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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한원

팔족이 자손을 이었고, 오부가 직무를 나누었다.

팔족이 자손을 이었고, 오부가 직무를 나누었다.
『괄지지』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수 개황(581~600) 연간에, 그 [나라] 왕의 이름은 창(위덕왕)이었다. 창이 죽자, 아들 여선(법왕)이 왕위를 이었고, [여선이] 죽자, 아들 여장(무왕)주 001
각주 001)
『三國史記』 백제본기에는 ‘扶餘璋’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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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왕위를 이었다.주 002
각주 002)
위덕왕~무왕 대에 이르는 시기의 출계 관계는 사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三國史記』 백제본기에 의하면 법왕은 惠王의 長子로 기록되어 있으며, 무왕은 법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반해 『三國遺事』에서는 무왕을 과부인 어머니가 池龍과 교합하여 낳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그 출계가 불분명하다. 한편 『北史』에서는 무왕을 위덕왕의 아들로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위덕왕 - 혜왕 - 법왕 - 무왕으로 이어지는 시기의 출계 관계가 불분명한 것은 우선 혜왕과 법왕이 각각 1년여 밖에 즉위하지 않으면서 이 과정에서 중국에서 이들의 관계를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위덕왕 사후 왕위 계승 과정에서 방계인 혜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새로운 왕계가 형성되고, 이 과정에서 출계 관념이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채 후대에 전승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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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라에는 사씨·연씨·이씨·해씨·진씨주 003
각주 003)
『隋書』에는 「貞氏」로 되어 있고, 『北史』에는 「眞氏」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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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목씨·수씨주 004
각주 004)
『隋書』에는 「苩氏」로 되어 있고, 『北史』에는 「苗氏」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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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있는데, 이들 여덟 족속이 대성이다. 그 관은 16등이 있는데, 좌평은 5인으로, 제1등이며, 달솔주 005
각주 005)
『隋書』에는 「大率」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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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30인으로 제2[등]이다. 은솔 이하는 정원이 없으며, [은솔은] 제3[등]이다. 덕솔은 제4[등], 타솔주 006
각주 006)
『周書』에는 「扞率」로 되어 있고, 『隋書』와 『北史』에는 「杅率」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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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제5[등], 나솔은 제6[등]으로, 6등 이상은, 관을 은화로 장식한다. 장덕은 제7[등]으로, 자대를 한다. 시덕은 제8[등]으로, 조대를 한다. 고덕은 제9[등]으로, 적대를 한다. 계덕주 007
각주 007)
『隋書』에는 「李德」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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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제10[등]으로, 청대를 한다. 대덕은 제11[등]이며, [대덕] 이하는 모두 황대를 한다. 문독은 제12[등]이고, 무독은 제13[등]이며, [무독] 이하는 모두 백대를 한다. 우군주 008
각주 008)
『周書』와 『隋書』, 『北史』에는 「佐軍」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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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제14[등], 거무주 009
각주 009)
『周書』와 『隋書』에는 「振武」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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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제15[등], 극우주 010
각주 010)
『周書』에는 「克虞」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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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제16[등]이다. 또 그 내관에는 전내부·곡부·내부주 011
각주 011)
『周書』에는 「肉部」로 되어 있고, 『北史』에는 앞의 「穀部」가 따로 없이, 「穀內部」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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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부주 012
각주 012)
『周書』와 『北史』에는 「內掠部」와 「外掠部」로 나뉘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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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부·약부·목부·법부·후궁부주 013
각주 013)
『周書』에는 「後官部」로 되어 있고, 『北史』에는 「後宮部」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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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있다주 014
각주 014)
『周書』, 『北史』와 달리 여기서는 「內掠部」와 「外掠部」가 「掠部」로 통칭되어 있고, 『周書』와 『北史』에 나오는 「馬部」와 「刀部」가 여기에는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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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장장이 있다. 외관에는 사군부·사종부·사공부·사구부·점구부·객부·외사부·주부·백관부가 있으며주 015
각주 015)
『周書』와 『北史』에 나오는 「都市部」 혹은 「市部」가 여기에는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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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체로 이러한 여러 관에는 각각 재가 있다. 관의 장은 임기가 있으니 모두 3년에 한번 교대한다. 왕의 거처는 도성 안[이다]. 또 5도를 두는데주 016
각주 016)
백제의 경우, 도성은 5부 5항으로 나뉘며, 지방은 5방과 그 휘하의 郡·城으로 나뉘었다. 지방의 방-군 관련 기사는 다음 정문의 주문에 별도로 기재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도성 내의 행정구획에 대한 설명이다. 『周書』와 『北史』에는 上部·前部·中部·下部·後部의 5部가 나온다. 한편, 『隋書』에서는 도성이 아닌, 畿內를 나누어 5部를 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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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달솔이 다스린다. 또 성 안에는 5항이 있는데, 사서(士庶)가 여기에 거주한다. 또 5방이 있는데, 중국의 도독과 같으며, 방은 모두 달솔이 다스린다. 각 방은 군을 다스리는데, 많은 것은 열 개 [군]에 이르고, 적은 것은 예닐곱 개[군]이다. 군장은 모두 은솔로 삼는다주 017
각주 017)
『周書』와 『北史』 등에는 ‘郡將은 3인으로, 德率이 그것을 맡았다’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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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현에는 도사를 두었는데, 또한 성주라고 하였다.”
 
• 참고
『三國史記』 卷27 武王 武王諱璋 法王之子 風儀英偉 志氣豪傑 法王即位翌年薨 子嗣位
『三國遺事』 卷2 武王 武王 第三十武王名璋 母寡居築室扵京師南池邊 池龍文通而生小名薯童 噐量難測 常掘薯蕷賣為活業. 國人因以爲名
『北史』 卷94 百濟 隋 開皇初 餘昌又遣使貢方物 拜上開府帶方郡公百濟王 平陳之歲 戰船漂至海東耽牟羅國 其船得還 經于百濟 昌資送之甚厚 幷遣使奉表賀平陳 文帝善之 下詔曰 彼國懸隔 來往至難 自今以後 不須年別入貢 使者舞蹈而去 十八年 餘昌使其長史王辯那來獻方物 興遼東之役 遣奉表請爲軍導 帝下詔 厚其使而遣之 高麗頗知其事 兵侵其境 餘昌死 子餘璋立
『隋書』 卷81 百濟 國中大姓有八族 沙氏燕氏刕氏解氏貞氏國氏木氏苩氏
『三國史記』 卷24 古爾王 二十七年春正月 置内臣佐平掌宣納事 内頭佐平掌庫藏事 内法佐平掌禮儀事 衛士佐平掌宿衛兵事 朝廷佐平掌刑獄事 兵官佐平掌外兵馬事 又置逹率恩率德率扞率奈率及將德施德固德季德對德文督武督佐軍振武克虞 六佐平並一品 逹率二品 恩率三品 德率四品 扞率五品 奈率六品 將德七品 施德八品 固德九品 季德十品 對德十一品 文督十二品 武督十三品 佐軍十四品 振武十五品 克虞十六品 二月 下令六品已上服紫 以銀花餙冠 十一品已上服緋 十六品已上服青
『周書』 卷49 百濟 官有十六品 左平五人一品 達率三十人二品 恩率三品 德率四品 扞率五品 柰率六品 六品已上 冠飾銀華 將德七品 紫帶 施德八品 皂帶 固德九品 赤帶 李[季]德十品 靑帶 對德十一品 文督十二品 皆黃帶 武督十三品 佐軍十四品 振武十五品 克虞十六品 皆白帶 自恩率以下 官無常員 各有部司 分掌衆務 內官有前內部穀部肉部內掠部外掠部馬部刀部功德部藥部木部法部後官部 外官有司軍部司徒部司空部司寇部點口部客部外舍部綢部日官部都市部
『隋書』 卷81 百濟 官有十六品 長曰左平 次大率 次恩率 次德率 次杅率 次奈率 次將德 服紫帶 次施德 皂帶次固德 赤帶 次李德 靑帶 次對德以下 皆黃帶 次文督 次武督 次佐軍 次振武 次剋虞 皆用白帶 其冠制並同唯奈率以上飾以銀花 長史 三年一交代 畿內爲五部 部有五巷 士人居焉 五方各有方領一人 方佐貳之 方有十郡 郡有將 其人雜有新羅高麗倭 亦有中國人

  • 각주 001)
    『三國史記』 백제본기에는 ‘扶餘璋’으로 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위덕왕~무왕 대에 이르는 시기의 출계 관계는 사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三國史記』 백제본기에 의하면 법왕은 惠王의 長子로 기록되어 있으며, 무왕은 법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반해 『三國遺事』에서는 무왕을 과부인 어머니가 池龍과 교합하여 낳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그 출계가 불분명하다. 한편 『北史』에서는 무왕을 위덕왕의 아들로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위덕왕 - 혜왕 - 법왕 - 무왕으로 이어지는 시기의 출계 관계가 불분명한 것은 우선 혜왕과 법왕이 각각 1년여 밖에 즉위하지 않으면서 이 과정에서 중국에서 이들의 관계를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위덕왕 사후 왕위 계승 과정에서 방계인 혜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새로운 왕계가 형성되고, 이 과정에서 출계 관념이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채 후대에 전승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隋書』에는 「貞氏」로 되어 있고, 『北史』에는 「眞氏」로 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隋書』에는 「苩氏」로 되어 있고, 『北史』에는 「苗氏」로 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隋書』에는 「大率」로 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6)
    『周書』에는 「扞率」로 되어 있고, 『隋書』와 『北史』에는 「杅率」로 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7)
    『隋書』에는 「李德」으로 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8)
    『周書』와 『隋書』, 『北史』에는 「佐軍」으로 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9)
    『周書』와 『隋書』에는 「振武」로 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10)
    『周書』에는 「克虞」로 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11)
    『周書』에는 「肉部」로 되어 있고, 『北史』에는 앞의 「穀部」가 따로 없이, 「穀內部」로 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12)
    『周書』와 『北史』에는 「內掠部」와 「外掠部」로 나뉘어 기록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13)
    『周書』에는 「後官部」로 되어 있고, 『北史』에는 「後宮部」로 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14)
    『周書』, 『北史』와 달리 여기서는 「內掠部」와 「外掠部」가 「掠部」로 통칭되어 있고, 『周書』와 『北史』에 나오는 「馬部」와 「刀部」가 여기에는 빠져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15)
    『周書』와 『北史』에 나오는 「都市部」 혹은 「市部」가 여기에는 빠져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16)
    백제의 경우, 도성은 5부 5항으로 나뉘며, 지방은 5방과 그 휘하의 郡·城으로 나뉘었다. 지방의 방-군 관련 기사는 다음 정문의 주문에 별도로 기재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도성 내의 행정구획에 대한 설명이다. 『周書』와 『北史』에는 上部·前部·中部·下部·後部의 5部가 나온다. 한편, 『隋書』에서는 도성이 아닌, 畿內를 나누어 5部를 둔다고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17)
    『周書』와 『北史』 등에는 ‘郡將은 3인으로, 德率이 그것을 맡았다’라고 되어 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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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족이 자손을 이었고, 오부가 직무를 나누었다. 자료번호 : hw.k_0002_008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