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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한원

탁야[산]에서 의심을 품게 했으니, 방분의 공이 빨리 이루어졌다.

탁야[산]에서 의심을 품게 했으니, 방분의 공이 빨리 이루어졌다.
『후한서』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영원 7년(95)에 안문태수주 001
각주 001)
鴈門郡은 秦代에 설치되었으며 雒陽의 북쪽 1천 5리 지점에 위치해 있다고 전한다. 진한대 치소는 善無縣이었으나 후한대 陽館縣으로 옮겼으니, 지금의 산서성 삭주시 동남쪽에 위치한 夏官城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자세한 내용은 동북아역사재단 편, 앞의 책, 2009, 325쪽, 주 14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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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분을 행도요장군으로 삼았다. 봉후는주 002
각주 002)
逢侯는 남흉노 제8대 선우인 休蘭尸逐侯鞮單于의 아들이다. 『後漢書』 남흉노열전에 따르면, 안국이 죽은 이후 新降胡는 봉후를 선우로 세운 후 삭방으로 달아났으며, 한 조정에서는 行車騎將軍 鄧鴻, 越騎校尉 馮柱, 行度遼將軍 朱徽를 보내 이들을 공격하였다. 한과의 전투에서 패한 봉후는 이후 새외로 달아났다. 자세한 내용은 『後漢書』 남흉노열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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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외에서 두 부로 나누고, 자신은 우부를 거느려 탁야산 아래에 진을 치고, 좌부는 삭방의 서북쪽에 진을 치게 하니 서로 간의 거리가 수백 리였다. [영원] 8년(96) 겨울에 좌부의 호는 스스로 상대가 배반하였다고 의심하여 삭방주 003
각주 003)
朔方郡은 전한 무제 원삭 2년(기원전 127) 車騎將軍 衛靑이 흉노를 격파하여 현재 오르도스 지방을 정복한 이후 처음 설치한 군 중 하나로, 현재의 내몽고자치구 河套와 伊克昭盟 일대로 추정된다. 당시 한은 대대적인 흉노 정벌을 감행하였고, 삭방군 외에도 上谷郡·代郡·雲中郡雁門郡遼西郡漁陽郡北平郡 등을 설치하였다. 그 중에서도 삭방군은 한의 수도 장안과 바로 이어져 군사적인 면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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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새로 되돌아 들어왔다. 방분이 그들을 영접하여 받아들이고 위무하니 정병 4천인과 노약자 1만여 구가 모두 항복했다. 나누어서 북변에 살게 했다.”
 
• 참고
『後漢書』 卷89 南匈奴 後帝知朱徽杜崇失胡和 又禁其上書 以致反畔 皆徵下獄死 以鴈門太守龐奮行度遼將軍 逢侯於塞外分爲二部 自領右部屯涿邪山下 左部屯朔方西北 相去數百里 八年冬 左部胡自相疑畔 還入朔方塞 龐奮迎受慰納之 其勝兵四千人 弱小萬餘口悉降 以分處北邊諸郡

  • 각주 001)
    鴈門郡은 秦代에 설치되었으며 雒陽의 북쪽 1천 5리 지점에 위치해 있다고 전한다. 진한대 치소는 善無縣이었으나 후한대 陽館縣으로 옮겼으니, 지금의 산서성 삭주시 동남쪽에 위치한 夏官城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자세한 내용은 동북아역사재단 편, 앞의 책, 2009, 325쪽, 주 146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2)
    逢侯는 남흉노 제8대 선우인 休蘭尸逐侯鞮單于의 아들이다. 『後漢書』 남흉노열전에 따르면, 안국이 죽은 이후 新降胡는 봉후를 선우로 세운 후 삭방으로 달아났으며, 한 조정에서는 行車騎將軍 鄧鴻, 越騎校尉 馮柱, 行度遼將軍 朱徽를 보내 이들을 공격하였다. 한과의 전투에서 패한 봉후는 이후 새외로 달아났다. 자세한 내용은 『後漢書』 남흉노열전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3)
    朔方郡은 전한 무제 원삭 2년(기원전 127) 車騎將軍 衛靑이 흉노를 격파하여 현재 오르도스 지방을 정복한 이후 처음 설치한 군 중 하나로, 현재의 내몽고자치구 河套와 伊克昭盟 일대로 추정된다. 당시 한은 대대적인 흉노 정벌을 감행하였고, 삭방군 외에도 上谷郡·代郡·雲中郡雁門郡遼西郡漁陽郡北平郡 등을 설치하였다. 그 중에서도 삭방군은 한의 수도 장안과 바로 이어져 군사적인 면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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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야[산]에서 의심을 품게 했으니, 방분의 공이 빨리 이루어졌다. 자료번호 : hw.k_0002_0010_0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