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고대 유적, 유물과 인물들
백제가 멸망하기 전부터 삼국은 일본과 다양한 관계를 맺었다. 일본은 바다 건너에 위치해 결정적인 순간에 우군이 되어줄 수 있는 나라였기 때문에 삼국 모두에게 필요한 존재였다.
삼국은 학자나 승려, 장인들을 보내어 일본의 문화 발전을 도왔고 다양한 기술을 전파하였다. 그 흔적은 일본 곳곳의 문화 유적과 유물들을 통해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백제는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인적 교류도 매우 활발하였다. 백제가 신라와 당에 의해 멸망한 후에는 대규모의 유이민들이 바다를 건너 일본에 들어와 정착하기도 하였다.
이제부터 일본의 고대 유적들과 그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반도와 일본의 공존 관계를 짚어보자.
삼국은 학자나 승려, 장인들을 보내어 일본의 문화 발전을 도왔고 다양한 기술을 전파하였다. 그 흔적은 일본 곳곳의 문화 유적과 유물들을 통해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백제는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인적 교류도 매우 활발하였다. 백제가 신라와 당에 의해 멸망한 후에는 대규모의 유이민들이 바다를 건너 일본에 들어와 정착하기도 하였다.
이제부터 일본의 고대 유적들과 그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반도와 일본의 공존 관계를 짚어보자.
소가노 우마코
한반도의 삼국은 각기 일본과 동맹을 맺기도 했고, 또 적대관계를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삼국시대 내내 백제와 일본은 돈독한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백제의 뛰어난 학자와 기술자들은 바다를 건너 일본에 가 다양한 문화를 전달했고, 일본은 백제의 든든한 군사적 지원세력이 되어 신라나 고구려가 쉽게 백제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도왔다.
백제와 일본의 친밀한 관계로 인해 백제왕실도 쉽게 일본을 오갔고, 기술자 가문도 일본에 들어와 둥지를 틀었다. 일본에 아예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발전된 기술을 이용해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도래인(渡來人, 도라이진)’으로서의 정체성을 다져나갔다. 선진기술을 보유한 도래인은 마침내 정치권력의 정점까지 올랐는데, 그가 바로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다.
소가노 우마코는 쇼토쿠 태자를 정치에 입문시킨 장본인이며, 본격적으로 백제의 문화를 일본에 심은 사람이다. 또한 소가씨는 천황가의 외척이 되어 정치 실권을 장악하였다. 소가(蘇我)씨 가문은 6세기 이후 100여 년 동안 일본을 사실상 지배했던 유력한 호족이었다. 그 조상은 백제에서 건너온 도래인이라고 전해진다. 그중 소가노 우마코는 한반도를 통해 불교를 받아들이고 권력을 강화하며 쇼토쿠 태자에게 섭정을 맡겼다. 그러나 소가노 우마코의 손자인 이루카가 권력을 독차지하려 천황 집안을 해하려 하자 반대세력에 부딪혔고, 그 속에서 몰락하였다.
백제와 일본의 친밀한 관계로 인해 백제왕실도 쉽게 일본을 오갔고, 기술자 가문도 일본에 들어와 둥지를 틀었다. 일본에 아예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발전된 기술을 이용해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도래인(渡來人, 도라이진)’으로서의 정체성을 다져나갔다. 선진기술을 보유한 도래인은 마침내 정치권력의 정점까지 올랐는데, 그가 바로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다.
소가노 우마코는 쇼토쿠 태자를 정치에 입문시킨 장본인이며, 본격적으로 백제의 문화를 일본에 심은 사람이다. 또한 소가씨는 천황가의 외척이 되어 정치 실권을 장악하였다. 소가(蘇我)씨 가문은 6세기 이후 100여 년 동안 일본을 사실상 지배했던 유력한 호족이었다. 그 조상은 백제에서 건너온 도래인이라고 전해진다. 그중 소가노 우마코는 한반도를 통해 불교를 받아들이고 권력을 강화하며 쇼토쿠 태자에게 섭정을 맡겼다. 그러나 소가노 우마코의 손자인 이루카가 권력을 독차지하려 천황 집안을 해하려 하자 반대세력에 부딪혔고, 그 속에서 몰락하였다.
아스카사와 이시부타이
아스카사는 588년 백제로부터 부처의 사리를 헌납받은 소가노 우마코가 발원해 596년에 창건된 일본 최초의 사찰이다. 창건을 위해 백제로부터 많은 기술자들을 초청해 지은 매우 큰 절이었고, 한때 정치의 중심지였던 아스카의 중심에 있었던 상징성도 컸다. 지금 아스카사에는 몇 개의 건물만 남아있다. 아스카사는 백제의 사찰 건축 양식을 따라 지어졌고, 사용했던 기와와 와당 모두 백제의 것과 흡사하다. 일본에 공식적으로 불교가 전래되었음을 증명하는 절이 바로 아스카사다. 창건 당시 건너왔던 백제출신 기술자들은 호류지의 창건에도 관여했고, 이후 이들의 제자들이 일본 전역으로 퍼져 사찰과 건물 건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아스카테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소가노 우마코의 묘로 알려진 이시부타이가 있다. 커다란 돌덩어리들이 서로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이며 한자로는 ‘석무대(石舞臺)_춤추는 돌’이다. 이 고분의 현실은 길이가 7.6미터, 폭 3.5미터, 높이 4.7미터의 횡혈식 고분으로, 30여 개의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져있다. 고분에 사용된 돌의 총 중량은 2300톤에 이른다고 한다.
위는 원래 봉분으로 조성되었으나 흙이 모두 쓸려 내려가 바위가 드러났고, 아래쪽에는 반듯한 바위로 쌓아 만든 석실이 있다. 이러한 형태는 백제의 일반적인 무덤 형태였다고 하므로 당연히 도래인의 것으로 추정되었고, 이 근방에서 이정도 규모의 무덤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소가노 우마코뿐이었을 것이다. 한때 일본 전체를 좌지우지했고, 일본의 사상과 문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소가노 우마코의 무덤이다.
아스카테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소가노 우마코의 묘로 알려진 이시부타이가 있다. 커다란 돌덩어리들이 서로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이며 한자로는 ‘석무대(石舞臺)_춤추는 돌’이다. 이 고분의 현실은 길이가 7.6미터, 폭 3.5미터, 높이 4.7미터의 횡혈식 고분으로, 30여 개의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져있다. 고분에 사용된 돌의 총 중량은 2300톤에 이른다고 한다.
위는 원래 봉분으로 조성되었으나 흙이 모두 쓸려 내려가 바위가 드러났고, 아래쪽에는 반듯한 바위로 쌓아 만든 석실이 있다. 이러한 형태는 백제의 일반적인 무덤 형태였다고 하므로 당연히 도래인의 것으로 추정되었고, 이 근방에서 이정도 규모의 무덤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소가노 우마코뿐이었을 것이다. 한때 일본 전체를 좌지우지했고, 일본의 사상과 문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소가노 우마코의 무덤이다.
소가노 우마코가 아스카사를 창건하면서 많은 백제 문화를 들여왔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
쇼토쿠 태자
쇼토쿠 태자는 소가노 우마코에 의해 섭정을 시작하며 국가 개조 사업의 전면에 나섰다. 그는 한반도의 모든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고구려의 혜자를 자신의 스승으로 모시고, 우리에게 익숙한 아직기와 왕인은 학문의 발달을 위해 백제로부터 모셔왔다. 그는 바다를 건너온 이들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불교를 널리 퍼뜨리며 당시 일본으로서는 꿈꿀 수 없었던 건축과 축조기술을 받아들였다. 힘닿는 곳에 절을 세워 문화를 발전시켰고 그 힘을 바탕으로 천황의 권력을 다져나갔다. 그러나 불교만을 발전시킨 것은 아니다. 불교를 중심으로 토착 종교인 신도와 유교의 좋은 점을 모으려 노력하였다. 이러한 사상을 신불유습합사상(神佛儒習合思想)이라 하며 좋은 점은 재빨리 받아들이는 일본인의 독특한 사상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호류지
호류지는 아스카문화의 중심지이고 일본이 자랑하는 최고(最古)의 목조건축물인 목탑이 있는 곳이다. 이 목탑은 중국과 한반도의 불교 건축물이 일본으로 건너와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 목탑은 또한 이제 한반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백제 건축물의 모습을 눈앞에 보여주는 문화재이다.
호류지는 쇼토쿠 태자와 스이코 천황이 요메이 천황의 병이 낫기를 기원하며 607년에 완성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국보가 19점, 중요문화재가 36점이 있고, 199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금당의 벽화들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벽화 기법들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고,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과 같은 모양의 장신구들이 그려져 있다.
금당 옆쪽으로 들어가면 태자전이 있다. 역시 어두운 경내 자세히는 볼 수 없었지만, 태자상의 사진을 확대하여 전시한 후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중앙에 모셔진 태자 45세상 바로 곁에는 고구려 승려 혜자의 조각상이 모셔져 있다.
혜자는 아스카사를 지을 때도 주지였다고 하며 이 호류지를 지을 때도 지도자 역할을 했단다. 또 그는 불교에 심취한 태자의 공부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태자에게 유학을 가르쳤던 백제인 아직기와 왕인, 채색과 지묵 제작 방법을 가르친 고구려인 담징도 일본의 발전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호류지는 쇼토쿠 태자와 스이코 천황이 요메이 천황의 병이 낫기를 기원하며 607년에 완성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국보가 19점, 중요문화재가 36점이 있고, 199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금당의 벽화들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벽화 기법들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고,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과 같은 모양의 장신구들이 그려져 있다.
금당 옆쪽으로 들어가면 태자전이 있다. 역시 어두운 경내 자세히는 볼 수 없었지만, 태자상의 사진을 확대하여 전시한 후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중앙에 모셔진 태자 45세상 바로 곁에는 고구려 승려 혜자의 조각상이 모셔져 있다.
혜자는 아스카사를 지을 때도 주지였다고 하며 이 호류지를 지을 때도 지도자 역할을 했단다. 또 그는 불교에 심취한 태자의 공부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태자에게 유학을 가르쳤던 백제인 아직기와 왕인, 채색과 지묵 제작 방법을 가르친 고구려인 담징도 일본의 발전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백제관음(구다라 관음)
호류지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불상으로, 예로부터 ‘백제관음-구다라관음’으로 불리어 왔다고 한다. 키는 2미터 정도에 목조관음상인 이 불상은 유려한 곡선과 신체 표현, 옷자락 조각 등이 완연히 7세기 초 백제의 양식이라고 한다. 특히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며 매우 아름답다.
쇼토쿠 태자는 불교를 매우 발달시키며 여러 사찰을 세웠다. 또한 적극적으로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문화와 기술자들을 받아들였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설명보기
정답불교라는 앞선 문화를 선점하여 자신들의 문화적 우월성을 드러내고, 권력을 차지하고자 하였다. 당시의 불교는 왕족을 부처의 일족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여 왕과 그 일가족을 신성시하여 복종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또한 한자와 유교경전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문화적 역량을 발전시킬 수 있었으며, 축제술, 양잠기술, 농사기술을 받아들여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사찰 건축기술과 기와, 와당 제작기술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발전시켜갔다. 이러한 발전은 쇼토쿠 태자를 둘러싼 세력이 집권에 성공할 수 있게 도왔고 백성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게 했다.
진하승과 하타씨
신영보전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조각상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반가사유상 바로 옆에 전시되어 있는 도래인 진하승(秦河勝, 하타노 가와카쓰) 부부의 조각상이다.
전 세계가 사랑해마지 않는 반가사유상의 바로 옆자리를 차지한 이 사람들은 도래인인 하타씨의 일족이다. 하타씨는 신라로부터 도래한 것으로 추측되는 집단인데, 아스카에 자리잡은 백제인들과는 달리 일찌감치 교토에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백제계의 아야씨가 일찍부터 자리를 잡은 아스카 지역과는 달리, 신라계의 하타씨가 자리잡은 교토는 지형과 기후가 경주가 매우 흡사하다.
하타씨에 의탁하여 수도를 나라(奈良)에서 교토로 수도를 옮긴이가 캄무(柦武) 천황이고, 그의 어머니는 한반도계인 야마토(和)씨의 여인이었다. 캄무 천황은 그들의 본거지였던 동부에 중국의 장안을 모방해 계획도시를 건설하는데, 이곳이 바로 헤이안쿄(平安京)이고, 이곳이 나중의 교토이다.
하타씨는 한반도에서 가져온 뛰어난 축제술로 제방을 쌓아 농업용수로 이용하며 농지를 늘려 벼농사를 발달시켰다. 또한 양잠기술을 이용해 직조술을 전하고 발달시킴으로써, 살아가는 데 기본이랄 수 있는 먹는 것과 입을 것을 해결하도록 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집을 짓는 기술도 전수하였으니, 고류지가 바로 하타씨의 우지데라(氏寺)로 뛰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전 세계가 사랑해마지 않는 반가사유상의 바로 옆자리를 차지한 이 사람들은 도래인인 하타씨의 일족이다. 하타씨는 신라로부터 도래한 것으로 추측되는 집단인데, 아스카에 자리잡은 백제인들과는 달리 일찌감치 교토에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백제계의 아야씨가 일찍부터 자리를 잡은 아스카 지역과는 달리, 신라계의 하타씨가 자리잡은 교토는 지형과 기후가 경주가 매우 흡사하다.
하타씨에 의탁하여 수도를 나라(奈良)에서 교토로 수도를 옮긴이가 캄무(柦武) 천황이고, 그의 어머니는 한반도계인 야마토(和)씨의 여인이었다. 캄무 천황은 그들의 본거지였던 동부에 중국의 장안을 모방해 계획도시를 건설하는데, 이곳이 바로 헤이안쿄(平安京)이고, 이곳이 나중의 교토이다.
하타씨는 한반도에서 가져온 뛰어난 축제술로 제방을 쌓아 농업용수로 이용하며 농지를 늘려 벼농사를 발달시켰다. 또한 양잠기술을 이용해 직조술을 전하고 발달시킴으로써, 살아가는 데 기본이랄 수 있는 먹는 것과 입을 것을 해결하도록 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집을 짓는 기술도 전수하였으니, 고류지가 바로 하타씨의 우지데라(氏寺)로 뛰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고류지와 목조미륵반가사유상
쇼토쿠 태자가 아스카의 소가노 우마코와 갈등을 빚을 당시, 소가씨에 맞서기 위해 함께 했던 하타씨 일족 중 한명이 진하승이다. 진하승이 세운 고류지는 현재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고류지에는 하타씨를 제사지내는 작은 신전이 있는데, 양잠을 전래해 준 것에 대한 보은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쇼토쿠 태자가 ‘내가 고귀한 불상을 가지고 있는데, 누군가 이 불상을 모실 자가 없는가’라고 묻자, 진하승이 자진해 이 절을 짓고 불상을 모셨다고 전해진다.
5세기부터 하타씨에 의해 개발된 교토 분지는 결국 헤이안시대 일본의 수도가 되고 천년 동안 천황의 본거지가 된다. 고류지에 모셔진 목조미륵보살상도 쇼토쿠 태자가 4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을 애도하기 위해 신라에서 진하승에게 보낸 것이라고 추정된다.
목조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신라의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83호)와 빼닮았다. 불상의 재료가 적송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 신라에서 제작되어 옮겨진 것이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일본의 목조상들이 대부분 녹나무로 만들어졌고, 적송은 한반도에서 많이 자라는 나무라는 사실이 이 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쇼토쿠 태자가 ‘내가 고귀한 불상을 가지고 있는데, 누군가 이 불상을 모실 자가 없는가’라고 묻자, 진하승이 자진해 이 절을 짓고 불상을 모셨다고 전해진다.
5세기부터 하타씨에 의해 개발된 교토 분지는 결국 헤이안시대 일본의 수도가 되고 천년 동안 천황의 본거지가 된다. 고류지에 모셔진 목조미륵보살상도 쇼토쿠 태자가 4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을 애도하기 위해 신라에서 진하승에게 보낸 것이라고 추정된다.
목조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신라의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83호)와 빼닮았다. 불상의 재료가 적송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 신라에서 제작되어 옮겨진 것이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일본의 목조상들이 대부분 녹나무로 만들어졌고, 적송은 한반도에서 많이 자라는 나무라는 사실이 이 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하타씨 계열의 도래인이 일본의 문명과 문화 발전에 기여한 점을 정리해 보자.
신라의 금동미륵반가상과 고류지의 목조미륵보살반가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서 적어보자.
행기스님
도다이지(東大寺)는 율령체제를 도입한 후 천황의 권력이 마침내 천하를 호령할 정도로 강력해졌던 쇼무 천황 때 만들어졌다. 쇼무 천황은 불법의 세계를 이 땅에 완벽히 구현하고자 하는 이상을 가지고 도다이지 건립과 대불(大佛, 다이부쓰) 조성을 명했다. 이는 또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막대한 인력과 자금이 필요한 일이었고, 뛰어난 건축술과 불상 주조 기술도 불가결했다. 이 과정에서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국가 신료들의 통합을 노렸을 것이다.
그러나 쉽지만은 않았다. 대불의 무게만도 약 450톤, 높이는 약 16미터이니, 그 사전작업인 용광로 조성이나 모형제작, 불상에 들어가는 금을 모으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도다이지 건립 과정의 어려운 일들을 숱하게 해결한 행기(行基) 스님은 도래인 집안 출신인데, 본래 왕인을 조상으로 하는 일족이었다고 한다. 행기 스님은 민중불교를 전파하며 활동하였는데 매우 신망이 높았다. 당시 정부는 도다이지와 대불 건립에 필요한 기부금 모금을 행기 스님에게 맡겼고, 원만히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쇼무천황, 료벤스님, 보리 스님과 함께 동대사 4성(聖)으로 추앙받았다.
도다이지 곳곳에는 행기스님 뿐 아니라 다양한 도래인들의 손길이 묻어 있는데, 건축, 주조, 토목 등의 기술을 가진 기술자들이 대규모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멸망한 백제 박사들의 후예인 것이다.
또한 현재의 시가현 근처에 정착한 백제계 씨족들은 절을 지을 땅을 제공했고, 일본은 감사의 표시로 절 경내에 신사를 지어 감사를 표했다. 이것이 가라쿠니(韓國) 신사이다. 백제왕족으로 알려진 경복(敬福)은 도다이지 대불 도금에 필요한 황금 900량을 조달하였는데, 그의 조부가 바로 백제 의자왕의 아들로 백제 멸망 후 일본으로 온 선광(善光)으로, ‘백제왕(百濟王)’ 씨의 시조가 되었다.
752년 4월 9일에 완성된 도다이지 대불 앞에는 1만여 명의 참배객이 모여들었고, 개안공양(開眼供養, 불상에 눈을 그려 넣는 의식)에는 신라와 발해가 1000여 명의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한반도에서 불교가 전래된 지 꼭 200년 되는 해였다고 한다.
그러나 쉽지만은 않았다. 대불의 무게만도 약 450톤, 높이는 약 16미터이니, 그 사전작업인 용광로 조성이나 모형제작, 불상에 들어가는 금을 모으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도다이지 건립 과정의 어려운 일들을 숱하게 해결한 행기(行基) 스님은 도래인 집안 출신인데, 본래 왕인을 조상으로 하는 일족이었다고 한다. 행기 스님은 민중불교를 전파하며 활동하였는데 매우 신망이 높았다. 당시 정부는 도다이지와 대불 건립에 필요한 기부금 모금을 행기 스님에게 맡겼고, 원만히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쇼무천황, 료벤스님, 보리 스님과 함께 동대사 4성(聖)으로 추앙받았다.
도다이지 곳곳에는 행기스님 뿐 아니라 다양한 도래인들의 손길이 묻어 있는데, 건축, 주조, 토목 등의 기술을 가진 기술자들이 대규모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멸망한 백제 박사들의 후예인 것이다.
또한 현재의 시가현 근처에 정착한 백제계 씨족들은 절을 지을 땅을 제공했고, 일본은 감사의 표시로 절 경내에 신사를 지어 감사를 표했다. 이것이 가라쿠니(韓國) 신사이다. 백제왕족으로 알려진 경복(敬福)은 도다이지 대불 도금에 필요한 황금 900량을 조달하였는데, 그의 조부가 바로 백제 의자왕의 아들로 백제 멸망 후 일본으로 온 선광(善光)으로, ‘백제왕(百濟王)’ 씨의 시조가 되었다.
752년 4월 9일에 완성된 도다이지 대불 앞에는 1만여 명의 참배객이 모여들었고, 개안공양(開眼供養, 불상에 눈을 그려 넣는 의식)에는 신라와 발해가 1000여 명의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한반도에서 불교가 전래된 지 꼭 200년 되는 해였다고 한다.
도다이지 건립과정에서 기여했던 도래인의 이름을 모두 적어보자.
백촌강 전투와 다자이후
백제와 일본이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저 ‘밀접한’ 관계 정도가 아니라, 국가의 명운을 함께 할 정도였다는 사실을 ‘백촌강 전투’를 통해 알 수 있다.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왜의 사이메이 천황은 백제 부흥군을 이끌던 복신으로부터 도움을 요청받는다. 사이메이 천황은 661년 오사카를 출발하여 군사를 모으며 북규슈에 도착하였고, 천황이 몸소 출정하였다. 그러나 사이메이는 급사하고, 황태자 나카노오오에가 상을 치른 뒤 다시 군사를 일으켜 5천의 군사를 백제에 파견하여 백제부흥군에 합류시켰다.
텐지 천황으로 즉위한 후 마침내 663년 8월, 400여 척의 배에 자그마치 27,000명의 군대를 한반도에 파견해 백촌강(오늘날의 동진강 하구)에서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이 날의 전투를 중국의 구당서(舊唐書)에서는 ‘왜국 수군의 배 400척을 불태웠는데 그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바닷물이 핏빛이었다.’고 쓰고 있다.
당시 그 정도의 군사라면 국가의 흥망을 결정할 수 있는 수였다. 그러나 일본은 멸망한 백제를 되살린다는 명분 하나로 군사를 파견한 것이었다. 백제와의 관계가 단지 ‘동맹’ 정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일본군은 백촌강을 피로 물들이며 죽어갔다.
3천여 명에 이르는 백제 지배층이 이때 패전한 일본군과 함께 일본으로 향하는 배를 탔다. 텐지 천황은 신라가 규슈까지 뒤따라 공격할 것이라 믿었다. 규슈의 하카다 만은 일본 열도 중에서 한국에서 가장 가까워 부산에서 200km밖에 되지 않는다. 신라와 당이 바다를 건너 일본을 칠 것이라는 공포가 일본을 감쌌고, 일본에 들어온 백제인은 일본군과 함께 큐슈 다자이후 인근에 백제식 토성, 수성(水城)을 쌓고 산성을 짓는다. 이 자리에 들어선 것이 다자이후로, 이후 일본에서 규슈 지역을 다스리고 외교를 담당하며, 관문을 지키는 역할을 맡기 위해 만든 행정지역이다.
이처럼 백제와 일본의 관계는 단순한 동맹국이 아니라, 문화와 명운을 함께 하는 나라였다.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왜의 사이메이 천황은 백제 부흥군을 이끌던 복신으로부터 도움을 요청받는다. 사이메이 천황은 661년 오사카를 출발하여 군사를 모으며 북규슈에 도착하였고, 천황이 몸소 출정하였다. 그러나 사이메이는 급사하고, 황태자 나카노오오에가 상을 치른 뒤 다시 군사를 일으켜 5천의 군사를 백제에 파견하여 백제부흥군에 합류시켰다.
텐지 천황으로 즉위한 후 마침내 663년 8월, 400여 척의 배에 자그마치 27,000명의 군대를 한반도에 파견해 백촌강(오늘날의 동진강 하구)에서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이 날의 전투를 중국의 구당서(舊唐書)에서는 ‘왜국 수군의 배 400척을 불태웠는데 그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바닷물이 핏빛이었다.’고 쓰고 있다.
당시 그 정도의 군사라면 국가의 흥망을 결정할 수 있는 수였다. 그러나 일본은 멸망한 백제를 되살린다는 명분 하나로 군사를 파견한 것이었다. 백제와의 관계가 단지 ‘동맹’ 정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일본군은 백촌강을 피로 물들이며 죽어갔다.
3천여 명에 이르는 백제 지배층이 이때 패전한 일본군과 함께 일본으로 향하는 배를 탔다. 텐지 천황은 신라가 규슈까지 뒤따라 공격할 것이라 믿었다. 규슈의 하카다 만은 일본 열도 중에서 한국에서 가장 가까워 부산에서 200km밖에 되지 않는다. 신라와 당이 바다를 건너 일본을 칠 것이라는 공포가 일본을 감쌌고, 일본에 들어온 백제인은 일본군과 함께 큐슈 다자이후 인근에 백제식 토성, 수성(水城)을 쌓고 산성을 짓는다. 이 자리에 들어선 것이 다자이후로, 이후 일본에서 규슈 지역을 다스리고 외교를 담당하며, 관문을 지키는 역할을 맡기 위해 만든 행정지역이다.
이처럼 백제와 일본의 관계는 단순한 동맹국이 아니라, 문화와 명운을 함께 하는 나라였다.
영상 – SBS 스페셜, 371회, 유홍준 일본 속 한국을 걷다 중에서 백촌강 전투 부분 동영상 클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