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일본서기

판합부련석포 등을 당에 파견함( 『이길련박덕서(伊吉連博德書)』와 『난파길사남인서(難波吉士男人書)』의 상세 내용)

가을 7월 병자삭 무인(3일)에 소금하(小錦下)주 001
번역주 001)
『日本書紀』 대화 5년의 관위 19계에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천지천황 3년에 제정된 관위 26계 가운데 제12위에 해당된다. 『伊吉連博德書』는 천지천황 3년 이후에 기록된 것이므로 천지천황 3년 이후의 관위가 기재된 것이다.
닫기
판합부련석포(坂合部連石布;사카히베노무라지이하시키)주 002
번역주 002)
2년 9월조에서는 坂合部連磐鍬(사카이베노무라지이와스키)라 한다. ‘磐鍬(이와시키)’와 石布(이와스키)의 차이는 『日本書紀』 원사료의 필자가 달라서 생긴 문제인 듯하다.
닫기
, 대선하(大仙下)주 003
번역주 003)
‘大山下’를 의미하며 대화 5년의 관위 19계와 천지천황 3년의 관위 26계에도 보인다.
닫기
진수련길상(津守連吉祥;츠모리노무라지키사)주 004
번역주 004)
副使로 도당한 뒤 당의 백제 침입을 맞이해 억류되었다가 다음해 5월에 귀국하였다. 『善隣國寶記』에 인용된 『海外國記』에서는 천지천황 3년 9월에 大山中(천지천황 3년의 관위로 제14위에 해당)의 관위를 띠고 있다. 또한 『住吉神代記』에는 右大弁 吉祥이 견당사로 출발하기 직전에 신대기의 원자료를 기록해 두었다는 내용이 跋文에 보인다.
닫기
을 사신으로 당에 파견하였다. 도오(道奧)주 005
번역주 005)
아래에 나오는 『伊吉連博德書』에 당 황제의 질문에 대한 일본 사신의 답문 가운데 ‘熟蝦夷는 매년 조정에 입공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 하이를 가리킨다. 제명천황이 道奧하 이를 대동한 사신단을 당에 파견한 것은 하이를 대동하여 당과의 교섭에서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또한 왜 사신은 道奧하이가 매년 왜에 조공을 바치고 있다는 점을 당에게 강조한 데 비해 『通典』과 『唐會要』의 蝦夷國條에서는 ‘海島 가운데 있는 조그만 국가인 하이국에서 온 사신은 수염이 4척이나 되었고 활을 잘 쏘았다고 하며, 大唐 顯慶 4년(659) 10월에 입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왜 사신의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고, 대동한 하이국에 관한 사실만을 주목하고 있다. 이는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계획을 세운 당 입장에서 친백제 노선을 견지하고 있는 제명천황의 외교노선에 대한 문제의식이 바탕에 깔린 것이다. 그리고 하이의 입조는 당 입장에서는 새로운 조공국 하나가 더 생겨 당의 국제적 위상을 한 단계 높이는 것이었기에 당 조정에서는 하이를 데려온 왜의 사신을 홀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갈등구조 속에서 왜의 사신이 바란 왜와 당의 긴장관계 완화는 성공하지 못했고, 당 고종을 알현한 후 왜 사신은 곧바로 귀국할 수 없었다.
닫기
의 하이 남녀 두 명을 당의 천자에게 보였다주 006
번역주 006)
656년에 고구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坂合部連石布가 견당대사였던 점에 주목하면, 왜국은 당의 백제, 고구려 공격과 관련된 정보를 얻기 위해 견당사를 파견했을 것이다. 또한 道奧蝦夷 남녀 2명을 함께 데리고 가서 이들이 왜국에 매년 조공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점에서 견당사는 고구려-백제-왜국-하이의 동맹이 형성되어 있음을 당에게 과시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닫기
[이길련박덕서(伊吉連博德書) 주 007
번역주 007)
『日本書紀』 효덕천황 백치 5년 2월 伊吉博得 참조.
닫기
에는 이 천황시대에 소금하(小錦下) 판합부석포련(坂合部石布連;사카히베이하시키노무라지)과 대산하 진수길상련 등이 탄 두 척의 배가 오당로(吳唐路)주 008
번역주 008)
견당사의 渡唐 항로를 시사하는 중요한 사료이다. 吳는 중국 三國時代의 일국으로 강남 일대를 판도로 하였다. 吳와 唐이 병기된 것은 이때 파견된 견당사가 강남으로 직행하는 남로를 취한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 추론하고 있다. 『日本書紀』 응신천황 37년 2월조 吳國 참조.
닫기
로 가는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기미년주 009
번역주 009)
齊明天皇 5년(559)을 가리킨다.
닫기
7월 3일에 난파삼진포(三津浦;미츠노우라)주 010
번역주 010)
大和川과 渟川이 합류하여 대판만으로 들어가는 곳에 난파가 있다. 현재 大阪市 住吉區 주변을 ‘難破御(三)津, 難波大津’ 등으로 비정하거나 東區 高麗橋 부근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닫기
를 출발하였다. 8월 11일에 축자대진포(大津浦;오호츠노우라)주 011
번역주 011)
大津은 那津이라고도 칭한다. 현재 福岡市 博多港의 옛 이름이다. 자세한 내용은 『日本書紀』 선화천황 원년 5월조 那津 참조.
닫기
를 출발하였다. 9월 13일에 백제의 남쪽 해안에 있는 섬에 닿았다. 섬의 이름은 분명하지 않다. 14일 인시(寅時)주 012
번역주 012)
오전 3시부터 5시 사이를 의미한다.
닫기
에 두 척의 배가 나란히 대해로 나아갔다. 15일 해가 질 무렵에 석포련의 배가 갑작스럽게 역풍을 만나 남쪽 바다에 있는 섬에 표착하였다. 섬의 이름은 이가위(爾加委;니카웨)주 013
번역주 013)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닫기
라 한다. 그곳에서 섬사람에 의해 살해되었다. 동한장직아리마(東漢長直阿利麻;야마토노아야노나가노아타히아리마)주 014
번역주 014)
제명천황 6년 7월조 분주의 『伊吉連博德書』에도 보인다. 『日本書紀』 황극천황 3년 11월조 長直 참조.
닫기
, 판합부련도적(坂合部連稻積;사카히베노무라지이나츠미)주 015
번역주 015)
여기에만 보인다.
닫기
등 5명은 섬사람의 배를 훔쳐 타고 도망쳐 괄주(括州) 주 016
번역주 016)
江南道에 속하며 大曆 14년(779)에 處州로 改名하였다. 현재 浙江省 麗水이다.
닫기
에 도착하였다. 주현의 관인이 낙양의 도읍주 017
번역주 017)
당의 수도는 長安이다. 舊都인 洛陽을 東都, 太原을 北都라 불렀다.
닫기
으로 보내주었다. 16일 한밤중에 길상련의 배가 월주(越州) 주 018
번역주 018)
강남도에 속하고 括州보다 북쪽에 위치한 杭州灣 남안 일대를 가리킨다. 이 기록에 따르면 강한 동남풍을 타고 해상 60여km를 삼일 낮 이틀 밤 동안에 횡단한 셈이다.
닫기
회계현(會稽縣) 주 019
번역주 019)
현재 浙江省 興紹이다.
닫기
수안산(須岸山) 주 020
번역주 020)
현재 舟山列島의 須岸島라고 추정하고 있다.
닫기
에 도착하였다. 동북풍이 매우 강하게 불었다. 23일 여도현(餘姚縣) 주 021
번역주 021)
越州 餘姚縣으로 현재 浙江省 餘姚이다.
닫기
에 도착하였다. 타고 온 배와 여러 가지 비품을 그곳에 남겨 두었다. 윤10월 1일 월주의 관청주 022
번역주 022)
원문은 州底이다. 底는 州衙를 의미하고 당시에 越州의 관아가 있던 곳은 會稽縣이다.
닫기
에 도착하였다. 15일에 역마를 타고 왕경에주 023
번역주 023)
長安을 가리킨다.
닫기
들어갔다. 29일에 말을 달려 동경(東京)주 024
번역주 024)
洛陽을 가리킨다.
닫기
에 도착하였다. 천자주 025
번역주 025)
당시의 당 황제는 高宗이다. 『資治通鑑』 唐紀에는 ‘고종이 顯慶 4년(659) 윤10월 5일에 장안을 출발하여 동 25일에 東都인 낙양에 도착하였다.’고 적혀 있다.
닫기
는 동경에 있었다. 30일주 026
번역주 026)
당대의 戊寅曆에 따르면 이 해의 윤10월은 30일이 없는 달이다. 따라서 이 ‘三十日’은 博德이 잘못 기록한 것이다.
닫기
에 천자가 이들을 대면하여 “일본국주 027
번역주 027)
‘일본’이라는 국호가 확실히 사용된 용례로 가장 오래된 사례로 간주되고 있다. 『書紀集解』에서는 「問訊之曰, 本國天皇」을 『日本書紀』 편자가 「問訊之, 曰本國天皇」으로 고쳐서 쓴 것이라 보고, 이후에 행해진 수사라고 적고 있다.
닫기
천황은 평안한가.”라고 물었다. 사신이 “천지의 덕이 합쳐져 저절로 평안을 얻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천자가 “정무를 담당하는 경들은 잘 있는가.”라고 물었다. 사신이 “천황의 깊은 은혜를 입어 모두 잘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천자가 “국내는 평화로운가.”라고 물었다. 사신이 “다스림이 천지에 상응하여 만민이 무사합니다.”라고 답하였다. 천자가 “이들 하이의 나라는 어느 쪽에 있는가.”라고 물었다. 사신이 “이들의 나라는 동북쪽에 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천자가 “하이에는 몇 가지 부류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사신이 “세 부류가 있습니다. 먼 데 있는 것은 도가류(都加留;츠가루)주 028
번역주 028)
현재 津輕 지역의 하이를 가리킨다.
닫기
, 다음은 추하이(麤蝦夷;아라에미시), 가까운 데 있는 것은 숙하이(熟蝦夷;니키에미시)라 칭합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남녀는 숙하이입니다주 029
번역주 029)
당 고종에게 데려와 보이고 있는 道奧蝦夷 남녀 두 사람을 가리킨다.
닫기
. 해마다 본국주 030
번역주 030)
본국은 자국인 왜국을 가리킨다.
닫기
조정에 입공합니다.”라고 답하였다. 천자가 “그 나라에 오곡주 031
번역주 031)
우리나라에서는 벼, 보리, 콩, 조, 기장을, 중국에서는 ‘수수(黍), 기장(稷), 보리(麥), 콩(豆), 벼(稻)’ 등의 주요 농작물을 가리킨다. 일본에서는 수수 대신에 피(稗)를 넣어 ‘오곡’이라 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닫기
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사신이 “없습니다주 032
번역주 032)
하이국에는 오곡이 없다고 답하고 있지만, 고고학적으로 보면 彌生文化의 유적은 동북각지에 분포한다. 靑森縣 田舍館 유적에서는 탄화된 稻籾이나 稻籾에 눌린 흔적이 있는 彌生式토기가 출토된 바 있다. 근래에는 同縣 砂澤유적 등에서 야요이시대 전기의 도작유구가 출토되고 있어 농경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닫기
. 고기를 먹고 살고 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천자가 “나라에 가옥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사신이 “없습니다주 033
번역주 033)
蝦夷가 농경민족과 같이 일정한 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하이 관계 기사는 『日本書紀』 景行天皇 40년 7월조에 「其東夷之中. 蝦夷是尤強焉. 男女交居. 父子無別. 冬則宿穴. 夏則住樔. 衣毛飮血…而犯邊界. 或伺農桑. 以略人民. 撃則隱草. 追則入山. 故往古以來. 未染王化.」라고 적고 있다.
닫기
. 깊은 산 중 나무 아래에서 기거합니다.”라고 답하였다. 천자가 “짐은 하이의 몸과 얼굴의 기이함을 보니, 기쁘고 신기하구나. 사신이 먼 곳에서 오느라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물러가 관청주 034
번역주 034)
중국에서 蠻夷의 사신들을 머물게 한 鴻臚館을 가리킨다.
닫기
에서 머물도록 하라. 나중에 다시 볼 것이다.”라고 거듭하여 말하였다. 11월 1일에 조정에서 동지주 035
번역주 035)
중국에서는 예부터 11월 1일이 마침 동지가 되면, 朔旦冬至라 칭하며 祥瑞로운 일이라 여기고 축하 의식을 행하였다.
닫기
의식이 있었다. 의식이 있는 날에 천자를 또 알현하였다. 입조한 제번(諸蕃) 가운데 우리 사신주 036
번역주 036)
원문은 倭客이다.
닫기
이 가장 훌륭하였다. 그러나 뒤에 화재 때문에 더 이상의 알현은 없었다. 12월 3일에 한지흥(韓智興;간치코우)주 037
번역주 037)
『日本書紀』 효덕천황 5년 2월조 倭種韓智興 참조.
닫기
의 시종주 038
번역주 038)
『集韻』에는 「傔, 侍從也.」라고 적고 있다. 『延喜式』 大藏式에서는 유학생이나 학문승에게 몇 명씩 시중을 드는 사람, 傔人(傔從)을 따르게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西漢大麻呂와 제명천황 7년 5월조에 보이는 東漢草直足嶋 등이 한지흥의 시종으로 따라간 것이다.
닫기
서한대마려(西漢大麻呂;가후치노아야노오호마로)주 039
번역주 039)
여기에만 보인다. 『日本書紀』 추고천황 17년 9월조 西漢直 참조.
닫기
가 우리 사신을 참언하였다. 사신들이 당조에서 죄주 040
번역주 040)
‘倭에서 온 사신이 당의 출병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는 것이 참언 내용이라면, 『唐律』 擅興律 密有征討條에서 「若化外人, 來爲間諜, 或傳書信與化内人, 并受及知情容止者, 竝絞.」라고 적고 있듯이 絞(首)刑에 해당된다.
닫기
를 얻어 유배형이 결정되었다. 그 후 지흥을 삼천 리 밖으로 유배하였다주 041
번역주 041)
당률에는 死刑(絞, 斬)에 이어 流刑(2천, 2천5백, 3천 리)이 존재한다. 이 기사에 따르면 세 가지 유형 가운데 가장 무거운 3천 리에 처해졌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닫기
. 사신 가운데 있던 이길련박덕이 아뢰었다. 이로 인해 곧 죄를 면하였다주 042
번역주 042)
智興까지 허락을 받았는지 그 여부는 알 수 없다.
닫기
. 일이 끝난 뒤에 “우리나라는 내년에 반드시 해동을 정토하려주 043
번역주 043)
원문은 海東之政이다. ‘海東’은 한반도, ‘政’은 정토를 의미한다. 당은 이 해(559) 봄에 신라에서 구원을 청하자 다음해(660년) 3월 대군을 파견하여 7월에 백제를 침략하였다.
닫기
한다. 너희들 왜객도 동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명하였다. 그리고 서경에 묶어두고 별도의 장소에 가두어 두었다. 문을 닫고 막아 여기저기주 044
번역주 044)
원문은 東西이다.
닫기
왕래하지 못하게 하였다. 오랫동안 고생하였다주 045
번역주 045)
『伊吉連博德書』에는 당이 백제 정토를 앞두고 왜국의 견당사들을 감금한 사건이 기재되어 있다. 이 조치는 당의 백제 정벌 계획이 사전에 누설될 것을 우려하였기에 취한 조치이다. 왜국이 당과 입장을 달리하고 있음이 이 사건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닫기
.
난파길사남인서(難波吉士男人書) 주 046
번역주 046)
여기에만 보인다. 難波吉士는 『日本書紀』 安閑天皇 원년 2월 시월조 難波吉士日香蚊 참조.
닫기
에는 당으로 향한 대사주 047
번역주 047)
坂合部連石布를 가리킨다.
닫기
의 배가 섬에 부딪혀 전복되었다. 부사주 048
번역주 048)
津守連吉祥을 가리킨다.
닫기
가 친히 천자를 뵙고 하이를 보여주었다. 이에 하이는 흰 사슴 가죽 1장, 활3개, 화살 80개를 천자에게 바쳤다고 한다.].

  • 번역주 001)
    『日本書紀』 대화 5년의 관위 19계에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천지천황 3년에 제정된 관위 26계 가운데 제12위에 해당된다. 『伊吉連博德書』는 천지천황 3년 이후에 기록된 것이므로 천지천황 3년 이후의 관위가 기재된 것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2년 9월조에서는 坂合部連磐鍬(사카이베노무라지이와스키)라 한다. ‘磐鍬(이와시키)’와 石布(이와스키)의 차이는 『日本書紀』 원사료의 필자가 달라서 생긴 문제인 듯하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大山下’를 의미하며 대화 5년의 관위 19계와 천지천황 3년의 관위 26계에도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副使로 도당한 뒤 당의 백제 침입을 맞이해 억류되었다가 다음해 5월에 귀국하였다. 『善隣國寶記』에 인용된 『海外國記』에서는 천지천황 3년 9월에 大山中(천지천황 3년의 관위로 제14위에 해당)의 관위를 띠고 있다. 또한 『住吉神代記』에는 右大弁 吉祥이 견당사로 출발하기 직전에 신대기의 원자료를 기록해 두었다는 내용이 跋文에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05)
    아래에 나오는 『伊吉連博德書』에 당 황제의 질문에 대한 일본 사신의 답문 가운데 ‘熟蝦夷는 매년 조정에 입공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 하이를 가리킨다. 제명천황이 道奧하 이를 대동한 사신단을 당에 파견한 것은 하이를 대동하여 당과의 교섭에서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또한 왜 사신은 道奧하이가 매년 왜에 조공을 바치고 있다는 점을 당에게 강조한 데 비해 『通典』과 『唐會要』의 蝦夷國條에서는 ‘海島 가운데 있는 조그만 국가인 하이국에서 온 사신은 수염이 4척이나 되었고 활을 잘 쏘았다고 하며, 大唐 顯慶 4년(659) 10월에 입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왜 사신의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고, 대동한 하이국에 관한 사실만을 주목하고 있다. 이는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계획을 세운 당 입장에서 친백제 노선을 견지하고 있는 제명천황의 외교노선에 대한 문제의식이 바탕에 깔린 것이다. 그리고 하이의 입조는 당 입장에서는 새로운 조공국 하나가 더 생겨 당의 국제적 위상을 한 단계 높이는 것이었기에 당 조정에서는 하이를 데려온 왜의 사신을 홀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갈등구조 속에서 왜의 사신이 바란 왜와 당의 긴장관계 완화는 성공하지 못했고, 당 고종을 알현한 후 왜 사신은 곧바로 귀국할 수 없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6)
    656년에 고구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坂合部連石布가 견당대사였던 점에 주목하면, 왜국은 당의 백제, 고구려 공격과 관련된 정보를 얻기 위해 견당사를 파견했을 것이다. 또한 道奧蝦夷 남녀 2명을 함께 데리고 가서 이들이 왜국에 매년 조공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점에서 견당사는 고구려-백제-왜국-하이의 동맹이 형성되어 있음을 당에게 과시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7)
    『日本書紀』 효덕천황 백치 5년 2월 伊吉博得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08)
    견당사의 渡唐 항로를 시사하는 중요한 사료이다. 吳는 중국 三國時代의 일국으로 강남 일대를 판도로 하였다. 吳와 唐이 병기된 것은 이때 파견된 견당사가 강남으로 직행하는 남로를 취한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 추론하고 있다. 『日本書紀』 응신천황 37년 2월조 吳國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09)
    齊明天皇 5년(559)을 가리킨다.바로가기
  • 번역주 010)
    大和川과 渟川이 합류하여 대판만으로 들어가는 곳에 난파가 있다. 현재 大阪市 住吉區 주변을 ‘難破御(三)津, 難波大津’ 등으로 비정하거나 東區 高麗橋 부근으로 비정하기도 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11)
    大津은 那津이라고도 칭한다. 현재 福岡市 博多港의 옛 이름이다. 자세한 내용은 『日本書紀』 선화천황 원년 5월조 那津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12)
    오전 3시부터 5시 사이를 의미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13)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바로가기
  • 번역주 014)
    제명천황 6년 7월조 분주의 『伊吉連博德書』에도 보인다. 『日本書紀』 황극천황 3년 11월조 長直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15)
    여기에만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16)
    江南道에 속하며 大曆 14년(779)에 處州로 改名하였다. 현재 浙江省 麗水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17)
    당의 수도는 長安이다. 舊都인 洛陽을 東都, 太原을 北都라 불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8)
    강남도에 속하고 括州보다 북쪽에 위치한 杭州灣 남안 일대를 가리킨다. 이 기록에 따르면 강한 동남풍을 타고 해상 60여km를 삼일 낮 이틀 밤 동안에 횡단한 셈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19)
    현재 浙江省 興紹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20)
    현재 舟山列島의 須岸島라고 추정하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1)
    越州 餘姚縣으로 현재 浙江省 餘姚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22)
    원문은 州底이다. 底는 州衙를 의미하고 당시에 越州의 관아가 있던 곳은 會稽縣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23)
    長安을 가리킨다.바로가기
  • 번역주 024)
    洛陽을 가리킨다.바로가기
  • 번역주 025)
    당시의 당 황제는 高宗이다. 『資治通鑑』 唐紀에는 ‘고종이 顯慶 4년(659) 윤10월 5일에 장안을 출발하여 동 25일에 東都인 낙양에 도착하였다.’고 적혀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6)
    당대의 戊寅曆에 따르면 이 해의 윤10월은 30일이 없는 달이다. 따라서 이 ‘三十日’은 博德이 잘못 기록한 것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27)
    ‘일본’이라는 국호가 확실히 사용된 용례로 가장 오래된 사례로 간주되고 있다. 『書紀集解』에서는 「問訊之曰, 本國天皇」을 『日本書紀』 편자가 「問訊之, 曰本國天皇」으로 고쳐서 쓴 것이라 보고, 이후에 행해진 수사라고 적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8)
    현재 津輕 지역의 하이를 가리킨다.바로가기
  • 번역주 029)
    당 고종에게 데려와 보이고 있는 道奧蝦夷 남녀 두 사람을 가리킨다.바로가기
  • 번역주 030)
    본국은 자국인 왜국을 가리킨다.바로가기
  • 번역주 031)
    우리나라에서는 벼, 보리, 콩, 조, 기장을, 중국에서는 ‘수수(黍), 기장(稷), 보리(麥), 콩(豆), 벼(稻)’ 등의 주요 농작물을 가리킨다. 일본에서는 수수 대신에 피(稗)를 넣어 ‘오곡’이라 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32)
    하이국에는 오곡이 없다고 답하고 있지만, 고고학적으로 보면 彌生文化의 유적은 동북각지에 분포한다. 靑森縣 田舍館 유적에서는 탄화된 稻籾이나 稻籾에 눌린 흔적이 있는 彌生式토기가 출토된 바 있다. 근래에는 同縣 砂澤유적 등에서 야요이시대 전기의 도작유구가 출토되고 있어 농경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33)
    蝦夷가 농경민족과 같이 일정한 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하이 관계 기사는 『日本書紀』 景行天皇 40년 7월조에 「其東夷之中. 蝦夷是尤強焉. 男女交居. 父子無別. 冬則宿穴. 夏則住樔. 衣毛飮血…而犯邊界. 或伺農桑. 以略人民. 撃則隱草. 追則入山. 故往古以來. 未染王化.」라고 적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34)
    중국에서 蠻夷의 사신들을 머물게 한 鴻臚館을 가리킨다.바로가기
  • 번역주 035)
    중국에서는 예부터 11월 1일이 마침 동지가 되면, 朔旦冬至라 칭하며 祥瑞로운 일이라 여기고 축하 의식을 행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36)
    원문은 倭客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37)
    『日本書紀』 효덕천황 5년 2월조 倭種韓智興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38)
    『集韻』에는 「傔, 侍從也.」라고 적고 있다. 『延喜式』 大藏式에서는 유학생이나 학문승에게 몇 명씩 시중을 드는 사람, 傔人(傔從)을 따르게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西漢大麻呂와 제명천황 7년 5월조에 보이는 東漢草直足嶋 등이 한지흥의 시종으로 따라간 것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39)
    여기에만 보인다. 『日本書紀』 추고천황 17년 9월조 西漢直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40)
    ‘倭에서 온 사신이 당의 출병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는 것이 참언 내용이라면, 『唐律』 擅興律 密有征討條에서 「若化外人, 來爲間諜, 或傳書信與化内人, 并受及知情容止者, 竝絞.」라고 적고 있듯이 絞(首)刑에 해당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41)
    당률에는 死刑(絞, 斬)에 이어 流刑(2천, 2천5백, 3천 리)이 존재한다. 이 기사에 따르면 세 가지 유형 가운데 가장 무거운 3천 리에 처해졌다는 의미로 이해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42)
    智興까지 허락을 받았는지 그 여부는 알 수 없다.바로가기
  • 번역주 043)
    원문은 海東之政이다. ‘海東’은 한반도, ‘政’은 정토를 의미한다. 당은 이 해(559) 봄에 신라에서 구원을 청하자 다음해(660년) 3월 대군을 파견하여 7월에 백제를 침략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44)
    원문은 東西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45)
    『伊吉連博德書』에는 당이 백제 정토를 앞두고 왜국의 견당사들을 감금한 사건이 기재되어 있다. 이 조치는 당의 백제 정벌 계획이 사전에 누설될 것을 우려하였기에 취한 조치이다. 왜국이 당과 입장을 달리하고 있음이 이 사건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바로가기
  • 번역주 046)
    여기에만 보인다. 難波吉士는 『日本書紀』 安閑天皇 원년 2월 시월조 難波吉士日香蚊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47)
    坂合部連石布를 가리킨다.바로가기
  • 번역주 048)
    津守連吉祥을 가리킨다.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판합부련석포, 진수련길상, 판합부석포련, 진수길상련, 석포련, 동한장직아리마, 판합부련도적, 길상련, 한지흥, 서한대마려, 지흥, 이길련박덕
지명
난파, 삼진포, 축자, 대진포, 이가위, 괄주(括州), 낙양, 월주(越州), 회계현(會稽縣), 수안산(須岸山), 여도현(餘姚縣), 월주
서명
이길련박덕서(伊吉連博德書), 난파길사남인서(難波吉士男人書)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판합부련석포 등을 당에 파견함( 『이길련박덕서(伊吉連博德書)』와 『난파길사남인서(難波吉士男人書)』의 상세 내용) 자료번호 : ns.k_0040_0060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