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 보리소비치 공 각하
Милостивый Государь Князь Алексей Борисович
№50с.ж. 1896년 2월 1일
1896년 1월 26일.
№302
서울, 1895년 11월 26일.
1월 31일 석판인쇄됨.
로마노프 로스톱스키주 001 공 각하 수신
금년 11월 19일이 되자 왕후의 국상에 관한 공식 포고문이 발송되었습니다. 외국 대표들의 전체 회의에서 왕후의 죽음을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토론되었습니다. 장시간에 걸친 그러나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한 토론이 끝난 뒤 고무라주 002 씨는 왕후가 사망했다고 단언한다는 사실을 단호하게 밝혔습니다. 비록 그가 우리들에게 어느 정도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다른 이들을 따라 조기를 게양하는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 날 저는 8등관 로스포포프주 003에게 조선의 외부로 향하여 애도의 뜻을 절대 표현하지 말되, 오직 제 명의로 외부의 통지를 접수했으며, 왕후 시해 사건에 관한 모든 상세한 사항을 가장 조속한 시일 내에 저도 받아볼 수 있기만을 바란다는 내용을 외부대신에게 전달만 하라고 하명했습니다.
로스포포프 씨는 외부에서 프랑스 대표를 제외한 모든 외국 대표들을 만나고 난 뒤, 외부대신의 답변 마지막 부분에서야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영국 대표의 말을 빌어서 그 내용을 모두 저에게 전달해 주었습니다. 즉 조선의 외부대신은 현재까지 공포심에서 그 누구도 증언하지 않으려 하지만, 이제는 세 명의 증인이 있는바, 바로 한 명은 궁녀이며, 궁궐수비대의 장교 한 명 그리고 조선인 증인 한 명 등인데, 이들은 자신의 두 눈으로 왕후의 시체를 목격한 것으로 증언했으며, 따라서 조선 정부는 조속한 시일 내에 그녀의 유골을 매장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식의 보증이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 혹은 그저 단순하게 관심만이라도 기울일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반드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왕후의 죽음에 대한 ‘절대적’ 보증은 이미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1882년 대원군의 계획에 따라 왕후를 살해하기 위하여 이번과 정확히 동일한 형태의 궁궐 습격이 있은 후에도 왕후의 사망이 공식적으로 공표되었으며, 또한 국상으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왕후께서는 조선의 4개 신식 대대의 지휘관이며, 이번에 모반자들을 저지하기 위해 돌진하다 일본인들에 의하여 살해된 홍주 004에 의하여 구출되셨습니다. 이번에도 왕후께서는 죽음을 피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몇 가지 간접적인 징조들이 이런 희망을 갖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런 징조는 배신자 자신들의 불확실성으로서, 최근의 왕후 수색에서도 이런 불확실성이 확인되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만약 현재 왕후의 은신처가 발각될 경우, 왕후께서는 죽음을 면치 못하실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존경과 충성을 담아.
각하의 충복
베베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