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송지주 : 선비의 기원과 단석괴(檀石槐) 등장 후의 역사에 대한 설명
[배송지주] 『위서(魏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비(鮮卑)주 001
중국의 것과 다른 [선비의] 짐승들로는주 007야마(野馬), 완양(羱羊), 주 008단우(端牛)주 009가 있었다. 단우의 뿔로 활을 만드는데 사용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각단(角端)주 485이라 불렀다. 또 초(貂), 주 011놜(豽), 주 012혼자(鼲子)주 013가 있었는데, 가죽과 털이 부드럽고 연했기 때문에 천하(天下)에서는 품질 좋은 갖옷으로 여겼다.
선비인들은 [흉노의] 묵특[선우]에게 격파된 이후주 014멀리 요동의 새외로 달아나 숨었으며 다른 나라들과 서로 우열을 다투지 않았으므로 이름이 한나라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환과 서로 인접하였다.주 015 광무제 재위 초기에 남흉노의 선우[南單于]와 북흉노의 선우[北單子]가 서로 공격하여 흉노의 세력이 소모되어 [쇠약해졌고 반대로] 선비는 드디어 강성해졌다.
건무 30년(54)에 선비대인(鮮卑大人) 어구분(於仇賁)이 무리를 이끌고 궁궐을 방문하여 조공을 바치니, 주 016이에 [광무제는] 어구분을 왕으로 봉하였다.주 017영평년간(58~75)에 제융(祭肜)이 요동태수(遼東太守)가 되어 선비인들을 유혹하여 재물을 주어 배반한 오환 흠지분(欽志賁) 주 018등의 목을 베게 하였다.주 019이때 돈황[군](燉煌郡) 주 486과 주천[군](酒泉郡) 주 021
화제(和帝) 주 023때 선비대도호(鮮卑大都護) 교위(校尉) 융말외는 부중을 이끌고 오환교위 임상(任尙)을 따라 종군하여 배반한 자를 공격하였으며, [이 공으로 선우대도호] 교위 융말외를 솔중왕으로 삼았다. 상제(殤帝) 연평(延平)년간(106) 선비는 또 동쪽으로 새내(塞內)로 침입하였고 어양태수(漁陽太守) 장현(張顯)을 살해하였다. 안제 때주 024선비대인 연려양(燕荔陽)이 입조(入朝)하니주 025 한나라 [조정은 연려양에게] 선비왕(鮮卑王)의 인수와 말 세 마리가 끄는 붉은 수레를 하사하였고 오환교위가 거처하는 영(甯)주 026곁에 머무르게 하였다.주 027또 호시(胡市)를 통하게 하였고, 남북 2부(部)의 질궁(質宮)을 축조하여주 028읍락 120부[에서 보낸] 인질을 받았다.주 029이후 선비인들은 항복하기도 하고 반란하기도 했으며, 주 488흉노·오환과 함께 서로 공격하기도 했다.주 031
안제(安帝) 말년에주 032변경의 보병과 기병[步騎] 2만 인을 징발하여 방어상 중요한 곳에 나누어 주둔케 하였다. 후에 선비 8~9천의 기병이 [대군(代郡)의 속현인] 마성[현](馬城縣) 주 033의 요새를 뚫고 쳐들어와서 장리들을 살해하였다. 이에 한나라는 도료장군(度遼將軍) 등준(鄧遵)과 중랑장(中郞將)주 034
등준이 가버린 후주 489 기지건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며주 041오환교위를 마성(馬城)에서 포위하였다.주 042도료장군 경기와 유주자사(幽州刺史)주 043는 구원병을 보내 선비군의 포위망을 풀었다.주 044 기지건[의 무리는] 이미 강성하였으며, 활을 쏘는 군사가 수만 기나 되었다.주 045[기지건의 무리는] 자주 새내로 들어왔으며, 주 046 오원[군](五原郡)의 만백[현](曼栢縣) 주 047으로 진격하여 남흉노의 선우를 공격하여 좌욱건일축왕(左奧鞬日逐王)주 048을 죽였다.주 049 순제 때 다시 새내로 침입하여 대군태수(代郡太守)주 490를 살해하였다.주 051 한나라는 여양영(黎陽營)의 병사들을 보내 중산[국](中山國) 주 052에 주둔시켰고, 변경의 군병(郡兵)들을 장성 곁(塞下)에 주둔시켰으며, 다섯 영(營)의 노수(弩帥)를 파견하여 전술과 사격을 가르치게 하였다. 남흉노 선우는 보병과 기병 만여 인을 이끌고 한나라의 군대를 도와 선비의 군대를 공격하여 물리쳤다.주 053후에 오환교위 경엽이 솔중왕을 이끌고 선비를 공격하니 참수하고 포획한 것이 많았다. 이때 선비 3만여 락이 요동[군]으로 와서 항복하였다.주 054흉노와 북선우(北單于)가 도망간 후 남은 무리[餘種] 십여만 락이 요동[군]으로 와서 여러 곳에 흩어져 살았는데, 모두 스스로를 선비병(鮮卑兵)이라 불렀다.주 055
투록후(投鹿侯)가 예전에 흉노의 군대에 3년 동안 종군하는 동안 그의 아내는 집에 있었는데,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주 056 투록후가 돌아와 괴이하게 생각해서 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아내는 “일찍이 낮에 길을 가다가 천둥 치는 소리를 듣고 하늘을 우러러 보니 번개주 057가 자기 입 안에 들어와 삼키니 임신되어 버렸으며 열달이 지나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 아이는 반드시 기이함이 있으니 길러야 합니다.”주 058고 말하였다. 투록후는 아내의 말을 믿지 않았다.주 059아내는 이에 친정에 말하여 아기를 거두어 기르게 하였으며, 주 491그 이름을 단석괴(檀石槐)라고 불렀다.주 061 단석괴는 자라서 용감하고 건장하였으며 지략(智略)이 무리들 가운데 뛰어났다.주 06214~15세의 나이[에 불과했을] 때, 다른 부의 대인 복분읍(卜賁邑) 주 063이 그의 외가에서 키우는 소와 양을 훔쳐가자주 064 단석괴는 말에 채찍질하여 달려가서 그 대인을 따라잡아 공격하니주 065[적들이 놀라 단석괴를 향해] 앞으로 나오는 자가 없었으니 [단석괴는 그제서야] 잃어버린 가축들을 데리고 돌아왔다.주 066이로 말미암아 부락[의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며 복종하였다. [단석괴는] 법금(法禁)을 실시하고주 067옳고 그름을 바르게 판결하여 감히 [법금을] 범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으니 드디어 [부락의 사람들이] 그를 대인으로 추대하였다. 단석괴는 대인이 된 후에 거처[庭]주 068를 고류[현](高柳縣) 북쪽에서 300여 리 떨어진 탄한산(彈汗山) 주 069 철구수(啜仇水) 주 492곁에 두니, 주 071동부(東部)와 서부(西部)의 대인들이 모두 그에게 귀속하였다. 남쪽으로 한나라의 북변 지역을 약탈하였고, 주 072북쪽으로 정령(丁令) 주 073을 막았으며, 동쪽으로 부여(夫餘)를 물리치고 서쪽으로 오손을 공격하여 흉노의 옛 땅을 모두 점유하였으니, [선비의 영역은] 동서로 1만 2천여 리, 주 074남북으로 7천여 리에 달하였고 산천과 수택(水澤), 염지(鹽池)를 망라하여 영토가 넓었다.주 075
한나라는 단석괴[의 부상을] 걱정하여 환제(桓帝) 주 076
[단석괴는] 스스로 [선비의 땅]을 중부(中部)·동부(東部)·서부(西部) 3부(部)로 나누었다.주 079 우북평[군]부터 동쪽으로 요동[군]에 이르며, 부여 및 예맥(濊貊)과 인접하는 지역을 동부로 삼았는데, 20여 읍(邑)이 있었으며, [동부의] 대인에는 미가(彌加), 궐기(厥機), 소리(素利), 괴두(槐頭) 주 493가 있었다.주 081 우북평[군]부터 서쪽으로 상곡[군]에 이르는 지역을 중부로 삼았는데, 10여 읍이 있었고 가최(柯最), 궐거(闕居), 모용(慕容) 주 082등[이라 불리는 대인들]이 대수(大帥)였다.주 083 상곡[군]의 서쪽에서 돈황[군](燉煌郡)과 오손에 이르는 지역을 서부로 삼았는데, 20여 읍이 있었고, 치건락라(置鞬落羅), 주 084 일률추연(日律推演), 주 085 연려유(宴荔游) 주 086등 [이라 불리는 대인들]이 대수(大帥)가 되었다.주 087이들은 모두 단석괴에 제어되고 속하였다.주 088
영제 때 이르러 단석괴는 유주와 병주(幷州) 2주를 크게 약탈하였다. 변경의 제군(諸郡)은 [선비의 침입과 노략의] 해독을 입지 않는 해가 없었다.주 089희평(熹平) 6년(177)에 [영제는] 호오환교위(護烏丸校尉)주 494 하육(夏育)과 파선비중랑장(破鮮卑中郞將) 전안(田晏), 흉노중랑장(匈奴中郞將) 장민(臧旻)을 보내 남흉노의 선우와 함께 안문새(鴈門塞)를 나가 세 갈래 길로 함께 진격하여 2천여 리를 빠르게 진군하여 선비를 정벌하게 하였다.주 091
선비의 무리는 나날이 많아져서주 093농경과 목축, 사냥으로 족히 식량을 조달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주 094후에 단석괴는 순시하며 돌아다니다가 오후진수(烏侯秦水) 주 095가에 이르렀는데, 오후진수는 면적이 수백 리에 이르고 물이 깨끗하고 맑았으나 흐르지 않았고, 물 속에 물고기가 있으나 능히 잡지 못하였다.주 096[단석괴는] 한인(汗人)주 097들이 물고기를 그물로 잡는 데 능하다는 정보를 이전에 들었다. 이때 단석괴는 동쪽으로 한국(汗國) 주 098을 공격하여 천여 가(家)를 생포하여 오후진수의 물가로 옮겨 두고 한인들에게 물고기를 잡도록 명하여 양식을 조달하게 하였다.주 099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오후진수의 물가에는 한인 수백 호가 여전히 남아 있다.주 495
단석괴는 나이 45세에 죽었고, 주 101아들 화련(和連)이 대를 이어 [대인으로] 즉위하였다. 화련은 재주와 힘이 아버지[인 단석괴]에 미치지 못하였을 뿐더러, 탐욕스럽고 음탕하였으며, 주 102소송과 법의 판결이 공평하지 못하자 등을 돌린 무리들이 반(半)이나 되었다.주 103 영제(靈帝) 말년에 여러 차례 침략하고 노략질하여 북지[군](北地郡) 주 104을 공격하였는데, 쇠뇌를 잘 쏘는 북지군의 서인(庶人)이 쇠뇌를 쏘아 화련을 맞추니 화련은 바로 즉사하였다.주 105 화련의 아들 건만(騫曼)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주 106형의 아들 괴두(魁頭)가 대신 대인이 되었다.주 107 괴두가 대인이 된 후, 건만이 자라 어른이 되어 괴두와 나라를 다투게 되자주 108무리들은 떨어져 나가 흩어져 버렸다. 괴두가 죽고 아우인 보도근이 대신 즉위하였다.주 109 단석괴가 죽은 이후에 여러 대인들은 대대로 대인의 자리를 세습하게 되었다.주 496
각주 001)
역시 동호의 남은 무리들인데, 따로 선비산(鮮卑山)
주 002에 의존하여 [살았기 때문에] 불려진 명칭이었다.주 003선비의 언어와 습속은 오환과 같다. 선비의 땅은 동쪽으로 요수(遼水)와 접하고 서쪽으로 서성(西城)주 004에 이르렀다. 해마다 삼월에 큰 모임을 열어 물가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주 005[여자들은] 시집가고 [남자들은] 장가갔으며, [결혼하는 사람들은] 머리를 깎고 잔치에 참가하였다.주 006
鮮卑:북아시아의 유목민 집단이며, 東胡의 支派이다. 처음에 鮮卑山 부근에 모여 살아 ‘鮮卑’라고 명명되었다. 후에 呼倫池 부근으로 이동하였고 다시 陰山 일대로 이동하여 다른 種族과 접촉하였다. 檀石槐가 鮮卑의 각 부족을 통합하였고, 옛날의 흉노에 필적하는 유목제국을 세웠다. 檀石槐 사후 분열되었으나, 軻比能이 다시 鮮卑 각 부족을 규합하였다. 三國 魏 靑龍 3년(235)에 軻比能이 魏의 자객에게 살해되어 鮮卑는 분열되었고, 후에 黃河 유역으로 이주하였다. 兩晉·南北朝時代에 慕容部가 前燕·後燕·西燕·南燕 등을, 乞伏部가 西秦을, 禿跋部가 南涼을, 拓跋部가 北魏를 세웠다.
중국의 것과 다른 [선비의] 짐승들로는주 007야마(野馬), 완양(羱羊), 주 008단우(端牛)주 009가 있었다. 단우의 뿔로 활을 만드는데 사용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각단(角端)주 485이라 불렀다. 또 초(貂), 주 011놜(豽), 주 012혼자(鼲子)주 013가 있었는데, 가죽과 털이 부드럽고 연했기 때문에 천하(天下)에서는 품질 좋은 갖옷으로 여겼다.
선비인들은 [흉노의] 묵특[선우]에게 격파된 이후주 014멀리 요동의 새외로 달아나 숨었으며 다른 나라들과 서로 우열을 다투지 않았으므로 이름이 한나라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환과 서로 인접하였다.주 015 광무제 재위 초기에 남흉노의 선우[南單于]와 북흉노의 선우[北單子]가 서로 공격하여 흉노의 세력이 소모되어 [쇠약해졌고 반대로] 선비는 드디어 강성해졌다.
건무 30년(54)에 선비대인(鮮卑大人) 어구분(於仇賁)이 무리를 이끌고 궁궐을 방문하여 조공을 바치니, 주 016이에 [광무제는] 어구분을 왕으로 봉하였다.주 017영평년간(58~75)에 제융(祭肜)이 요동태수(遼東太守)가 되어 선비인들을 유혹하여 재물을 주어 배반한 오환 흠지분(欽志賁) 주 018등의 목을 베게 하였다.주 019이때 돈황[군](燉煌郡) 주 486과 주천[군](酒泉郡) 주 021
각주 021)
동쪽에 있던 선비의 읍락(邑落) 대인들은 모두 요동[군](遼東郡)을 방문하여 상으로 준 물품(賞賜)를 받았다.주 022
청주(靑州)와 서주(徐州)의 두 개 주에서 전(錢)을 지급하였는데, 해마다 2억 7천만 [전]을 [요동군으로 보내는 액수로] 규정하였다.酒泉郡:前漢 元狩 2년(전121) 匈奴의 昆邪王이 항복한 후 설치되었다. 郡治所 城 아래에 泉이 있었는데, 泉의 맛이 술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治所는 祿福縣인데, 晉代 福祿縣으로 改稱되었고, 隋代 酒泉縣으로 바뀌었다. 관할구역은 현재 甘肅省 河西回廊 서부에 해당한다. 일설에 따르면 元鼎 2~3년 사이(전115~114), 혹은 元鼎 6년 酒泉郡이 처음 설치되었으며, 관할구역은 河西回廊 전체였다고 한다. 후에 武威郡과 酒泉郡을 분할하여 張掖郡과 敦煌郡을 설치하였는데, 관할구역은 현재 甘肅省 疏勒河 以東, 高合縣 以西의 지역이었다. 後漢時代 涼州에 속했다.
화제(和帝) 주 023때 선비대도호(鮮卑大都護) 교위(校尉) 융말외는 부중을 이끌고 오환교위 임상(任尙)을 따라 종군하여 배반한 자를 공격하였으며, [이 공으로 선우대도호] 교위 융말외를 솔중왕으로 삼았다. 상제(殤帝) 연평(延平)년간(106) 선비는 또 동쪽으로 새내(塞內)로 침입하였고 어양태수(漁陽太守) 장현(張顯)을 살해하였다. 안제 때주 024선비대인 연려양(燕荔陽)이 입조(入朝)하니주 025 한나라 [조정은 연려양에게] 선비왕(鮮卑王)의 인수와 말 세 마리가 끄는 붉은 수레를 하사하였고 오환교위가 거처하는 영(甯)주 026곁에 머무르게 하였다.주 027또 호시(胡市)를 통하게 하였고, 남북 2부(部)의 질궁(質宮)을 축조하여주 028읍락 120부[에서 보낸] 인질을 받았다.주 029이후 선비인들은 항복하기도 하고 반란하기도 했으며, 주 488흉노·오환과 함께 서로 공격하기도 했다.주 031
안제(安帝) 말년에주 032변경의 보병과 기병[步騎] 2만 인을 징발하여 방어상 중요한 곳에 나누어 주둔케 하였다. 후에 선비 8~9천의 기병이 [대군(代郡)의 속현인] 마성[현](馬城縣) 주 033의 요새를 뚫고 쳐들어와서 장리들을 살해하였다. 이에 한나라는 도료장군(度遼將軍) 등준(鄧遵)과 중랑장(中郞將)주 034
각주 034)
마속(馬續)을 보내 장성(長城)을 나가서 선비[의 군대를] 추격케 하여 [선비의 군대를] 대파하였다.주 035선비 대인 오륜(烏倫)과 기지건(其至鞬) 등 7천여 인이 등준의 [군영을] 찾아 와서 항복하니, 주 036[조정에서는] 오륜을 왕으로, 기지건을 후로 봉하고주 037무늬 있는 비단주 038을 하사하였다.주 039
中郞將: 秦漢時代 禁中의 警衛를 관장한 郎中令 휘하에 설치된 中郞을 관리하기 위해 五官署·左署·右署에 두어진 장관의 명칭이다. 秩은 比二千石이며 지위는 將軍의 아래이고 합쳐서 五官中郞將이라 칭했다. 虎賁郞에 설치한 中郞將은 虎賁中郞將이라 칭하였다. 이러한 中郞將은 모두 皇帝의 侍衛를 통솔하여 좌우를 隨從하며 어떤 경우에는 禁軍을 통솔하였다. 後漢時代에는 五官中郞將 1인을 두었는데, 秩은 比二千石이었고 五官郞을 관장하였으며, 그 아래에는 五官中郞(比六百石), 五官侍郞(比四百石), 五官郎中(比三百石)을 두었다. 또 左中郞將·右中郞將·虎賁中郞將·羽林中郞將·使匈奴中郞將 등을 두었는데, 모두 光祿勳(前漢의 郎中令)에 속하였다. 後漢末에 東西南北의 四中郞將을 두었는데,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등준이 가버린 후주 489 기지건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며주 041오환교위를 마성(馬城)에서 포위하였다.주 042도료장군 경기와 유주자사(幽州刺史)주 043는 구원병을 보내 선비군의 포위망을 풀었다.주 044 기지건[의 무리는] 이미 강성하였으며, 활을 쏘는 군사가 수만 기나 되었다.주 045[기지건의 무리는] 자주 새내로 들어왔으며, 주 046 오원[군](五原郡)의 만백[현](曼栢縣) 주 047으로 진격하여 남흉노의 선우를 공격하여 좌욱건일축왕(左奧鞬日逐王)주 048을 죽였다.주 049 순제 때 다시 새내로 침입하여 대군태수(代郡太守)주 490를 살해하였다.주 051 한나라는 여양영(黎陽營)의 병사들을 보내 중산[국](中山國) 주 052에 주둔시켰고, 변경의 군병(郡兵)들을 장성 곁(塞下)에 주둔시켰으며, 다섯 영(營)의 노수(弩帥)를 파견하여 전술과 사격을 가르치게 하였다. 남흉노 선우는 보병과 기병 만여 인을 이끌고 한나라의 군대를 도와 선비의 군대를 공격하여 물리쳤다.주 053후에 오환교위 경엽이 솔중왕을 이끌고 선비를 공격하니 참수하고 포획한 것이 많았다. 이때 선비 3만여 락이 요동[군]으로 와서 항복하였다.주 054흉노와 북선우(北單于)가 도망간 후 남은 무리[餘種] 십여만 락이 요동[군]으로 와서 여러 곳에 흩어져 살았는데, 모두 스스로를 선비병(鮮卑兵)이라 불렀다.주 055
각주 055)
『後漢書』에 따르면 匈奴 집단이 ‘鮮卑’를 자칭한 것은 和帝 永元년간(89~105)의 일이다. 또 원문에서는 “鮮卑兵”이라고 스스로 불렀다고 하였는데, 『後漢書』에서는 그냥 “鮮卑”를 자칭했다고 한다. 이 구절은 유목민들의 種族과 정체성 문제를 해명하는 데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 유목민들은 본래 단일 種族이 아니라 혈연이 다른 집단들이 모인 혼성집단이었으며, 유목 부족들을 통합한 집단의 명칭을 따서 부족연합체의 명칭으로 삼았다. 이 부족연합체가 붕괴하면 복속된 부족들은 이를 이탈하여 다른 집단에 속하였다. 이때 이 집단의 명칭은 새로 속한 집단의 이름에 따르게 된다. 즉 匈奴에 복속했던 부족도 鮮卑에 속하게 되면 자신의 정체성을 匈奴가 아닌 鮮卑로 본 것이다. 金浩東은 중국사서에 보이는 여러 유목집단 혹은 유목국가들이 種族的(ethnic)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political)인 속성을 지녔다고 보았으며, 번역문의 내용이 대표적인 예라고 지적하였다(金浩東, 1993: 125~126 및 125~126의 주) 17 참조).
투록후(投鹿侯)가 예전에 흉노의 군대에 3년 동안 종군하는 동안 그의 아내는 집에 있었는데,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주 056 투록후가 돌아와 괴이하게 생각해서 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아내는 “일찍이 낮에 길을 가다가 천둥 치는 소리를 듣고 하늘을 우러러 보니 번개주 057가 자기 입 안에 들어와 삼키니 임신되어 버렸으며 열달이 지나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 아이는 반드시 기이함이 있으니 길러야 합니다.”주 058고 말하였다. 투록후는 아내의 말을 믿지 않았다.주 059아내는 이에 친정에 말하여 아기를 거두어 기르게 하였으며, 주 491그 이름을 단석괴(檀石槐)라고 불렀다.주 061 단석괴는 자라서 용감하고 건장하였으며 지략(智略)이 무리들 가운데 뛰어났다.주 06214~15세의 나이[에 불과했을] 때, 다른 부의 대인 복분읍(卜賁邑) 주 063이 그의 외가에서 키우는 소와 양을 훔쳐가자주 064 단석괴는 말에 채찍질하여 달려가서 그 대인을 따라잡아 공격하니주 065[적들이 놀라 단석괴를 향해] 앞으로 나오는 자가 없었으니 [단석괴는 그제서야] 잃어버린 가축들을 데리고 돌아왔다.주 066이로 말미암아 부락[의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며 복종하였다. [단석괴는] 법금(法禁)을 실시하고주 067옳고 그름을 바르게 판결하여 감히 [법금을] 범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으니 드디어 [부락의 사람들이] 그를 대인으로 추대하였다. 단석괴는 대인이 된 후에 거처[庭]주 068를 고류[현](高柳縣) 북쪽에서 300여 리 떨어진 탄한산(彈汗山) 주 069 철구수(啜仇水) 주 492곁에 두니, 주 071동부(東部)와 서부(西部)의 대인들이 모두 그에게 귀속하였다. 남쪽으로 한나라의 북변 지역을 약탈하였고, 주 072북쪽으로 정령(丁令) 주 073을 막았으며, 동쪽으로 부여(夫餘)를 물리치고 서쪽으로 오손을 공격하여 흉노의 옛 땅을 모두 점유하였으니, [선비의 영역은] 동서로 1만 2천여 리, 주 074남북으로 7천여 리에 달하였고 산천과 수택(水澤), 염지(鹽池)를 망라하여 영토가 넓었다.주 075
한나라는 단석괴[의 부상을] 걱정하여 환제(桓帝) 주 076
각주 076)
때 흉노중랑장 장환(張奐)을 보내 단석괴를 정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주 077이에 다시 사자를 보내 인수를 지니고 가서 단석괴를 왕으로 봉하여 단석괴와 화친하고자 하였다. 단석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북변을 침입하고 노략질함이 더욱 심해졌다.주 078桓帝(132~167;146~167):이름은 劉志이며, 章帝의 증손이다.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蠡吾侯가 되었다. 本初元年(146) 質帝 사후 梁太后와 大將軍 梁冀의 옹립으로 15세의 나이로 帝位에 올랐다. 재위기간 梁太后가 臨朝稱制하고 梁冀가 전횡하여 朝政은 혼란하고 민생이 불안하였다. 延熹 2년(159) 宦官 單超 등과 함께 모의하여 梁氏를 멸하고 單超 등 환관을 縣侯로 봉하여, 이후 권력이 宦官에게 돌아갔다. 大臣 陳蕃과 李膺 등이 太學生과 연합하여 宦官의 정치 관여에 반대하여 朋黨으로 지목되었다. 이에 조서를 내려 黨人을 체포하고 종신 禁錮시켰다. 이를 黨錮의 禍라 한다.
각주 078)
원문은 “漢患之, 桓帝時使匈奴中郎將張奐征之, 不克. 乃更遣使者齎印綬, 即封檀石槐爲王, 欲與和親. 檀石槐拒不肯受, 寇鈔滋甚.”인데, 『後漢書』에서는 “朝廷積患之, 而不能制, 遂遣使持印綬封檀石槐爲王, 欲與和親. 檀石槐不肯受, 而寇抄滋甚.”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後漢書』에는 원문 앞에 “永壽二年秋, 檀石槐遂將三四千騎寇雲中. 延熹元年, 鮮卑寇北邊. 冬, 使匈奴中郎將張奐率南單于出塞擊之, 斬首二百級. 二年, 復入鴈門, 殺數百人, 大抄掠而去. 六年夏, 千餘騎寇遼東屬國. 九年夏, 遂分騎數萬人入緣邊九郡, 並殺掠吏人, 於是復遣張奐擊之, 鮮卑乃出塞去.”라는 기사가 있다. 檀石槐가 後漢과 和親하면 後漢으로부터 막대한 재물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를 거부하고 약탈에 몰두한 것은 그가 평화보다 전쟁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和親을 하면 그의 권력기반에 큰 손실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라고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중국으로부터 물자를 획득하면 大人이 이를 재분배하여 권력을 강화할 수 있지만, 약탈은 참여자 모두에게 물자 획득의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했기 때문에 檀石槐 휘하의 鮮卑人들은 화친보다 약탈을 선호했다고 한다. 檀石槐는 이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和親대신 약탈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金浩東, 1993: 132). 바필드는 鮮卑가 “약탈-화친-약탈”의 유기적인 강온 양면책을 구사하며 중국으로부터 더 많은 물자를 획득하는 정책을 구사함과 동시에 화친보다 약탈에 의존했던 이유를 鮮卑의 느슨한 정치적 결합 때문으로 보았다. 부족의 독자성이 강했던 鮮卑의 각 집단들의 견제로 大人이 재화의 재분배 과정을 독점할 수 없었다(Barfield, 1989: 86~90).
[단석괴는] 스스로 [선비의 땅]을 중부(中部)·동부(東部)·서부(西部) 3부(部)로 나누었다.주 079 우북평[군]부터 동쪽으로 요동[군]에 이르며, 부여 및 예맥(濊貊)과 인접하는 지역을 동부로 삼았는데, 20여 읍(邑)이 있었으며, [동부의] 대인에는 미가(彌加), 궐기(厥機), 소리(素利), 괴두(槐頭) 주 493가 있었다.주 081 우북평[군]부터 서쪽으로 상곡[군]에 이르는 지역을 중부로 삼았는데, 10여 읍이 있었고 가최(柯最), 궐거(闕居), 모용(慕容) 주 082등[이라 불리는 대인들]이 대수(大帥)였다.주 083 상곡[군]의 서쪽에서 돈황[군](燉煌郡)과 오손에 이르는 지역을 서부로 삼았는데, 20여 읍이 있었고, 치건락라(置鞬落羅), 주 084 일률추연(日律推演), 주 085 연려유(宴荔游) 주 086등 [이라 불리는 대인들]이 대수(大帥)가 되었다.주 087이들은 모두 단석괴에 제어되고 속하였다.주 088
영제 때 이르러 단석괴는 유주와 병주(幷州) 2주를 크게 약탈하였다. 변경의 제군(諸郡)은 [선비의 침입과 노략의] 해독을 입지 않는 해가 없었다.주 089희평(熹平) 6년(177)에 [영제는] 호오환교위(護烏丸校尉)주 494 하육(夏育)과 파선비중랑장(破鮮卑中郞將) 전안(田晏), 흉노중랑장(匈奴中郞將) 장민(臧旻)을 보내 남흉노의 선우와 함께 안문새(鴈門塞)를 나가 세 갈래 길로 함께 진격하여 2천여 리를 빠르게 진군하여 선비를 정벌하게 하였다.주 091
각주 091)
단석괴가 부중을 이끌고 역습하니 장민 등이 패하여 달아났는데, 돌아온 병마(兵馬)는 열 가운데 하나뿐이었다.주 092
원문은 “(嘉)[熹]平六年, 遣護烏丸校尉夏育, 破鮮卑中郎將田晏, 匈奴中郎將臧旻與南單于出鴈門塞, 三道並進, 徑二千餘里征之.”인데, 『後漢書』에서는 “遂遣夏育出高柳, 田晏出雲中, 匈奴中郎將臧旻率南單于出鴈門, 各將萬騎, 三道出塞二千餘里.”라고 하였다. 『後漢書』에는 원문 앞에 “熹平三年冬, 鮮卑入北地, 太守夏育率休著屠各追擊破之. 遷育爲護烏桓校尉. 五年, 鮮卑寇幽州. 六年夏, 鮮卑寇三邊. 秋, 夏育上言:「鮮卑寇邊, 自春以來, 三十餘發, 請徵幽州諸郡兵出塞擊之, 一冬二春, 必能禽滅.」 朝廷未許. 先是護羌校尉田晏坐事論刑被原, 欲立功自效, 乃請中常侍王甫求得爲將, 甫因此議遣兵與育并力討賊. 帝乃拜晏爲破鮮卑中郎將. 大臣多有不同, 乃召百官議朝堂.”이라는 문장과 蔡邕이 鮮卑 遠征을 중지할 것을 간언한 上表가 실려 있다.
선비의 무리는 나날이 많아져서주 093농경과 목축, 사냥으로 족히 식량을 조달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주 094후에 단석괴는 순시하며 돌아다니다가 오후진수(烏侯秦水) 주 095가에 이르렀는데, 오후진수는 면적이 수백 리에 이르고 물이 깨끗하고 맑았으나 흐르지 않았고, 물 속에 물고기가 있으나 능히 잡지 못하였다.주 096[단석괴는] 한인(汗人)주 097들이 물고기를 그물로 잡는 데 능하다는 정보를 이전에 들었다. 이때 단석괴는 동쪽으로 한국(汗國) 주 098을 공격하여 천여 가(家)를 생포하여 오후진수의 물가로 옮겨 두고 한인들에게 물고기를 잡도록 명하여 양식을 조달하게 하였다.주 099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오후진수의 물가에는 한인 수백 호가 여전히 남아 있다.주 495
단석괴는 나이 45세에 죽었고, 주 101아들 화련(和連)이 대를 이어 [대인으로] 즉위하였다. 화련은 재주와 힘이 아버지[인 단석괴]에 미치지 못하였을 뿐더러, 탐욕스럽고 음탕하였으며, 주 102소송과 법의 판결이 공평하지 못하자 등을 돌린 무리들이 반(半)이나 되었다.주 103 영제(靈帝) 말년에 여러 차례 침략하고 노략질하여 북지[군](北地郡) 주 104을 공격하였는데, 쇠뇌를 잘 쏘는 북지군의 서인(庶人)이 쇠뇌를 쏘아 화련을 맞추니 화련은 바로 즉사하였다.주 105 화련의 아들 건만(騫曼)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주 106형의 아들 괴두(魁頭)가 대신 대인이 되었다.주 107 괴두가 대인이 된 후, 건만이 자라 어른이 되어 괴두와 나라를 다투게 되자주 108무리들은 떨어져 나가 흩어져 버렸다. 괴두가 죽고 아우인 보도근이 대신 즉위하였다.주 109 단석괴가 죽은 이후에 여러 대인들은 대대로 대인의 자리를 세습하게 되었다.주 496
-
각주 001)
鮮卑:북아시아의 유목민 집단이며, 東胡의 支派이다. 처음에 鮮卑山 부근에 모여 살아 ‘鮮卑’라고 명명되었다. 후에 呼倫池 부근으로 이동하였고 다시 陰山 일대로 이동하여 다른 種族과 접촉하였다. 檀石槐가 鮮卑의 각 부족을 통합하였고, 옛날의 흉노에 필적하는 유목제국을 세웠다. 檀石槐 사후 분열되었으나, 軻比能이 다시 鮮卑 각 부족을 규합하였다. 三國 魏 靑龍 3년(235)에 軻比能이 魏의 자객에게 살해되어 鮮卑는 분열되었고, 후에 黃河 유역으로 이주하였다. 兩晉·南北朝時代에 慕容部가 前燕·後燕·西燕·南燕 등을, 乞伏部가 西秦을, 禿跋部가 南涼을, 拓跋部가 北魏를 세웠다.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485)
- 각주 011)
- 각주 012)
- 각주 013)
- 각주 014)
- 각주 015)
- 각주 016)
- 각주 017)
- 각주 018)
- 각주 019)
- 각주 486)
-
각주 021)
酒泉郡:前漢 元狩 2년(전121) 匈奴의 昆邪王이 항복한 후 설치되었다. 郡治所 城 아래에 泉이 있었는데, 泉의 맛이 술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治所는 祿福縣인데, 晉代 福祿縣으로 改稱되었고, 隋代 酒泉縣으로 바뀌었다. 관할구역은 현재 甘肅省 河西回廊 서부에 해당한다. 일설에 따르면 元鼎 2~3년 사이(전115~114), 혹은 元鼎 6년 酒泉郡이 처음 설치되었으며, 관할구역은 河西回廊 전체였다고 한다. 후에 武威郡과 酒泉郡을 분할하여 張掖郡과 敦煌郡을 설치하였는데, 관할구역은 현재 甘肅省 疏勒河 以東, 高合縣 以西의 지역이었다. 後漢時代 涼州에 속했다.
- 각주 022)
- 각주 023)
- 각주 024)
- 각주 025)
- 각주 026)
- 각주 027)
- 각주 028)
- 각주 029)
- 각주 488)
- 각주 031)
- 각주 032)
- 각주 033)
-
각주 034)
中郞將: 秦漢時代 禁中의 警衛를 관장한 郎中令 휘하에 설치된 中郞을 관리하기 위해 五官署·左署·右署에 두어진 장관의 명칭이다. 秩은 比二千石이며 지위는 將軍의 아래이고 합쳐서 五官中郞將이라 칭했다. 虎賁郞에 설치한 中郞將은 虎賁中郞將이라 칭하였다. 이러한 中郞將은 모두 皇帝의 侍衛를 통솔하여 좌우를 隨從하며 어떤 경우에는 禁軍을 통솔하였다. 後漢時代에는 五官中郞將 1인을 두었는데, 秩은 比二千石이었고 五官郞을 관장하였으며, 그 아래에는 五官中郞(比六百石), 五官侍郞(比四百石), 五官郎中(比三百石)을 두었다. 또 左中郞將·右中郞將·虎賁中郞將·羽林中郞將·使匈奴中郞將 등을 두었는데, 모두 光祿勳(前漢의 郎中令)에 속하였다. 後漢末에 東西南北의 四中郞將을 두었는데,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 각주 035)
- 각주 036)
- 각주 037)
- 각주 038)
- 각주 039)
- 각주 489)
- 각주 041)
- 각주 042)
- 각주 043)
- 각주 044)
- 각주 045)
- 각주 046)
- 각주 047)
- 각주 048)
- 각주 049)
- 각주 490)
- 각주 051)
- 각주 052)
- 각주 053)
- 각주 054)
-
각주 055)
『後漢書』에 따르면 匈奴 집단이 ‘鮮卑’를 자칭한 것은 和帝 永元년간(89~105)의 일이다. 또 원문에서는 “鮮卑兵”이라고 스스로 불렀다고 하였는데, 『後漢書』에서는 그냥 “鮮卑”를 자칭했다고 한다. 이 구절은 유목민들의 種族과 정체성 문제를 해명하는 데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 유목민들은 본래 단일 種族이 아니라 혈연이 다른 집단들이 모인 혼성집단이었으며, 유목 부족들을 통합한 집단의 명칭을 따서 부족연합체의 명칭으로 삼았다. 이 부족연합체가 붕괴하면 복속된 부족들은 이를 이탈하여 다른 집단에 속하였다. 이때 이 집단의 명칭은 새로 속한 집단의 이름에 따르게 된다. 즉 匈奴에 복속했던 부족도 鮮卑에 속하게 되면 자신의 정체성을 匈奴가 아닌 鮮卑로 본 것이다. 金浩東은 중국사서에 보이는 여러 유목집단 혹은 유목국가들이 種族的(ethnic)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political)인 속성을 지녔다고 보았으며, 번역문의 내용이 대표적인 예라고 지적하였다(金浩東, 1993: 125~126 및 125~126의 주) 17 참조).
- 각주 056)
- 각주 057)
- 각주 058)
- 각주 059)
- 각주 491)
- 각주 061)
- 각주 062)
- 각주 063)
- 각주 064)
- 각주 065)
- 각주 066)
- 각주 067)
- 각주 068)
- 각주 069)
- 각주 492)
- 각주 071)
- 각주 072)
- 각주 073)
- 각주 074)
- 각주 075)
-
각주 076)
桓帝(132~167;146~167):이름은 劉志이며, 章帝의 증손이다.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蠡吾侯가 되었다. 本初元年(146) 質帝 사후 梁太后와 大將軍 梁冀의 옹립으로 15세의 나이로 帝位에 올랐다. 재위기간 梁太后가 臨朝稱制하고 梁冀가 전횡하여 朝政은 혼란하고 민생이 불안하였다. 延熹 2년(159) 宦官 單超 등과 함께 모의하여 梁氏를 멸하고 單超 등 환관을 縣侯로 봉하여, 이후 권력이 宦官에게 돌아갔다. 大臣 陳蕃과 李膺 등이 太學生과 연합하여 宦官의 정치 관여에 반대하여 朋黨으로 지목되었다. 이에 조서를 내려 黨人을 체포하고 종신 禁錮시켰다. 이를 黨錮의 禍라 한다.
- 각주 077)
-
각주 078)
원문은 “漢患之, 桓帝時使匈奴中郎將張奐征之, 不克. 乃更遣使者齎印綬, 即封檀石槐爲王, 欲與和親. 檀石槐拒不肯受, 寇鈔滋甚.”인데, 『後漢書』에서는 “朝廷積患之, 而不能制, 遂遣使持印綬封檀石槐爲王, 欲與和親. 檀石槐不肯受, 而寇抄滋甚.”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後漢書』에는 원문 앞에 “永壽二年秋, 檀石槐遂將三四千騎寇雲中. 延熹元年, 鮮卑寇北邊. 冬, 使匈奴中郎將張奐率南單于出塞擊之, 斬首二百級. 二年, 復入鴈門, 殺數百人, 大抄掠而去. 六年夏, 千餘騎寇遼東屬國. 九年夏, 遂分騎數萬人入緣邊九郡, 並殺掠吏人, 於是復遣張奐擊之, 鮮卑乃出塞去.”라는 기사가 있다. 檀石槐가 後漢과 和親하면 後漢으로부터 막대한 재물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를 거부하고 약탈에 몰두한 것은 그가 평화보다 전쟁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和親을 하면 그의 권력기반에 큰 손실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라고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중국으로부터 물자를 획득하면 大人이 이를 재분배하여 권력을 강화할 수 있지만, 약탈은 참여자 모두에게 물자 획득의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했기 때문에 檀石槐 휘하의 鮮卑人들은 화친보다 약탈을 선호했다고 한다. 檀石槐는 이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和親대신 약탈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金浩東, 1993: 132). 바필드는 鮮卑가 “약탈-화친-약탈”의 유기적인 강온 양면책을 구사하며 중국으로부터 더 많은 물자를 획득하는 정책을 구사함과 동시에 화친보다 약탈에 의존했던 이유를 鮮卑의 느슨한 정치적 결합 때문으로 보았다. 부족의 독자성이 강했던 鮮卑의 각 집단들의 견제로 大人이 재화의 재분배 과정을 독점할 수 없었다(Barfield, 1989: 86~90).
- 각주 079)
- 각주 493)
- 각주 081)
- 각주 082)
- 각주 083)
- 각주 084)
- 각주 085)
- 각주 086)
- 각주 087)
- 각주 088)
- 각주 089)
- 각주 494)
-
각주 091)
원문은 “(嘉)[熹]平六年, 遣護烏丸校尉夏育, 破鮮卑中郎將田晏, 匈奴中郎將臧旻與南單于出鴈門塞, 三道並進, 徑二千餘里征之.”인데, 『後漢書』에서는 “遂遣夏育出高柳, 田晏出雲中, 匈奴中郎將臧旻率南單于出鴈門, 各將萬騎, 三道出塞二千餘里.”라고 하였다. 『後漢書』에는 원문 앞에 “熹平三年冬, 鮮卑入北地, 太守夏育率休著屠各追擊破之. 遷育爲護烏桓校尉. 五年, 鮮卑寇幽州. 六年夏, 鮮卑寇三邊. 秋, 夏育上言:「鮮卑寇邊, 自春以來, 三十餘發, 請徵幽州諸郡兵出塞擊之, 一冬二春, 必能禽滅.」 朝廷未許. 先是護羌校尉田晏坐事論刑被原, 欲立功自效, 乃請中常侍王甫求得爲將, 甫因此議遣兵與育并力討賊. 帝乃拜晏爲破鮮卑中郎將. 大臣多有不同, 乃召百官議朝堂.”이라는 문장과 蔡邕이 鮮卑 遠征을 중지할 것을 간언한 上表가 실려 있다.
- 각주 092)
- 각주 093)
- 각주 094)
- 각주 095)
- 각주 096)
- 각주 097)
- 각주 098)
- 각주 099)
- 각주 495)
- 각주 101)
- 각주 102)
- 각주 103)
- 각주 104)
- 각주 105)
- 각주 106)
- 각주 107)
- 각주 108)
- 각주 109)
- 각주 496)
색인어
- 이름
- 배송지, 묵특[선우], 광무제, 어구분(於仇賁), 광무제, 어구분, 제융(祭肜), 흠지분(欽志賁), 화제(和帝), 융말외, 임상(任尙), 융말외, 상제(殤帝), 장현(張顯), 안제, 연려양(燕荔陽), 연려양, 안제(安帝), 등준(鄧遵), 마속(馬續), 오륜(烏倫), 기지건(其至鞬), 등준, 오륜, 기지건, 등준, 기지건, 경기, 기지건, 기지건, 순제, 경엽, 투록후(投鹿侯), 투록후, 투록후, 단석괴(檀石槐), 단석괴, 단석괴, 단석괴, 단석괴, 단석괴, 단석괴, 단석괴, 환제(桓帝), 장환(張奐), 단석괴, 단석괴, 단석괴, 단석괴, 단석괴, 미가(彌加), 궐기(厥機), 소리(素利), 괴두(槐頭), 가최(柯最), 궐거(闕居), 모용(慕容), 치건락라(置鞬落羅), 일률추연(日律推演), 연려유(宴荔游), 단석괴, 영제, 단석괴, 영제, 하육(夏育), 전안(田晏), 장민(臧旻), 단석괴, 장민, 단석괴, 단석괴, 단석괴, 단석괴, 화련(和連), 화련, 단석괴, 영제(靈帝), 화련, 화련, 화련, 건만(騫曼), 괴두(魁頭), 괴두, 건만, 괴두, 괴두, 보도근, 단석괴
- 지명
- 선비산(鮮卑山), 요수(遼水), 요동, 한나라, 요동, 돈황[군](燉煌郡), 주천[군](酒泉郡), 요동[군](遼東郡), 청주(靑州), 서주(徐州), 요동군, 어양, 한나라, 대군(代郡), 마성[현](馬城縣), 한나라, 마성(馬城), 유주, 오원[군](五原郡), 만백[현](曼栢縣), 대군, 한나라, 중산[국](中山國), 한나라, 요동[군], 요동[군], 복분읍(卜賁邑), 고류[현](高柳縣), 탄한산(彈汗山), 철구수(啜仇水), 한나라, 정령(丁令), 부여(夫餘), 오손, 한나라, 우북평[군], 요동[군], 부여, 우북평[군], 상곡[군], 상곡[군], 돈황[군](燉煌郡), 오손, 유주, 병주(幷州), 오후진수(烏侯秦水), 오후진수, 한국(汗國), 오후진수, 오후진수, 북지[군](北地郡), 북지군
- 서명
- 위서(魏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