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망이 선우의 즉위를 축하하며 사신을 파견하고 변경의 장수와 둔병을 폐지함
천봉(天鳳) 원년(14), 운과 당은 서하[군](西河郡)
호맹[현](虎猛縣)의 제로새(制虜塞)로주 001사람을 보내 변새의 관리에게 화친후(和親侯)를 알현하고 싶다고 고하였다. 화친후 왕흡이란 사람은 왕소군의 조카다. 중부도위(中部都尉)주 002
선우는 [진량 등] 네 사람과 [무기]교위 초호를 손으로 때려죽인 역적 지음(芝音) 주 004의 처와 자식 이하 27명을 다 잡아들여 모두 형틀을 채우고 우리에 가둔 다음 사신에게 넘겼다. 주유고석왕(廚唯姑夕王) 부(富) 등 40인을 보내 왕흡과 전덕후 [왕]립 등을 전송하였다. 왕망은 분여(焚如)의 형벌주 005을 만들어 진량 등을 태워 죽였다.
[그리고 변경의] 여러 장수들과 둔병을 폐지하고 다만 유격도위(游擊都尉)만을 두었다.주 006
[신의] 사자가 선우에게 힐문하면 그때마다 말하였다. “오환과 흉노의 무례하고 교활한 인민들이 함께 [중국을] 침공하여 변새 안으로 들어갔으니, 마치 중국 안에 도적이 있는 것과 같을 뿐이오! 함이 처음 즉위하여 국가를 장악하였을 때 위신이 아직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힘을 다하여 금지하였으며, 감히 두 마음을 품지 않았소.”
각주 002)
가 이 일을 아뢰었다. 왕망은 왕흡과 왕흡의 동생인 기도위(騎都尉)주 003전덕후(展德侯) [왕]립(王颯)을 흉노에 사신으로 보내 선우의 새로운 즉위를 축하하고, 황금과 의복, 비단 등을 사여하였다. [건국 4년에 참수한 오루선우의 아들] 시자(侍子) 등(登)이 살아 있다고 거짓말하고, [흉노에 망명한] 진량과 종대 등을 돈을 주고 데려오려 하였다.中部都尉 : 秦代 이래 漢武帝 이전까지 邊郡에 설치된 都尉는 오로지 蠻夷를 관할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郡守의 지휘권 아래 속해 있기도 했고, 그러지 않기도 하였다. 마치 후한대 屬國과 같았다. 그러나 漢武帝 이후 邊郡에 모두 郡守가 설치되고, 都尉는 漢의 군대를 지휘하는 역할을 맡았다. 대신 屬國都尉를 신설하여 蠻夷 관장의 업무를 맡게 하였다(嚴耕望, 1961 : 160). 都尉는 1郡 안에 여러 개가 설치되는데, 東․西․南․北․中 등의 방위가 이름 앞에 오고 이를 五部都尉라고 한다. 『漢書』 「地理志」에 따르면 西河郡에는 屬國都尉(치소는 美稷縣), 南部都尉(塞外 翁龍․埤是), 西部都尉(虎猛縣), 北部都尉(千章․增山) 등이 보일 뿐 中部都尉는 없으나, 위의 기록처럼 설치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선우는 [진량 등] 네 사람과 [무기]교위 초호를 손으로 때려죽인 역적 지음(芝音) 주 004의 처와 자식 이하 27명을 다 잡아들여 모두 형틀을 채우고 우리에 가둔 다음 사신에게 넘겼다. 주유고석왕(廚唯姑夕王) 부(富) 등 40인을 보내 왕흡과 전덕후 [왕]립 등을 전송하였다. 왕망은 분여(焚如)의 형벌주 005을 만들어 진량 등을 태워 죽였다.
[그리고 변경의] 여러 장수들과 둔병을 폐지하고 다만 유격도위(游擊都尉)만을 두었다.주 006
각주 006)
선우는 왕망이 보낸 뇌물을 탐내었다. 그래서 겉으로는 한의 고사를 어기지 않는다 하면서도,주 007속으로는 약탈을 이롭게 여겼다. 또한 [신에 보냈던] 사신이 돌아온 뒤 아들 등이 이미 죽었음을 알고 원한을 품었다. [그래서] 노략질하는 오랑캐가 [흉노의] 좌지(左地)로부터주 008침입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天鳳원년(14) 변경지역에는 큰 기근이 들어 ‘人相食’의 참극이 벌어졌다. 諫大夫 如普가 변경의 군부대를 시찰하고 돌아와 “軍士들이 장기간 주둔하면서 추위에 고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邊郡에서는 그들을 구휼할 수 없습니다. 지금 單于가 새롭게 화친의 관계를 맺으니, 응당 변경의 주둔군을 철수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校尉 韓威의 반대가 있기는 하였으나, 王莽은 如普의 주장을 받아들여 변경의 諸將을 철수시키고, 아울러 陳欽 등 18인을 면직시켰다(『資治通鑑』 권37 : 1203). 이때 유일하게 철수시키지 않은 游擊都尉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王莽이 將軍으로 임명한 韓威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신의] 사자가 선우에게 힐문하면 그때마다 말하였다. “오환과 흉노의 무례하고 교활한 인민들이 함께 [중국을] 침공하여 변새 안으로 들어갔으니, 마치 중국 안에 도적이 있는 것과 같을 뿐이오! 함이 처음 즉위하여 국가를 장악하였을 때 위신이 아직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힘을 다하여 금지하였으며, 감히 두 마음을 품지 않았소.”
-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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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2)
中部都尉 : 秦代 이래 漢武帝 이전까지 邊郡에 설치된 都尉는 오로지 蠻夷를 관할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郡守의 지휘권 아래 속해 있기도 했고, 그러지 않기도 하였다. 마치 후한대 屬國과 같았다. 그러나 漢武帝 이후 邊郡에 모두 郡守가 설치되고, 都尉는 漢의 군대를 지휘하는 역할을 맡았다. 대신 屬國都尉를 신설하여 蠻夷 관장의 업무를 맡게 하였다(嚴耕望, 1961 : 160). 都尉는 1郡 안에 여러 개가 설치되는데, 東․西․南․北․中 등의 방위가 이름 앞에 오고 이를 五部都尉라고 한다. 『漢書』 「地理志」에 따르면 西河郡에는 屬國都尉(치소는 美稷縣), 南部都尉(塞外 翁龍․埤是), 西部都尉(虎猛縣), 北部都尉(千章․增山) 등이 보일 뿐 中部都尉는 없으나, 위의 기록처럼 설치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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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6)
天鳳원년(14) 변경지역에는 큰 기근이 들어 ‘人相食’의 참극이 벌어졌다. 諫大夫 如普가 변경의 군부대를 시찰하고 돌아와 “軍士들이 장기간 주둔하면서 추위에 고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邊郡에서는 그들을 구휼할 수 없습니다. 지금 單于가 새롭게 화친의 관계를 맺으니, 응당 변경의 주둔군을 철수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校尉 韓威의 반대가 있기는 하였으나, 王莽은 如普의 주장을 받아들여 변경의 諸將을 철수시키고, 아울러 陳欽 등 18인을 면직시켰다(『資治通鑑』 권37 : 1203). 이때 유일하게 철수시키지 않은 游擊都尉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王莽이 將軍으로 임명한 韓威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 각주 007)
- 각주 008)
색인어
- 이름
- 운, 당, 왕흡, 왕소군, 왕망, 왕흡, 왕흡, [왕]립(王颯), 오루선우, 등(登), 진량, 종대, 진량, 초호, 지음(芝音), 부(富), 왕흡, [왕]립, 왕망, 진량, 왕망, 등, 함
- 지명
- 서하[군](西河郡), 호맹[현](虎猛縣), 한, 신,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