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가 남도(南道)와 함께 북도(北道)를 보호하여 도호(都護)를 설치함
선제(宣帝)
주 001때에 이르러 위사마(衛司馬)주 002를 보내어 선선(鄯善) 이서의 몇 나라를 감호하도록 했다. 고사(姑師)를 격파했지만 아직 진멸하지 못하여,주 003거사전왕(車師前王)과 거사후왕(車師後王) 및 산북(山北)의 여섯 나라로 나뉘어졌다.주 004
각주 004)
당시 한나라는 오로지 남도만 보호했을 뿐 북도까지 모두 장악하지는 못했는데, 그래도 흉노는 스스로 불안해했다. 그 후 일축왕(日逐王)이 선우에게 반란을 일으켜 무리를 이끌고 투항해 오니, 선선 이서[의 지역]을 감호하는 사자(使者)주 005인 정길(鄭吉)이 그를 맞이하였다. 그가 한나라에 오니 일축왕을 봉하여 귀덕후(歸德侯)로 삼고 정길은 안원후(安遠侯)로 삼았다. 그 해는 신작(神爵) 3년(전59)이었다.주 006이에 정길로 하여금 북도도 함께 보호하라고 했고, 그런 연유로 ‘도호’(都護)주 007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도호의 시초는 정길에서부터 두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서 동복도위는 폐지되고 흉노는 더욱 약해져서 서역에 가까이 올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둔전민을 이주시켜 북서건(北胥鞬)주 008에서 경작토록 하고 사차의 땅을 나누어주 009[주었다]. 둔전교위(屯田校尉)가 처음으로 도호에 소속하게 되었다. 도호는 오손과 강거와 여러 외국의 동정을 독찰(督察)주 010하고 변고가 생기면 보고했다. 평안으로 다스릴 수 있으면 평안으로 다스리고[安輯],주 011공격할 만하면 공격했다.주 012도호의 치소는 오루성(烏壘城)이었는데,주 013양관에서 2,738리 떨어져 있고 거리(渠犁)의 전관(田官)과는 서로 가까웠다.주 014토지는 비옥하고 서역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니, 이런 연유로 도호의 치소가 [그곳에] 두어진 것이다.姑師와 車師 : 嶋崎昌(1977 : 3-58)의 연구에 따르면 알타이어 계통으로서 姑師(혹은 車師)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집단이 언제부터인가 율두즈 계곡에서 바르쿨 방면에 걸친 천산산맥 동부지역에 살다가 점차 분열적 경향을 보이며 주변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의 中核은 투르판 분지와 그 북쪽의 천산산록에 있었고 그 위치가 서역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둘러싸고 한과 흉노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宣帝時에 이르러 한나라가 투르판 분지에 屯田을 실시함으로써 일단 그 지역을 영향권 하에 넣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흉노 측의 집요한 공격으로 말미암아 車師屯田은 포기되고, 그곳의 車師人들은 渠犁로 이주되었다. 전67년 흉노는 車師王 兜莫을 내세워 山北의 車師人들을 東遷시키자, 한나라는 전63년경 軍宿을 車師王으로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車師前王과 車師後王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위의 본문에서 서술되듯이 廣義의 車師人들은 다시 나뉘어져 山北六國(蒲類前後國, 東西且彌國, 卑陸前後國)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흉노의 내분으로 日逐王이 투항하고 기원전 60년에 西域都護가 설치되면서, 渠犁로 이주했던 車師인들이 투르판 지역으로 돌아와 車師前王國이 형성되었고 흉노가 서역의 도시들에 徵稅를 위해 설치했던 童僕都尉도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漢은 元帝 初元元年 즉 전48년에 車師前王國의 交河(高昌壁)에 戊己校尉를 배치하고 屯田을 실시하며 흉노의 남하를 견제하도록 했다. 한편 匈奴도 東遷시킨 車師人들을 山北으로 다시 이주시켜 車師後王國을 형성하였다. 車師前王國의 王治는 交河城(현재 신강 투르판 西北의 交河故城址)이었고, 車師後王國의 王治는 務涂谷(현재 신강 吉木薩爾 南泉子街 일대)이었다. 일찍이 松田壽男은 務涂谷을 Jimsa 남쪽에 있는 Pa-no-p’a溪谷으로 비정했다(嶋崎昌, 1977 : 8). 또한 車師後王國의 四至轄境, 주요 城鎭(務涂谷, 金滿城, 疏勒城 등)의 方位, 國王의 世系와 주요 職官들, 漢과의 외교관계 및 왕국의 소멸과정 등에 관해서는 孟凡人(1985 : 19-48)의 상세한 연구가 있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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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4)
姑師와 車師 : 嶋崎昌(1977 : 3-58)의 연구에 따르면 알타이어 계통으로서 姑師(혹은 車師)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집단이 언제부터인가 율두즈 계곡에서 바르쿨 방면에 걸친 천산산맥 동부지역에 살다가 점차 분열적 경향을 보이며 주변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의 中核은 투르판 분지와 그 북쪽의 천산산록에 있었고 그 위치가 서역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둘러싸고 한과 흉노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宣帝時에 이르러 한나라가 투르판 분지에 屯田을 실시함으로써 일단 그 지역을 영향권 하에 넣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흉노 측의 집요한 공격으로 말미암아 車師屯田은 포기되고, 그곳의 車師人들은 渠犁로 이주되었다. 전67년 흉노는 車師王 兜莫을 내세워 山北의 車師人들을 東遷시키자, 한나라는 전63년경 軍宿을 車師王으로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車師前王과 車師後王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위의 본문에서 서술되듯이 廣義의 車師人들은 다시 나뉘어져 山北六國(蒲類前後國, 東西且彌國, 卑陸前後國)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흉노의 내분으로 日逐王이 투항하고 기원전 60년에 西域都護가 설치되면서, 渠犁로 이주했던 車師인들이 투르판 지역으로 돌아와 車師前王國이 형성되었고 흉노가 서역의 도시들에 徵稅를 위해 설치했던 童僕都尉도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漢은 元帝 初元元年 즉 전48년에 車師前王國의 交河(高昌壁)에 戊己校尉를 배치하고 屯田을 실시하며 흉노의 남하를 견제하도록 했다. 한편 匈奴도 東遷시킨 車師人들을 山北으로 다시 이주시켜 車師後王國을 형성하였다. 車師前王國의 王治는 交河城(현재 신강 투르판 西北의 交河故城址)이었고, 車師後王國의 王治는 務涂谷(현재 신강 吉木薩爾 南泉子街 일대)이었다. 일찍이 松田壽男은 務涂谷을 Jimsa 남쪽에 있는 Pa-no-p’a溪谷으로 비정했다(嶋崎昌, 1977 : 8). 또한 車師後王國의 四至轄境, 주요 城鎭(務涂谷, 金滿城, 疏勒城 등)의 方位, 國王의 世系와 주요 職官들, 漢과의 외교관계 및 왕국의 소멸과정 등에 관해서는 孟凡人(1985 : 19-48)의 상세한 연구가 있다.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010)
- 각주 011)
- 각주 012)
- 각주 013)
- 각주 014)
색인어
- 이름
- 선제(宣帝), 정길(鄭吉), 귀덕후(歸德侯), 정길, 안원후(安遠侯), 정길, 정길
- 지명
- 선선(鄯善), 고사(姑師), 한나라, 선선, 한나라, 사차, 오손, 강거, 오루성(烏壘城), 거리(渠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