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가(呂嘉)가 반란을 일으키고 건덕(建德)을 왕으로 세우자 천자가 토벌을 명함
천자는 여가(呂嘉)가 왕의 명령을 듣지 않고, 왕과 왕태후는 약하고 고립되어 이를 제압할 수 없는데다, 사자들은 나약하여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또, 왕과 왕태후는 이미 한(漢)에 귀속하기로 했는데, 여가 홀로 반란을 일으켰으니 군대를 동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장삼(莊參)에게 이천의 군사를 주어 남월에 사신으로 파견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장삼이, “친선을 위해 간다면 두세 사람이면 충분합니다만, 정벌하러 간다면 이천 명으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면서 불가하다고 사양하였다. 천자는 이에 장삼을 파면하였다. 그런데 협현(郟縣)
주 001의 장사이자 이전에 제북국(濟北國)
주 002
각주 002)
의 상(相)을 지냈던 한천추(韓千秋)
주 003가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앞으로 나서서 말하기를, “조그만 월나라인데다가 왕과 태후가 안에서 호응하고 있고 오직 승상 여가만이 문제인데, 용맹한 병사 이백주 004이면 반드시 여가의 목을 바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천자는 한천추를 파견함주 005과 동시에 왕태후의 동생인 규악(樛樂)에게 이천의 군사를 이끌고 남월의 국경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이에 여가 등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켜 온 나라에 영을 내려 말하기를, “왕의 춘추가 아직 어린데다가 태후는 중국인이다. 게다가 한의 사자와 사사로이 정을 통하면서 오로지 한에 내속하려 하고 있다. 선왕의 귀중한 보물을 가져다가 몽땅 천자에게 바쳐 아부하고 따르는 사람들을 장안(長安)에 데리고 가서 노비로 팔아 버리려 하고 있다. 스스로 한때의 화를 모면하려는 이익만 취하려 할 뿐 조씨 사직을 돌보아 만세의 대책을 강구할 생각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의 동생과 병졸들을 이끌고 공격하여 왕과 태후 그리고 한의 사자를 죽였다. 창오(蒼梧)의 진왕(秦王)과 소속 군현에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고, 명왕(明王)
주 006의 장남으로 월인 아내가 낳은 술양후(術陽侯)주 007
건덕(建德)을 왕으로 세웠다. 그러자 한천추의 병사들이 들어와 몇몇 작은 읍들을 쳤다. 남월은 단지 길을 열어 먹을 것을 제공하면서 [유인하다가 한천추의] 군대가 번우성(番禺城) 40리쯤에 못 미쳤을 때, 남월은 군사를 이끌고 한천추 등을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사람을 시켜 한의 사자가 가지고 있던 부절(符節)을 함에 봉해서 국경의 요새 위에 두게 하고주 008그럴듯한 말로 사죄의 뜻을 표하는 한편, 군사를 동원하여 요충지를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자 천자는 “한천추는 비록 공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군의 선봉으로서는 으뜸이었다.”라고 하며, 그의 아들인 한연년(韓延年)을 성안후(成安侯)
주 009에 봉하였다. 규악은 그의 누이가 왕태후이고 제일 먼저 한에 귀속하길 청하였으므로 규악의 아들인 광덕(廣德)을 용항후(龍亢侯)
주 010에 봉하였다. 그리고 사면을 내려, “천자의 권위가 미약하여 제후들이 서로 힘으로 다툴 때, 신하된 자로서 난적을 토벌하지 않는 것을 『춘추(春秋)』는 나무랐다.주 011지금 여가(呂嘉)와 건덕(建德) 등이 반란을 일으켜 자립하여 태연자약하고 있다. 죄수들과 장강(長江) 및 회수(淮水)
주 012이남의 누선(樓船)주 01310만 병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라.”라고 하였다.濟北國 : 濟北國의 治所는 盧縣(현재의 山東省 長淸縣 동남쪽에 위치)에 있다. 그런데 『史記』 「李陵傳」에는 韓千秋가 濟北相이 아니라 濟南相으로 되어 있다(成安侯者, 穎川人, 父韓千秋, 故濟南相, 奮擊南越戰死, 武帝封子延年爲侯, 以校尉隨陵). 濟北國은 孝文帝 元年(전179)에 처음 설치된 이래 잠깐 폐지되었다가 孝文帝 15년(전165)에 다시 설치된 후 孝宣帝 地節 3년(전67) 平原郡과 泰山郡으로 분리되어 폐지되었다. 한편, 濟南國은 文帝 16년(전164)에 濟南郡을 國으로 개칭하고 劉肥의 아들 辟光을 濟南王에 임명 東平陵(지금의 山東省 章丘市 서쪽)에 도읍하였다. 景帝 3년(전154)에 吳楚七國의 亂에 참가하여 郡으로 강등되었다. 武帝 이후에는 南部가 泰山郡에 소속됨으로써 관할지역이 더욱 축소되었다.
-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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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2)
濟北國 : 濟北國의 治所는 盧縣(현재의 山東省 長淸縣 동남쪽에 위치)에 있다. 그런데 『史記』 「李陵傳」에는 韓千秋가 濟北相이 아니라 濟南相으로 되어 있다(成安侯者, 穎川人, 父韓千秋, 故濟南相, 奮擊南越戰死, 武帝封子延年爲侯, 以校尉隨陵). 濟北國은 孝文帝 元年(전179)에 처음 설치된 이래 잠깐 폐지되었다가 孝文帝 15년(전165)에 다시 설치된 후 孝宣帝 地節 3년(전67) 平原郡과 泰山郡으로 분리되어 폐지되었다. 한편, 濟南國은 文帝 16년(전164)에 濟南郡을 國으로 개칭하고 劉肥의 아들 辟光을 濟南王에 임명 東平陵(지금의 山東省 章丘市 서쪽)에 도읍하였다. 景帝 3년(전154)에 吳楚七國의 亂에 참가하여 郡으로 강등되었다. 武帝 이후에는 南部가 泰山郡에 소속됨으로써 관할지역이 더욱 축소되었다.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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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11)
- 각주 012)
- 각주 013)
색인어
- 이름
- 여가(呂嘉), 여가, 장삼(莊參), 장삼, 장삼, 한천추(韓千秋), 여가, 여가, 한천추, 규악(樛樂), 여가, 진왕(秦王), 명왕(明王), 건덕(建德), 한천추, 한천추, 한천추, 한천추, 한연년(韓延年), 성안후(成安侯), 규악, 규악, 광덕(廣德), 용항후(龍亢侯), 여가(呂嘉), 건덕(建德)
- 지명
- 한(漢), 남월, 협현(郟縣), 제북국(濟北國), 월나라, 남월, 한, 한, 장안(長安), 한, 창오(蒼梧), 남월, 번우성(番禺城), 남월, 한, 한, 장강(長江), 회수(淮水)
- 서명
- 춘추(春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