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호(趙胡)가 태자 조영제(趙嬰齊)를 한에 입조시켰으나 이후 병을 핑계대며 자신은 천자를 알현하지 않음
천자가 엄조(嚴助)
주 001를 보내 한 조정의 뜻을 알리자 남월왕(南粤王) 호(胡)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천자께서주 002군사를 일으켜 민월(閩粤)을 토벌하셨으니, 죽어도 그 은덕에 보답할 길이 없사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곧이어 태자 영제(嬰齊)를 보내 입조시켜 천자를 숙위(宿衛)하도록 하였다. 호가 엄조에게 말하기를, “나라가 적에게 침략당한 지 이제 얼마 되지 않았으니 사신은 먼저 돌아가시오. 저 호(胡)는 가까운 시일 내에 행장을 꾸려 입조하여 천자를 알현토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그런데 엄조가 떠나자 남월의 대신들이 호에게 간언하기를, “한(漢)이 군사를 일으켜 영(郢)을 주살하여 놀랐는데, 또다시 [왕께서] 입조하기 위해 한(漢)에 간다면 이 역시 남월에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입니다.주 003또 선왕(先王)주 004께서 옛적에 하신 말씀이, 천자를 섬기되 예를 잃지 않도록 힘쓸 뿐이라 하셨습니다. 요컨대 사신의 달콤한 말에 기꺼워하며[怵好語]주 005입조하여 알현할 것까지는 없다는 말입니다. 입조하여 천자를 알현하러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으니 이는 망국(亡國)의 지름길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호는 병을 핑계삼아 결국 입조하여 천자를 알현하지 않았다. 그 후 10여 년이 흘러 호는 진짜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자 태자인 영제(嬰齊)가 귀국을 청하였다. 호가 죽자[薨] 그 시호(諡號)를 문왕(文王)이라 하였다.주 006
각주 006)
고대 예법에는 등급에 따라 죽음도 구별했는데, 제후가 죽었을 때 薨이라 한다. 『禮記』「曲禮下」에 “天子死曰崩, 諸侯曰薨, 大夫曰卒, 士曰不祿, 庶人曰死”라고 하였다. 趙胡의 묘가 1983년 6월 현재 廣州市 象崗山에서 발견되었는데, 수천 건에 달하는 부장품이 출토되었고 그중에 ‘文帝行璽’라고 새겨진 龍紐金印이 출토되었다. 이것으로 남월왕이 국내에서는 여전히 帝號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출토기물에 새겨진 명문은 묘주가 趙眜이라고 되어 있는데, 麥英豪, 黃展岳 등 다수 학자들이 趙眜이 『史記』의 趙胡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혹자는 이를 부정하고 있어(吳海貴, 「象崗南越王墓主新考」, 『考古與文物』, 2000-3) 아직 정론은 없는 실정이다. 남월왕묘 발굴현황에 대해서는 廣州象崗漢墓發掘隊, 「西漢南越王墓發掘初步報告」, 『考古』 1984-3을 참조.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고대 예법에는 등급에 따라 죽음도 구별했는데, 제후가 죽었을 때 薨이라 한다. 『禮記』「曲禮下」에 “天子死曰崩, 諸侯曰薨, 大夫曰卒, 士曰不祿, 庶人曰死”라고 하였다. 趙胡의 묘가 1983년 6월 현재 廣州市 象崗山에서 발견되었는데, 수천 건에 달하는 부장품이 출토되었고 그중에 ‘文帝行璽’라고 새겨진 龍紐金印이 출토되었다. 이것으로 남월왕이 국내에서는 여전히 帝號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출토기물에 새겨진 명문은 묘주가 趙眜이라고 되어 있는데, 麥英豪, 黃展岳 등 다수 학자들이 趙眜이 『史記』의 趙胡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혹자는 이를 부정하고 있어(吳海貴, 「象崗南越王墓主新考」, 『考古與文物』, 2000-3) 아직 정론은 없는 실정이다. 남월왕묘 발굴현황에 대해서는 廣州象崗漢墓發掘隊, 「西漢南越王墓發掘初步報告」, 『考古』 1984-3을 참조.
색인어
- 이름
- 엄조(嚴助), 호(胡), 영제(嬰齊), 호, 엄조, 호(胡), 엄조, 호, 영(郢), 호, 호, 영제(嬰齊), 호, 문왕(文王)
- 지명
- 한, 남월, 한(漢), 한(漢), 남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