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秦), 진(晉)이 강성했을 때 존재한 여러 이민족을 설명
이 무렵 진(秦)나라와 진(晉)나라가 강한 나라였다.주 001
진나라의 문공은 융적을 몰아내 [그들을] 하서(河西)
주 002의 은수(圁水)
주 003와 낙수
주 004사이에 살게 하고 적적(赤翟)주 005
각주 005)
, 백적(白翟)주 006이라 불렀다. [또], 진(秦)나라의 목공(穆公)은 유여(由余)
주 007를 얻어 서융의 여덟 개 나라주 008가 진나라에 복속되게 했다. 따라서 농[산](隴山)
주 009의 서쪽에 면저(緜諸)주 010, 곤융(緄戎)주 011, 적환(翟䝠)주 012등의 융이 있었고, 기산, 양산(梁山)
주 013, 경수, 칠수(漆水)
주 014이북에는 의거(義渠)주 015, 대려(大荔)주 016, 오지(烏氏)주 017, 후연(胊衍)주 018등의 융이 있었다. 그리고 진(晉)나라의 북쪽에 임호(林胡)주 019赤翟 : 고대 종족 명칭으로 ‘赤狄’이라고도 한다. 春秋時代 狄人의 하나이다. 그들의 분포지역은 대체적으로 지금의 山西省 長治縣 북부에 해당되는데, 이곳에서 晉나라 사람과 섞여 살았다. 그들이 붉은 색 옷을 입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기원전 6세기경에 晉나라에 복속되었다. 이들과 관련하여 『左傳』 宣公 16年조에 “晉師滅赤狄潞氏”라는 기록이 있다. 과거에 赤翟이 山西省 長治縣에 거주하였는데, 本文에서는 赤翟이 河西의 圁·洛之間에 거주한다고 했다. 이로 인해 杜預는 ‘潞’를 赤翟의 다른 종류로 보았다.
각주 019)
, 누번(樓煩)주 020林胡 : 고대 종족 명칭으로 ‘林人’, ‘儋林’이라고도 한다. 樓煩, 東胡와 함께 ‘三胡’라고 지칭된다. 戰國時代 지금의 山西省 朔縣에 거주했다. 목축과 수렵에 종사하였고, 말 키우는 데 능숙했다. 기원전 7세기 중반 晉나라의 북변에 거주하고 있었다. 기원전 5 ~ 3세기에 燕나라의 북변으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晉나라의 북변으로 이주했다. 趙나라의 肅侯(재위 전349 ~ 전326)가 군대를 보내 荏(山西省 북부)에서 대패시켰고, 武靈王이 전306년에 대파하자 그에 복속되어 공물을 바쳤다. 趙나라 孝成王(재위 전265 ~ 전244)이 李牧을 시켜 匈奴 십여 만 기를 격파할 때 이들 역시 완전히 복속되었다. 그 이후 이들은 소멸되었다. (林幹, 2003 : 45 ~ 46).
각주 020)
등의 융이 있었으며, 연나라의 북쪽에 동호(東胡)주 021樓煩 : 고대 종족 명칭으로 林胡의 서쪽에 거주하고 있었다. 春秋末에 주로 山西省 靈武縣, 岢嵐縣 등지에 살고 있었다. 이들은 騎射에 능숙하고 목축업에 종사하였다. 이후 陝北과 內蒙古 남부지역에서 활동하다가 秦나라 말기 匈奴에게 정복되었다. 이후에 지금의 內蒙古 오르도스 지역으로 이주했다가 漢武帝 元朔 2년(전127)에 衛靑이 이들을 격파하였다. 이런 종족명으로의 해석과 달리 『史記索隱』에서는 이것을 縣의 명칭으로 해석하고 있다. 縣으로서의 樓煩은 원래 異民族의 땅으로 漢代에는 雁門郡에 속했다. 이곳은 지금의 山西省 神池, 五寨 등지에 해당한다. (林幹, 2003 : 46 ~ 47).
각주 021)
, 산융 등이 있었다. [그들은] 각각 계곡에 흩어져 살면서 나름의 군장(君長)이 있어 가끔씩 무리를 이룬 것이 백여 개의 융(戎)주 022이었는데, 서로 하나로 [묶이지는] 않았다.東胡 : 고대 종족 명칭이다. 匈奴의 동쪽에 거주했기 때문에 東胡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長成 동북의 광활한 범위에 걸쳐 살았고, 목축업에 주로 종사하였다. 春秋戰國시대에는 남으로 燕나라와 접했다. 燕나라에게 패배해 북쪽의 遼河 상류지역으로 이주했다. 秦나라 말기에 東胡가 다시 강해졌지만 匈奴의 冒頓單于에게 패배하여 대부분이 그에 병합되었다. 이들은 이후에 등장하는 烏丸과 鮮卑의 조상으로 여겨진다. 그들의 습속은 水草를 따라 다니고 고정적인 주거가 없었다. 아비의 이름을 성으로 삼았고, 부자 남녀가 모두 머리를 깎아서 가볍고 편안했다. (林幹, 1995 : 9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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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9)
林胡 : 고대 종족 명칭으로 ‘林人’, ‘儋林’이라고도 한다. 樓煩, 東胡와 함께 ‘三胡’라고 지칭된다. 戰國時代 지금의 山西省 朔縣에 거주했다. 목축과 수렵에 종사하였고, 말 키우는 데 능숙했다. 기원전 7세기 중반 晉나라의 북변에 거주하고 있었다. 기원전 5 ~ 3세기에 燕나라의 북변으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晉나라의 북변으로 이주했다. 趙나라의 肅侯(재위 전349 ~ 전326)가 군대를 보내 荏(山西省 북부)에서 대패시켰고, 武靈王이 전306년에 대파하자 그에 복속되어 공물을 바쳤다. 趙나라 孝成王(재위 전265 ~ 전244)이 李牧을 시켜 匈奴 십여 만 기를 격파할 때 이들 역시 완전히 복속되었다. 그 이후 이들은 소멸되었다. (林幹, 2003 : 45 ~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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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20)
樓煩 : 고대 종족 명칭으로 林胡의 서쪽에 거주하고 있었다. 春秋末에 주로 山西省 靈武縣, 岢嵐縣 등지에 살고 있었다. 이들은 騎射에 능숙하고 목축업에 종사하였다. 이후 陝北과 內蒙古 남부지역에서 활동하다가 秦나라 말기 匈奴에게 정복되었다. 이후에 지금의 內蒙古 오르도스 지역으로 이주했다가 漢武帝 元朔 2년(전127)에 衛靑이 이들을 격파하였다. 이런 종족명으로의 해석과 달리 『史記索隱』에서는 이것을 縣의 명칭으로 해석하고 있다. 縣으로서의 樓煩은 원래 異民族의 땅으로 漢代에는 雁門郡에 속했다. 이곳은 지금의 山西省 神池, 五寨 등지에 해당한다. (林幹, 2003 : 46 ~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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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21)
東胡 : 고대 종족 명칭이다. 匈奴의 동쪽에 거주했기 때문에 東胡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長成 동북의 광활한 범위에 걸쳐 살았고, 목축업에 주로 종사하였다. 春秋戰國시대에는 남으로 燕나라와 접했다. 燕나라에게 패배해 북쪽의 遼河 상류지역으로 이주했다. 秦나라 말기에 東胡가 다시 강해졌지만 匈奴의 冒頓單于에게 패배하여 대부분이 그에 병합되었다. 이들은 이후에 등장하는 烏丸과 鮮卑의 조상으로 여겨진다. 그들의 습속은 水草를 따라 다니고 고정적인 주거가 없었다. 아비의 이름을 성으로 삼았고, 부자 남녀가 모두 머리를 깎아서 가볍고 편안했다. (林幹, 1995 : 9 ~ 23).
- 각주 022)
색인어
- 이름
- 문공, 목공(穆公), 유여(由余)
- 지명
- 진(秦)나라, 진(晉)나라, 진나라, 하서(河西), 은수(圁水), 낙수, 진(秦)나라, 진나라, 농[산](隴山), 기산, 양산(梁山), 경수, 칠수(漆水), 진(晉)나라, 연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