
각주 005)
楚武王: 이름은 熊通이고 기원전 7세기 초 690년까지 楚의 國君. 당시 楚의 세력이 크게 확장하면서 周王室에게 지위를 올려 줄 것을 요구하는 등, 본격적으로 周를 중심으로 하는 中國과 대립의 자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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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만은 나자(羅子) 주 006
각주 006)
羅子: 春秋時代의 ‘羅國’으로, 周武王시기에 羅國은 子爵으로 봉해져 羅子 혹은 羅子國이라고 한다. 그 위치는 『史記正義』와 『通典』 「地理典」에 의하면 羅縣城은 岳州 湘陰縣 東北 60里에 있었는데, 春秋時에 羅子國이 있었다고 한다(『史記』 卷84, 「屈原賈生列傳」; 『通典』 「地理典」, 「古荊州」 「巴陵郡岳州」). 이것은 晋代 長沙郡의 속하고 현재 湖北省 宜城 일대로 後漢代에는 蠻夷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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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함께 의 군사를 패퇴시키고 장수 굴하(屈瑕) 주 007
각주 007)
屈瑕: 춘추시대 楚武王 熊通의 아들로서, 號는 莫敖이고 生年은 불분명. 기원전 699년 羅國征伐에 실패하였는데, 『後漢書』 본문에서는 蠻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左傳』에서는 자결하였다고 한다. 楚國의 귀족 屈氏의 祖先으로 蒲騷之戰 이래 3차례의 전투에서 元帥로서 공을 세워 屈邑에 봉해져 申國을 제어하도록 하였다. 원래 姓은 羋였으나, 후손들이 封地를 姓으로 삼아 屈氏로 불리게 되었다. 屈邑은 현재 그 위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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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살해하였다.주 008
각주 008)
李賢注에서는 『左傳』을 인용하여 그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楚 屈瑕가 羅와 鄢을 정벌하였는데, 대열이 혼란한 채로 강을 건너다가 마침내 대열이 붕괴되어 버렸다. 그리고 장비도 없었다. 羅國과 廬戎이 양쪽으로 공격해 와서 크게 패배시켰다. 莫敖(屈瑕)가 荒谷에서 목을 매 자결하니, 여러 장수들이 冶父산에서 포로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左傳』 “楚屈瑕伐羅及鄢, 亂次以濟其水, 遂無次, 且不設備, 羅與盧戎兩軍之, 大敗之. 莫敖縊于荒谷, 群帥囚于冶父” 也).蠻과 羅子가 연합하여 楚軍을 격파한 것은 기원전 699년 봄의 일이었다. 현전본 『左傳』 「桓公」 13년조에서의 인용문은 자구상 약간의 차이가 있다(“及鄢, 亂次以濟, 遂無次. 且不設備. 及羅, 羅與盧戎兩軍之, 大敗之. 莫敖縊于荒谷. 羣帥囚于冶父以聽刑. 楚子曰, “孤之罪也.” 皆免之.). 冶父에 대해 『後漢書志』 卷22, 「郡國志」 南郡 江陵縣 소속 津鄕에 대해 李賢의 注에서는 『荊州記』를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縣 동쪽 3리여에 三湖가 있고 그 동쪽에 개울이 있어 萇谷이라 불리고 서북에는 작은 城이 있는데, 이름이 冶父라고 한다. 『左傳』에서는 ‘莫敖가 荒谷에서 목매어 죽었는데, 여러 장수들이 冶父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縣 북쪽으로 십여리에 紀南城이 있는데, 楚王이 도읍한 곳이고, 동남쪽에 郢城이 있는데, 子囊이 城으로 삼은 곳이다(荊州記曰: “縣東三里餘有三湖, 湖東有水, 名萇谷, 又西北有小城名曰冶父, 左傳曰: ‘莫敖縊于荒谷, 衆帥囚于冶父’ 縣北十餘里有紀南城, 楚王所都, 東南有郢城, 子囊所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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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왕(莊王) 주 009
각주 009)
莊王: 春秋시대 楚國 國君으로서, 姓은 芈, 이름은 旅 혹은 熊侣로서, 기원전 613~591년 재위. 즉위초에는 國內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남방 蠻族들의 저항이 심하여 국가가 자못 혼란하였다. 그러나 伍參 蘇從, 孫叔敖 子重 등을 기용하여 국력을 신장시켰다. 기원전 606년 雒邑의 西南에 있는 陸渾을 정벌하면서 周 郊外에서 말에게 黃河의 물을 먹이면서 周鼎의 輕重을 물었던 소위 ‘問鼎’을 일으켰는데, 周王室의 권위쇠락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후 陳, 蔡, 許, 鄭 등을 정벌하여 이른바 春秋五霸의 하나가 되었다. 북방의 晉을 중심으로 齊, 魯가 포함되는 남북 대립의 군사상황을 형성하는 등 楚의 극성기를 구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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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처음 즉위하였을 때 백성들은 굶주리고 군사는 나약하여 다시 [만들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의 군사가 강성해지자 만(蠻)들은 굴복하여, 이때부터 마침내 초국(楚國)에 복속되었다. 언릉(鄢陵)의 전투주 010
각주 010)
鄢陵之戰: 춘추시대 중기 기원전 575년에 남방의 楚와 북방의 晉이 패권을 다투었던 전투로, 城濮之战과 邲之战에 이어 마지막으로 楚가 몰락하는 계기가 된 의미를 갖는다. 楚가 鄭國으로 하여금 晉國의 盟邦인 宋國을 치도록 하자, 晉의 厲公이 齊, 衛, 魯國과 연합하여 鄭國을 정벌하였는데, 이에 楚 恭王이 군사를 이끌고 鄭을 구원하기 위해 출병하여 鄢陵(현재 河南省 鄢陵縣 西北)에서 격돌한 전투이다. 이때 楚 恭王은 과거 자주 사용하였던 전략, 즉 새벽에 갑자기 정면으로 공격하는 방법을 택하였으나, 晉軍은 楚에서 晉으로 망명하였던 苗賁皇의 정보와 계책에 따라 主力軍인 中軍을, 鄭國의 군대와 蠻軍으로 이루어져 정비되지 않은 楚의 左右軍에 집중 투입하여 左右를 먼저 제압한다는 전술을 선택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晉軍의 ‘攻弱避堅’의 전술은 이후 중국 고대 전쟁사에서 대표적인 전술의 한 유형으로 자주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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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만은 공왕(恭王)과 군사를 연합하여 진(晉)을 공격하였다.주 011
각주 011)
李賢注에서는 『左傳』을 인용하여, 晉과 楚가 鄢陵에서 전쟁할 때 晉의 郤至가 말하기를 “楚는 두 명의 卿이 서로를 미워하고, 왕의 군사는 구태의연하며, 鄭나라는 진을 펼쳤으되 정리가 안 되어 있고, 蠻은 군을 동원하였지만 진법을 갖추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左傳』“晉楚戰于鄢陵. 晉郤至曰 ‘楚二卿相惡, 王卒以舊, 鄭陳而不整, 蠻軍而不陳’ 也”). 이 문장은 『左傳』의 문장 그 자체가 인용된 것은 아니다. 내용은 『春秋左傳』 「成公十六年條」의 傳文에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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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吳起) 주 012
각주 012)
吳起: 戰國시대 탁월한 정치개혁가, 군사이론가이자 현장의 군사지휘관. 衛國의 左氏(현재 山東省 定陶縣, 혹은 曹縣 東北) 출신. 원래 孔子의 弟子 曾參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魯國에서 자기 자신에 엄격한 뛰어난 장수였지만 功名을 좇는 인물로 衆臣들로부터 칭찬과 비난을 함께 받으면서 유명해졌다. 이후 魏文侯에게 발탁되어 大臣에 이르렀지만, 결국 魏의 재상 田文과 公叔과의 갈등 때문에 다시 楚로 망명하였다. 楚悼王의 신임을 받아 재상으로서 엄격한 法令제정과 실행, 公族을 억제하고 富國强兵策을 추진하는 한편, 남쪽으로 蠻族을 평정하고, 북쪽으로는 陳國과 蔡國을 겸병하여 楚國을 强國으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그의 강경한 정책은 隣國과 楚 公族들의 원한을 사서, 楚悼王이 죽자 公族들의 공격을 받아 기원전 381년 楚 悼王의 屍身 옆에서 사살되었다. 그의 저술에 대해 『漢書』 「藝文志」에는 『吳起』 48편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佚失되고, 후대에 「圖國」, 「料敵」, 「治兵」, 「論將」, 「變化」, 「勵士」篇 등이 수집되어 『吳子』 6편으로 전한다. 그 내용은 주로 孫武의 사상을 계승하여 ‘内修文德, 外治武備’를 강조하고 있다. 『孫子』와 함께 『孫吳兵法』으로 일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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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왕(悼王) 주 013
각주 013)
悼王: 전국시대 楚國의 國君으로 이름은 ‘疑’ 혹은 ‘類’, 楚聲王의 아들로서 聲王이 ‘盜’에게 피살당하자, 國人들에 옹립되었다. 재위기간은 기원전 401~381年. 재위 11년(전391) 大梁(현재 하남성 開封), 榆關(현재 開封 西南)을 三晋에 빼앗기자 吳起를 令尹으로 초빙하여 變法을 통하여 富國强兵策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북으로는 魏國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남쪽으로는 百越을 정벌하고 蒼梧를 장악하는 등 楚國의 영토를 확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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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재상이 되고 나서 남으로 만월(越)을 겸병하여 마침내 동정(洞庭) 주 014
각주 014)
洞庭: 현재에는 湖南, 湖北에 결쳐져 있는 洞庭湖를 의미하지만, 여기에서는 洞庭湖 연안의 지역 그 중에서도 특히 호수 서남단에서 유입되는 沅水유역을 가리킨다. ‘洞庭’은 고전문헌에 “三苗氏左洞庭, 右彭蠡.”라고 하여 周代 이래 南方 이민족 집단의 거주지를 대표하는 곳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한편, 최근 里耶古城에서 竹簡이 발굴되었는데, 여기에 史書에 기재되지 않은 ‘洞庭郡’이 확인되어, 이것이 黔中郡과 동일하느냐의 여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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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오(蒼梧) 주 015
각주 015)
蒼梧: 현재 廣西省 동부 梧州市 蒼梧縣. 후에 漢武帝가 元鼎6년 蒼梧郡을 설치하였지만, 南越王과 마찬가지로 蒼梧王이 ‘秦王’을 자칭하면서 독자적으로 지배하던 곳이었다. 전통적으로 ‘舜藏於蒼梧’ 혹은 ‘禹巡狩蒼梧’라고 하여 中國王朝 지배의 가장 남단구역으로 인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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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차지하게 되었다. 진소왕(秦昭王) 주 016
각주 016)
秦昭王: 전국시대 秦의 國君으로 秦昭襄王이라고도 한다. 기원전 306~250년 재위. 秦惠文王의 아들이고 秦武王의 동생으로서, 秦武王이 죽자 동생들과 왕위쟁탈전 끝에 승리하여 등극한 후, 張儀와 白起를 등용하여 강력한 부국강병책과 외교정책을 추진하였다. 기원전 260年 趙와 長平之戰에서 승리함으로써 천하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秦昭王은 기원전 256년에는 東周를 멸망시켰는데, 이 때문에 史書에서는 그를 폄하하는 표현들이 많이 나타나는데, 단순히 秦昭王으로 簡稱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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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白起) 주 017
각주 017)
白起: 戰國時代 秦國의 名將으로서 公孫起라고도 한다. 郿縣(현재 陝西省 郿縣 常興鎮 白家村) 출신으로, 秦昭王 13년(전294) 左庶長으로 韓의 新城을 공격한 이래 30여 년 동안 70餘城을 정복하였는데, 伊闕之戰, 長平之戰 등의 승리가 유명하다. 戰功으로 武安君으로 봉해졌는데, 秦昭王 49년(전257) 邯鄲의 전투에서 실패하고 돌아왔을 때, 다시 출격하라는 昭王의 명령에 병을 칭하고 따르지 않자, 昭王이 노하여 白起의 관직을 박탈하고 士兵으로 咸陽에서 축출하였다. 西門을 벗어나 杜郵(현 陝西省 咸陽東北)에 이르렀을 때 昭王은 使者를 보내 劍을 내리고 자결을 명하니, 죽기 전에 白起는 항복한 적군을 과격하게 살해한 것을 참회하였다고 한다. 秦昭王 50년(전256) 11월인데, 秦人은 이를 가련히 여겨 鄉邑에서 모두 제사를 지내 주었다. 白起에 관한 기사는 『史記』 「白起王翦列傳」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司馬遷의 먼 선조인 司馬靳 역시 白起와 함께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杜郵에서 함께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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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하여금 를 정벌하게 하여, 만이[지역]을 탈취하고 비로소 검중군(黔中郡) 주 018
각주 018)
黔中郡: 秦 昭王 때 白起가 蠻夷를 정복하여 설치한 郡으로, 후에 楚國을 멸망시키고 沅陵 一带, 즉 湘江流域을 떼어 長沙國을 설치하였다. 漢代에는 武陵郡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현재의 湖南 北部와 西部일대를 포괄하고 郡治는 常德 沅陵일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실재와 위치, 존립기간과 지역, 그리고 이른바 ‘洞庭郡’과의 관계에 대해 많은 異論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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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설치하였다. 한(漢)이 흥기하자 무릉군(武陵郡) 주 019
각주 019)
武陵郡: 漢高祖시에 처음 秦代 黔中郡에 武陵郡을 설치하였다가 곧바로 다시 ‘義陵郡’으로 개명하였는데, 王莽시 建平으로 하였다가, 後漢代 武陵으로 복원하여 이후 계속 사용되었다. 그 改置 시기에 대해서는 사료상의 여러 가지 차이가 있어 확정하기 어려운데, 前漢代에는 武陵 혹은 義陵이 혼용되고 있었다. 漢初 武陵郡은 13개 縣으로 구성되었는데, 현재 湖北省 북부와 貴州省 서부, 四川省 南東部를 포괄하고 있다. 義陵郡으로 불리게 된 것은 項羽가 義帝를 郴에서 살해하자, 武陵人들이 소복을 입고 屈亭에서 哭을 하였다는 말을 漢高祖가 듣고 이곳을 ‘義陵’이라고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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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개칭하였다. 매해 대인에게서는 포 1필을 소구(小口)에게서는 2장(丈)을 징수하였는데, 이를 종포(賨布)주 020
각주 020)
賨布: 李賢注에서는 『說文解字』를 인용하여 南蠻의 賦라 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晋代 戶調之式이다. 戶調之式에서는 “丁男之戶, 歲輸絹三匹, 緜三斤, 女及次丁男爲戶者半輸. 其諸邊郡或三分之二, 遠者三分之一. 夷人輸賨布, 戶一匹, 遠者或一丈(『晉書』 卷26, 「食貨志」).”로 규정되어 있는데, 夷人賨布가 戶 1匹이라고 하여, 賨布는 전국시대 이래 1匹로 고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戰國末과 晋代의 조세제도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으로, 州郡民에 대한 조세로서 戶를 기준으로 하는 戶調는 西晋代 제도화되었고, 秦漢代에는 口賦와 算賦가 조세의 기본이었기 때문에, 西晋의 戶調는 戰國末부터 이민족에 대해 戶단위로 부과하는 賨布와는 그 성격이 동일하지 않다. 戰國末 秦漢代 賨布는 당시 州郡民에 부과되는 口賦와 算賦에 대치되는 것으로, 晋代 州郡民에 대한 戶調가 정착되면서 異民族에 대한 賨布를 이 범주로 제도화한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板楯蠻 등 일부 종족들이 唐代까지 免役을 주장한 것은 賨布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後漢書疏證』 卷12에서 沈欽韓은 『北史』 卷95 「蠻傳」의 “獠者蓋南蠻之別種. ……能爲細布 色至鮮淨”과 『唐六典』 卷3 「尙書戶部」의 “涪州連頭獠布”를 賓布와 연결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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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한다. 비록 때때로 노략질을 하기도 하였지만, 군국(郡國)의 걱정거리는 되지 못하였다.

  • 각주 001)
    平王: 周 제13대 왕으로서 기원전 770~720년 동안 재위하였는데, 즉위와 함께 도읍을 宗周에서 洛邑(현 河南省 洛陽市)으로 천도하여, 이른바 東周시대를 열었다. 西周의 마지막 왕 幽王은 后妃 褒姒를 총애하여 正后인 申后와 태자 宜臼를 폐하고, 대신 褒姒를 正后로 褒姒의 아들 伯腹을 태자로 삼았다. 이에 申后의 아버지 申侯는 曾國 犬戎과 연합하여 幽王을 공격하여 驪山에서 죽였다. 申侯 및 여러 제후들은 이전의 태자인 宜臼를 옹립하여 申(현재의 河南省 南陽市 북쪽)에서 즉위하도록 하였는데, 이가 平王이다. 즉위 후 王子 余臣을 추대한 携王와 대립하다가 晋文侯의 도움을 받아 携王을 살해하고 周王의 정통을 확보하였다. 이때 도읍인 宗周 鎬京은 犬戎에 의해 빈번하게 침입을 받는 등, 불안정해졌는데, 平王은 이를 피해 도읍을 동쪽의 成周인 낙읍으로 천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周王의 권위는 현저하게 실추되어 몇 명의 제후들이 정치를 장악하는 상황이 되는데, 이후를 東周 혹은 春秋시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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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上國: 춘추전국시대에는 吳나 楚 등 주변의 제후나 민족과 비교하여 中原의 제후국을 가리키는 칭호. 이는 중원의 국가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결국 ‘中國’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左傳』 「昭公」 27年條, “吴子使延州來, 季子聘于上國, 遂聘于晉, 以觀諸侯.” [孔颖達疏] “服虔曰: 上國, 中國也. 蓋以吴辟在東南, 地勢卑下, 中國在其上流, 故謂中國爲上國也.”; 『國语』 「吴語」, “越滅吴, 上征上國.” 韋昭注: “上國, 中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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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晉文侯: 이름이 姬仇이고, 晉의 11대 國君으로서 기원전 780~746년 재위. 文侯는 원래 晉穆侯의 太子였는데, 穆公 사후 그 숙부가 自立하여 文侯를 방출하였으나, 4년 후 무력으로 숙부를 물리치고 諸侯位에 올랐다. 文侯 11년에 幽王이 죽자 平王 宜臼와 携王 余臣이 각각 王을 칭하여 周에 2王이 병립하게 되었는데, 晉文侯가 21년 携王을 처형하여 周王室을 통일시켰다. 晉文侯는 이 공으로 平王으로부터 ‘秬鬯’과 ‘圭瓚’을 사여받고, 平王은 〈文侯之命〉을 지어 그 공덕을 칭찬하였다(『尙書』 「周書」 〈文侯之命〉). 文侯는 35년간 재위하면서 平王의 周王室 정치를 사실상 장악하다가 기원전 746年에 사망하였다. 여기서 晉文侯가 周王室을 輔政하였다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떠한 지위나 직책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또, ‘輔政’은 秦代까지는 사용된 개념이 아니었다. 漢武帝시기 설명적인 표현으로 ‘輔政’이 처음 나타나는데, 皇帝를 보좌한다는 의미가 강하였다. 그러나 前漢末 霍光이나 王莽이 실권을 장악하면서 ‘輔政’이라는 지위가 생겨났고, 이후 魏晋南北朝 기간에 輔政將軍이라는 직책으로 구체화되어, 사실상 황제권을 대신 행사하는 의미로 사용되게 된다(金翰奎, 1997: 120~231). 따라서, 范曄은 자신의 시대에 자주 사용되는 개념과 지위를 周代의 상황으로 가차하고 있는데, 輔政이 왕조교체시기 새로운 실권자들이 주로 이 직함을 가졌다는 점에서 周王室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 晉文侯의 상황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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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蔡共侯: 이름은 姬興이고 춘추시기 蔡의 國君으로 기원전 761~760년 재위. 平王 東遷 후 蠻의 침입과 晉文侯와 蔡共侯의 활약에 관해서는 『後漢書』 외에 다른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단지, 『史記』 「周本紀」에 “平王立, 東遷于雒邑, 辟戎寇”라는 구절이 있는데, 戎이 蠻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설명은 없다. 이후 史書에도 『後漢書』의 기록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後漢書』의 내용을 가장 많이 이용하였던 『通典』 「邊防典」에서도 平王시기의 사실은 제외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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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楚武王: 이름은 熊通이고 기원전 7세기 초 690년까지 楚의 國君. 당시 楚의 세력이 크게 확장하면서 周王室에게 지위를 올려 줄 것을 요구하는 등, 본격적으로 周를 중심으로 하는 中國과 대립의 자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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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羅子: 春秋時代의 ‘羅國’으로, 周武王시기에 羅國은 子爵으로 봉해져 羅子 혹은 羅子國이라고 한다. 그 위치는 『史記正義』와 『通典』 「地理典」에 의하면 羅縣城은 岳州 湘陰縣 東北 60里에 있었는데, 春秋時에 羅子國이 있었다고 한다(『史記』 卷84, 「屈原賈生列傳」; 『通典』 「地理典」, 「古荊州」 「巴陵郡岳州」). 이것은 晋代 長沙郡의 속하고 현재 湖北省 宜城 일대로 後漢代에는 蠻夷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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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屈瑕: 춘추시대 楚武王 熊通의 아들로서, 號는 莫敖이고 生年은 불분명. 기원전 699년 羅國征伐에 실패하였는데, 『後漢書』 본문에서는 蠻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左傳』에서는 자결하였다고 한다. 楚國의 귀족 屈氏의 祖先으로 蒲騷之戰 이래 3차례의 전투에서 元帥로서 공을 세워 屈邑에 봉해져 申國을 제어하도록 하였다. 원래 姓은 羋였으나, 후손들이 封地를 姓으로 삼아 屈氏로 불리게 되었다. 屈邑은 현재 그 위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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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李賢注에서는 『左傳』을 인용하여 그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楚 屈瑕가 羅와 鄢을 정벌하였는데, 대열이 혼란한 채로 강을 건너다가 마침내 대열이 붕괴되어 버렸다. 그리고 장비도 없었다. 羅國과 廬戎이 양쪽으로 공격해 와서 크게 패배시켰다. 莫敖(屈瑕)가 荒谷에서 목을 매 자결하니, 여러 장수들이 冶父산에서 포로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左傳』 “楚屈瑕伐羅及鄢, 亂次以濟其水, 遂無次, 且不設備, 羅與盧戎兩軍之, 大敗之. 莫敖縊于荒谷, 群帥囚于冶父” 也).蠻과 羅子가 연합하여 楚軍을 격파한 것은 기원전 699년 봄의 일이었다. 현전본 『左傳』 「桓公」 13년조에서의 인용문은 자구상 약간의 차이가 있다(“及鄢, 亂次以濟, 遂無次. 且不設備. 及羅, 羅與盧戎兩軍之, 大敗之. 莫敖縊于荒谷. 羣帥囚于冶父以聽刑. 楚子曰, “孤之罪也.” 皆免之.). 冶父에 대해 『後漢書志』 卷22, 「郡國志」 南郡 江陵縣 소속 津鄕에 대해 李賢의 注에서는 『荊州記』를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縣 동쪽 3리여에 三湖가 있고 그 동쪽에 개울이 있어 萇谷이라 불리고 서북에는 작은 城이 있는데, 이름이 冶父라고 한다. 『左傳』에서는 ‘莫敖가 荒谷에서 목매어 죽었는데, 여러 장수들이 冶父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縣 북쪽으로 십여리에 紀南城이 있는데, 楚王이 도읍한 곳이고, 동남쪽에 郢城이 있는데, 子囊이 城으로 삼은 곳이다(荊州記曰: “縣東三里餘有三湖, 湖東有水, 名萇谷, 又西北有小城名曰冶父, 左傳曰: ‘莫敖縊于荒谷, 衆帥囚于冶父’ 縣北十餘里有紀南城, 楚王所都, 東南有郢城, 子囊所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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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莊王: 春秋시대 楚國 國君으로서, 姓은 芈, 이름은 旅 혹은 熊侣로서, 기원전 613~591년 재위. 즉위초에는 國內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남방 蠻族들의 저항이 심하여 국가가 자못 혼란하였다. 그러나 伍參 蘇從, 孫叔敖 子重 등을 기용하여 국력을 신장시켰다. 기원전 606년 雒邑의 西南에 있는 陸渾을 정벌하면서 周 郊外에서 말에게 黃河의 물을 먹이면서 周鼎의 輕重을 물었던 소위 ‘問鼎’을 일으켰는데, 周王室의 권위쇠락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후 陳, 蔡, 許, 鄭 등을 정벌하여 이른바 春秋五霸의 하나가 되었다. 북방의 晉을 중심으로 齊, 魯가 포함되는 남북 대립의 군사상황을 형성하는 등 楚의 극성기를 구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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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鄢陵之戰: 춘추시대 중기 기원전 575년에 남방의 楚와 북방의 晉이 패권을 다투었던 전투로, 城濮之战과 邲之战에 이어 마지막으로 楚가 몰락하는 계기가 된 의미를 갖는다. 楚가 鄭國으로 하여금 晉國의 盟邦인 宋國을 치도록 하자, 晉의 厲公이 齊, 衛, 魯國과 연합하여 鄭國을 정벌하였는데, 이에 楚 恭王이 군사를 이끌고 鄭을 구원하기 위해 출병하여 鄢陵(현재 河南省 鄢陵縣 西北)에서 격돌한 전투이다. 이때 楚 恭王은 과거 자주 사용하였던 전략, 즉 새벽에 갑자기 정면으로 공격하는 방법을 택하였으나, 晉軍은 楚에서 晉으로 망명하였던 苗賁皇의 정보와 계책에 따라 主力軍인 中軍을, 鄭國의 군대와 蠻軍으로 이루어져 정비되지 않은 楚의 左右軍에 집중 투입하여 左右를 먼저 제압한다는 전술을 선택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晉軍의 ‘攻弱避堅’의 전술은 이후 중국 고대 전쟁사에서 대표적인 전술의 한 유형으로 자주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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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李賢注에서는 『左傳』을 인용하여, 晉과 楚가 鄢陵에서 전쟁할 때 晉의 郤至가 말하기를 “楚는 두 명의 卿이 서로를 미워하고, 왕의 군사는 구태의연하며, 鄭나라는 진을 펼쳤으되 정리가 안 되어 있고, 蠻은 군을 동원하였지만 진법을 갖추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左傳』“晉楚戰于鄢陵. 晉郤至曰 ‘楚二卿相惡, 王卒以舊, 鄭陳而不整, 蠻軍而不陳’ 也”). 이 문장은 『左傳』의 문장 그 자체가 인용된 것은 아니다. 내용은 『春秋左傳』 「成公十六年條」의 傳文에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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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吳起: 戰國시대 탁월한 정치개혁가, 군사이론가이자 현장의 군사지휘관. 衛國의 左氏(현재 山東省 定陶縣, 혹은 曹縣 東北) 출신. 원래 孔子의 弟子 曾參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魯國에서 자기 자신에 엄격한 뛰어난 장수였지만 功名을 좇는 인물로 衆臣들로부터 칭찬과 비난을 함께 받으면서 유명해졌다. 이후 魏文侯에게 발탁되어 大臣에 이르렀지만, 결국 魏의 재상 田文과 公叔과의 갈등 때문에 다시 楚로 망명하였다. 楚悼王의 신임을 받아 재상으로서 엄격한 法令제정과 실행, 公族을 억제하고 富國强兵策을 추진하는 한편, 남쪽으로 蠻族을 평정하고, 북쪽으로는 陳國과 蔡國을 겸병하여 楚國을 强國으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그의 강경한 정책은 隣國과 楚 公族들의 원한을 사서, 楚悼王이 죽자 公族들의 공격을 받아 기원전 381년 楚 悼王의 屍身 옆에서 사살되었다. 그의 저술에 대해 『漢書』 「藝文志」에는 『吳起』 48편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佚失되고, 후대에 「圖國」, 「料敵」, 「治兵」, 「論將」, 「變化」, 「勵士」篇 등이 수집되어 『吳子』 6편으로 전한다. 그 내용은 주로 孫武의 사상을 계승하여 ‘内修文德, 外治武備’를 강조하고 있다. 『孫子』와 함께 『孫吳兵法』으로 일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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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悼王: 전국시대 楚國의 國君으로 이름은 ‘疑’ 혹은 ‘類’, 楚聲王의 아들로서 聲王이 ‘盜’에게 피살당하자, 國人들에 옹립되었다. 재위기간은 기원전 401~381年. 재위 11년(전391) 大梁(현재 하남성 開封), 榆關(현재 開封 西南)을 三晋에 빼앗기자 吳起를 令尹으로 초빙하여 變法을 통하여 富國强兵策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북으로는 魏國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남쪽으로는 百越을 정벌하고 蒼梧를 장악하는 등 楚國의 영토를 확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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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洞庭: 현재에는 湖南, 湖北에 결쳐져 있는 洞庭湖를 의미하지만, 여기에서는 洞庭湖 연안의 지역 그 중에서도 특히 호수 서남단에서 유입되는 沅水유역을 가리킨다. ‘洞庭’은 고전문헌에 “三苗氏左洞庭, 右彭蠡.”라고 하여 周代 이래 南方 이민족 집단의 거주지를 대표하는 곳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한편, 최근 里耶古城에서 竹簡이 발굴되었는데, 여기에 史書에 기재되지 않은 ‘洞庭郡’이 확인되어, 이것이 黔中郡과 동일하느냐의 여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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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蒼梧: 현재 廣西省 동부 梧州市 蒼梧縣. 후에 漢武帝가 元鼎6년 蒼梧郡을 설치하였지만, 南越王과 마찬가지로 蒼梧王이 ‘秦王’을 자칭하면서 독자적으로 지배하던 곳이었다. 전통적으로 ‘舜藏於蒼梧’ 혹은 ‘禹巡狩蒼梧’라고 하여 中國王朝 지배의 가장 남단구역으로 인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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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秦昭王: 전국시대 秦의 國君으로 秦昭襄王이라고도 한다. 기원전 306~250년 재위. 秦惠文王의 아들이고 秦武王의 동생으로서, 秦武王이 죽자 동생들과 왕위쟁탈전 끝에 승리하여 등극한 후, 張儀와 白起를 등용하여 강력한 부국강병책과 외교정책을 추진하였다. 기원전 260年 趙와 長平之戰에서 승리함으로써 천하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秦昭王은 기원전 256년에는 東周를 멸망시켰는데, 이 때문에 史書에서는 그를 폄하하는 표현들이 많이 나타나는데, 단순히 秦昭王으로 簡稱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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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白起: 戰國時代 秦國의 名將으로서 公孫起라고도 한다. 郿縣(현재 陝西省 郿縣 常興鎮 白家村) 출신으로, 秦昭王 13년(전294) 左庶長으로 韓의 新城을 공격한 이래 30여 년 동안 70餘城을 정복하였는데, 伊闕之戰, 長平之戰 등의 승리가 유명하다. 戰功으로 武安君으로 봉해졌는데, 秦昭王 49년(전257) 邯鄲의 전투에서 실패하고 돌아왔을 때, 다시 출격하라는 昭王의 명령에 병을 칭하고 따르지 않자, 昭王이 노하여 白起의 관직을 박탈하고 士兵으로 咸陽에서 축출하였다. 西門을 벗어나 杜郵(현 陝西省 咸陽東北)에 이르렀을 때 昭王은 使者를 보내 劍을 내리고 자결을 명하니, 죽기 전에 白起는 항복한 적군을 과격하게 살해한 것을 참회하였다고 한다. 秦昭王 50년(전256) 11월인데, 秦人은 이를 가련히 여겨 鄉邑에서 모두 제사를 지내 주었다. 白起에 관한 기사는 『史記』 「白起王翦列傳」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司馬遷의 먼 선조인 司馬靳 역시 白起와 함께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杜郵에서 함께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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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黔中郡: 秦 昭王 때 白起가 蠻夷를 정복하여 설치한 郡으로, 후에 楚國을 멸망시키고 沅陵 一带, 즉 湘江流域을 떼어 長沙國을 설치하였다. 漢代에는 武陵郡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현재의 湖南 北部와 西部일대를 포괄하고 郡治는 常德 沅陵일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실재와 위치, 존립기간과 지역, 그리고 이른바 ‘洞庭郡’과의 관계에 대해 많은 異論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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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武陵郡: 漢高祖시에 처음 秦代 黔中郡에 武陵郡을 설치하였다가 곧바로 다시 ‘義陵郡’으로 개명하였는데, 王莽시 建平으로 하였다가, 後漢代 武陵으로 복원하여 이후 계속 사용되었다. 그 改置 시기에 대해서는 사료상의 여러 가지 차이가 있어 확정하기 어려운데, 前漢代에는 武陵 혹은 義陵이 혼용되고 있었다. 漢初 武陵郡은 13개 縣으로 구성되었는데, 현재 湖北省 북부와 貴州省 서부, 四川省 南東部를 포괄하고 있다. 義陵郡으로 불리게 된 것은 項羽가 義帝를 郴에서 살해하자, 武陵人들이 소복을 입고 屈亭에서 哭을 하였다는 말을 漢高祖가 듣고 이곳을 ‘義陵’이라고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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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0)
    賨布: 李賢注에서는 『說文解字』를 인용하여 南蠻의 賦라 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晋代 戶調之式이다. 戶調之式에서는 “丁男之戶, 歲輸絹三匹, 緜三斤, 女及次丁男爲戶者半輸. 其諸邊郡或三分之二, 遠者三分之一. 夷人輸賨布, 戶一匹, 遠者或一丈(『晉書』 卷26, 「食貨志」).”로 규정되어 있는데, 夷人賨布가 戶 1匹이라고 하여, 賨布는 전국시대 이래 1匹로 고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戰國末과 晋代의 조세제도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으로, 州郡民에 대한 조세로서 戶를 기준으로 하는 戶調는 西晋代 제도화되었고, 秦漢代에는 口賦와 算賦가 조세의 기본이었기 때문에, 西晋의 戶調는 戰國末부터 이민족에 대해 戶단위로 부과하는 賨布와는 그 성격이 동일하지 않다. 戰國末 秦漢代 賨布는 당시 州郡民에 부과되는 口賦와 算賦에 대치되는 것으로, 晋代 州郡民에 대한 戶調가 정착되면서 異民族에 대한 賨布를 이 범주로 제도화한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板楯蠻 등 일부 종족들이 唐代까지 免役을 주장한 것은 賨布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後漢書疏證』 卷12에서 沈欽韓은 『北史』 卷95 「蠻傳」의 “獠者蓋南蠻之別種. ……能爲細布 色至鮮淨”과 『唐六典』 卷3 「尙書戶部」의 “涪州連頭獠布”를 賓布와 연결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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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평왕(平王), 진문후(晉文侯), 채공후(蔡共侯), 초무왕(楚武王), 굴하(屈瑕), 장왕(莊王), 공왕(恭王), 오기(吳起), 도왕(悼王), 진소왕(秦昭王), 백기(白起)
지명
나자(羅子), , , 초국(楚國), 언릉(鄢陵), 진(晉), 동정(洞庭), 창오(蒼梧), , 검중군(黔中郡), 한(漢), 무릉군(武陵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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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光武帝)때 만이가 번성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함 자료번호 : jo.k_0003_0116_001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