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읍전투 이후 흉노와의 지속된 싸움 뒤에 한나라가 하남 땅을 빼앗고 황하를 따라 방비를 구축함
마읍의 전투가 있은 지 5년주 001후 가을주 002, 한나라에서는 네 장군주 003에게 각각 만 기씩을 주어 관시 부근의 흉노를 치게 했다. 장군 위청(衛靑)
주 004
각주 004)
은 상곡[군]
주 005을 나와 농성(蘢城)
주 006에 이르러 흉노의 수급과 포로 7백 인을 얻었다. 공손하(公孫賀)
주 007衛青(? ~ 전106) : 字가 仲卿이고 河東 平陽(지금의 山西省 臨汾市 서남쪽) 사람이다. 부친의 이름은 鄭季인데 그가 관리 시절에 平陽侯의 집에서 일하고 있다가 平陽侯의 비첩 위온과 밀통하여 낳은 아들이다. 그의 이복누이 衛子가 平陽公主(孝武帝의 누나, 平陽侯의 夫人)를 모시다가 武帝의 총애를 받게 되면서 太中大夫(궁중고문관)가 되었다. 元光 5년(전127) 車騎將軍으로 匈奴를 공격한 이래 元朔 元年(전128)에는 河南 땅을 되찾아 朔方軍을 설치함으로써 長平侯가 되었다. 그 이후 이어진 匈奴의 공세에 대응해 元朔 5년(전124) 봄에 다시 高闕에서 출정하여 匈奴의 右賢王을 격파하여 大將軍이 되었다. 그 이후에는 霍去病과 함께 大司馬가 되었다. 匈奴와의 계속된 전투에서 도합 7차례에 걸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史記』 권111 「衛將軍驃騎列傳」 : 2921 ~ 2939).
각주 007)
는 운중[군]
주 008을 나와 [흉노를 공격하였으나] 전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공손오(公孫敖)
주 009公孫賀 : 義渠(秦나라에게 망한 西戎의 하나) 출신으로 그의 조상은 匈奴이다. 아버지 渾邪는 景帝 때 平曲侯가 되었으나 죄를 지어 侯를 잃었다. 武帝가 太子 시절이었을 때 舍人이었다. 武帝가 즉위하자 8년에 太僕 자격으로 輕車將軍이 되어 馬邑에 주둔했다. 4년이 지나자 輕車將軍으로 雲中郡에 출격했다. 5년이 지나서 輕車將軍으로 大將軍을 따라 출격해 軍功을 쌓고 봉을 받아 南窌侯가 되었다. 1년이 지나 左將軍으로 재차 大將軍을 따라 定襄에서 출격했으나 군공은 없었다. 4년이 지나 酎禁에 걸려 侯를 잃었다. 8년이 지나서 浮沮將軍으로 五原에서 2천여 리를 진출했으나 군공은 없었다. 8년이 지나자 太僕에서 丞相이 되어 葛繹侯로 봉해졌다. 일곱 명의 장군 중 하나로 匈奴에 출격했지만 큰 功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侯가 되고 丞相이 되었다. 그의 아들 公孫敬聲이 陽石公主(孝武帝의 皇女)와 밀통하고 남을 저주한 죄로 일족이 몰살되어 후사도 끊어졌다(『史記』 권111 「衛將軍驃騎列傳」 : 2941 ~ 2)(주113) 참조).
각주 009)
는 대[군]을 나와 흉노에게 7천여 명주 010을 잃었다. 이광(李廣)
주 011公孫敖 : 義渠 출신의 장군이다. 그는 먼저 郎官으로 武帝를 섬겼다. 그는 衛靑을 구한 것으로 권세를 갖게 되었다. 武帝가 즉위한 지 12년에 騎將軍이 되어 代郡에서 출격했다. 사졸을 7천 명이나 잃어 참살될 뻔했으나 속전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5년이 지나 校尉로서 大將軍을 따라 출격해 군공을 세워 合騎侯가 되었다. 1년이 지나서 中將軍으로 大將軍을 따라 재차 定襄에서 출격했으나 군공은 없었다. 2년이 지나서 將軍으로 北地郡에 출격해 驃騎將軍과의 약속기일에 지체돼 참죄에 해당됐으나 속전을 내고 서민으로 다시 떨어졌다. 2년이 지나서 校尉로 大將軍을 따라 출격했지만 군공은 없었다. 14년이 지나 因杅將軍으로 受降城을 구축했다. 7년이 지나서 다시 因杅將軍으로 匈奴를 쳤으나 余吾水에 이르러 많은 사졸을 잃었다. 형리에게 인도되어 참형을 당했으나 거짓 죽은 체하다 도망했다. 5, 6년 동안 민간에 숨어 살다가 뒤에 발각되어 다시 옥에 갇혔다. 그의 아내가 지은 巫蠱罪로 일족이 몰살되었다(『史記』 권111 「衛將軍驃騎列傳」 : 2942).
각주 011)
은 안문[군]을 나와 흉노에게 패해 흉노가 [이]광을 사로잡았으나 [이]광이 이후에 도망쳐 돌아왔다. 한나라에서는 [공손]오와 [이]광을 잡아가두었는데, [공손]오와 [이]광은 속전을 내고 [풀려나] 서인이 되었다. 그 해 겨울에주 012흉노는 여러 차례주 013[한나라의] 변경을 노략질하였는데, 어양(漁陽)
주 014[의 피해가] 더욱 심했다. 한나라에서는 장군 한안국을 어양군에 주둔시켜 흉노[의 침입]에 대비케 했다. 그 이듬해 가을주 015흉노의 기병 2만이 한나라로 들어와 요서(遼西)주 016태수(太守)를 죽이고 2천여 명을 잡아갔다. 흉노는 또한 [변경 안으로] 들어와 어양 태수의 군대 천여 명을 패배시키고주 017
한나라 장군 [한]안국을 포위했다. [한]안국은 마침 천여 기의 병력마저 전멸하려 하였는데, 때마침 연(燕)
주 018의 [구원병이] 구하러 도착하자주 019흉노가 바로 물러났다. 흉노가 다시 안문[군]으로 들어와주 020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갔다.주 021이에 한나라에서는 장군 위청으로 하여금 3만 기를 거느리고 안문[군]에서, 이식(李息)
주 022은 대군에서 나아가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주 023[그 결과 흉노의] 수급과 포로 수천 명을주 024얻었다. 그 이듬해에 [위]청이 다시 운중[군]에서 나가 서쪽으로 농서에 이르러 흉노의 누번왕(樓煩王)과 백양왕(白羊王)을 하남(河南)에서 격파하여 흉노의 수급과 포로 수천과 소와 양 백여 만을 얻었다.주 025이에 한나라는 마침내 하남 땅을 빼앗아 삭방[군](朔方郡)
주 026을 [설치하고 성을] 쌓고 다시 옛날 진나라 장군 몽염이 구축했던 장성을 수리하여 황하를 따라 [방비를] 굳게 하였다.주 027
한나라는 또한 상곡[군]의 [북방에 흉노와] 가까운주 028현(縣)인 조양(造陽)
주 029땅을 버리듯이 흉노에게 내주었다. 이 해가 한의 원삭(元朔)주 0302년(전127)이었다.李廣 : 隴西 成紀(지금의 甘肅省 秦安縣) 사람으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남다른 弓術과 騎馬術로 뛰어난 장수로 이름을 떨쳤다. 文帝 14년(전166) 匈奴가 대거 蕭關을 침입하자 이를 막은 공으로 발탁되어 郎中(侍從)과 武騎常侍(侍從騎兵 武官)가 되었다. 景帝시기에 都尉가 되었다가 騎郞將(侍從騎兵隊長)으로 승진했다. 그 이후 吳楚七國의 난 시기에 驍騎都尉로서 공을 세웠으나 梁王한테서 將軍의 인수를 몰래 받은 것이 탄로나 개선한 뒤에도 상이 없었다. 이후 上谷郡(河北省 廷慶縣 일대) 태수로 인근을 전전하면서 匈奴와 전투를 벌였다. 이후 隴西, 北地, 右北平 등의 변방 太守를 지냈다. 그리고 武帝時期에는 馬邑 전투에서 驍騎將軍으로 匈奴 원정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잡혀 있다가 돌아와 참형을 면하고 庶人이 되었다. 이후 右北平郡 太守가 되어 匈奴를 방어하였다. 匈奴가 그를 飛將軍이라 부르고 감히 쳐들어오지 못하였다. 이후 元朔 6년(전123) 後衛軍의 將軍이 되어 大將軍 衛靑의 군대에 소속되었다. 定襄(山西省 大同市 北西)으로 나가 匈奴를 쳤다. 9년에는 郞中令으로 博望侯 張騫과 같이 출정했다가 패전하였다. 元狩 4년(전119)에 霍去病이 출정할 때 大將軍 衛靑을 따라 참전하였다가 자살했다. 청렴하여 상을 받으면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음식도 사졸들의 것과 똑같은 것을 먹었다. 그는 죽기까지 40여 년 동안 2천 석의 俸祿을 받는 신분이면서도 집에는 재산이 남지 않았다. 또한 일생 동안 재물에 관해서 말한 적도 신경을 쓴 적도 없었다고 한다(『史記』 권109 「李將軍列傳」 : 2867 ~ 2876).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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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4)
衛青(? ~ 전106) : 字가 仲卿이고 河東 平陽(지금의 山西省 臨汾市 서남쪽) 사람이다. 부친의 이름은 鄭季인데 그가 관리 시절에 平陽侯의 집에서 일하고 있다가 平陽侯의 비첩 위온과 밀통하여 낳은 아들이다. 그의 이복누이 衛子가 平陽公主(孝武帝의 누나, 平陽侯의 夫人)를 모시다가 武帝의 총애를 받게 되면서 太中大夫(궁중고문관)가 되었다. 元光 5년(전127) 車騎將軍으로 匈奴를 공격한 이래 元朔 元年(전128)에는 河南 땅을 되찾아 朔方軍을 설치함으로써 長平侯가 되었다. 그 이후 이어진 匈奴의 공세에 대응해 元朔 5년(전124) 봄에 다시 高闕에서 출정하여 匈奴의 右賢王을 격파하여 大將軍이 되었다. 그 이후에는 霍去病과 함께 大司馬가 되었다. 匈奴와의 계속된 전투에서 도합 7차례에 걸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史記』 권111 「衛將軍驃騎列傳」 : 2921 ~ 2939).
- 각주 005)
-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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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7)
公孫賀 : 義渠(秦나라에게 망한 西戎의 하나) 출신으로 그의 조상은 匈奴이다. 아버지 渾邪는 景帝 때 平曲侯가 되었으나 죄를 지어 侯를 잃었다. 武帝가 太子 시절이었을 때 舍人이었다. 武帝가 즉위하자 8년에 太僕 자격으로 輕車將軍이 되어 馬邑에 주둔했다. 4년이 지나자 輕車將軍으로 雲中郡에 출격했다. 5년이 지나서 輕車將軍으로 大將軍을 따라 출격해 軍功을 쌓고 봉을 받아 南窌侯가 되었다. 1년이 지나 左將軍으로 재차 大將軍을 따라 定襄에서 출격했으나 군공은 없었다. 4년이 지나 酎禁에 걸려 侯를 잃었다. 8년이 지나서 浮沮將軍으로 五原에서 2천여 리를 진출했으나 군공은 없었다. 8년이 지나자 太僕에서 丞相이 되어 葛繹侯로 봉해졌다. 일곱 명의 장군 중 하나로 匈奴에 출격했지만 큰 功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侯가 되고 丞相이 되었다. 그의 아들 公孫敬聲이 陽石公主(孝武帝의 皇女)와 밀통하고 남을 저주한 죄로 일족이 몰살되어 후사도 끊어졌다(『史記』 권111 「衛將軍驃騎列傳」 : 2941 ~ 2)(주113) 참조).
- 각주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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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9)
公孫敖 : 義渠 출신의 장군이다. 그는 먼저 郎官으로 武帝를 섬겼다. 그는 衛靑을 구한 것으로 권세를 갖게 되었다. 武帝가 즉위한 지 12년에 騎將軍이 되어 代郡에서 출격했다. 사졸을 7천 명이나 잃어 참살될 뻔했으나 속전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5년이 지나 校尉로서 大將軍을 따라 출격해 군공을 세워 合騎侯가 되었다. 1년이 지나서 中將軍으로 大將軍을 따라 재차 定襄에서 출격했으나 군공은 없었다. 2년이 지나서 將軍으로 北地郡에 출격해 驃騎將軍과의 약속기일에 지체돼 참죄에 해당됐으나 속전을 내고 서민으로 다시 떨어졌다. 2년이 지나서 校尉로 大將軍을 따라 출격했지만 군공은 없었다. 14년이 지나 因杅將軍으로 受降城을 구축했다. 7년이 지나서 다시 因杅將軍으로 匈奴를 쳤으나 余吾水에 이르러 많은 사졸을 잃었다. 형리에게 인도되어 참형을 당했으나 거짓 죽은 체하다 도망했다. 5, 6년 동안 민간에 숨어 살다가 뒤에 발각되어 다시 옥에 갇혔다. 그의 아내가 지은 巫蠱罪로 일족이 몰살되었다(『史記』 권111 「衛將軍驃騎列傳」 : 2942).
- 각주 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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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1)
李廣 : 隴西 成紀(지금의 甘肅省 秦安縣) 사람으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남다른 弓術과 騎馬術로 뛰어난 장수로 이름을 떨쳤다. 文帝 14년(전166) 匈奴가 대거 蕭關을 침입하자 이를 막은 공으로 발탁되어 郎中(侍從)과 武騎常侍(侍從騎兵 武官)가 되었다. 景帝시기에 都尉가 되었다가 騎郞將(侍從騎兵隊長)으로 승진했다. 그 이후 吳楚七國의 난 시기에 驍騎都尉로서 공을 세웠으나 梁王한테서 將軍의 인수를 몰래 받은 것이 탄로나 개선한 뒤에도 상이 없었다. 이후 上谷郡(河北省 廷慶縣 일대) 태수로 인근을 전전하면서 匈奴와 전투를 벌였다. 이후 隴西, 北地, 右北平 등의 변방 太守를 지냈다. 그리고 武帝時期에는 馬邑 전투에서 驍騎將軍으로 匈奴 원정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잡혀 있다가 돌아와 참형을 면하고 庶人이 되었다. 이후 右北平郡 太守가 되어 匈奴를 방어하였다. 匈奴가 그를 飛將軍이라 부르고 감히 쳐들어오지 못하였다. 이후 元朔 6년(전123) 後衛軍의 將軍이 되어 大將軍 衛靑의 군대에 소속되었다. 定襄(山西省 大同市 北西)으로 나가 匈奴를 쳤다. 9년에는 郞中令으로 博望侯 張騫과 같이 출정했다가 패전하였다. 元狩 4년(전119)에 霍去病이 출정할 때 大將軍 衛靑을 따라 참전하였다가 자살했다. 청렴하여 상을 받으면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음식도 사졸들의 것과 똑같은 것을 먹었다. 그는 죽기까지 40여 년 동안 2천 석의 俸祿을 받는 신분이면서도 집에는 재산이 남지 않았다. 또한 일생 동안 재물에 관해서 말한 적도 신경을 쓴 적도 없었다고 한다(『史記』 권109 「李將軍列傳」 : 2867 ~ 2876).
- 각주 012)
- 각주 013)
- 각주 014)
- 각주 015)
- 각주 016)
- 각주 017)
- 각주 018)
- 각주 019)
- 각주 020)
- 각주 021)
- 각주 022)
- 각주 023)
- 각주 024)
- 각주 025)
- 각주 026)
- 각주 027)
- 각주 028)
- 각주 029)
- 각주 030)
색인어
- 이름
- 위청(衛靑), 공손하(公孫賀), 공손오(公孫敖), 이광(李廣), [이]광, [이]광, [공손]오, [이]광, [공손]오, [이]광, 한안국, [한]안국, [한]안국, 위청, 이식(李息), [위]청, 몽염
- 지명
- 마읍, 한나라, 상곡[군], 농성(蘢城), 운중[군], 대[군], 안문[군], 한나라, 한나라, 어양(漁陽), 한나라, 어양군, 한나라, 한나라, 연(燕), 안문[군], 한나라, 안문[군], 대군, 운중[군], 농서, 하남(河南), 한나라, 하남, 삭방[군](朔方郡), 진나라, 황하, 한나라, 상곡[군], 조양(造陽),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