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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보는 독도

사직 이광적의 도성 방비책과 내수외어의 방책을 진계하는 상소문

  • 저필자
    장순순(전북대학교 교수)
  • 날짜
    1710년 10월 3일(음)
  • 출전
사료해설
사직(司直) 이광적(李光迪)이 일본배들이 자주 울릉도에서 출몰하여 어로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그것들을 차단하기 위하여 진(鎭)을 설치할 것을 건의한 내용이다. 이 사료를 통해서 1696년 일본인들의 울릉도 도해 금지를 명하는 막부의 지시가 내려졌는데도 일본 연해민들의 불법적으로 울릉도에 건너와 어물(魚物)을 채취하는 행태가 숙종 말년까지에도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문
○甲子/司直李光迪上疏累萬言, 極論固守都城之計, 仍陳內守七策, 外禦六策。 其內守之策七條:
一曰築城之審勢也。 或慮拘蹲之壓臨, 爲守城之不便, 鞍峴之孤絶, 爲置墩之不當。 槪其兄弟峰, 分脈橫亘, 爲狗蹲, 爲白岳, 爲仁王, 而後峰壁立, 下臨無地, 若於最高之峰, 列置墩臺, 張旗幟嚮砲銃, 亦可禦賊, 而必有大將, 可無踈虞之患。 必須移設摠營於北漢下, 地勢稍廣處, 使摠戎大將, 專任北城之固守, 移設楊州邑治於弘福, 先築山城, 通峽路接應, 則有表裏相倚之勢。 若夫南城之高峻, 雖不如北城之險阻, 而別置墩臺, 多設火攻之具, 且南山之與南漢, 隔江相對, 聲勢相依, 宜使守禦大將, 專任南城之固守, 節制府尹, 留鎭江上, 相爲倚毗, 則斯爲守禦南城之長策也。 東西二方, 地勢低平, 最爲虛曠, 堅築崇墉, 如平地間, 設砲樓於城上, 多儲火藥於樓內, 而此等物力之費, 有難專責於軍門。 若移沁築之資, 以爲修築之用, 則事易辨而役易完矣。 二曰, 江倉之移入城內也。 我國三江, 通漕五路, 諸般漕運, 總納江倉, 若値外寇猝至, 先據江館, 則不勞輓粟, 而自足盜糧。 宜令該曹, 移入城內, 而仁王山下守成宮公基之閑曠, 可合設倉。 三曰, 分屬坊民於軍門也。 都民帳籍男丁十萬有餘, 而除老病殘疾, 必不下七八萬。 北部之民, 使守北城, 而屬於禁營, 南部之民, 使守南城, 而屬於守禦, 西部之民, 使守西城, 而屬於都監, 中部、東部之民, 使守東城, 而屬於御營, 各定領將, 各成隊伍, 分排(授)〔守〕堞, 春秋習操, 一如南漢大操, 則坊民自爲守堞, 而衆心成城, 益堅效死之志也。 四曰, 糧餉之預蓄也。 我國以一年所入, 僅支一年, 而常患不贍, 別備軍餉, 更無計策。 宜以三南儲置米一半, 上納於京倉, 統、監、兵、三營糴穀一半, 令本營, 船運於京倉, 至如各軍門屯穀, 嚴禁其發賣, 直納其軍門, 歲爲恒式, 則可以備守城之糧。 五曰, 置京倉以淸四野也。 江倉旣入城內, 而畿邑亦置京倉於城內, 秋糴而自本邑輸納, 春糶而使邑民受去, 常留一半於京倉, 以爲待變之糶, 是亦淸野之策也。 且如大興山城, 城外倉穀, 旣不移入城內, 則亦令該邑, 直納京倉, 遠邑倉穀, 有本邑山城者, 收糴於山城, 有邑底完倉者, 收糴於邑倉, 各率邑民, 倂力固守, 則賊兵勢難輓粟遠來, 自當捲退, 此其淸野之法, 爲兵家勝算也。 六曰, 社倉之設置也。 都民之有料祿、貢物者, 雖多, 而朝夕販沽資生之類, 及轉輸外儲之穀, 以爲食道者倍多。 宜倣社倉之法, 使五部統戶, 作爲穀契, 而五部之官, 句管散(歛)〔斂〕, 春糶、秋糴, 如太常該官之掌東籍, 而嚴立契憲, 切禁濫受, 逐年生殖, 則亦足以備都民守城之糧資也。 七曰, 以江都爲應接也。 漢都之於江都, 有表裏山河之勢。 蓋其水道相連, 而三南之漕, 轉通於此, 陸路或梗, 而朝廷之命, 令由於此, 雖未必恃爲依歸之保障, 而可以爲都城之應援, 必須沿江置墩, 以爲斥堠, 然後雖當賊勢之鴟張, 猶可相通, 而此以守都城而言也。 不守都城, 則江都勢單力孤, 自保難矣, 何足爲應援乎?
其外禦之策, 六條:
一曰, 守畿內關隘, 以捍衛都城也。 國都之如慕華館、綠礬、惠任、蔚峙、飛雲峴等處, 儘所謂險阻咽喉之地。 宜令該曹, 擇差有將略武弁, 隷於摠戎廳, 使之分守關隘, 各給團束之軍, 以爲把守控扼, 則可防豕突之賊也。 二曰, 定畿內信地, 以防禦外寇也。 如松都之靑石洞, 正所謂一夫當關, 萬夫莫開。 今雖有大興山城, 距靑石稍遠, 必使開城留守, 設防隘口, 把絶賊路, 與大興城(猗)〔掎〕角而後, 可禦賊兵也。 且長湍之臨津, 當爲右防禦信地, 水原之禿城, 當爲左防禦信地, 而摠戎使統畿輔重兵, 留營北漢之下, 節制左右防禦使, 此其捍衛都城之策也。 三曰, 守諸道關防, 以控扼賊路也。 北路之鐵嶺,東路之大關嶺, 西路之正方駒峴, 湖西之車嶺, 皆可爲本道方伯之信地, 此外可設關防處甚多。 方伯節制, 其管下兵使、營將, 分守險要, 一以爲控扼賊路, 一以爲領兵勤王, 此其爲捍禦外寇之長策。 四曰, 置重鎭於安興, 以備漕路也。 安興一島, 正在三南漕路之咽嗌, 而浮于海達于江, 此其門戶也。 今乃以泰安郡, 兼防禦使, 故本郡稱以防禦, 官吏之侵虐鎭卒, 罔有紀極, 而僉使受制於兼防, 兩相牴牾, 抛其軍務。 亟罷泰安兼防之任, 仍令本鎭僉使, 專管防禦, 一如永宗之兼防禦, 專責其海防之守禦, 此不可少緩也。 五曰, 遣御史巡撫海防也。 近來海防之踈虞, 無處不然。 舟楫雖存, 櫓卒不備, 浦戶流亡, 立代無人。 僉使、萬戶, 雖受防布, 而一自減數之後, 絶無代立者。 至如永宗鎭所屬水卒, 散在遠地, 島中浦民, 多屬於各衙門之陸軍。 湖西水、虞候所管戰船, 皆在數日程海港, 而張空拳瞭望而已。 且東海, 古有水宗, 而船舶不通, 故革罷諸鎭矣, 數十年來, 水宗大變, 而倭船比比漁採於鬱陵島, 誠可寒心。 亟宜分遣御史於東、西海浦, 舟楫之不完者, 申飭改造, 櫓卒之未備者, 督令責立, 革罷之鎭, 依前復設, 已減之防布, 依前準給, 水軍之在山郡者, 從便換定, 爲今日之急務也。 六曰, 勑北路烽燧也。 八路烽燧, 次次擧火, 合準於南山, 而爲五炬。 他路烽燧, 則每夕相準, 而北路則不得候望, 每以雲暗懸錄。 宜令該曹, 申飭北路, 嚴査某道某邑烽臺之火絶, 勘正烽軍之罪, 亦不可忽也。
答曰: “都城事, 非所更議, 而他餘事, 令廟堂稟處。” 是後, 竟無採用者。
【史臣曰: “自有北咨以來, 謀事之章, 日滿公車, 而李翊漢憑藉人才收召, 陰濟護黨之計, 金一鏡張大體府設置, 妄爲喜事之談, 玉堂只是掇拾陳腐, 無一設施之言。 獨光迪一疏, 縷縷至屢萬語, 備論修禦諸策, 其言雖未必一一中窾, 而布張措置, 間有可觀, 老臣惓惓之志, 其亦可尙也已。 惜乎! 只以其人望輕年〔又〕耄而忽而笑之也。 況今日朝廷所講論, 皆是檀公上策, 設有奇謀異計, 稍涉守城之方, 則比如以水投石, 初以爲闊而不省, 可勝歎哉。”】
번역문
사직(司直) 이광적(李光迪)이 상소(上疏)하여 수만 마디의 말로 도성(都城)을 굳게 지키는 계책(計策)을 극론(極論)하고, 이어 내수(內守)하는 일곱 가지 방책과 외어(外禦)하는 여섯 가지 방책을 진계하였다. 내수(內守)하는 일곱 조목에 이르기를,
“1. 축성(築城)의 형세를 살펴보건대, 혹 구준봉(狗蹲峰)이 압박하여 부림(俯臨)하는 것이 염려스러워 수성(守城)하는 데 불편(不便)하게 여기고, 안현(鞍峴)은 외따로 떨어져 있어서 돈대(墩臺)를 설치하기에 마땅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대개 그 형제봉(兄弟峰)에서 분맥(分脈)이 뻗어나와, 구준봉(狗蹲峰)이 되고 백악(白岳)이 되고 인왕산(仁王山)이 되어, 뒤의 봉우리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어서 아래로 내려다볼 땅이 없으니, 만약 제일 높은 봉우리에 돈대를 열치(列置)하여 기치(旗幟)를 베풀고 총포(銃砲)를 울리면, 또한 적(賊)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대장(大將)이 있어야 허술한 근심이 없을 것이니, 반드시 총영(摠營)을 북한산(北漢山) 아래 조금 지세(地勢)가 넓은 곳에 옮겨 설치하고, 총융 대장(摠戎大將)으로 하여금 북성(北城)을 전임(專任)하여 견고하게 지키게 하고, 양주(楊州)의 읍치(邑治)를 홍복산(洪福山)으로 옮겨 설치하여, 먼저 산성(山城)을 쌓고 협로(峽路)를 통해 접응(接應)하게 하면, 안팎으로 서로 의뢰하는 형세가 있을 것입니다. 대저 남성(南城)의 높고 험준함이 비록 북성(北城)의 험조(險阻)함만 못하다 하나, 따로 돈대를 설치하여 화공(火攻)의 기구(器具)를 많이 설치해 놓고, 또 남산(南山)이 남한(南漢)과 더불어 강(江)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對峙)하여 성세(聲勢)가 서로 의지하게 될 것이니, 마땅히 수어 대장(守禦大將)으로 하여금 남성(南城)을 전임(專任)하여 굳게 지키도록 하고, 부윤(府尹)으로 하여금 강(江)에 머물러 있으면서 서로 의비(倚毗)하게 하면, 이것이 남성(南城)을 수어(守禦)하는 장책(長策)이 될 것입니다. 동쪽과 서쪽 두 방향은 지세(地勢)가 낮고 평평하여 가장 허술하니, 높은 담을 견고하게 쌓고, 성 위에 포루(砲樓)를 설치하되, 포루 안에 화약(火藥)을 많이 비축(備蓄)해 두어야 하는데, 이러한 역사(役事)에 드는 물력(物力)은 오로지 군문(軍門)에만 책임지게 하기 어려운 바가 있습니다. 만약 강도(江都)에서 축성(築城)할 재력(財力)을 옮겨 수축(修築)하는 비용으로 삼는다면, 일을 쉽사리 추진하여 역사(役事)도 쉽게 완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강창(江倉)을 성(城) 안으로 옮겨 들이는 일입니다. 우리 나라의 삼강(三江)은 오로(五路)를 통하는 뱃길이 되므로, 여러 가지 조운(漕運)을 통틀어 강창에 바치는데, 만약 외구(外寇)가 갑자기 이르러 강관(江館)을 먼저 점거(占據)하면, 양식을 운반하는 수고로움이 없이 도둑질한 양식으로 풍족할 것입니다. 마땅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성 안으로 옮겨 들이게 해야 할 것인데, 인왕산(仁王山) 아래 수성궁(守城宮) 기지(基址)의 한적하고 넓은 곳이 창고를 설치하기에 적합합니다.
3. 방민(坊民)을 군문(軍門)에 분속(分屬)시키는 일입니다. 도민(都民)의 장부[帳籍]에는 남정(男丁)이 10여만 명이나, 늙고 병들어 쇠잔한 사람이 반드시 7, 8만 명에 밑돌지 않을 것입니다. 북부(北部)의 백성은 북성(北城)을 지키게 하되 금위영(禁衛營)에 소속시키고, 남부(南部)의 백성은 남성(南城)을 지키게 하되 수어청(守禦廳)에 소속시키고, 서부(西部)의 백성은 서성(西城)을 지키게 하되 도감(都監)에 소속시키고, 중부(中部)와 동부(東部)의 백성은 동성(東城)을 지키게 하되 어영청(御營廳)에 소속시키며, 각각 영장(領將)을 정하고 각각 대오(隊伍)를 편성하여 성첩(城堞)에 배치해 두고, 봄·가을로 남한 산성(南漢山城)에서 크게 습조(習操)하던 것과 같이 습조(習操)하게 하면, 방민(坊民)이 스스로 성첩(城堞)을 지키면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성벽(城壁)처럼 굳어져서 목숨을 바치겠다는 뜻이 더욱 견고해질 것입니다.
4. 양향(糧餉)을 미리 비축(備蓄)하는 일입니다. 우리 나라는 1년 동안 거두어 들인 것으로써 겨우 1년을 지탱하여 항상 넉넉하지 못한 것을 근심하니, 따로 군향(軍餉)을 비축하는 것 외에 다시 계책이 없습니다. 마땅히 삼남(三南)의 저치미(儲置米) 절반을 경창(京倉)에 상납(上納)하게 하고 통영(統營)·감영(監營)·병영(兵營)의 적곡(糴穀)의 절반을 본영(本營)으로 하여금 경창(京倉)에 배로 운반하게 하고, 각 군문(軍門)의 둔곡(屯穀)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그 발매(發賣)를 엄금(嚴禁)하여 직접 군문(軍門)에 바치게 하되, 해마다 항식(恒式)으로 삼는다면, 수성(守城)의 양식(糧食)을 비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경창(京倉)을 설치하고, 사방(四方)을 청야(淸野)하는 일입니다. 강창(江倉)을 이미 성(城) 안으로 들이고, 기읍(畿邑) 또한 성 안에 경창을 설치하여 가을의 적곡(糴穀)을 본읍(本邑)으로부터 실어다 바치게 하면, 봄의 조곡(糶穀)은 고을 백성으로 하여금 받아가게 하되, 항상 경창에 절반을 남겨 두었다가 변고(變故)에 대비하는 조곡을 삼게 한다면, 이 또한 청야(淸野)하는 방책입니다. 또 대흥 산성(大興山城)과 같이 성(城) 밖의 창고(倉庫) 곡식을 성 안에 옮겨 들이지 못한다면, 또한 해당 고을로 하여금 직접 경창에 바치게 할 것이며, 먼 고을의 창고 곡식은 본고을에 산성(山城)이 있을 경우에는 산성에 적곡을 거두어 들이게 하고, 고을 가운데에 창고를 완비한 경우에는 고을의 창고에 적곡을 거두어 들이게 하되, 각각 고을 백성을 거느리고 힘을 합하여 굳게 지키도록 하면, 적병(賊兵)의 형세가 곡식을 운반하여 멀리 오기가 어려워서 스스로 군사를 거두어 물러갈 것이니, 이는 청야하는 법으로서 병가(兵家)의 승산(勝算)이 되는 일입니다.
6. 사창(社倉)을 설치하는 일입니다. 급료(給料)·녹봉(祿俸)·공물(貢物)이 있는 도민(都民)이 비록 많다 하나, 아침 저녁으로 매매[販沽]하여 자생(資生)하는 무리와 외방(外方)에 쌓아 두었던 곡식을 전수(轉輸)하여 생계(生計)를 삼는 자가 갑절이나 많습니다. 마땅히 사창(社倉)의 법을 본떠서 오부(五部)의 통호(統戶)로 하여금 곡계(穀契)를 만들게 하고, 오부의 관리로 하여금 흩고 거두는 것을 구관(句管)하게 하되, 봄의 조곡(糶穀)과 가을의 적곡(糴穀)을 태상시(太常寺)의 해당 관리가 동적전(東籍田)을 관장(管掌)하는 것과 같이 하도록 할 것이며, 계헌(契憲)을 엄중하게 세워서 외람되게 받는 것을 준절하게 금하고, 해마다 이식(利息)을 늘리면 도민(都民)이 수성(守城)하는 양식 밑천을 풍족하게 비축(備蓄)하게 될 것입니다.
7. 강도(江都)를 응접(應接)하는 곳으로 삼는 일입니다. 한도(漢都)에 대한 강도의 입장은 안팎으로 숭산(崇山)과 대하(大河)의 험준(險峻)한 형세가 있는데, 대개 그 수로(水路)가 서로 이어져 있어 삼남(三南)의 조운(漕運)은 모두 이곳을 통하게 되어 있으며, 육로(陸路)가 혹 막힐 수 있으므로 조정(朝廷)의 의논이 이로 말미암아 비록 반드시 의뢰[依歸]할 보장(保障)의 땅으로 믿지는 않더라도, 도성(都城)의 응원(應援)은 삼을 만하니, 반드시 연강(沿江)에 돈대(墩臺)를 설치하여 척후(斥堠)를 삼은 후에야, 비록 적(賊)이 형세를 떨친다 하더라도 오히려 서로 통할 수 있으니, 이는 도성(都城)을 지키는 것으로써 말한 것입니다. 도성을 지키지 못한다면 강도는 세력이 고단(孤單)해져 스스로 보존(保存)하기도 어렵게 될 것이니, 어떻게 족히 응원(應援)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외어(外禦)하는 계책(計策) 여섯 조목에 이르기를,
“1. 기내(畿內)의 관애(關隘)를 지켜 도성(都城)을 방위(防衛)하는 일입니다. 국도(國都)의 모화관(慕華館)과 녹반현(綠礬峴)·혜임현(惠任峴)·울치현(蔚峙峴)·비운현(飛雲峴) 등지는 모두 이른바 험저(險阻)한 요해처이니, 마땅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장략(將略)이 있는 무변(武弁)을 가려서 차출하여, 총융청(摠戎廳)에 예속시켜서 관애(關隘)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각각 단속하는 군사를 주고 파수(把守)하며 제어하여 누르게 하면, 시돌(豕突)해 오는 적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기내(畿內)의 신지(信地)를 정하여 외적(外賊)을 방어하는 일입니다. 송도(松都)의 청석동(靑石洞)과 같은 곳은 바로 이른바 한 사람이 관문(關門)을 지키면 만 사람이 열지 못하는 곳인데, 지금 비록 대흥 산성(大興山城)이 있다 하더라도 청석동과는 거리가 조금 머니, 반드시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하여금 애구(隘口)에 방어(防禦)를 설치하여 적로(賊路)를 지켜 끊게 하고, 대흥 산성과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룬 후에야 적병(賊兵)을 방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장단(長湍)의 임진(臨津)은 마땅히 오른쪽을 방어하는 신지(信地)가 되고, 수원(水原)의 독성(禿城)은 마땅히 왼쪽을 방어하는 신지가 되니, 총융사(摠戎使)가 기보(畿輔)의 중병(重兵)을 통제(統制)하되, 북한산(北漢山) 아래에 병영(兵營)을 머물면서 좌우의 방어사(防禦使)를 절제(節制)하면, 이것이 도성을 방위하는 방책입니다.
3. 여러 도(道)의 관방(關防)을 지켜 적로(賊路)를 제어하여 누르는 일입니다. 북로(北路)의 철령(鐵嶺), 동로(東路)의 대관령(大關嶺), 서로(西路)의 정방산 구현(正方山駒峴), 호서(湖西)의 차령(車嶺)은 모두 본도(本道) 방백(方伯)이 신지로 삼을 만하고, 이 밖에 관방(關防)을 설치할 만한 곳이 매우 많습니다. 방백이 그 관하(管下)의 병사(兵使)·영장(營將)을 절제(節制)하여 험요(險要)를 나누어 지켜, 한편으로는 적로(賊路)를 제어하여 누르고, 한편으로는 군사를 거느려 근왕(勤王)한다면 이것이 외구(外寇)를 방어하는 장책(長策)입니다.
4. 안흥(安興)에 중진(重鎭)을 설치하여 조로(漕路)를 갖추는 일입니다. 안흥(安興) 한 섬[島]은 바로 삼남(三南)의 조운(漕運)하는 길목의 요해처로서 바다에 떠 있으면서도 강(江)과 통하는데, 이는 그 문호(門戶)입니다. 그런데 지금 태안군(泰安郡)으로 방어사(防禦使)를 겸하게 하므로, 본군(本郡)에서 방어를 칭탁하여 관리들이 진졸(鎭卒)을 침학(侵虐)함이 한이 없는 데도, 첨사(僉使)가 겸방어사(兼防禦使)에게 제어받아 양쪽이 서로 저오(牴牾)되니, 군무(軍務)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빨리 태안의 겸방어사(兼防禦使)의 직임을 혁파하고, 본진(本鎭)의 첨사(僉使)로 하여금 방어를 전관(專管)하게 하되, 일체 영종(永宗)의 겸방어사와 같이 오로지 그 해방(海防)의 수어(守禦)를 책임지게 하는 것은 조금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5. 어사(御史)를 보내어 해방(海防)을 순무(巡撫)하게 하는 일입니다. 근래에 해방이 소홀[疏虞]하여 그렇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주즙(舟楫)이 비록 있다 하더라도 노졸(櫓卒)이 갖추어지지 아니하였고, 포호(浦戶)가 유망(流亡)하였으나 대신 세울 사람이 없습니다. 첨사(僉使)·만호(萬戶)가 비록 방포(防布)를 받으나, 한 번 그 액수(額數)를 줄인 후부터는 전혀 대신 설 자가 없습니다. 영종진(永宗鎭)에 소속된 수졸(水卒)과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먼 지방에 흩어져 있고, 섬 안의 포민(浦民)은 각 아문(衙門)의 육군(陸軍)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호서(湖西)의 수군 우후(水軍虞候)가 관장하는 전선(戰船)은 모두 여러 날 노정(路程)의 항구[海港]에 있어 맨주먹으로 요망(瞭望)할 따름입니다. 또 동해(東海)에는 예부터 수종(水宗)이 있어 선박(船舶)이 통행(通行)하지 않으므로, 여러 진(鎭)을 혁파(革罷)하였는데, 수십년 이래로 수종(水宗)이 크게 변하여 왜선(倭船)은 자주 울릉도(鬱陵島)에 들어가 어물(漁物)을 채취하니, 진실로 한심하게 여길 만합니다. 마땅히 빨리 어사를 동해(東海)와 서해(西海)의 해변에 나누어 보내어서, 주즙(舟楫)이 완비(完備)되지 못한 것은 신칙(申飭)해서 개조(改造)하도록 하고, 노졸(櫓卒)이 갖추어지지 못한 경우는 독촉해서 세우도록 할 것이며, 혁파(革罷)한 진(鎭)은 전례에 의하여 다시 설치하고, 이미 줄인 방포(防布)는 전례에 의하여 준급(準給)하며, 산군(山郡)에 있는 수군(水軍)은 순편함에 따라 바꾸어 정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急先務)입니다.
6. 북로(北路)의 봉수(烽燧)를 신칙(申飭)하는 일입니다. 팔로(八路)의 봉수는 차례로 불을 들어 남산(南山)에서 모아서 준거(準據)하는데, 다섯 개의 횃불이 됩니다. 다른 길의 봉수는 매일 저녁마다 서로 준거하는데, 북로(北路)는 후망(候望)할 수가 없어 매번 구름이 짙어 보지 못하였다고 현록(懸錄)하니, 마땅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북로(北路)에 신칙해서 어느 도(道), 어느 고을의 봉수(烽燧)의 불이 꺼졌는지 엄격히 조사해서, 봉군(烽軍)의 죄를 감정(勘正)하는 것 또한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도성(都城)의 일은 거듭 의논할 바가 아니고, 다른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으나, 이후 마침내 채용(採用)한 것이 없었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북자(北咨)가 온 후로 일을 꾀하는 소장(疏章)이 날마다 관서(官署)에 가득하였는데, 이익한(李翊漢)은 인재를 거두어 부르는 것을 빙자하여 몰래 당류(黨類)를 비호하는 계책을 이루었고, 김일경(金一鏡)은 체부(體府)를 크게 설치하고자 하여 망령되이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말을 하였으며, 옥당(玉堂)에서는 단지 진부한 것만 주워 모았으니, 한 가지도 설시(設施)할 만한 것이 없었다. 오로지 이광적(李光迪)의 상소가 누누이 수만 마디에 이르러 다스리고 방어하는 여러 방책을 갖추어 논의하였는데, 그 말이 비록 일일이 적중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포장(布張)하고 조치(措置)하는 데 간혹 볼 만한 것이 있었으니, 노신(老臣)의 정성스러운 뜻이 또한 가상하였다. 단지 그 인망(人望)이 가볍고 나이가 늙었다 하여 소홀하게 여겨 이를 비웃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더욱이 오늘날 조정에서 강론(講論)한 바가 모두 단공(檀公)의 〈삼십육계(三十六計)에서 달아나는 것을〉 상책으로 삼은 것이고, 설령 기이한 모계(謀計)가 있다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수성(守城)하는 방책에 관계되면 물에 돌을 던지는 것과 같은 데에 견주었고, 애초에 넓다고 여겨 살피지도 아니하였으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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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 이광적의 도성 방비책과 내수외어의 방책을 진계하는 상소문 자료번호 : sd.d_0149_0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