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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이여부(伊与部; 이요베)

이여부(伊与部; 이요베)
 위와 같다.
 
【주석】
1. 이여부(伊与部)
이여부라는 씨명은 이예부(伊預部), 이요부(伊余部)라고 쓰며, 이여부의 반조씨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우경 신별(하) 「이여부」 조에서는 고미모수비명(高媚牟須比命; 다카미무스비노미코토)의 3세손인 천사대주명(天辭代主命)의 후손이라고 하여 고황산련종(高皇産靈尊; 다카미무스비노미코토) 계통의 이여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씨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해당 조를 참조.
이여부씨 일족의 이름은 달리 사료에 보이지 않으나, 본조의 이여부와 동족이며 본종가로 생각되는 이여부련씨(伊与部連氏)가 있다. 『일본삼대실록』 정관(貞觀) 4년 5월 13일 경진조에 미농국(美濃國) 후견군(厚見郡) 사람 외종5위하 행조교(行助教) 육인부영정(六人部永貞), 찬기소목(讚岐少目) 종7위상 육인부애성(六人部愛成), 산위(散位) 종7위하, 육인부행직(六人部行直) 등 세 사람에게 선연조신(善淵朝臣)을 사성하였다. 천손(天孫)화명명(火明命)의 후손인 소신적명(少神積命)의 후예이다. 이여부련(伊與部連) 차전련(次田連) 등과 조상이 같다고 하여, 이여부련씨가 본조의 이여부씨와 마찬가지로 화명명의 후손으로 자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여부련씨의 일족으로는 이여부련마사(伊余部連馬飼, 『日本書紀』 持統 3년 6월 계미조 등), 이여부련가수(伊与部連家守, 『속일본기』 延曆 10년 정월 무진조 등), 이여부련진좌(伊与部連眞佐, 『類聚國史』 99 叙位 弘仁 10년 정월 병술조), 이여부련진정(伊予部連眞貞, 『日本紀略』 天長 2년 8월 무신조 등)이 있다.
그들 중에서 이여부련마사는 『속일본기』 문무(文武) 4년 6월 갑오조에서 직광사(直廣肆) 이여부련마양(伊余部連馬養) 등에 율령을 찬정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보이고, 대보(大寶) 원년 8월 계묘조에 이여부련마양 등에게 율령을 찬정하도록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또한 대보 3년 2월 정미조에는 율령 찬정의 공로를 생각하여 종5위하 이여부련마양의 아들에게 논 5정(町)과 봉호 100호를 주었다. 천평보자(天平寶字) 원년 12월 임자조에서는 종5위하 이여부련마양 등에게 대보 2년에 율령을 찬수한 곳으로 공전(功田) 각 10정을 내렸는데, 하공(下功)에 해당하므로 그 아들까지 전하라고 하였다. 또한 『회풍조(懐風藻)』 에는 천황을 수행하다가 명을 받고 지은 5언시 1수가 전한다. 당시 마양은 황태자 학사로 관위는 종5위하였고 나이는 45세였다. 『단후국풍토기(丹後國風土記)』 일문에는 “이는 이른바 수강포도자(水江浦島子)라는 사람이다. 이는 과거의 국사였던 이예부마양련(伊預部馬養連)이 기록한 것과 다르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여부련가수(伊与部連家守)는 『일본기략(日本紀略)』 연력(延曆) 19년(800) 10월 경진조에 졸전(卒傳)이 실려 있다. “외종5위하 이여부가수가 죽었다. 보귀(寶龜) 6년에 견당사에 보임되어 『오경대의(五經大義)』 와 『절운(切韻)』, 『설문자체(說文字軆)』 를 배웠다. 돌아와서 직강(直講)에 임명되었다가 조교(助教)가 되었다. 이때 대신이 아뢰어 공양(公羊)·곡량(穀梁)·좌씨(佐氏) 3전의 뜻을 가르치게 하였다. 문선왕(文宣王)을 제향하는 자리에서 여러 유자들의 설이 같지 않았다. 이에 경전의 뜻에 의거하고 당(唐)에서 통용되는 것을 자세히 기록하여 바쳤다”라고 하였다. 『영집해(令集解)』 학령(學令) 경주역상서조(經周易尙書條)에서도 연력 17년 3월 16일의 태정관부에 의거하여 『춘추(春秋)』 의 공양, 곡량 2전을 각각 1경으로 삼아 학생에게 교수하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당시 일본에서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복건두예주(服虔杜預注) 두 전은 버리고 취하지 않았다. 그런데 견당사 명경청익직강박사(明經請益直講博士) 정6위상 이여부련가수가 당에서 익히고 돌아와 연력 3년에 처음으로 3전을 가르치게 하였으며, 이때에 이르러 몇몇 학생들로 하여금 익히도록 한 것이다
이예부련진정(伊予部連眞貞)에 대해서는 『일본기략(日本紀略)』천장(天長) 2년(825)8월 무신조에 대학박사와 학생들을 자신전(紫辰殿)에 불러 논의하게 하였는데 박사 종5위하 이예부련진정이 논의한 말이 훌륭하다고 하여 차시종(次侍從)에 보임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그의 졸전(卒傳)은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 승화(承和) 12년(845) 2월 정유조에 실려 있는데, 진정은 우경인(右京人)이고 이하수(伊賀守) 종5위하 이여부련가수(伊与部連家守)의 아들이며, 15세에 대학에 들어갔고 여러 유자들이 모두 그 재주와 행실을 추천하여 득업생(得業生)이 되었으며, 대동(大同) 4년에 과시(課試)에 합격하고 홍인(弘仁) 4년(813)에 대학조교를 겸임하였으며, 10년(819)에 종5위하에 임명되고 박사가 되었으며, 천장(天長) 초에 대학조(大學助)가 되었다. 5년에 선도조신(善道朝臣)이라는 성을 받았고, 8년에 아파수(阿波守)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영의해(令義解)』 를 편찬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어 임지로 가지 못하였다. 이처럼 진정은 삼전(三傳)과 삼례(三禮)에 정통하였고, 동궁학사와 대학박사를 지냈다. 죽었을 때 나이는 78세였다.
이예부련진정은 천장 5년(828)에 선도숙녜라는 성을 받고, 다시 승화(承和) 3년 11월 경진조에 다시 선도조신(善道朝臣)이라는 성을 받았다.
선도조신씨 일족으로는 선도조신진정 이외에, 선도조신근정(善道朝臣根筵, 『日本文德天皇實錄』 天安 원년 정월 병오조 등), 선도조신계근(善道朝臣繼根, 『日本三代實錄』 貞觀2년 8월 25일 임진조 등)이 있다.
또한 찬기국(讚岐國) 아야군(阿野郡) 산본향(山本鄕) 사람으로 이여부충마려(伊与部連虫麻呂, 天平勝寶 3년 4월 11일자 「우바새공진문(優婆塞貢進文)」, (『대일본고문서』 25-109), 이여부련인성(伊与部連人成, 상동)이 있는데, 이여부련씨와 동족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2. 동상(同上)
『신찬성씨록』 완본에는 화명명(火明命)의 5세손인 무려목명(武礪目命)의 후손이라고 되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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