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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동이전

고구려왕 을불리(乙弗利)가 요동을 노략질함

[서]진에서 영가(307~312)의 난주 001
번역주 001)
영가의 난 : 지금의 중국 山西 지역에 있던 匈奴를 중심으로 劉淵이 漢을 세우고, 아들 劉聰이 진의 도읍 洛陽을 함락하여 서진을 무너뜨린 사건을 말한다. 난을 모면한 진의 일족은 南京에 도읍하여 東晋을 세웠고, 華北에서는 이른바 5호16국이 수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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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어나자, 선비 모용외(269~333)주 002
번역주 002)
慕容廆 : 前燕의 초대 왕으로 慕容皝의 부친이다. 선비 慕容部는 3세기 초반 이후 요하 유역에서 세력을 확장해 갔는데, 모용외는 서진의 遼西를 침략하였다가 패하자 서진에 귀부했고, 289년(太康 10)에 서진으로부터 鮮卑都督에 책봉되었다. 5호의 난 이후 모용외는 인재를 폭넓게 등용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하였고, 선비의 단부·우문부와 고구려의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前燕 건국의 기초를 이루었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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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창려[군]의 대극성주 003
번역주 003)
昌黎 大棘城 : 창려는 서진 시기 평주 관할 아래 있던 5개 군의 하나로 대극성은 현재의 遼寧省 錦州市 북쪽 경계에 소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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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점거하였다. [동진의] 원제(재위: 317~322)주 004
번역주 004)
元帝 : 사마예(원제)는 진의 황족으로 봉지가 낭야였던 탓에 8왕의 난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 화북에서 내려온 士族과 吳의 豪族을 회유, 세력을 확보해나갔다. 316년 진의 愍帝가 흉노의 劉曜에게 포로가 되자 晉王을 칭하였고, 이듬해 민제의 죽음이 전해지자 제위에 올라 東晋의 첫 황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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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모용외에게] 평주자사주 005
번역주 005)
平州刺史 : 평주는 조위에서 幽州의 동부를 분할해 처음으로 세운 행정단위이다. 서진이 274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현재 요령성 六股河 以東에서 遼河의 이서와 이동 지역을 관할하였다. 창려·요동·현도·낙랑·대방의 5군을 예하에 두었으며 치소는 襄平이었다. 영가의 난 이후 혼란상황 속에서 모용외의 세력이 커지자 평주자사 崔毖와 고구려·于文部·段部의 3국 연합군이 모용외를 공격하였으나 도리어 격파당하고 모용외의 선비세력이 평주 지역을 석권하게 되었다. 이에 동진 원제는 모용외를 평주자사로 삼아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공인해주었다. 이 문단은 진의 지배력이 약화된 이후 선비 모용부가 평주 지역을 차지하게 된 과정을 축약한 내용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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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제수하였다. 고구려왕 을불리(미천왕, 재위: 300~331)가 자주 요동을 노략질하였지만, [모용]외는 막을 수 없었다. [을]불리가 죽자, 아들 쇠(고국원왕, 재위: 331~371)주 006
번역주 006)
釗 : 원문은 ‘劉’이다.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즉위년조에는 ‘휘를 斯由라고 하고, 혹 劉라고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진서』·『위서』·『자치통감』 등에 모두 ‘釗’로 나오며, 釗가 사유의 合音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劉를 誤記로 본다(李丙燾,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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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이어서 왕위에 올랐다.

  • 번역주 001)
    영가의 난 : 지금의 중국 山西 지역에 있던 匈奴를 중심으로 劉淵이 漢을 세우고, 아들 劉聰이 진의 도읍 洛陽을 함락하여 서진을 무너뜨린 사건을 말한다. 난을 모면한 진의 일족은 南京에 도읍하여 東晋을 세웠고, 華北에서는 이른바 5호16국이 수립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慕容廆 : 前燕의 초대 왕으로 慕容皝의 부친이다. 선비 慕容部는 3세기 초반 이후 요하 유역에서 세력을 확장해 갔는데, 모용외는 서진의 遼西를 침략하였다가 패하자 서진에 귀부했고, 289년(太康 10)에 서진으로부터 鮮卑都督에 책봉되었다. 5호의 난 이후 모용외는 인재를 폭넓게 등용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하였고, 선비의 단부·우문부와 고구려의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前燕 건국의 기초를 이루었다고 평가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昌黎 大棘城 : 창려는 서진 시기 평주 관할 아래 있던 5개 군의 하나로 대극성은 현재의 遼寧省 錦州市 북쪽 경계에 소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元帝 : 사마예(원제)는 진의 황족으로 봉지가 낭야였던 탓에 8왕의 난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 화북에서 내려온 士族과 吳의 豪族을 회유, 세력을 확보해나갔다. 316년 진의 愍帝가 흉노의 劉曜에게 포로가 되자 晉王을 칭하였고, 이듬해 민제의 죽음이 전해지자 제위에 올라 東晋의 첫 황제가 되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5)
    平州刺史 : 평주는 조위에서 幽州의 동부를 분할해 처음으로 세운 행정단위이다. 서진이 274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현재 요령성 六股河 以東에서 遼河의 이서와 이동 지역을 관할하였다. 창려·요동·현도·낙랑·대방의 5군을 예하에 두었으며 치소는 襄平이었다. 영가의 난 이후 혼란상황 속에서 모용외의 세력이 커지자 평주자사 崔毖와 고구려·于文部·段部의 3국 연합군이 모용외를 공격하였으나 도리어 격파당하고 모용외의 선비세력이 평주 지역을 석권하게 되었다. 이에 동진 원제는 모용외를 평주자사로 삼아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공인해주었다. 이 문단은 진의 지배력이 약화된 이후 선비 모용부가 평주 지역을 차지하게 된 과정을 축약한 내용에 해당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6)
    釗 : 원문은 ‘劉’이다.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즉위년조에는 ‘휘를 斯由라고 하고, 혹 劉라고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진서』·『위서』·『자치통감』 등에 모두 ‘釗’로 나오며, 釗가 사유의 合音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劉를 誤記로 본다(李丙燾, 1996).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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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왕 을불리(乙弗利)가 요동을 노략질함 자료번호 : jd.k_0008_0054_001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