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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동잠(棟蠶)이 반란을 일으킨 뒤 유상(劉尙)이 이들을 격파하자 모두 평정됨

  • 국가
    전왕(滇王)
건무(建武) 18년(42, 光武帝) 이족(夷族)의 거수(渠帥) 동잠고복(姑復) 접유(楪楡) 농동(梇棟) 연연(連然) 전지(滇池) 건령(建伶) 주 001
각주 001)
姑復은 縣名으로 越雟郡에, 나머지는 모두 益州郡에 속한 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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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곤명(昆明) 제종족과 함께 반역을 일으켜 장리(長吏)를 살해하였다. 익주 태수 번승(繁勝)은 이들과 싸웠으나 패하고 퇴각하여 주제(朱提) 주 002
각주 002)
朱提: 縣名으로 犍爲郡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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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자신을 보존하였다. 19년(43) 무위장군(武威將軍) 유상(劉尙)을 보내 광한(廣漢) 건위(犍爲) 촉군(蜀郡)의 인민과 주제이(朱提夷) 도합 13,000명을 징발하여 진격하였다. 유상의 군대가 노수(瀘水) 주 003
각주 003)
瀘水: 李賢注에서는 “瀘水는 일명 ‘若水’로 旄牛의 변경에서 발원하여 朱提를 지나 僰道에 이르러 장강으로 들어가는데, 오늘날 嶲州의 남쪽에 있다. 다만, 유해한 기운이 있어 3월과 4월에 이곳을 건너면 반드시 죽게 된다. 5월 이후에 건너는 자들은 무해하다. 그러므로 공명은 출사표에서 5월에 瀘水를 건넜다고 하였으니 그 어렵고 힘든 상황을 언급한 것이다(瀘水一名若水, 出旄牛徼外, 經朱提至僰道入江, 在今雟州南. 特有瘴氣, 三月四月經之必死. 五月以後, 行者得無害. 故諸葛[亮]表云「五月度瀘」, 言其艱苦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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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건너 익주 경내로 들어오자, 여러 이(夷)들은 대군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진지를 버리고 도망하였고, 유상은 아녀자나 늙고 병든 사람들, 그리고 곡식과 가축을 획득하였다. 20년(44) 군사를 계속 진격하여 동잠 등과 수개월간 계속 전투를 벌려 모두 격파하였다. 이듬해 정월 불위(不韋)주 004
각주 004)
不韋: 李賢注에서는 孫盛의 『蜀譜』를 인용하여 “처음에 秦나라가 呂不韋의 자제와 종족들을 蜀으로 이주시켰고, 한무제가 서남이 지역을 개척하여 군현을 설치하면서 呂氏들을 이주시켜 이곳을 충실하게 하였으므로 不韋縣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고, 『華陽國志』를 인용하여 “武帝가 博南을 개통하고 不韋縣을 설치하였는데, 南越에서 재상 노릇을 하던 呂嘉의 자손과 종족들을 이주시켜 그 지역을 근거로 하여 살게 하였다. 그러므로 不韋라고 명명하여 선조의 악행을 드러낸 것이다.”라고 하였다(孫盛蜀譜曰: “初, 秦徙呂不韋子弟宗族於蜀, 漢武帝開西南夷, 置郡縣, 徙呂氏以充之, 因置不韋縣.」 華陽國志曰「武帝通博南, 置不韋縣, 徙南越相呂嘉子孫宗族資之. 因名不韋, 以章其先人之惡行”也.).孫盛은 東晋代 인물로서 『魏氏春秋』 『晋陽秋』와 『孫盛集』을 남기고 있을 뿐, 『蜀譜』에 대한 언급이 『後漢書』의 이 부분의 李賢注에서 유일하게 언급되고 있다. 『魏氏春秋』에 포함된 부분일 가능성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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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추격하여 동잠의 장수를 참수하고 모두 7,000여 명을 베었으며, 생구(生口) 5,700명, 말 3,000필, 소와 양 30,000여 두를 획득하자, 여러 이(夷)들은 모두 평정되었다.

  • 각주 001)
    姑復은 縣名으로 越雟郡에, 나머지는 모두 益州郡에 속한 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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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朱提: 縣名으로 犍爲郡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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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瀘水: 李賢注에서는 “瀘水는 일명 ‘若水’로 旄牛의 변경에서 발원하여 朱提를 지나 僰道에 이르러 장강으로 들어가는데, 오늘날 嶲州의 남쪽에 있다. 다만, 유해한 기운이 있어 3월과 4월에 이곳을 건너면 반드시 죽게 된다. 5월 이후에 건너는 자들은 무해하다. 그러므로 공명은 출사표에서 5월에 瀘水를 건넜다고 하였으니 그 어렵고 힘든 상황을 언급한 것이다(瀘水一名若水, 出旄牛徼外, 經朱提至僰道入江, 在今雟州南. 特有瘴氣, 三月四月經之必死. 五月以後, 行者得無害. 故諸葛[亮]表云「五月度瀘」, 言其艱苦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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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不韋: 李賢注에서는 孫盛의 『蜀譜』를 인용하여 “처음에 秦나라가 呂不韋의 자제와 종족들을 蜀으로 이주시켰고, 한무제가 서남이 지역을 개척하여 군현을 설치하면서 呂氏들을 이주시켜 이곳을 충실하게 하였으므로 不韋縣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고, 『華陽國志』를 인용하여 “武帝가 博南을 개통하고 不韋縣을 설치하였는데, 南越에서 재상 노릇을 하던 呂嘉의 자손과 종족들을 이주시켜 그 지역을 근거로 하여 살게 하였다. 그러므로 不韋라고 명명하여 선조의 악행을 드러낸 것이다.”라고 하였다(孫盛蜀譜曰: “初, 秦徙呂不韋子弟宗族於蜀, 漢武帝開西南夷, 置郡縣, 徙呂氏以充之, 因置不韋縣.」 華陽國志曰「武帝通博南, 置不韋縣, 徙南越相呂嘉子孫宗族資之. 因名不韋, 以章其先人之惡行”也.).孫盛은 東晋代 인물로서 『魏氏春秋』 『晋陽秋』와 『孫盛集』을 남기고 있을 뿐, 『蜀譜』에 대한 언급이 『後漢書』의 이 부분의 李賢注에서 유일하게 언급되고 있다. 『魏氏春秋』에 포함된 부분일 가능성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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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光武帝, 동잠, 번승(繁勝), 유상(劉尙), 유상, 유상, 동잠, 동잠
지명
고복(姑復), 접유(楪楡), 농동(梇棟), 연연(連然), 전지(滇池), 건령(建伶), 주제(朱提), 광한(廣漢), 건위(犍爲), 촉군(蜀郡), 노수(瀘水), 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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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잠(棟蠶)이 반란을 일으킨 뒤 유상(劉尙)이 이들을 격파하자 모두 평정됨 자료번호 : jo.k_0003_0116_007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