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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중원고구려비

中原高句麗碑
  • 저필자
    표영관
  • 시대
    삼국시대
  • 위치
  • 원소장처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 입석마을
  • 시대
    고구려
  • 유형
입지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다.
유적개관
비석의 규모는 높이 2.03m, 너비 0.55m이다. 비문은 4면에 걸쳐 새겨져 있는데, 앞면에 23자씩 10줄로 된 230자의 명문이, 좌측면에는 155자가량, 뒷면과 우측면에는 각각 9줄과 6줄의 명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모가 심해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으나 5세기대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비문 내용에는 고구려왕이 신라왕과 신하에게 의복 등을 하사하고, 신라 영토 안에 고구려 군대가 주둔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남한의 고구려유적」, 2006
해설
중원고구려비는 중원군 가금면 용전리 입석(立石)마을에 오랫동안 있었으나, 표면에 이끼가 끼어있고 글자의 마멸이 심해 비석임을 인지하지 못하였다. 1979년 우연한 기회에 학계에 보고되면서 판독 및 연구결과 ‘중원고구려비’로 명명되었고, 1981년 국보205호로 지정되었다. 2011년 충주시의 건의로 ‘충주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로 개칭되었다.
비석은, 높이 203cm, 너비는 55cm 가량의 돌기둥 모양으로, 중국 집안현(集安縣)의 광개토왕비와 흡사한 형태이다. 돌의 전면에는 10줄에 23자씩, 좌측면은 7줄에 23자씩, 우측면은 6줄이며 뒷면은 9줄로 추정되고, 글자는 3∼5cm 크기로 질서 있게 새겨놓았다. 전체 400여자로 추정되지만 마멸로 인해 실제 판독이 가능한 글자는 약 230여자이다. 서체는 예서체로, 광개토왕비의 서체와 동일하며, 그 내용을 통해 고구려비임이 확실하게 확인되었다.
비문은 ‘고려대왕’이 ‘신라매금(新羅寐錦)’을 만나 영원토록 형제지간의 우호를 맺으려 중원에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대사자(大使者) 다우환노(多亏桓奴)’ 등의 관리들을 주둔시킨 것도 기록되어 있다. 이들 내용을 분석해보면 고려대왕, 즉 고구려왕이 충주까지 남하하여 신라의 항복을 받았고 영토의 지배권을 확인받았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충주 진출은 일회성 공격이 아니라, 승전이후 주둔군을 두고 실질적 지배를 통하여 고구려 영토로 영역화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신라의 왕을 신라매금 혹은 동이매금(東夷寐錦)이라 격하하여 칭하는 것, 형제지간의 상하관계를 요구한 것 등은 고구려의 천하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비문에 등장하는 고구려왕은 대체로 장수왕(長壽王)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장수왕은 백제를 한강유역에서 공주지역으로 후퇴시킨 후, 남진을 계속하여 신라의 영토였던 충주를 공파(攻破)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고구려는 충주를 새로운 교두보로 삼고 영역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에서 비문을 새겨 중원고구려비를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고구려의 진출 이전 충주는 신라의 영토였기보다는 백제의 영토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무엇보다도 중원고구려비의 발견은 고구려의 남진 한계가 한강 이북지역이라는 인식에서 충주지역까지로 수정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중원고구려비는 발견 직후 국보로 지정하여 보호비각을 세웠으나, 관리가 소홀하고 훼손이 심해지자 2004년 보존대책을 강구하였고, 2012년 충주고구려비전시관을 건립하여 현재 실내 공간에서 전시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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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원고구려비 자료번호 : isea.d_0002_0030_0070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