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여성인권,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역사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제국주의 일본이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을 상대로 침략전쟁을 벌이면서 실시했던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여성들을 집단적으로 동원하여 일본군의 성노예로 이용했던 성폭력 제도였다. 중일전쟁 발발 후 일본군이 난징대학살을 일으킨 1937년 12월부터 본격화되어 일본군의 병참 부속시설로서의 성격을 가졌다.
위안소는 피로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군인들에게 ‘성병으로부터 안전한 성적 위로’를 제공할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이를 통해 일본은 군인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성병을 예방하는 한편, 현지 여성에 대한 강간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일본인 여성, 식민지 조선 및 대만 여성, 그리고 점령지의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되었다. 민족 차별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가난하면서도 교육기회나 직업기회에서 차별받은 여성들일수록 조직적인 동원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제국주의 일본의 군국주의 및 가부장제를 이념적 배경으로, 일본이 전쟁을 통해 획득한 식민지와 점령지가 있었기 때문에 시행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문제가 역사의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전쟁이 끝나고도 50여년이 흐른 뒤였다. 1980년대 후반에 ‘성폭력’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생기기 전까지 ‘성’이란 공론화하기 어려운 수치스런 화제로 치부되었고, 성적 피해는 가해자 못지않게 그 피해자 역시 가해자보다 더 사회적 냉대를 받기도 하였다. 성적 피해자에게 도덕적 비난을 돌리고 사회적 불이익을 주는 분위기 속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은 비난을 감수하거나 고통에 대해 침묵하면서 살아남아야 했다.
여성운동이 고양되던 해인 1988년, 일본의 남성들이 한국에서 성매매관광(일명 기생관광)을 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한 세미나에서 윤정옥 교수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처음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였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성매매 관광의 역사적 뿌리이며, 어느 세력에 의한 정치침탈, 경제침탈, 군사침탈이 일어나는 곳에서 언제든 일어나는 오늘날의 문제임을 역설하였다. 여성단체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 현재에도 계속되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이 되리라고 생각하였으며, 연구모임을 꾸리고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나라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촉구하는 한편, 일본정부의 사죄와 진상규명을 요구하였다.
한일 정부로부터 성의 있는 답변을 얻지 못한 여성단체들은 1990년 11월, 36개 여성시민단체가 연대하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정신대’는 일제가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 조직했던 ‘근로정신대’를 가리키는 말로서, 엄격히 따지자면 일본군 ‘위안부’와는 의미가 달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사람들은 ‘정신대’를 ‘위안부’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당시에 마을을 떠난 여성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는 상황 속에서 ‘정신대’라는 ‘처녀공출’을 한다는 소문과 전쟁터에서 여성들이 ‘몹쓸 짓’을 당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당대 사람들의 경험 속에서 만들어진 ‘정신대’= ‘위안부’라는 오해는 당시 일본군 ‘위안부’의 동원이 ‘근로동원’이나 ‘공출’, ‘취업’의 외피를 쓰고 은밀히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은밀한 성격은 일본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부책임을 부정하는 하나의 핑계가 됐다. 여성단체의 진상규명 요구에 대하여 일본정부는 정부나 군이 관여한 바가 없다는 답변만 되돌렸다. 우리나라 정부 또한 진상규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991년 8월 14일, ‘위안부’ 문제가 다시 잊혀질 것만 같은 막막한 상황에서 ‘위안부’ 피해여성 김학순은 본인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처음으로 밝혔다. “당시 당했던 일이 하도 기가 막히고 끔찍해 평생 가슴 속에만 묻어두고 살아왔지만 …… 국민 모두가 과거를 잊은 채 일본에 매달리는 것을 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고 울분을 토로하였다. 이로부터 용기를 얻은 다른 피해생존자들도 한 명, 두 명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생존자들은 문헌자료가 감추었던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림과 동시에 이 문제의 해결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하여 위안소 생활의 실태뿐만 아니라 군의 관여 또한 하나하나 드러났다. 해방 후에 겪은 외로움과 생존위기의 이야기 속에서는 성적 피해자에 대한 우리사회의 무심함을 돌아보게 했다.
일본군 ‘위안부’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지 20년이 훌쩍 넘었다. 그 사이 일본정부와 군의 관여를 입증하는 문헌자료가 발견되고 1993년에는 고노(河野) 일본 관방장관이 ‘일본군이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여한 것’을 인정하고 ‘유감’을 표명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위안부’ 피해생존자에 대한 보상금 지급과 생활지원을 시작했으며, 일본정부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이라는 민간기구를 만들어 배상이 아닌 ‘위로금’ 지급을 시도하기도 했다. ‘위안부’ 문제해결의 실마리는 일본국회의 의결을 거친 공식적인 사죄와 일본정부 차원의 배상금 지급에서부터 시작된다고 계속해서 외쳐왔지만, 2014년 현재 일본 정부의 태도는 ‘고노담화’에서도 후퇴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동안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밝혔던 한국여성 238명 가운데, 2014년 10월 현재 생존자는 55명에 불과하다. 집회, 강연, 재판 등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현장마다 중심을 지켜주던 생존자들이 더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관심도, 일본정부가 느끼는 압박도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생존자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역사교과서 왜곡반대, 전쟁반대 및 평화요구, 여성에 대한 폭력 반대 등 오늘날의 현안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이고는 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단지 과거에 끝난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벌어지고 문제이며, 어쩌면 다음 세대가 겪어야할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기록하고 전하지 않으면 역사는 잊혀지기 마련이다. 망각 속에서 역사의 비극은 되풀이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 뜻은 전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평화로운 미래를 만드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안소는 피로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군인들에게 ‘성병으로부터 안전한 성적 위로’를 제공할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이를 통해 일본은 군인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성병을 예방하는 한편, 현지 여성에 대한 강간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일본인 여성, 식민지 조선 및 대만 여성, 그리고 점령지의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되었다. 민족 차별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가난하면서도 교육기회나 직업기회에서 차별받은 여성들일수록 조직적인 동원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제국주의 일본의 군국주의 및 가부장제를 이념적 배경으로, 일본이 전쟁을 통해 획득한 식민지와 점령지가 있었기 때문에 시행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문제가 역사의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전쟁이 끝나고도 50여년이 흐른 뒤였다. 1980년대 후반에 ‘성폭력’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생기기 전까지 ‘성’이란 공론화하기 어려운 수치스런 화제로 치부되었고, 성적 피해는 가해자 못지않게 그 피해자 역시 가해자보다 더 사회적 냉대를 받기도 하였다. 성적 피해자에게 도덕적 비난을 돌리고 사회적 불이익을 주는 분위기 속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은 비난을 감수하거나 고통에 대해 침묵하면서 살아남아야 했다.
여성운동이 고양되던 해인 1988년, 일본의 남성들이 한국에서 성매매관광(일명 기생관광)을 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한 세미나에서 윤정옥 교수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처음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였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성매매 관광의 역사적 뿌리이며, 어느 세력에 의한 정치침탈, 경제침탈, 군사침탈이 일어나는 곳에서 언제든 일어나는 오늘날의 문제임을 역설하였다. 여성단체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 현재에도 계속되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이 되리라고 생각하였으며, 연구모임을 꾸리고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나라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촉구하는 한편, 일본정부의 사죄와 진상규명을 요구하였다.
한일 정부로부터 성의 있는 답변을 얻지 못한 여성단체들은 1990년 11월, 36개 여성시민단체가 연대하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정신대’는 일제가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 조직했던 ‘근로정신대’를 가리키는 말로서, 엄격히 따지자면 일본군 ‘위안부’와는 의미가 달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사람들은 ‘정신대’를 ‘위안부’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당시에 마을을 떠난 여성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는 상황 속에서 ‘정신대’라는 ‘처녀공출’을 한다는 소문과 전쟁터에서 여성들이 ‘몹쓸 짓’을 당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당대 사람들의 경험 속에서 만들어진 ‘정신대’= ‘위안부’라는 오해는 당시 일본군 ‘위안부’의 동원이 ‘근로동원’이나 ‘공출’, ‘취업’의 외피를 쓰고 은밀히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은밀한 성격은 일본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부책임을 부정하는 하나의 핑계가 됐다. 여성단체의 진상규명 요구에 대하여 일본정부는 정부나 군이 관여한 바가 없다는 답변만 되돌렸다. 우리나라 정부 또한 진상규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991년 8월 14일, ‘위안부’ 문제가 다시 잊혀질 것만 같은 막막한 상황에서 ‘위안부’ 피해여성 김학순은 본인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처음으로 밝혔다. “당시 당했던 일이 하도 기가 막히고 끔찍해 평생 가슴 속에만 묻어두고 살아왔지만 …… 국민 모두가 과거를 잊은 채 일본에 매달리는 것을 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고 울분을 토로하였다. 이로부터 용기를 얻은 다른 피해생존자들도 한 명, 두 명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생존자들은 문헌자료가 감추었던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림과 동시에 이 문제의 해결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하여 위안소 생활의 실태뿐만 아니라 군의 관여 또한 하나하나 드러났다. 해방 후에 겪은 외로움과 생존위기의 이야기 속에서는 성적 피해자에 대한 우리사회의 무심함을 돌아보게 했다.
일본군 ‘위안부’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지 20년이 훌쩍 넘었다. 그 사이 일본정부와 군의 관여를 입증하는 문헌자료가 발견되고 1993년에는 고노(河野) 일본 관방장관이 ‘일본군이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여한 것’을 인정하고 ‘유감’을 표명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위안부’ 피해생존자에 대한 보상금 지급과 생활지원을 시작했으며, 일본정부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이라는 민간기구를 만들어 배상이 아닌 ‘위로금’ 지급을 시도하기도 했다. ‘위안부’ 문제해결의 실마리는 일본국회의 의결을 거친 공식적인 사죄와 일본정부 차원의 배상금 지급에서부터 시작된다고 계속해서 외쳐왔지만, 2014년 현재 일본 정부의 태도는 ‘고노담화’에서도 후퇴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동안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밝혔던 한국여성 238명 가운데, 2014년 10월 현재 생존자는 55명에 불과하다. 집회, 강연, 재판 등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현장마다 중심을 지켜주던 생존자들이 더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관심도, 일본정부가 느끼는 압박도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생존자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역사교과서 왜곡반대, 전쟁반대 및 평화요구, 여성에 대한 폭력 반대 등 오늘날의 현안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이고는 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단지 과거에 끝난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벌어지고 문제이며, 어쩌면 다음 세대가 겪어야할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기록하고 전하지 않으면 역사는 잊혀지기 마련이다. 망각 속에서 역사의 비극은 되풀이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 뜻은 전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평화로운 미래를 만드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군 위안소 지도
“위안부는 일본군이 싸우기 위해 가는 곳이면 어디에서건 발견되었다.”
1944년 8월, 미야마의 국경 부근에서 일본군 위안소 업자와 ‘위안부’ 여성들을 체포하고 이들에 대한 심문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미군이 삽입한 말이다. 1932년 상하이 사변을 일으키고 상하이에 최초의 위안소를 개설한 뒤부터 전쟁이 끝나는 1945년까지, 일본군은 그들이 가는 곳 어디에서건 위안소를 설치하였다. 병사의 성병예방과 사기고양, 정보누설방지와 일반 여성에 대한 강간방지를 막는다는 명분이었다.
일본군이 15년 동안 자행한 태평양전쟁은 오랜 기간, 넓은 지역을 대상으로 치른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군 위안소 또한 오랜 시간에 걸쳐, 아시아·태평양 전 지역을 대상으로 설치되었다는 특성을 갖는다. 시기에 따라, 지역에 따라 위안소의 설치방식과 모양새, 운영방식이 달랐다. 하지만 전체적인 규모와 각 시기별, 지역적 특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는 쉽지 않았다. 일단 종전 후 일본정부의 군기밀문서 소각으로 일본군 위안소 설치와 관련된 공문서가 완전히 남지 않았고 위안소 제도의 설치와 ‘위안부’ 동원, 위안소의 운영이 단일하지 않은 주체에 의해, 때로는 은폐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군 위안소 제도의 전체적인 피해 실태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인 ‘위안부’의 피해양상을 중심으로 일본군 위안소 제도를 이해해온 측면이 있다.
일본군 위안소 지도는 복잡다기한 일본군 위안소 제도의 전체상을 한 눈에 들어오도록 안내한다. 공문서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 옛 일본군 병사의 증언, 주변의 목격·증언을 하나하나 확인해가며 만들었다. 공문서는 일본군‧정부관계자료, 도쿄재판 기록, BC급 전범 재판기록, 연합군 작성자료를 활용했으며, 피해자 증언은 재판자료, 증언집, 증언기록, 관계서적, 피해당사자의 현장답사 기록을 모은 것이다. 옛 일본군 병사의 증언은 전쟁기록물, 군부대 기록물, 전우회 기록‧관련 서적 등에 기술된 ‘위안부’ 관련 체험기 내용이고, 목격·증언은 위안소를 이용한 적이 없는 옛 병사나 위안소 설치 지역의 주민 증언, 당시 위안소의 경영자의 증언에 해당한다. 출처가 분명한 자료를 꼼꼼하게 확인하고 망라하여 현재로서 실태를 확인할 수 있는 일본군 위안소 제도 관계 자료의 현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
지도는 일본 도쿄의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이 작성했고, 한국의 동북아역사재단이 제작을 후원했다.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女たちの戦争と平和資料館)은 2005년 8월 1일 일본 도쿄의 한 대학 사무실을 빌어 개관했다. 바우넷재팬(VAWW-NET JAPAN : 전쟁과 여성폭력에 반대하는 일본 네트워크 Violence Against in War Network Japan)의 전 대표인 마츠이 야요리(松井やより)가 남긴 유산을 씨앗돈 삼아 만든 전시관이다. 일본 대표로서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 국제여성법정을 이끌었던 마츠이 야요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 박물관 건립을 제안하고 2002년 사망했다. 자료관은 행동하는 박물관(active museum)으로서 정체성을 내걸고 다섯 가지 이념을 내걸었다.
일본군이 15년 동안 자행한 태평양전쟁은 오랜 기간, 넓은 지역을 대상으로 치른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군 위안소 또한 오랜 시간에 걸쳐, 아시아·태평양 전 지역을 대상으로 설치되었다는 특성을 갖는다. 시기에 따라, 지역에 따라 위안소의 설치방식과 모양새, 운영방식이 달랐다. 하지만 전체적인 규모와 각 시기별, 지역적 특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는 쉽지 않았다. 일단 종전 후 일본정부의 군기밀문서 소각으로 일본군 위안소 설치와 관련된 공문서가 완전히 남지 않았고 위안소 제도의 설치와 ‘위안부’ 동원, 위안소의 운영이 단일하지 않은 주체에 의해, 때로는 은폐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군 위안소 제도의 전체적인 피해 실태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인 ‘위안부’의 피해양상을 중심으로 일본군 위안소 제도를 이해해온 측면이 있다.
일본군 위안소 지도는 복잡다기한 일본군 위안소 제도의 전체상을 한 눈에 들어오도록 안내한다. 공문서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 옛 일본군 병사의 증언, 주변의 목격·증언을 하나하나 확인해가며 만들었다. 공문서는 일본군‧정부관계자료, 도쿄재판 기록, BC급 전범 재판기록, 연합군 작성자료를 활용했으며, 피해자 증언은 재판자료, 증언집, 증언기록, 관계서적, 피해당사자의 현장답사 기록을 모은 것이다. 옛 일본군 병사의 증언은 전쟁기록물, 군부대 기록물, 전우회 기록‧관련 서적 등에 기술된 ‘위안부’ 관련 체험기 내용이고, 목격·증언은 위안소를 이용한 적이 없는 옛 병사나 위안소 설치 지역의 주민 증언, 당시 위안소의 경영자의 증언에 해당한다. 출처가 분명한 자료를 꼼꼼하게 확인하고 망라하여 현재로서 실태를 확인할 수 있는 일본군 위안소 제도 관계 자료의 현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
지도는 일본 도쿄의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이 작성했고, 한국의 동북아역사재단이 제작을 후원했다.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女たちの戦争と平和資料館)은 2005년 8월 1일 일본 도쿄의 한 대학 사무실을 빌어 개관했다. 바우넷재팬(VAWW-NET JAPAN : 전쟁과 여성폭력에 반대하는 일본 네트워크 Violence Against in War Network Japan)의 전 대표인 마츠이 야요리(松井やより)가 남긴 유산을 씨앗돈 삼아 만든 전시관이다. 일본 대표로서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 국제여성법정을 이끌었던 마츠이 야요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 박물관 건립을 제안하고 2002년 사망했다. 자료관은 행동하는 박물관(active museum)으로서 정체성을 내걸고 다섯 가지 이념을 내걸었다.
첫째, 젠더 정의의 관점에서 전시 성폭력에 초점을 맞출 것.
둘째, 가해책임을 명확히 할 것.
셋째, 평화와 비폭력 미래를 실현하기 위한 활동의 거점으로 삼을 것.
넷째, 국가권력과 거리를 두는 민중운동을 만들 것.
다섯째, 국경을 넘는 연대활동을 할 것.
둘째, 가해책임을 명확히 할 것.
셋째, 평화와 비폭력 미래를 실현하기 위한 활동의 거점으로 삼을 것.
넷째, 국가권력과 거리를 두는 민중운동을 만들 것.
다섯째, 국경을 넘는 연대활동을 할 것.
2008년에 작성과 제작을 일단락한 일본군 위안소 지도는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 활동가들이 그 동안의 연구, 조사 활동을 집대성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지도는 전쟁 중 일본군이 주둔했던 모든 지역, 곧 한국, 타이완, 일본,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동티모르, 말레이시아, 타이, 괌, 미얀마, 베트남 등을 망라했다. 각 지역에 대해서는 도입부에 개요를 적어놓아 당시의 전쟁 상황과 ‘위안부’ 피해상황, 전후의 지역상황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그리고 다시 세부지역으로 구분하여 그 지역의 ‘위안부’ 피해실태를 입증하는 공문서와 여러 증언들을 한 데 모아놓았다. 시기와 지역에 따른 위안소의 실태를 독자들이 입체적으로 상상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꼼꼼하게 정리해 놓은 이미지 자료 또한 그 지역의 피해를 입증하는 훌륭한 자료다. 마지막으로 지도제작에 활용했던 데이터자료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제공했다. 아직도 갈 길이 바쁜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진상규명을 위해 기초자료로서 두고두고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지도는 전쟁 중 일본군이 주둔했던 모든 지역, 곧 한국, 타이완, 일본,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동티모르, 말레이시아, 타이, 괌, 미얀마, 베트남 등을 망라했다. 각 지역에 대해서는 도입부에 개요를 적어놓아 당시의 전쟁 상황과 ‘위안부’ 피해상황, 전후의 지역상황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그리고 다시 세부지역으로 구분하여 그 지역의 ‘위안부’ 피해실태를 입증하는 공문서와 여러 증언들을 한 데 모아놓았다. 시기와 지역에 따른 위안소의 실태를 독자들이 입체적으로 상상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꼼꼼하게 정리해 놓은 이미지 자료 또한 그 지역의 피해를 입증하는 훌륭한 자료다. 마지막으로 지도제작에 활용했던 데이터자료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제공했다. 아직도 갈 길이 바쁜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진상규명을 위해 기초자료로서 두고두고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증언’을 넘어 ‘이야기’로 듣는 ‘위안부’ 여성들의 경험과 기억
연구자·활동가 11명이 모여 구술팀을 꾸리고 ‘위안부’ 피해여성 12명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그 목소리를 글자로 옮겨 적은 기록물이다. 일본군 ‘위안부’ 증언집의 6집이라는 머리 제목을 달았다. 1993년부터 발간되기 시작한 일본군 ‘위안부’ 증언집의 6번째 간행물로서 시리즈의 마지막에 해당한다. 증언집 5집까지 꾸준히 중심을 이루었던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이라는 제목을 과감하게 버리고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라는 제목을 선택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의 역사에서 ‘위안부’ 생존자들의 구술은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역사적 피해사실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로서 자리매김해왔다. 이 문제의 책임주체인 일본정부의 부정과 회피, 정치적 공격 속에서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은 ‘강제로 끌려간……’을 적극적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증언집 발간의 역사가 1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강제로 끌려간 군위안부’는 한국사회의 집합기억 속에서 ‘위안부’ 피해를 기억하는 전범(典範)이 되어 있었고, 이러한 기억에 균열을 일으키는 피해자의 어떠한 사적 기억은 피해자의 머뭇거림 속에서 적당한 언어를 찾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 책이 증언집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책이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의미가 크다. 이 책에 자기 경험을 담은 ‘위안부’ 피해여성들은 ‘위안부’ 증언 10여년의 시간을 기다리고, 앞선 60여명의 증언을 다 들은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기억을 말할 수 있었던 여성들이라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물론, 앞서 증언을 풀어놓은 ‘위안부’ 피해여성들의 용기의 축적과 ‘묻기’에서 ‘듣기’로 증언채록 방식을 전환한 ‘위안부’ 여성 구술사 방법론의 진전이라는 사회적 배경이 있었다.
연구팀은 “사실의 엄밀성이 요구되는 다분히 엄숙한 증언과 달리, 우리가 구술을 ‘이야기’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이유는 그것이 가지는 주관적 체험을 강조하기 위해서”(13쪽)라고 밝힌다. 정치적인 쟁점으로 규정된 ‘강제성’ 문제에서 벗어나 “실제 위안소에서의 성폭력 경험과 그 당사자의 기억을 중심으로 일본군 ‘위안부’ 개념이 재정립되어야 함을 주장”(14-15쪽)하기 위해 ‘증언’을 넘어 ‘이야기’로서 ‘위안부’ 피해여성의 경험을 들어야한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이 책에서 만나는 여성들 12명이 공통적으로 일본군 ‘위안부’라고 불리기는 하나, 이들 여성 각자의 삶의 경험은 구체적인 위안소 생활에서뿐만 아니라 그 생활 이전과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르고 특이하며, 과거의 경험들은 현재의 삶과 상호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위안부’ 피해여성의 이야기를 생년월일과 고향, 형제 및 가족관계, 동원상황, 이동경로 및 수단, 위안소 생활, 귀환과정, 이후 생활 등으로 유형화하기는 했으나 그 안을 각자의 색으로 채색하는 다양하고 복잡한 삶의 결들에 독자들이 귀를 기울이기를 당부한다.
따라서 독자는 이 책의 ‘위안부’ 피해 여성 12명, 곧 공점엽, 김화자(가명), 정서운, 강일출, 석순희(가명), 이옥선, 임정자(가명), 노청자, 장점돌, 김봉이(가명), 김순악, 길원옥의 이야기를 펼치기 전에 반드시 연구팀이 작성한 총론을 꼼꼼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총론에서 ‘증언’이 아닌 ‘이야기’로 읽었을 때 독자와 구술자, 면접자는 어느 지점에서 만날 수 있는지, ‘이야기’로 읽기 위해서 소제목과 표제, 따옴표, 쉼표 등의 부호, 괄호 안의 내용들, 면접자의 참여기는 어떻게 눈여겨봐야 하는지 세세하게 기록해놓았다. 얄팍한 ‘강제성’ 논쟁을 넘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의 목소리를 두터운 생존의 이야기로 문자화하고 독자와 공유하기 위해 연구팀이 치열하게 고민했던 흔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총론을 다 읽은 뒤에는 12명 중 누구의 이야기를 먼저 읽어도 좋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인터뷰 실패기〉도 함께 싣고 있는데, 두려움과 머뭇거림 앞에서 여전히 적당한 언어를 찾지 못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의 현재의 이야기이다. 이 또한 함께 챙겨 읽으며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우리의 공감지수가 어느 정도까지 와 있는지 가늠하기 바란다. “이 책이 여섯 번째 반복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여섯 번째 인식과 성찰의 지평을 넓히는 이야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연구팀의 소망은 책 발간 후 다시 10여년이 지나버린 현재 시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의 역사에서 ‘위안부’ 생존자들의 구술은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역사적 피해사실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로서 자리매김해왔다. 이 문제의 책임주체인 일본정부의 부정과 회피, 정치적 공격 속에서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은 ‘강제로 끌려간……’을 적극적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증언집 발간의 역사가 1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강제로 끌려간 군위안부’는 한국사회의 집합기억 속에서 ‘위안부’ 피해를 기억하는 전범(典範)이 되어 있었고, 이러한 기억에 균열을 일으키는 피해자의 어떠한 사적 기억은 피해자의 머뭇거림 속에서 적당한 언어를 찾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 책이 증언집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책이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의미가 크다. 이 책에 자기 경험을 담은 ‘위안부’ 피해여성들은 ‘위안부’ 증언 10여년의 시간을 기다리고, 앞선 60여명의 증언을 다 들은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기억을 말할 수 있었던 여성들이라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물론, 앞서 증언을 풀어놓은 ‘위안부’ 피해여성들의 용기의 축적과 ‘묻기’에서 ‘듣기’로 증언채록 방식을 전환한 ‘위안부’ 여성 구술사 방법론의 진전이라는 사회적 배경이 있었다.
연구팀은 “사실의 엄밀성이 요구되는 다분히 엄숙한 증언과 달리, 우리가 구술을 ‘이야기’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이유는 그것이 가지는 주관적 체험을 강조하기 위해서”(13쪽)라고 밝힌다. 정치적인 쟁점으로 규정된 ‘강제성’ 문제에서 벗어나 “실제 위안소에서의 성폭력 경험과 그 당사자의 기억을 중심으로 일본군 ‘위안부’ 개념이 재정립되어야 함을 주장”(14-15쪽)하기 위해 ‘증언’을 넘어 ‘이야기’로서 ‘위안부’ 피해여성의 경험을 들어야한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이 책에서 만나는 여성들 12명이 공통적으로 일본군 ‘위안부’라고 불리기는 하나, 이들 여성 각자의 삶의 경험은 구체적인 위안소 생활에서뿐만 아니라 그 생활 이전과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르고 특이하며, 과거의 경험들은 현재의 삶과 상호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위안부’ 피해여성의 이야기를 생년월일과 고향, 형제 및 가족관계, 동원상황, 이동경로 및 수단, 위안소 생활, 귀환과정, 이후 생활 등으로 유형화하기는 했으나 그 안을 각자의 색으로 채색하는 다양하고 복잡한 삶의 결들에 독자들이 귀를 기울이기를 당부한다.
따라서 독자는 이 책의 ‘위안부’ 피해 여성 12명, 곧 공점엽, 김화자(가명), 정서운, 강일출, 석순희(가명), 이옥선, 임정자(가명), 노청자, 장점돌, 김봉이(가명), 김순악, 길원옥의 이야기를 펼치기 전에 반드시 연구팀이 작성한 총론을 꼼꼼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총론에서 ‘증언’이 아닌 ‘이야기’로 읽었을 때 독자와 구술자, 면접자는 어느 지점에서 만날 수 있는지, ‘이야기’로 읽기 위해서 소제목과 표제, 따옴표, 쉼표 등의 부호, 괄호 안의 내용들, 면접자의 참여기는 어떻게 눈여겨봐야 하는지 세세하게 기록해놓았다. 얄팍한 ‘강제성’ 논쟁을 넘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의 목소리를 두터운 생존의 이야기로 문자화하고 독자와 공유하기 위해 연구팀이 치열하게 고민했던 흔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총론을 다 읽은 뒤에는 12명 중 누구의 이야기를 먼저 읽어도 좋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인터뷰 실패기〉도 함께 싣고 있는데, 두려움과 머뭇거림 앞에서 여전히 적당한 언어를 찾지 못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의 현재의 이야기이다. 이 또한 함께 챙겨 읽으며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우리의 공감지수가 어느 정도까지 와 있는지 가늠하기 바란다. “이 책이 여섯 번째 반복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여섯 번째 인식과 성찰의 지평을 넓히는 이야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연구팀의 소망은 책 발간 후 다시 10여년이 지나버린 현재 시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참고자료
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慰安婦関係調査結果発表に関する河野内閣官房長官談話
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
이른바 종군위안부문제에 관해서 정부는 재작년 12월부터 조사를 진행해 왔는데 이번에 그 결과가 정리되었으므로 발표하기로 했다.
이번 조사 결과, 장기간에 나아가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서 위안소가 설치되고, 많은 수의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인정되었다.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구일본군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위안부의 모집에 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담당했는데, 이 경우에도 감언, 강압 등에 의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많았으며, 더욱이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일도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이 밝혀졌다. 또한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 하에서 처참한 것이었다.
또한 전장에 이송된 위안부의 출신지에 대해서는 일본을 별도로 한다면, 조선반도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당시 조선반도가 우리나라의 통치하에 있으며, 그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 강압에 의한 것으로, 총체적으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실시되었다.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본 건은 당시의 군 관여 하에,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낸 문제이다. 정부는 이 기회에 다시 새롭게 그 출신지 여하를 불문하고 소위 종군위안부로서 무수한 고통을 경험하고 몸과 마음에 걸쳐서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를 진 모든 분들에게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우리나라로서 어떻게 나타낼까라는 점에 관해서는 有識者의 의견을 등을 참고하면서 향후에도 신중히 검토할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이러한 역사의 진실을 회피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것을 역사의 교훈으로 직시해 가겠다. 우리들은 역사연구, 역사교육을 통하여 이러한 문제를 오랫동안 기억하면서 동일한 과오를 결코 반복하지 않는다는 굳은 결의를 다시 한 번 새롭게 표명한다.
덧붙여 본 문제에 관해서는 본국에서 소송이 제기되어 있으며, 또한 국제적으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으며, 정부로서도 향후 민간의 연구를 포함하여 충분히 관심을 갖겠다.
이번 조사 결과, 장기간에 나아가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서 위안소가 설치되고, 많은 수의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인정되었다.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구일본군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위안부의 모집에 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담당했는데, 이 경우에도 감언, 강압 등에 의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많았으며, 더욱이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일도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이 밝혀졌다. 또한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 하에서 처참한 것이었다.
또한 전장에 이송된 위안부의 출신지에 대해서는 일본을 별도로 한다면, 조선반도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당시 조선반도가 우리나라의 통치하에 있으며, 그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 강압에 의한 것으로, 총체적으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실시되었다.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본 건은 당시의 군 관여 하에,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낸 문제이다. 정부는 이 기회에 다시 새롭게 그 출신지 여하를 불문하고 소위 종군위안부로서 무수한 고통을 경험하고 몸과 마음에 걸쳐서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를 진 모든 분들에게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우리나라로서 어떻게 나타낼까라는 점에 관해서는 有識者의 의견을 등을 참고하면서 향후에도 신중히 검토할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이러한 역사의 진실을 회피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것을 역사의 교훈으로 직시해 가겠다. 우리들은 역사연구, 역사교육을 통하여 이러한 문제를 오랫동안 기억하면서 동일한 과오를 결코 반복하지 않는다는 굳은 결의를 다시 한 번 새롭게 표명한다.
덧붙여 본 문제에 관해서는 본국에서 소송이 제기되어 있으며, 또한 국제적으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으며, 정부로서도 향후 민간의 연구를 포함하여 충분히 관심을 갖겠다.
1993년 8월 4일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미 의회 결의안 전문(United States House of Representatives House Resolution 121)
캘리포니아의 랜토스 의원과 플로리다의 로스-레티넨의원의 수정 제의를 반영한 하원 121호 결의안
전문(前文)을 삭제하고 다음과 같이 삽입한다.
일본정부는 1930년대부터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아시아 및 태평양제도를 식민통치하고 이를 점령하는 동안 제국군에 성적 서비스를 제공할 목적으로 ‘위안부’로 알려진 젊은 여성들의 동원을 공식 위임했다.
일본 정부에 의한 강제 군대 매춘인 ‘위안부’ 제도는 잔학성과 규모 면에서 전례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며, 집단 강간과 강제 유산, 수치, 신체 손상을 초래한 성폭력, 사망 및 자살 등이 20세기 최대 인신매매 사례에 포함되었다.
일본 학교에서 사용되는 일부 개정 교과서는 위안부의 비극과 2차 대전 중 일본이 저지른 다른 전쟁 범죄의 축소를 시도하고 있다.
최근 일본의 공공 및 민간 관계자들은 위안부의 고통에 대한 일본 정부의 진지한 사과와 참회를 표명한 1993년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의 ‘위안부’ 관련 담화를 희석시키거나 철회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일본 정부는 1921년도 여성 및 아동의 인신매매금지협약에 서명하고, 무력 분쟁이 여성에 미치는 영향을 인정한 2000년도 여성ㆍ평화ㆍ안보에 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325호를 지지한 바 있다.
하원은 인간의 안전과 인권, 민주적 가치, 법의 통치를 증진시키고 안보리 결의 1325호를 지지한 일본의 노력을 치하한다.
미일동맹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대한 미국의 안보 이익을 위한 초석이며 지역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냉전 후 전략적 지형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미일동맹은 정치, 경제적 자유의 보존과 진흥, 인권 및 민주적 제도에 대한 지지, 양국 및 국제사회 시민의 번영 보장 등을 비롯하여, 아시아 태평양 지역 내에서 공유하고 있는 주요 이익과 가치를 토대로 하고 있다.
하원은 일본 관리와 민간인들의 노력과 열정으로 1995년 민간 차원의 아시아여성기금이 설립된 것을 치하한다.
아시아여성기금은 위안부에 대한 일본인의 ‘속죄’를 전달하기 위해 570만 달러를 모금했다.
‘위안부’의 학대와 고통에 대한 속죄를 위한 프로그램 및 프로젝트 수행을 목적으로 정부가 주도하고 주로 정부의 기금으로 운영된 민간 재단인 아시아여성기금의 임무는 2007년 3월 31일 종료되었으며, 동 기금은 해당 일자를 기준으로 해산되었다.
이에 결의문 문구 일체를 삭제하고 아래와 같이 조항을 삽입한다.
일본정부는 1930년대부터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아시아 및 태평양제도를 식민통치하고 이를 점령하는 동안 제국군에 성적 서비스를 제공할 목적으로 ‘위안부’로 알려진 젊은 여성들의 동원을 공식 위임했다.
일본 정부에 의한 강제 군대 매춘인 ‘위안부’ 제도는 잔학성과 규모 면에서 전례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며, 집단 강간과 강제 유산, 수치, 신체 손상을 초래한 성폭력, 사망 및 자살 등이 20세기 최대 인신매매 사례에 포함되었다.
일본 학교에서 사용되는 일부 개정 교과서는 위안부의 비극과 2차 대전 중 일본이 저지른 다른 전쟁 범죄의 축소를 시도하고 있다.
최근 일본의 공공 및 민간 관계자들은 위안부의 고통에 대한 일본 정부의 진지한 사과와 참회를 표명한 1993년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의 ‘위안부’ 관련 담화를 희석시키거나 철회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일본 정부는 1921년도 여성 및 아동의 인신매매금지협약에 서명하고, 무력 분쟁이 여성에 미치는 영향을 인정한 2000년도 여성ㆍ평화ㆍ안보에 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325호를 지지한 바 있다.
하원은 인간의 안전과 인권, 민주적 가치, 법의 통치를 증진시키고 안보리 결의 1325호를 지지한 일본의 노력을 치하한다.
미일동맹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대한 미국의 안보 이익을 위한 초석이며 지역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냉전 후 전략적 지형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미일동맹은 정치, 경제적 자유의 보존과 진흥, 인권 및 민주적 제도에 대한 지지, 양국 및 국제사회 시민의 번영 보장 등을 비롯하여, 아시아 태평양 지역 내에서 공유하고 있는 주요 이익과 가치를 토대로 하고 있다.
하원은 일본 관리와 민간인들의 노력과 열정으로 1995년 민간 차원의 아시아여성기금이 설립된 것을 치하한다.
아시아여성기금은 위안부에 대한 일본인의 ‘속죄’를 전달하기 위해 570만 달러를 모금했다.
‘위안부’의 학대와 고통에 대한 속죄를 위한 프로그램 및 프로젝트 수행을 목적으로 정부가 주도하고 주로 정부의 기금으로 운영된 민간 재단인 아시아여성기금의 임무는 2007년 3월 31일 종료되었으며, 동 기금은 해당 일자를 기준으로 해산되었다.
이에 결의문 문구 일체를 삭제하고 아래와 같이 조항을 삽입한다.
아래에 적은 바는 하원의 의견이다.
(1) 일본 정부는 1930년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아시아 태평양 제도를 식민통치하고 이를 점령하는 동안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위안부’로 알려진 젊은 여성들을 강제로 성의 노예로 만든 사실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확실하고 분명한 태도로 공식 인정, 사과하고 수용해야 한다.
(2) 일본 정부는 총리가 공식적인 입장에서 공식 성명을 통해 사과한다면 종전에 발표한 성명의 진실성과 지위에 대해 되풀이되는 의혹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3) 일본 정부는 일본군들이 ‘위안부’를 성의 노예로 삼고 인신매매를 한 사실이 결코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분명하고 공개적으로 반박해야 한다.
(4) 일본 정부는 ‘위안부’에 대한 국제사회의 권고에 따라 현 세대와 미래세대를 대상으로 잔혹한 범죄에 관한 교육을 해야 한다.
네덜란드 의회 결의안 전문
네덜란드 의회 결의안 전문
심의를 개최한 의회는
일본이 아시아의 전략적 파트너로서 외교관계를 유지한 150년을 비롯하여 네덜란드와 400여 년간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우리는 이들과 공동의 미래를 실현하고자 한다는 점을 참작하고,
일본이 2차 대전 이전과 당시에 운영된 강제매춘제도와 이로 인해 위안부에게 초래된 고통에 대해 지체 없이 총체적이고 공개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어떤 의심도 생길 수 없고 일어나서는 안 되며,
일본 정부는 1993년도 고노담화를 통해 위안부의 운명을 진심으로 시인하고. 피해자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며 본 담화에서 이에 대한 책임을 시인하였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지난 3월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가 성명을 철회하고 올 초 동일 주제에 관하여 일본 중의원 구성원이 워싱턴포스트지에 광고를 게재한 점 등에서 드러나듯이, 일본 정부와 일본 의회 구성원은 여러 차례 이와는 거리가 있는 행보를 보였던 점을 인식하고,
일본 중의원 의장이 11월 7일 워싱턴포스트지 광고에 관한 6월 26일자 의장의 서한에 대한 답신으로 작성한, 기 언급한 광고와 거리를 두고 있는 서한을 검토하고,
일본의 특정 교과서는 일본의 전쟁범죄, 특히 위안부 문제 취급을 정당하게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여,
정부가 일본 정부에게 1993년도 유감 표명과 거리를 두고 있는 성명을 자제하고, 일본군의 강제매춘제도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지고,
현재 생존한 ‘위안부’ 여성이 받은 고통에 대해 직접 도덕적 사죄를 하고, 이들 각자에게 재정적 보상을 제시하는 등 추가 조치를 취하며
일본 학교의 모든 교재가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역할, 특히 위안부의 운명에 대해 진실을 제공하는 것을 장려하도록 강력히 촉구할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일본이 2차 대전 이전과 당시에 운영된 강제매춘제도와 이로 인해 위안부에게 초래된 고통에 대해 지체 없이 총체적이고 공개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어떤 의심도 생길 수 없고 일어나서는 안 되며,
일본 정부는 1993년도 고노담화를 통해 위안부의 운명을 진심으로 시인하고. 피해자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며 본 담화에서 이에 대한 책임을 시인하였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지난 3월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가 성명을 철회하고 올 초 동일 주제에 관하여 일본 중의원 구성원이 워싱턴포스트지에 광고를 게재한 점 등에서 드러나듯이, 일본 정부와 일본 의회 구성원은 여러 차례 이와는 거리가 있는 행보를 보였던 점을 인식하고,
일본 중의원 의장이 11월 7일 워싱턴포스트지 광고에 관한 6월 26일자 의장의 서한에 대한 답신으로 작성한, 기 언급한 광고와 거리를 두고 있는 서한을 검토하고,
일본의 특정 교과서는 일본의 전쟁범죄, 특히 위안부 문제 취급을 정당하게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여,
정부가 일본 정부에게 1993년도 유감 표명과 거리를 두고 있는 성명을 자제하고, 일본군의 강제매춘제도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지고,
현재 생존한 ‘위안부’ 여성이 받은 고통에 대해 직접 도덕적 사죄를 하고, 이들 각자에게 재정적 보상을 제시하는 등 추가 조치를 취하며
일본 학교의 모든 교재가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역할, 특히 위안부의 운명에 대해 진실을 제공하는 것을 장려하도록 강력히 촉구할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캐나다 의회 결의안 전문
캐나다 의회 결의안 전문
본 하원은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1. 일본 제국 군대는 1930년대부터 2차 대전이 지속되는 기간을 통하여 아시아 및 태평양군도를 식민 통치하고 이를 점령하는 동안 성적 서비스를 제공할 목적으로 ‘위안부’로 알려진 젊은 여성들의 동원을 공식 위임했다.
2. 일부 일본의 관료들은 ‘위안부’ 들의 고통에 대해 정부의 진심어린 사죄와 반성을 표명한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의 1993년 ‘위안부’ 관련 담화를 희석시키고 철회하기 위한 유감스런 의도를 최근 표명해 왔다.
3. 일본은 자신들의 과거 행위들에 대해 인정하고 속죄하는데 있어서 1945년 이후 많은 진전을 보였고, 수십 년 동안 유엔 전체를 포함해, 국제평화, 안보, 발전에 주요한 공헌을 해왔다.
4. 캐나다와 일본의 동맹은 정치경제적 자유의 보호와 촉진, 인권 및 민주적 제도의 지지, 양 국가와 국제사회의 시민들을 위한 번영 보장을 포함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중요한 이익과 가치를 공유함을 기반으로 지속되고 있다.
5. 따라서 캐나다 정부는 1993년 고노 성명서의 유감 표명을 후퇴시키는 어떠한 발언도 중지할 것, 일본 제국 군대에서 성노예와 ‘위안부’ 인신매매가 결코 발생한 적이 없다는 모든 주장을 명확하고 공개적으로 반박할 것, 모든 희생자에 대해 의회에서 공표한 공식적이고도 진실한 사죄를 포함하여 일본 제국 군대의 강제매춘시스템 관여에 관한 완전한 책임을 질 것, 화해의 정신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계속 관심을 기울일 것을 일본 정부에게 권고 한다.
2. 일부 일본의 관료들은 ‘위안부’ 들의 고통에 대해 정부의 진심어린 사죄와 반성을 표명한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의 1993년 ‘위안부’ 관련 담화를 희석시키고 철회하기 위한 유감스런 의도를 최근 표명해 왔다.
3. 일본은 자신들의 과거 행위들에 대해 인정하고 속죄하는데 있어서 1945년 이후 많은 진전을 보였고, 수십 년 동안 유엔 전체를 포함해, 국제평화, 안보, 발전에 주요한 공헌을 해왔다.
4. 캐나다와 일본의 동맹은 정치경제적 자유의 보호와 촉진, 인권 및 민주적 제도의 지지, 양 국가와 국제사회의 시민들을 위한 번영 보장을 포함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중요한 이익과 가치를 공유함을 기반으로 지속되고 있다.
5. 따라서 캐나다 정부는 1993년 고노 성명서의 유감 표명을 후퇴시키는 어떠한 발언도 중지할 것, 일본 제국 군대에서 성노예와 ‘위안부’ 인신매매가 결코 발생한 적이 없다는 모든 주장을 명확하고 공개적으로 반박할 것, 모든 희생자에 대해 의회에서 공표한 공식적이고도 진실한 사죄를 포함하여 일본 제국 군대의 강제매춘시스템 관여에 관한 완전한 책임을 질 것, 화해의 정신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계속 관심을 기울일 것을 일본 정부에게 권고 한다.
유럽 의회 결의안 전문(Justice for the Comfort Women)
유럽 의회 결의안 전문
[‘위안부’(2차 대전 이전과 전쟁 기간 동안의 아시아의 성노예)를 위한 정의에 관한 2007.12.13 유럽의회 결의안]
유럽 의회는.
- 2007년 노예 매매의 폐지 200주년
- 1921년 일본도 서명한 여성 및 어린이의 매매금지 협약
- 일본이 비준한 국제노동기구(ILO)의 강제노동금지협약(1930)
- 여성, 평화 및 안보에 관한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결의안 제1325호(2000년)
- 무력 분쟁 중 조직적인 강간, 성 노예, 노예 같은 처우에 대한 UN 특별 조사관 게이 맥두걸(Gay Mcdougall)의 보고서(1998년 6월 22일)
- 유엔 고문 반대 위원회 38차 회기의 결론 및 권고안(2007년 5월 9-10)
- 일본 점령 동안의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현재의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 여성의 강제 매춘에 대한 네덜란드 정부 문서 연구 보고서(헤이그 2004년)
- 2007년 7월 30일 채택된 미 의회 결의안 및 2007년 11월 28일 채택된 캐나다 의회의 결의안
- Rules of Procedure의 Rule 115에 주목하고
A. 일본 정부는 1930년대부터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아시아 및 태평양군도를 식민 통치하고 이를 점령하는 동안 제국군에 성적 서비스를 제공할 목적으로 ‘위안부’로 알려진 젊은 여성들의 동원을 공식 지시했다는 사실
B. '위안부‘ 제도는 20세기 최대 인신매매 가운데 하나로, 집단 강간과 강제 유산. 수치, 신체 손상을 초래한 성폭력, 사망 및 자살 등을 포함한다는 점
C. 제국 군대의 직간접적인 관련성 및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는 일본 법정의 판단에도 불구하고, 일본 법정에 제시된 ‘위안부’ 소송이 모두 보상에 대한 원고의 청구를 최종적으로 기각했다는 점
D. '위안부‘ 시스템 희생자 대부분이 사망하고, 남아 있는 생존자의 연령이 80세를 넘어섰다는 점
E. 일본 정부의 고위 임원과 공직자들이 지난 몇 년에 걸쳐 ‘위안부’ 시스템에 대해 사과 성명을 낸데 반해, 일부 일본 공직자들은 그러한 성명서들을 희석시키고 무효화시키려는 유감스런 의도를 최근 표명해 온 점
F. 성적 노예 시스템의 전모가 일본 정부에 의해 결코 충분히 공개되지 않아 왔으며, 일본의 학교에서 사용되는 새로운 몇몇 교과서에서 ‘위안부’ 의 비극 및 2차 대전 중의 다른 일본 전쟁 범죄를 축소하려고 시도한다는 점
G. ‘위안부’ 의 피해와 고통에 대한 보상을 위한 프로그램 및 계획의 구현을 목적으로 정부가 발의한 민간단체인 아시아여성기금의 임무 기간이 2007년 3월 31일로 종료되었다는 점에 비추어,
1. 다당제 민주주의, 법치 및 인권 존중에 대한 상호 공유된 가치에 입각한 유럽연합과 일본 사이의 매우 훌륭한 관계를 환영한다.
2. 2차 대전 기간을 통틀어 ‘위안부’ 시스템의 희생자였던 여성에 대한 연대 책임을 공표하는 바이다.
3. ‘위안부’에 대한 1993년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및 1995년 무라야마 토미이치 총리 성명서는 물론, '위안부‘ 시스템의 희생자를 포함한 전쟁 희생자들에 대한 사죄를 공표한 1995년 및 2005년의 일본 의회 결의안을 환영한다.
4. 지금은 해체되었지만 일본 정부의 발의로 1995년에 설립되어 대부분의 자금을 정부가 지원한 민간단체인 아시아여성기금이 수 백 명의 ‘위안부’ 여성에게 일정한 ‘보상금’을 지급했던 것을 환영한다. 그러나 게이 맥도갈이 1998년 여성 폭력에 대한 유엔 특별보고서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인도주의적 솔선수범은 공개적인 국제법상의 법적 인정 및 배상에 대한 희생자들의 요청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다.
5. 1930년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아시아 및 태평양 군도를 식민통치하고 이를 점령하는 동안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위안부’로 알려진 젊은 여성들을 강제 성노예로 만든 사실에 대한 역사적 및 법적 책임을 확실하고 분명한 방식으로 공식적으로 인정, 사과, 수용할 것을 일본 정부에 요청한다.
6. ‘위안부’ 시스템의 모든 생존 희생자들 및 사망한 희생자들의 가족들에게 배상을 제공할 효과적인 행정 메커니즘을 구현할 것을 일본 정부에게 요청한다.
7. 일본 법정에서 배상을 받는데 있어서 기존의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법적 조치를 취할 것을 일본 의회(내각)에 요청한다. 특히 일본 정부에 대해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개인의 권리가 국내법에서 명확하게 인정되어야 하며, 국제법 하의 범죄로서 성노예 생존자를 위한 배상 사례들이 생존들의 연령을 고려해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8. ‘위안부’ 의 예속화 및 노예화가 결코 발생하지 않았다는 어떠한 주장도 공개적으로 반박할 것을 일본 정부에게 요청한다.
9. 모든 국가들의 도덕적 의무인 바, 자신들의 국가 전체의 역사를 인식하고, ‘위안부’ 관련 사항을 포함한 1930~40년대의 일본의 행위에 대한 인식이 보다 성숙될 수 있도록, 추가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일본 국민과 정부에게 권고한다. 그러한 사건들에 관해 현재 및 미래의 세대들에게 교육할 것을 일본 정부에게 요청한다.
10. 일본 정부 및 의회, 유엔인권위원회, 아세안 국가들의 정부, 북한, 남한, 중국, 타이완 및 동티모르, 그리고 이사회, 위원회 및 회원국의 정부와 의회에 이러한 결의안을 전달할 것을 의장에게 통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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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대전의 여성피해자 (Women Victims in World War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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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의 전쟁 책임과 전후 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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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 역사현안 관련 일본군 위안부 연구논저 목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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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간 역사현안의 국제법적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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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truth of the Japanese military" Comfort Women"
- 동북아역사재단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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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검토 | 김창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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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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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리나요? 열두소녀이야기(일본군위안부 피해 구술기록집)
-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 2013년 02월 28일
- 인도네시아 동원 여성명부에 관한 진상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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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잊지 마세요!(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득 할머니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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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이 해결해야 할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각계의 증언과 기록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살펴 본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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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카이브814에서 제공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의 구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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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fort Woman" survivor, Jan Ruff O'Herne on Talking Heads in 2009
- 러프 오헤른 할머니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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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use Resolution 121. Mike Honda on 'Comfort Women'
- 미하원 위안부 결의안 121(혼다 의원의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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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安世鴻(写真家)
-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전문 사진가 안세홍에 대한 다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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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일본군 ‘위안부’ 관련 연표(1894~2014)
일본군 ‘위안부’ 관련 연표(1894~2014)
- 연 도
- 월
- 사건
- 1894
- 8
- 중·일전쟁의 발발
-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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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일전쟁의 발발
-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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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사조약 강제 체결
- 1910
- 8
- 한일강제병합 체결
- 1914~1918
- 제1차 세계대전
- 1925
- 일본은 조선, 대만, 광저우현(Province)과 같은 식민지에서 여성 및 아이들의 밀거래금지 조약 적용과 미성년자의 나이를 21세에서 18세로 정한다는 유보사항과 함께 비준함.
- 1931
- 9
- 일본의 만주 침략
- 1932
- 1
- 일본은 상하이 침략 후 위안소를 통제할 군대를 상하이에 세움
- 1937~1945
- ·아시아태평양 전쟁(제2차 세계대전)
·일본군은 군대를 파견할 전 지역에 위안소 네트워크를 설치함. - 1937
- 12
- 남경대학살
- 1945
- 7
- 포츠담선언에서 일본과 독일의 전쟁범죄자를 재판할 국제전쟁범죄법정의 설립을 암시하고 평화에 반대하는 범죄, 전쟁범죄, 비인도적 범죄를 규정함.
- 1945
- 9
- 일본은 무조건적 항복문서에 서명함.
- 1946
- 5
- 일본의 전쟁범죄자를 재판할 수 있는 국제 극동군사법정(IMTFE)을 도쿄에 설립함.
- 1946~1948
- 연합국은 또한 아시아와 태평양 연안에 일본의 B급과 C급 전쟁범죄자를 재판할 위성 법정을 설립함.
- 1948
- 35명의 네덜란드 여성을 ‘위안부’로 강제 동원한 일본군에 대한 바타비아(Batavia) 전범재판이 인도네시아에서 열림.
- 1951
- 9
-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일본과 연합국 48개국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대일강화조약)을 체결함.
- 1965
- 6
- 한일협정 조약 체결로 한일 간 외교관계를 정상화함.
- 1988
- 한국의 여성단체가 일본군의 위안소 제도를 청취하고 조사를 요구함.
- 1990
- 11
- 한국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진상 규명, 위안부 생존자 지원을 위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만들어짐.
- 1991
- 8
-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 김학순이 일본군에 의하여 강제로 ‘위안부’가 되었음을 공개적으로 증언함.
- 1991
- 12
- "김학순과 그외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도쿄지방법원에 일본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함.
한국정부는 위안부에 대한 조사 착수를 일본정부에 요구함." - 1992
- 1
- ·일본군 ‘위안부’의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수요시위가 처음 시작됨.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쥬오대(中央大) 교수가 일본 방위청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일본군이 군위안부를 강제 동원하는 데 직접 관여했다는 문건 6점을 발견해 이 문건을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 공개함. - 1992
- 2
-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위안부’ 문제가 제기됨.
- 1992
- 7
- ·일본의 관방장관 가토 고이치가 처음으로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와 운영·감독에 관여했다고 인정함.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인 황금주가 미국 버지니아 주 워싱턴 한인중앙교회에서 일본군 '위안부'로서 겪었던 참담한 경험을 폭로함.
·미국 ‘위안부’ 여성운동의 시발점이 된 워싱턴 ‘위안부’ 문제 연합회(WCCWI)가 워싱턴 D.C에서 조직됨. - 1993
- 6
- 일본정부는 ‘위안부’에 대한 내용을 정부승인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수록할 것을 지시함.
- 1993
- 8
- 고노담화에서 ‘위안부’ 강제 동원에 일본군이 관여했음을 인정하고 강제 동원에 대해 사과함.
- 1994
- 4
- 유엔인권위원회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조사를 위해 여성폭력문제 특별보고관으로 레디카 쿠마라스와미를 임명함.
- 1995
- 7
- 일본정부가 태평양 전쟁 중 일본에 의해 강제로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되어 피해를 입은 여성들에 대한 보상을 위해 민간기구인 아시아여성기금을 설립함.
- 1996
- 4
- 유엔인권위원회는 쿠마라스와미의 보고서를 채택하여 일본 정부에 ‘위안부’ 피해 배상을 권고함.
- 1996
- 12
- 미국 법무부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위안소 운영에 연관되었던 일본인 16명에 대한 “감시대상 목록”을 발급함.
- 1997
- 4
- 일본의 중학교 역사교과서에 ‘위안부’문제를 기술하였으나 1997년 이후 개편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에서는 삭제됨.
- 1998
- 12
- 유엔 인권소위원회 특별보고관 게이 J. 맥두걸(Gay J. McDougall)의 위안부 실태조사에 대한 유엔위원회의 제2차 보고서가 발표됨.
- 2000
- 6
- 미국 하원의원 레인 에반스(Lane Evans)와 하원 30여 명은 제2차 세계대전에 일본군대가 저지른 전쟁범죄의 희생자에 대한 공식적 사과와 배상금 지불을 촉구함.
- 2000
- 9
- ·한국(Korea), 대만(Taiwan), 필리핀(Philippines)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 15명은 워싱턴에 있는 미국 연방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함.
·일본군대의 성노예 문제가 미국 법정에서 최초로 다루어짐. : 1787년에 제정된 외국인 불법행위청구법령을 사용하여 워싱턴 D.C.에서 처음으로 일본을 피고로 지명한 재판이 열림. - 2000
- 12
-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 모의법정이 일본 도쿄(12월 8-12일)에서 개최되어 9개국(한국, 중국, 필리핀, 대만,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네덜란드, 일본)의 ‘위안부’ 피해 여성이 '위안부'로서 겪었던 참담한 경험을 증언하며 비인도적 범죄의 책임자로 히로히토(裕仁) 일본천황을 기소함.
- 2001
- 7
- 미국 하원의원 레인 에반스가 일본정부에 공식적인 인정과 명백한 사과를 하도록 요청하는 하원결의안 195호를 제출한 후 ‘위안부’ 피해 여성 김순덕이 '위안부'로서 겪었던 참담한 경험을 증언하는 기자회견 개최됨.
- 2001
- 8
- 워싱턴의 미국 콜롬비아 특별구 연방항소법원(U.S. District of Columbia Circuit Court)에 15명의 ‘위안부’ 피해 여성이 제소한 집단소송에 대한 심리공판이 개최됨.
- 2001
- 9
- 유엔인권위원회는 일본에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의 희생자에 대하여 반드시 보상할 것을 권고함.
- 2001
- 12
- 모의 헤이그 법정이 네덜란드에서 개최됨; 전쟁범죄에 대한 피고로 이미 사망한 일본의 전쟁범죄자들이 기소됨.
- 2003
- 6
- ·미국 콜롬비아 특별구 연방항소법원의 더글라스 H. 긴즈버그(Douglas H. Ginsburg), 주디트W. 로저(Judith W. Rogers), 데이비스T. 테텔(Davis T. Tatel)판사는 ‘위안부’ 피해 여성의 항소를 기각함.
·미국 하원의원 레인 에반스, 미셸 혼다 등은 결의안 226호를 다시 제출하였지만 다시 기각됨. ‘위안부’ 문제를 제2차 세계대전의 범법행위로 다루기보다는 여성인권에 대한 위반으로 예외적으로 다루었음. - 2004
- 7
- 미국 대법원은 황(Hwang) 대(vs) 일본(Japan)의 위안부 사건에 명령을 냄; 청원이 받아들여지고, 재판이 중지되었으며 사건은 오스트리아(Republic of Austria) 대(vs) 알트만(Altmann) 사건에 비추어 더 많은 숙고를 위해 계류됨.
- 2005
- 8
- 유엔과 국제사면위원회는 일본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에게 직접적으로 보상할 것을 요청하면서 아시아여성기금은 공식적인 책임을 회피하는 일본정부의 술책이라고 비판함.
- 2006
- 9
- ·한국정부는 1965년에 관련된 모든 기밀문건의 취급을 해제함.
·한일 간 기본 조약 회담에서 “위안부”, “원자폭탄 희생자”, “사할린 강제 노동자”와 관련하여 새롭게 제기된 사안들은 미해결된 요구사항에 추가적으로 논의될 현안으로 상정됨. - 2006
- 11
- ·일본에 공식적인 인정과 완전한 책임 이행을 촉구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미국 연방의회 하원 결의안 759호는 위안부에 대하여 미국 정계에서 7년간의 합법적인 행동주의가 있은 후, 미 하원 외교 분과위원회에서 만장일치 투표에 의해 통과되었으나 하원은 그 결의안 문건을 논의하지 않았음.
·미국 민주당이 중간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위안부 결의안을 놓고 정치적 타이밍을 일신하는 데 중요한 미연방의회 하원에 과반수를 확보하여 다수당으로 복귀함. - 2007
- 1
- 미국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 제121호가 마이크 혼다(Mike Honda) 하원의원과 다른 동료 의원들의 도움으로 하원 소속 외교 분과 위원회에 상정됨.
- 2007
- 3
-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수상은 미국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 제121호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위안부’의 강제 동원에 대한 시인을 부정함으로써 논란을 촉발시킴.
- 2007
- 6~7
- 7월 30일, 미국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 제121호가 미국 하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됨.
- 2007
- 11
- ·네덜란드에서 위안부 결의안 통과됨.
·캐나다에서 위안부 결의안 통과됨. - 2007
- 12
- 유럽연합에서 위안부 결의안 통과됨.
- 2008
- 3
- ·필리핀에서 위안부 결의안 통과됨.
·일본 효고현(兵庫縣) 다카라즈카 시(宝塚市)에서 위안부 결의안 통과됨. : 2012년 현재, 일본의 41개 지방자치 의회들이 어린 여성들을 성노예화한 강제성에 대해 명백한 방식으로 공식 인정 및 사과하고 역사적 책임을 받아들일 것을 일본정부에 촉구하는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됨. - 2008
- 10
- ·‘위안부’ 문제에 대한 워싱턴 연대(Washington Coalition for Comfort Women Issue, WCCWI) 단체는 미국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 제121호의 하원 통과 1주년을 맞이하여 버지니아 주에서 전 세계적 각성을 촉진하는 기념행사를 가짐.
·유엔인권위원회는 현재 빠르게 사망하고 있는 80살 이상의 ‘위안부’ 피해 여성에 대하여 일본정부에 과거 잘못을 즉각적으로 시정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권고함. 유엔인권위원회가 일본정부에 행동을 촉구하는 권고는 2001년과 2005년에 이은 세 번째 권고임. - 2008
- 11
- 타이완 의회에서 위안부 결의안 통과됨.
- 2009
- 3
- 오스트레일리아, 스트라스필드(Strathfiled) 시 의회에서 위안부 결의안 통과됨.
- 2010
- 3
- 대한민국 국회의 모든 정당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국회의원 위원회를 결성하고, 6월에 조각 예정이었던 일본의 간 나오토(菅直人) 내각에 공식 서한을 보내고자 함.
- 2010
- 6
- 유엔인권위원회는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가해 정부의 책임을 강조한 UN 소속 여성 특별보고관 라쉬다 만주(Rashida Manjoo)가 작성한 “폭력을 당한 여성에 대한 배상을 주제로 한 보고서, AIHRCJI4/22”를 발표함.
- 2010
- 8
- 8월 25일 일본에 의한 한국식민 지배 100주년 행사에서 100명의 영향력 있는 한국 지도층 인사들이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함.
- 2011
- 5
- ·한국 헌법재판소는 남한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일본과 외교적으로 해결하는 데 실패했음을 규정하고,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규정되었던 대로, 보다 건설적이고 진취적인 “논쟁 해결 과정”을 정부에 요구하기로 결정함.
·한국정부는 헌법재판소가 ‘한국정부의 실패는 헌법에 위배되는 부주의로 이루어졌음을 규정하고 정부의 조치를 촉구’함에 따라, 9월과 11월 2차례에 거쳐 일본정부에 ‘위안부’ 문제에 대한 회담을 제의함.
·일본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일본을 상대로 한 향후에 있을 어떠한 요구사항도 소멸된다는 이전의 주장을 되풀이하며 거부함. - 2011
- 11
- 한국 출신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 2명과 나치 대학살(Holocaust) 만행으로부터 살아남은 2명의 여성 생존자가 뉴욕에서 공개적으로 그들이 겪었던 경험을 공유하는 모임을 가짐.
- 2011
- 12
- 수요시위가 1,000번째 모임행사를 기념하면서 서울 주재 일본 대사관에 앞에 평화소녀조각상을 건립함.
- 2012
- 5
-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이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서 개관함.
- 2013
- 1~2
- 뉴욕 주 상하원에서 위안부 결의안 통과됨.
- 2013
- 3
- ·위안부 추모비가 3월 9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미국 뉴저지 주 버겐 카운티 법원 앞 메모리얼 아일랜드 파크에 세워져 한국, 중국, 네덜란드, 필리핀, 타이완 등의 수많은 일본군 ‘위안부’의 넋을 추모함.
·일본 교토 시 의회에서 위안부 결의안 통과됨.
·뉴욕 주 하원에서 위안부 결의안 통과됨. - 2013
- 5
- ·미국 일리노이 주 하원에서 위안부 결의안 통과됨.
·유엔 산하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CESCR)와 유엔 산하 고문반대위원회(CAT)는 위안부 희생자에 대한 일본정부의 사과와 희생자에 대한 법적 보상의 책임, 그리고 일본의 과거 잘못에 대한 일본 청소년의 교육을 재촉구함. - 2013
- 6
- ·일본 시마네현에서 위안부 결의안 통과됨.
·미국 뉴저지 주 상원에서 위안부 결의안 통과됨.
·2013년 현재, 55건의 위안부 결의안이 일본 지역의회, 미국 캘리포니아, 일리노이, 뉴욕, 뉴저지 주 의회,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캐나다, 필리핀, 타이완, 유럽연합 등 전 세계적으로 통과됨. - 2013
- 7
-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인근 그렌데일 시에 미국 하원 위안부 결의안 121호 통과 6주년을 맞아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함.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 있는 재미 한인단체들에서 위안부 추모비를 세우려는 노력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음.
·일본정부는 미국의 태평양, 대서양 연방의 위안부 추모비 건립 노력에 대해 일본정부의 외교 사절과 사업관계망을 통하여 미 도시의 공직자와 정치인을 상대로 조직화된 압력을 통해 방해함. - 2014
- 4
- ·한국과 일본 외무성 국장급 회의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부간 논의는 5월과 7월에 다시 진행하기로 함
- 2014
- 5
- ·한국과 일본 외무성 국장급 회의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부간 논의는 5월과 7월에 다시 진행하기로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