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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궁(位宮)이 서안평(西安平)을 노략질하자 관구검(毌丘儉)이 토벌함

정시 3년(242)에 위궁이 서안평주 001
번역주 001)
西安嘉平 : 원문은 ‘서안가평’인데, ‘가’는 연자이다. 丹東市 동쪽으로 靉河가 압록강에 합류하는 곳의 靉河尖村에는 애하첨고성으로 불리는 토성이 있다. 이곳에서 ‘安平樂未央’ 銘의 와당 등이 나왔기에 서안평현성으로 본다(曹汛,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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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노략질하였다. [정시] 5년(244)에 유주자사 관구검주 002
번역주 002)
毌丘儉 : 河東 聞喜(지금의 山西省 聞喜縣) 출신으로, 荆州刺史 등 여러 고위관직을 거쳐, 魏明帝 青龍 3年(235)에 幽州刺史 度遼將軍 使持節 護烏丸校尉에 제수되어, 조위의 동북방 경략을 담당하였다. 237년에 司馬懿와 함께 公孫淵을 멸하고, 이어서 244년·245년 2회에 걸쳐 고구려를 침공함으로써 조위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였다. 한편, 일찍부터 毌丘儉의 성씨가 毋丘(무구)인지 毌丘(관구)인지는 논란이 많았는데, 대체로 毌丘(관구)로 읽어 왔다. 그런데 최근 中國 山西省 太原市 山西省藝術博物館 소장 〈毋丘氏造像碑〉를 통해 毌丘(관구)가 아니라, 毋丘(무구)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田中俊明, 2014)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그 성씨는 山東省 曹縣 남부의 古地名인 毌丘에서 비롯되었으므로, 관구검으로 읽어야 한다는 비판(이승호, 2015)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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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군]을 나가 위궁을 토벌하였다.주 003
번역주 003)
관구검의 고구려 공격에 대해서는 〈毋丘儉紀功碑〉 “正始三年高句驪反 督七牙門討句驪五 復遣寇六年五月旋 討寇將軍巍烏丸單于□ 威寇將軍都亭侯□ 行裨將軍領□ □裨將軍”(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고대금석문』과 『三國志』 권28, 魏書28 毌丘儉,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20년(246), 『삼국사기』 권45, 열전5 密友·紐由 등이 참고된다. 『삼국사기』는 대부분 『삼국지』를 전재하였지만, 동천왕의 피난 및 밀우·유유·유옥구의 활약을 비롯한 몇 가지는 고유의 전거자료에 의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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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궁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관구검의] 군대에 맞서 비류[수]에서 크게 전투하였다. 위궁이 패배하여 달아났다. [관구]검의 군대가 [그를] 추격해 [적]현주 004
번역주 004)
䚂峴 : 『北史』 권94, 列傳82 高麗에 ‘䚂峴’으로 나온다. 䚂峴은 麻線溝 동쪽 4리의 石廟鄕 혹은 그로부터 4리 떨어진 小板岔村, 혹은 석묘향 동남쪽 2리의 二道陽岔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한편 소판차와 이도양차 지역은 협소해서 대량의 수레와 말이 지나다니기 어렵다고 보고, 비교적 평탄하고 넓은 석묘향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였다(王綿厚·李健才,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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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렀고, 험한 산길을 헤치면서,주 005
번역주 005)
懸車束馬 : ‘수레를 달아매고 말을 묶어가며’라는 뜻으로 험준한 산길을 넘어가는 어려움을 표현한 관용어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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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도산에 올라 도읍을 도륙하였고, 1만여 급을 참수하였다. 위궁은 단신으로 처자만을 거느리고 멀리 달아났다.

  • 번역주 001)
    西安嘉平 : 원문은 ‘서안가평’인데, ‘가’는 연자이다. 丹東市 동쪽으로 靉河가 압록강에 합류하는 곳의 靉河尖村에는 애하첨고성으로 불리는 토성이 있다. 이곳에서 ‘安平樂未央’ 銘의 와당 등이 나왔기에 서안평현성으로 본다(曹汛, 1980).바로가기
  • 번역주 002)
    毌丘儉 : 河東 聞喜(지금의 山西省 聞喜縣) 출신으로, 荆州刺史 등 여러 고위관직을 거쳐, 魏明帝 青龍 3年(235)에 幽州刺史 度遼將軍 使持節 護烏丸校尉에 제수되어, 조위의 동북방 경략을 담당하였다. 237년에 司馬懿와 함께 公孫淵을 멸하고, 이어서 244년·245년 2회에 걸쳐 고구려를 침공함으로써 조위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였다. 한편, 일찍부터 毌丘儉의 성씨가 毋丘(무구)인지 毌丘(관구)인지는 논란이 많았는데, 대체로 毌丘(관구)로 읽어 왔다. 그런데 최근 中國 山西省 太原市 山西省藝術博物館 소장 〈毋丘氏造像碑〉를 통해 毌丘(관구)가 아니라, 毋丘(무구)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田中俊明, 2014)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그 성씨는 山東省 曹縣 남부의 古地名인 毌丘에서 비롯되었으므로, 관구검으로 읽어야 한다는 비판(이승호, 2015)이 있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관구검의 고구려 공격에 대해서는 〈毋丘儉紀功碑〉 “正始三年高句驪反 督七牙門討句驪五 復遣寇六年五月旋 討寇將軍巍烏丸單于□ 威寇將軍都亭侯□ 行裨將軍領□ □裨將軍”(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고대금석문』과 『三國志』 권28, 魏書28 毌丘儉,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20년(246), 『삼국사기』 권45, 열전5 密友·紐由 등이 참고된다. 『삼국사기』는 대부분 『삼국지』를 전재하였지만, 동천왕의 피난 및 밀우·유유·유옥구의 활약을 비롯한 몇 가지는 고유의 전거자료에 의거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䚂峴 : 『北史』 권94, 列傳82 高麗에 ‘䚂峴’으로 나온다. 䚂峴은 麻線溝 동쪽 4리의 石廟鄕 혹은 그로부터 4리 떨어진 小板岔村, 혹은 석묘향 동남쪽 2리의 二道陽岔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한편 소판차와 이도양차 지역은 협소해서 대량의 수레와 말이 지나다니기 어렵다고 보고, 비교적 평탄하고 넓은 석묘향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였다(王綿厚·李健才, 1990).바로가기
  • 번역주 005)
    懸車束馬 : ‘수레를 달아매고 말을 묶어가며’라는 뜻으로 험준한 산길을 넘어가는 어려움을 표현한 관용어구이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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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궁(位宮)이 서안평(西安平)을 노략질하자 관구검(毌丘儉)이 토벌함 자료번호 : jd.k_0008_0054_001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