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중국정사외국전

파습백리(巴什伯里)의 지리와 이칭(異稱) 및 역사적 연혁에 관한 글

  • 국가
    별실팔리(別失八里)
별실팔리(別失八里) 주 001
각주 001)
別失八里: Besh Balig의 音譯이다. 『殊域周咨錄』 卷15에는 亦力把力으로 기재되어 있지만, 그 외에 別十八里·別石八里·鱉思馬·別石把 등으로도 불리는데, 突厥語로 ‘五城’이라는 의미이고, 北庭이라 칭하기도 한다. 別失八里는 西北의 중요 城鎭으로, 남쪽으로는 于闐, 북쪽으로는 瓦剌, 서쪽으로는 撒馬兒罕, 동쪽으로는 火州에 연접해 있으며, 그 중심은 지금의 新疆 吉木薩爾 境內에 있다. 이 지역은 前漢 시대에는 車師의 땅이었고, 後漢代에는 車師後王庭이었다가 6세기 후반에는 突厥에 점거되었다. 이후 640년에 唐朝는 이곳에 庭州 金滿縣을 설치하고 北庭 都護府의 治所로 삼았으나 700년에 吐蕃에 함락되었다. 얼마 후에는 回鶻, 吐藩 등이 이곳에서 서로 각축을 벌이다가 9세기 초에 回鶻이 이곳을 장악하였다. 840년 漠北의 回鶻汗國이 멸망하자 일부 回鶻人이 天山의 동쪽으로 이주하여 高昌回鶻(畏兀兒)이라 칭하였다. 別失八里는 그 왕이 여름에 머무르는 장소가 되었는데, 이후 高昌回鶻의 정치적 중심지로 각광을 받았다. 이후 칭기스칸에 항복하여 몽골의 치하에 들어왔으며, 元 世祖 때에 이곳에 宣慰司를 설치하였으나 14세기 초에 차가타이 칸국의 篤哇에게 점거된 후 오랫동안 차가타이 칸국의 치하에 있었다. 명조에 들어와서도 차가타이 禿忽魯帖木兒(Tuqluq Temür)의 후예가 통치하였으나 永樂 15년(1417)에 歪思汗이 亦力把里(지금의 新疆 伊寧)로 이주하면서 別失八里는 점차 피폐해졌다.
닫기
서역의 대국(大國)이다. 남으로는 우전(于闐)과 접하고, 북으로는 와랄(瓦剌) 주 002
각주 002)
瓦剌: 몽골 서북쪽에서 일어난 蒙古族 別部의 族稱으로, ‘漠西蒙古’ 혹은 ‘西蒙古’라고도 칭한다. 동 몽골 지역이 초원지대인 데 비해 서북 몽골은 주로 초원삼림지대로 이루어져 있거니와, 17세기 이후 이곳에 사는 이들을 ‘森林(oi)에 사는 民(arat)’이라는 의미의 오이라트(Oirat)라 칭하였다. 이들 부족은 12세기경에 예니세이강 상류 유역에서 반수렵·반목축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1207년에 족장 忽都合別乞(Qutuqa Bäki)이 이곳에 출정한 쥬치(Züchi)에게 항복한 이후 4萬戶로 편성되었다. 그러나 그의 자손들은 세대로 元朝의 駙馬가 되어 원조 치하에서 특수한 신분을 이루었다. 원나라가 멸망한 후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귀족들의 분립항쟁이 격화되고, 몽골 동부의 韃靼(Tatar)이 쇠퇴해짐을 틈타 세력을 확대하였으며, 脫歡(Toghon) 시대에는 외몽골을 그들의 세력권으로 만들고 타타르를 내몽골로 몰아냈다. 脫歡의 아들 也先(Esen)칸은 만주로부터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세력권을 형성하고 점차 중국의 북쪽 변방을 침입하여, 明朝의 英宗을 생포하는 이른바 土木의 變이 발발하자 중국에서도 이들을 두려워하였다. 다만 그 후 에센칸이 암살된 뒤 세력이 약화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외몽골을 보유하였다. 이후 타타르의 達延(Dayan)칸이 내몽골을 통일하고, 이어 그의 손자인 俺答(Altan)칸이 침략해 오자 이르티시(Irtysh)강 상류로 쫓겨나 약 반세기 동안 숨어 살았다. 이후 17세기에 들어와 巴圖爾(Batur)·噶爾丹(Galdan) 父子가 등장하여 내부의 통일을 이룩하여 准噶爾(Jungar) 왕국을 건설하였는데, 몽골리아의 패권을 놓고 淸朝와 다투었다. 그러나 1759년에 淸朝 乾隆帝에게 토벌당하여 왕국은 붕괴되고 부족은 대량 살육을 당했으며, 伊犁(Ili) 將軍 밑에 소속된 하나의 藩部로 편성되었다.
닫기
에 이어지며, 서로는 살마아한에 닿고, 동으로는 화주(火州)에 이르며, 동남 방면으로 가욕관(嘉峪關)과는 3,700리 떨어져 있다. 언기(焉耆) 주 003
각주 003)
焉耆: 카라샤르(Karashahr)의 音譯이다.
닫기
라고도 칭(稱)하고 구자(龜玆) 주 004
각주 004)
龜玆: 쿠차(Kucha)의 音譯이다.
닫기
라고도 부른다. 원나라 세조(世祖, 1215~1294; 재위 1260~1294)주 005
각주 005)
世祖: 몽골 제국의 제5대 칸이자 元朝의 始祖인 쿠빌라이(忽必烈)의 廟號이다. 칭기스칸의 손자이자 톨루이의 넷째 아들이기도 하다. 1251년 형 뭉케가 제4대 칸의 자리에 오르자, 그는 漠南 漢地의 사무를 총괄하는 大總督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漢族 幕僚와 儒士, 예를 들면 劉秉忠, 許衡, 姚樞 등을 대거 요직에 기용하였다. 1253년에는 고비사막 남쪽의 金蓮川을 근거지로 삼고 오늘날 雲南 지역에 상당하는 大理國을 멸망시켰으며, 티베트와 베트남까지 공격하였다. 1256년 南宋이 몽골의 使者를 억류시키고 있으니, 이를 응징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뭉케가 南宋에 대한 선전포고를 단행하였다. 하지만 1258년 가을 大軍을 이끌고 四川 북부를 공격하던 뭉케가 1259년에 병영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1260년 쿠빌라이는 國都 카라코룸을 지키고 있던 막내 동생 아릭 부케보다 먼저 중국의 開平府(즉 上都)에서 大汗의 자리에 올랐다. 그 뒤로 양자가 싸우기를 4년, 마침내 아릭 부케를 굴복시킨 쿠빌라이는 도읍을 大都(현재 北京)로 옮기고, 1271년에는 국호를 大元이라 칭하였다. 이후 1276년 臨安(현재 杭州)을 함락시켜 南宋을 멸망시키고, 1279년에는 南宋 잔여 세력의 마지막 저항을 진압함으로써 이민족 정권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 전역을 지배하에 두었다. 至元 31년(1294) 쿠빌라이는 재위 35년, 향년 80세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닫기
때에 선위사(宣慰司)주 006
각주 006)
宣慰司: 省과 州 사이에 위치하는 일종의 軍事에 편중하는 監司기구로서 대개 軍民의 사무를 관장한다. 그 장관은 宣慰使인데, 地方軍政의 최고장관이다. 宣慰司는 金朝 시기에 처음 출현했는데, 元朝는 전국에 널리 이를 설치했다. 明淸 시기에는 소수민족이 모여 사는 곳에만 두었으므로 그 수는 前代보다 감소하였다. 元 世祖 쿠빌라이는 모든 行中書省을 60개 宣慰司로 나누었고, 宣慰司 밑으로는 약 180개의 路를 두었다. 宣慰司에는 宣慰使(종2품) 3명과 宣慰司 同知(종3품) 1명, 副使(정4품) 1명과 經歷都事 등의 관직이 설치되었다.
닫기
를 설치주 007
각주 007)
당시 宣慰使로는 萬戶 綦公直을 임명하였다(『殊域周咨錄』 卷15).
닫기
했다가 얼마 후에 원수부(元帥府)로 바꾸었는데, 그 후에는 제왕(諸王)이 이곳을 진수(鎭守)하였다.

  • 각주 001)
    別失八里: Besh Balig의 音譯이다. 『殊域周咨錄』 卷15에는 亦力把力으로 기재되어 있지만, 그 외에 別十八里·別石八里·鱉思馬·別石把 등으로도 불리는데, 突厥語로 ‘五城’이라는 의미이고, 北庭이라 칭하기도 한다. 別失八里는 西北의 중요 城鎭으로, 남쪽으로는 于闐, 북쪽으로는 瓦剌, 서쪽으로는 撒馬兒罕, 동쪽으로는 火州에 연접해 있으며, 그 중심은 지금의 新疆 吉木薩爾 境內에 있다. 이 지역은 前漢 시대에는 車師의 땅이었고, 後漢代에는 車師後王庭이었다가 6세기 후반에는 突厥에 점거되었다. 이후 640년에 唐朝는 이곳에 庭州 金滿縣을 설치하고 北庭 都護府의 治所로 삼았으나 700년에 吐蕃에 함락되었다. 얼마 후에는 回鶻, 吐藩 등이 이곳에서 서로 각축을 벌이다가 9세기 초에 回鶻이 이곳을 장악하였다. 840년 漠北의 回鶻汗國이 멸망하자 일부 回鶻人이 天山의 동쪽으로 이주하여 高昌回鶻(畏兀兒)이라 칭하였다. 別失八里는 그 왕이 여름에 머무르는 장소가 되었는데, 이후 高昌回鶻의 정치적 중심지로 각광을 받았다. 이후 칭기스칸에 항복하여 몽골의 치하에 들어왔으며, 元 世祖 때에 이곳에 宣慰司를 설치하였으나 14세기 초에 차가타이 칸국의 篤哇에게 점거된 후 오랫동안 차가타이 칸국의 치하에 있었다. 명조에 들어와서도 차가타이 禿忽魯帖木兒(Tuqluq Temür)의 후예가 통치하였으나 永樂 15년(1417)에 歪思汗이 亦力把里(지금의 新疆 伊寧)로 이주하면서 別失八里는 점차 피폐해졌다. 바로가기
  • 각주 002)
    瓦剌: 몽골 서북쪽에서 일어난 蒙古族 別部의 族稱으로, ‘漠西蒙古’ 혹은 ‘西蒙古’라고도 칭한다. 동 몽골 지역이 초원지대인 데 비해 서북 몽골은 주로 초원삼림지대로 이루어져 있거니와, 17세기 이후 이곳에 사는 이들을 ‘森林(oi)에 사는 民(arat)’이라는 의미의 오이라트(Oirat)라 칭하였다. 이들 부족은 12세기경에 예니세이강 상류 유역에서 반수렵·반목축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1207년에 족장 忽都合別乞(Qutuqa Bäki)이 이곳에 출정한 쥬치(Züchi)에게 항복한 이후 4萬戶로 편성되었다. 그러나 그의 자손들은 세대로 元朝의 駙馬가 되어 원조 치하에서 특수한 신분을 이루었다. 원나라가 멸망한 후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귀족들의 분립항쟁이 격화되고, 몽골 동부의 韃靼(Tatar)이 쇠퇴해짐을 틈타 세력을 확대하였으며, 脫歡(Toghon) 시대에는 외몽골을 그들의 세력권으로 만들고 타타르를 내몽골로 몰아냈다. 脫歡의 아들 也先(Esen)칸은 만주로부터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세력권을 형성하고 점차 중국의 북쪽 변방을 침입하여, 明朝의 英宗을 생포하는 이른바 土木의 變이 발발하자 중국에서도 이들을 두려워하였다. 다만 그 후 에센칸이 암살된 뒤 세력이 약화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외몽골을 보유하였다. 이후 타타르의 達延(Dayan)칸이 내몽골을 통일하고, 이어 그의 손자인 俺答(Altan)칸이 침략해 오자 이르티시(Irtysh)강 상류로 쫓겨나 약 반세기 동안 숨어 살았다. 이후 17세기에 들어와 巴圖爾(Batur)·噶爾丹(Galdan) 父子가 등장하여 내부의 통일을 이룩하여 准噶爾(Jungar) 왕국을 건설하였는데, 몽골리아의 패권을 놓고 淸朝와 다투었다. 그러나 1759년에 淸朝 乾隆帝에게 토벌당하여 왕국은 붕괴되고 부족은 대량 살육을 당했으며, 伊犁(Ili) 將軍 밑에 소속된 하나의 藩部로 편성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焉耆: 카라샤르(Karashahr)의 音譯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4)
    龜玆: 쿠차(Kucha)의 音譯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5)
    世祖: 몽골 제국의 제5대 칸이자 元朝의 始祖인 쿠빌라이(忽必烈)의 廟號이다. 칭기스칸의 손자이자 톨루이의 넷째 아들이기도 하다. 1251년 형 뭉케가 제4대 칸의 자리에 오르자, 그는 漠南 漢地의 사무를 총괄하는 大總督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漢族 幕僚와 儒士, 예를 들면 劉秉忠, 許衡, 姚樞 등을 대거 요직에 기용하였다. 1253년에는 고비사막 남쪽의 金蓮川을 근거지로 삼고 오늘날 雲南 지역에 상당하는 大理國을 멸망시켰으며, 티베트와 베트남까지 공격하였다. 1256년 南宋이 몽골의 使者를 억류시키고 있으니, 이를 응징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뭉케가 南宋에 대한 선전포고를 단행하였다. 하지만 1258년 가을 大軍을 이끌고 四川 북부를 공격하던 뭉케가 1259년에 병영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1260년 쿠빌라이는 國都 카라코룸을 지키고 있던 막내 동생 아릭 부케보다 먼저 중국의 開平府(즉 上都)에서 大汗의 자리에 올랐다. 그 뒤로 양자가 싸우기를 4년, 마침내 아릭 부케를 굴복시킨 쿠빌라이는 도읍을 大都(현재 北京)로 옮기고, 1271년에는 국호를 大元이라 칭하였다. 이후 1276년 臨安(현재 杭州)을 함락시켜 南宋을 멸망시키고, 1279년에는 南宋 잔여 세력의 마지막 저항을 진압함으로써 이민족 정권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 전역을 지배하에 두었다. 至元 31년(1294) 쿠빌라이는 재위 35년, 향년 80세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6)
    宣慰司: 省과 州 사이에 위치하는 일종의 軍事에 편중하는 監司기구로서 대개 軍民의 사무를 관장한다. 그 장관은 宣慰使인데, 地方軍政의 최고장관이다. 宣慰司는 金朝 시기에 처음 출현했는데, 元朝는 전국에 널리 이를 설치했다. 明淸 시기에는 소수민족이 모여 사는 곳에만 두었으므로 그 수는 前代보다 감소하였다. 元 世祖 쿠빌라이는 모든 行中書省을 60개 宣慰司로 나누었고, 宣慰司 밑으로는 약 180개의 路를 두었다. 宣慰司에는 宣慰使(종2품) 3명과 宣慰司 同知(종3품) 1명, 副使(정4품) 1명과 經歷都事 등의 관직이 설치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7)
    당시 宣慰使로는 萬戶 綦公直을 임명하였다(『殊域周咨錄』 卷15).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원나라 세조, 世祖
지명
별실팔리(別失八里), 서역, 우전(于闐), 와랄(瓦剌), 살마아한, 화주(火州), 가욕관(嘉峪關), 언기(焉耆), 구자(龜玆)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파습백리(巴什伯里)의 지리와 이칭(異稱) 및 역사적 연혁에 관한 글 자료번호 : jo.k_0024_0332_009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