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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만(長沙蠻)과 무릉만(武陵蠻)의 기원

  • 국가
    남만(南蠻)
옛날 고신씨(高辛氏) 주 001
각주 001)
高辛: 중국의 전설적인 五帝 중 네 번째 帝嚳. 高辛氏로 불리는 경우는 帝嚳 외에 帝摯가 있는데, 帝嚳의 아들이다. 史書에 ‘高辛氏’라고 하는 경우 대체로 帝嚳를 가리킨다. 帝嚳의 姓은 姬, 이름은 俊, 祖父는 玄囂, 父親은 蟜極으로, 선왕 顓頊은 그의 伯父로 알려져 있다. 古文獻에는 ‘帝俊’으로 칭해지기도 하였는데, 『山海經』 「大荒南經」에는 帝俊은 中容, 晏龍, 黑齒, 季釐 등의 子族이 있다고 되어 있다. 전설상 그가 共主로 추대되자 지금의 河南省 偃師市로 알려진 亳을 도읍으로 木德의 帝가 되었다고 한다. 이에 상당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던 共工氏가 嚳이 帝에 오른 것에 불만을 품었는데, 울분에 싸여 머리를 不周山에 부딪혀 天柱가 부러지면서 大地가 東南으로 기울게 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共工氏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帝嚳은 火正 黎로 하여금 共工의 반란을 평정하도록 하였지만, 黎는 실패하고 돌아왔다. 帝嚳은 黎를 처형하고 동생 吳回를 火正으로 임명하여 다시 共工氏를 토벌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共工氏를 처형하였다고 한다(『史記』 卷40, 「楚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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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에 견융(犬戎)주 002
각주 002)
犬戎: 중국 고대의 種族名으로 나타나는데, ‘獫狁’ 혹은 ‘西戎’이라 칭하기도 한다. 西周 중기부터 현재의 陝西, 甘肅 일대를 근거로 출현하지만 주왕실에 의해 제압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周王室이 쇠약해진 共王, 懿王, 孝王, 夷王시기에는 주왕실의 입장에서 겨우 방어하는 상황이었다. 周宣王시기 尹吉甫, 南仲 등을 파견하여 獫狁을 정벌하였지만, 宣王 말기 이후에는 오히려 獫狁의 활약이 두드러져 幽王시기에 犬戎은 申國과 繒國을 도와 周王室을 공격하여 멸망시킨다. 이처럼 犬戎은 주로 西北의 종족으로, 이후 나타나는 西南夷나 蠻과의 관련성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犬戎이 구체적인 종족명 외에 중국의 古文獻에서 異民族을 비하하는 칭호로 사용된 경우도 많은데, 南蠻과 관련한 犬戎의 활동에 대해 구체적인 정황은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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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침범이 있었다. 제(帝)주 003
각주 003)
帝: 秦始皇 이래 漢代에서는 천하를 통치하는 군주에 대한 칭호로 쓰이게 되는데(『史記』 「秦始皇本紀」, “秦故王國, 始皇君天下, 故稱帝.”; 『說文解字』 “帝, 諦也. 王天下之號也.”), 이와 함께 後漢代 이후 道家類 서적에서는 ‘天神’, ‘上帝’, ‘天帝’ 등 神的 존재에 대한 칭호에도 쓰이고 있었다. 史書의 역사적 표현법으로는 三代 때에 ‘帝堯’, ‘帝乙’ 등 죽은 군주에 대한 칭호로 사용되고 있었다(『禮記』 「曲禮」上, “天王登假, 措之廟, 立之圭, 曰帝.”). 甲骨文에서 주로 ‘禘’와 통용되어 제사의 대상으로 쓰이고 있는 것을 보면, 殷代에는 죽은 군주에 대한 칭호로 제사의 대상으로 나타난 관념임이 분명하다. 이것이 秦代에 현실적인 군주에 대한 직접적인 칭호로 확대되고, 한편으로는 제사의 대상인 神的 관념이 별도로 확대되어 도교적인 표현법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즉, 帝嚳시기에는 당시의 군주에 대한 칭호로 ‘帝’가 직접 사용된 것이 아니었고, 진한시대에 당시의 개념에 근거하여 殷代 이전의 성왕적 군주를 칭하는 편의적인 표현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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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그 침략성과 포악함이 걱정이 되어 정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그래서 천하에 두루 인물을 모집하였는데, 견융의 장수인 오장군(吳將軍)주 004
각주 004)
吳將軍에 대한 일화는 『後漢書』 이전에는 晋代에 저술된 『搜神記』에 처음 나타난다. 그러나 현전하는 『搜神記』는 일실되었다가 唐代 다시 편집되었기 때문에, 『後漢書』와의 선후관계는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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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머리를 포획한 자에게 황금 1,000일(鎰),주 005
각주 005)
鎰: 중량의 단위로서 20兩 혹은 24兩에 해당하는데, 戰國末 이후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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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0가(家)주 006
각주 006)
家: 秦漢時代 夫婦 단위의 가족관계를 중심으로 국가권력에 의해 통치 대상의 단위로 설정된 ‘戶’와는 달리 보다 큰 범위로 ‘家門’ 혹은 ‘宗族’을 의미하는 말이다. 戰國末 戶의 지배체제가 성립되어 가기 이전에는 강한 결집력을 가진 정치 경제 그리고 생활공동체의 의미를 가졌다가, 秦漢시대에는 법적 구속력은 없이 단순히 심정적 일체감을 중심으로 정치 사회생활 방면에서 동질성을 유지하는 정도의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高辛氏시대의 관념으로 본다면 ‘家’는 거의 소규모 부족 단위와 가까운 것으로, 帝에 의해 ‘萬家’를 사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개념이 아니다. ‘邑’은 周代에는 侯國, 혹은 先君宗廟가 있는 都와 비교하여 宗廟가 없는 취락을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서 ‘家’는 사실상 ‘戶’ 정도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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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읍(邑)을 상으로 주고,주 007
각주 007)
전체적으로 포상의 내용이 당시의 시대상황과 맞지 않은데, 唐代 杜佑가 이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通典』 卷187, 「邊防」3, 「南蠻」上, “按黃金周以前爲斤, 秦以二十兩爲鎰, 三代以前分土, 自秦漢分人. 又周末始有將軍之官. 其吳姓宜自周命氏. 曄皆以爲高辛之代, 何不詳之甚!(살피건대, 黃金은 周 이전에는 斤을 사용하였는데, 秦代 20兩을 鎰로 삼았다. 三代 이전에는 토지를 나누어 주었고, 秦漢時代 때부터 인민을 나누어 주었다. 또, 周末에 비로소 將軍의 관직이 나타났다. 吳氏 姓은 마땅히 周왕실로부터 명명된 氏名이다. 范曄은 이를 모두 高辛氏시대라고 하였으니. 그 치밀하지 못한 것이 어찌나 심한지!).”실제 같은 고사가 실려 있는 『搜神記』에는 “贈金千斤, 封邑萬戶”라고 하여 중량의 단위는 시대상황에 더 가깝게 표현되어 있고, 封邑은 ‘戶’로 하여 보다 현실적으로 파악하였다. 『玄中記』에서는 ‘封三百戶’라고 하여 보다 더 현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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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린 딸을 처로 삼게 하여 주겠다고 하였다. 당시 제가 기르는 개가 있었는데, 그 털이 오색으로 빛나 이름이 ‘반호(槃瓠)’주 008
각주 008)
槃瓠와 관련된 고사는 출처에 따라 내용에 약간씩 차이가 있다. 李賢注에 인용된 『魏略』에서는 槃瓠의 출생에 관해 다른 서술하고 있다. 高辛씨는 老婦가 있어 王室에서 살았다. 귓병이 들었는데, 후벼서 긁어내니 누에고치 같은 것이 나왔다. 부인이 단지에 넣어 소반으로 덮어 놓으니, 잠시 후에 개로 변하였는데, 무늬가 오색이라 槃瓠라고 이름하였다. (“魏略曰: “高辛氏有老婦, 居(正)[王]室, 得耳疾, 挑之, 乃得物大如繭. 婦人盛瓠中, 覆之以槃, 俄頃化爲犬, 其文五色, 因名槃瓠.”)이에 비해 『藝文類聚』에 인용된 『玄中記』에서는 ‘槃護’로 표기되면서 高辛氏와의 관계에 대한 또다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玄中記』에 이르기를, 狗封氏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高辛氏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시집을 가지 못하였다. 犬戎이 난을 일으키자, 帝는 이를 토벌하는 자에게 아름다운 딸을 처로 삼게 하고 300戶를 봉해 주겠다고 하였다. 帝는 槃護라고 불리는 개가 있었는데, 3개월이 지나자 犬戎을 죽여 머리를 가져왔다. 帝는 [약속을 어기면] 백성을 가르칠 수 없다고 하여 딸을 [槃護의] 처로 삼았다. 會稽에서 東南으로 2만 1천리를 흘러가면 바다 가운데 토지를 얻을 수 있는데, 사방 3,000里의 땅을 봉하였다. 아들을 낳으니 개가 되었고, 딸을 낳으니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다. (『藝文類聚』, 卷94, 「獸部」中 〈狗〉, “玄中記曰: 狗封氏者. 高辛氏有美女, 未嫁. 犬戎爲亂, 帝曰: 有討之者, 妻以美女, 封三百戶. 帝之狗名槃護. 三月而殺犬戎之首來. 帝以爲不可訓民. 乃妻以女. 流之會稽東南二萬一千里. 得海中土. 方三千里而封之. 生男爲狗. 生女爲美女.”) 이야기의 전체적인 구성은 『後漢書』와 비슷하지만, 내용이 비교적 간략하고, 특히 槃護가 高辛氏의 딸을 거느리고 山谷이 아니라 會稽 밖의 바다 가운데 섬으로 갔다고 한 점이 큰 차이이다.한편, 『搜神記』 卷14에도 槃瓠에 관한 고사가 실려 있는데, 槃瓠의 출생에 관해 『魏略』과 유사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나머지의 문투와 내용은 『後漢書』와 매우 유사한데, 부분적으로 표현이 더 상세하다. 『魏略』은 曹魏시 魚豢, 『玄中記』는 晉 郭璞, 『搜神記』는 東晉시 干寶가 撰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槃瓠의 출생에 관한 『魏略』의 고사와 高辛氏시기 槃瓠의 활동에 관한 『玄中記』의 이야기가 합해져 『搜神記』의 기록이 이루어지고, 劉宋代 范曄은 이를 轉載하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원래의 『搜神記』가 亡佚되고 현행본은 후대에 보충하여 다시 쓰였다는 사실과 『搜神記』의 내용과 표현이 『後漢書』에 비해 상세하고 구체적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현행본 『搜神記』의 내용은 후대 『後漢書』를 참조하여 첨가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玄中記』와 『搜神記』는 역사서라기보다 魏晋南北朝시에 유행하였던 志怪小說類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러한 내용이 史書에 포함된 것에 대해 唐代 杜佑는 『通典』에서 이를 전재하면서 그 근거가 없으며 ‘放誕不經’하다고 비판하고 있다(『通典』 卷187, 「邊防」3 『南蠻』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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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명령을 내리고 난 후에 반호가 사람의 머리를 물고 대궐 아래에 이르렀다. 여러 신하들이 괴이하게 여겨 살펴보니 오장군의 머리였다. 제는 기뻐하였지만, 반호에게 딸을 처로 줄 수도 없고 봉작(封爵)을 내릴 방법도 없어, 포상할 것을 논의하였으나 마땅한 바를 찾지 못하였다. 딸이 이 말을 듣고 제황(帝皇)주 009
각주 009)
帝皇: 천하를 직접 지배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秦代에 처음 ‘皇帝’의 관념이 나타난 이후의 개념으로, 漢代 이후 자주 쓰였다. 역시 고대의 실제 쓰여진 개념이 아니라 『後漢書』 편찬시의 관념으로 나타난 칭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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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령을 내린 것은 신의에 어긋나서는 안된다고 하여 그대로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제는 할 수 없이 딸을 반호의 배필로 삼았다. 반호는 딸을 얻자, 업고 달려 남산(南山)주 010
각주 010)
南山: 李賢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금 辰州 盧溪縣 서부에 武山이 있다. 黃閔의 『武陵記』에 이르길, “산이 높아 가히 만린이 된다. 산 중턱에 槃瓠石室이 있는데, 가히 수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가운데에 石床이 있는데, 槃瓠의 行蹟이다.”라고 되어 있다. 생각컨대, 山窟 앞에 石羊과 石獸가 있고, 기이한 古蹟이 더 많다. 望石窟은 크기가 3간의 집과 같은데, 멀리서 보면 하나의 돌이 개의 형상이다. 蠻의 풍속으로 계속 전해 오는데, 槃瓠의 像이라고 한다(今辰州盧溪縣西有武山. 黃閔武陵記曰: “山高可萬仞. 山半有槃瓠石室, 可容數萬人. 中有石床, 槃瓠行跡.” 今案: 山窟前有石羊·石獸, 古跡奇異尤多. 望石窟大如三閒屋, 遙見一石仍似狗形, 蠻俗相傳, 云是槃瓠像也.). 盧溪縣은 현재 湖南省 盧溪縣 武溪鎭으로 縣內에 巫水가 지나고 있다. 『武陵記』는 현재 전해 오지 않는다. 다만, 『後漢書』 李賢의 注와 『通典』에서 杜佑 自註, 『通志』 본문 등에서 한두 군데 인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北宋初까지는 일부나마 전해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南方地域의 山水와 植物에 관한 것으로 보아 武陵의 地理志인 것으로 보인다. 黃閔은 『隋書』 「經籍志」에 瑩陽山水를 서술한 『神壤記』를 찬했다는 기록이 나타나는데, 달리 그의 이력은 확인되지 않는다. ‘南山’에 대해 杜佑의 『通典』 自註에서 “國의 남쪽에 있는데, 五溪의 中山이다.(在國之南, 卽五溪之中山)”라고 하였다. 五溪는 『水經注』에 의하면 武陵縣의 雄溪, 樠溪, 酉溪, 潕溪, 辰溪,를 가리키는데, 이곳은 蠻夷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이들을 ‘五溪蠻’으로 부른다고 한다. 사료에 따라 雄溪, 蒲溪, 酉溪, 沅溪, 辰溪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현재 湖南省 武陵縣의 지역에 위치한다. 安徽省 九華山지역에도 蠻夷가 살고 있는 五溪가 있는데, 서로 별개의 지역이다. 湖南省 五溪는 현재 주로 苗族들이 거주하고, 安徽省에는 侗族, 苗族, 瑶族, 土家族 등이 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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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들어가 석실 안에 머물렀다. 머문 곳은 험하고 외따로 떨어져서 인적이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그 딸은 옷을 벗어 버리고 복감(僕鑒)식으로 머리를 묶고 독력(獨力)의 옷을 입었다.주 011
각주 011)
‘僕鑒’과 ‘獨力’: 李賢은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으며, 그 당시 유통본에 ‘鑒’이 ‘竪’로 되어 있는 것이 있는데, 억지로 견강부회한 것이라고 하였다(僕鑒, 獨力, 皆未詳. 流俗本或有改 ‘鑒’字爲 ‘豎’者, 妄穿鑿也. 結音髻.).‘僕鑒’과 ‘獨力’은 李賢의 주석 이래 그 의미는 파악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최근 覃聖敏은 壯族語를 통하여 그 의미를 추적하였다. 槃瓠는 현대의 瑤族의 祖先으로 알려져 槃瓠와 관련된 문제는 瑤族語를 통하여 그 의미를 추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覃聖敏은 『後漢書』에 나타나는 南蠻之地는 古代 越人의 활동지역으로 古代越語가 사용된 것으로 파악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古代越語는 현대 狀族語로 계승되었다는 기존의 연구를 근거로, ‘僕鑒’과 ‘獨力’도 現代 狀族語의 발음을 통하여 유추하였다. 이에 따라 ‘僕鑒’의 ‘鑒’은 狀族語로 ‘gam’, 즉 ‘岩洞’의 의미이고, ‘僕’은 ‘布’와 마찬가지로 狀族語에서 ‘bu’로 발음되는 人稱冠詞로 파악하였다. 그래서 ‘僕鑒’은 ‘동굴 속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獨力’에서 ‘獨’은 고대 사서에서 가끔 나타나는 ‘都’와 마찬가지로 狀族語에서 ‘du’로 발음되는 人稱冠詞이고, ‘力’은 狀族語에서 ‘lek’으로 발음되면서 ‘어린아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추정하였다(覃聖敏 1984).이에 따르면 “爲僕鑒之結, 著獨力之衣”은 “동굴에서 사는 사람들이 하는 모양으로 머리를 묽고, 어린애와 같은 (蠻夷의 짧은) 옷을 입었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전체적인 문맥은 보다 분명해진다고 할 수 있는데, 언어학적 기원과 계승의 문제가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고, 단어 역시 발음에 의한 추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유사한 예가 확인되기 전에는 확정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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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는 슬퍼하며 딸을 그리워하여 사자(使者)를 보내 찾아보도록 하였다. 그러나 번번이 비바람이 불고 어두워져 사자는 더 나아가지 못하였다. 3년이 흘러 자식을 12명 낳으니, 6남 6녀였다. 반호가 죽고 난 후, [자식들이] 서로 부부가 되어 나무 껍질로 옷감을 짜고 풀의 열매로 염색을 하였는데, 오색의 의복을 좋아하고, 옷을 재봉할 때 모두 꼬리를 단 모습을 하였다. 그들의 어미가 후에 돌아와 그간의 상황을 제에게 아뢰었는데, 이에 여러 자식들을 맞이하여 불러들였다. 의상은 다양한 색상으로 찬란하였고, 언어는 발음이 복잡하고 특이하여 구별되지 않았고[侏離],주 012
각주 012)
侏離: 李賢은 “蠻夷의 말소리이다.”라고 하였는데(侏離, 蠻夷語聲也.), ‘侏離’는 蠻夷 언어의 발음이 잘 구분되지 않아 알아듣기 힘든 것을 설명하는 의성어로서, ‘朱離’, ‘兜離’라고도 쓴다. 한편으로는 西南夷의 음악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周禮』 「春官」 〈鞮鞻氏〉, “掌四夷之樂” 賈公彦 疏 『孝經緯』 “西夷之樂曰侏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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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잘 깊은 산계곡에 들어갔으며 넓고 평평한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제는 그들의 뜻을 따라 명산과 넓은 늪지를 사여하였다. 그 후손들이 점점 번성하였는데, ‘만이(蠻夷)’라고 불렸다. 겉으로는 어리석어 보였으나 실제는 간교하였고, 토착하여 사는 것을 좋아하면서 옛 것을 중시하였다. 선대의 아비는 공이 있고 어미는 제의 딸이라 하여, 농사짓거나 상거래하면서도 관문과 교량의 통행허가증이나 조(租)와 부(賦) 등의 세금이 없었다.주 013
각주 013)
李賢은 특별히 우대하였기 때문에 부역을 면제하였다고 하였다. 또, 『刑州記』를 인용하여 그 위치를 밝히고 있는데, “沅陵縣의 酉溪 입구에 上就, 武陽 2鄕이 있다. 오직 이들만이 槃瓠의 자손으로 狗種이다. 2鄕은 武溪의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優寵之, 故蠲其賦役也. 荊州記曰: “沅陵縣居酉口, 有上就·武陽二鄕, 唯此是槃瓠子孫, 狗種也. 二鄕在武溪之北”). ‘狗種’이라는 표현은 槃瓠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舊唐書』에서는 吐蕃에 대해 ‘狗種’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舊唐書』 卷194上, 「突厥」上, 「毗伽可汗」), 개를 토템으로 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唐以前까지 나타난 『荊州記』는 3종이 확인된다. 晋代 中書郎 范汪과 劉宋 盛弘之, 역시 劉宋代 郭仲產의 저술이다. 『史記集解』에 范汪 『荊州記』가 인용되고 있는데, 范汪은 『後漢書』 찬자인 范曄의 조상으로서 그의 이력이나 이후 史書에서는 그가 저술하였다는 『荊州記』는 확인되지 않는다. 范汪은 東晋初 고위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禮學과 관련된 활동을 많이 한 인물로서 『隋書』 「經籍志」에는 『尙書大事』 『范氏家傳』 등을 저술하였던 인물로 『史記集解』의 오류로 보인다. 郭仲産은 『述異記』에서 劉宋 元嘉, 孝建 연간에 생존하였던 인물로 확인할 수 있는데 『秦州記』, 『湘州記』 등도 저술하였고, 『荊州記』는 『新唐書』 「藝文志」에 『郭仲産荊州記』가 기재되어 있다. 『後漢書』 李賢注에는 『秦州記』가 한 차례 인용되어 있다. 盛弘之는 그의 이력이 확인되지 않고, 오직 『隋書』 「經籍志」에 『荊州記』가 등재되어 있는데, 여기에 “宋 臨川王 侍郞 盛弘之撰”이라고 기록된 것이 그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그의 『荊州記』는 『史記正義』, 『後漢書』 李賢注에 수차 “盛弘之荊州記曰”로 인용되어 있다. 李賢注에서 단순히 ‘荊州記曰’로 되어 있는 부분도 盛弘之의 『荊州記』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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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마다 군장이 있었는데 모두 인수(印綏)가 사여되었고, 관(冠)은 수달의 가죽으로 되어 있었다. 부족의 우두머리를 ‘정부(精夫)’주 014
각주 014)
精夫: 일정한 지역 단위로 구분되는 蠻部族 휘하의 소규모 집단 우두머리를 가리킨다. 『後漢書』「南蠻西南夷傳」에서는 “零陽蠻 五里精夫”, “武陵蠻 精夫相單程”등의 표현이 나타나는데, 이에 관한 기록은 오직 『後漢書』와 이를 인용한 『通典』에서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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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하였는데, 서로 칭하기를 ‘앙도(姎徒)’주 015
각주 015)
姎徒: 李賢은 『說文解字』를 인용하여 ‘姎’은 여인의 자칭으로서 ‘나’를 의미한다. 음은 烏와 郞의 반절이다. 이 앞부분은 모두 『風俗通』에 보인다고 하였다(說文曰: “姎, 女人自稱, 我也” 音烏朗反. 此已上並見風俗通也). 그러나 고대 남방 蠻夷의 추장을 ‘精夫’라 칭하고 상호 ‘姎徒’로 불렀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은 현존하는 『風俗通義』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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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였다. 지금 장사만(長沙蠻)과 무릉만(武陵蠻)이 이들이다.주 016
각주 016)
여기서 ‘지금’이라는 시점은 『後漢書』 편찬 시점인 劉宋代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集解』는 『南史』 권79 「夷貊列傳」 下와 『隋書』 권31 「地理志」 下를 인용하여 그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李賢은 干寶의 『晋紀』를 인용하여 武陵 長沙蠻을 설명하였다. “武陵, 長沙, 廬江郡의 夷는 槃瓠의 후손이다. 五溪에 흩어져 거주하고 있다. 槃瓠는 산의 험준함에 의지하여 매번 해를 끼치고 있다. 물고기와 육류를 섞어서 먹고, 나무통을 두드리며 부르짖으며 槃瓠에 제사지낸다. 일반적으로 ‘赤髀’, ‘橫裙’이라고 불리는 자들은 槃瓠의 자손이다(干寶晉紀曰:“武陵·長沙·廬江郡夷, 槃瓠之後也. 雜處五溪之內. 槃瓠憑山阻險, 每每常爲害. 糅雜魚肉, 叩槽而號, 以祭槃瓠. 俗稱 ‘赤髀橫裙’, 卽其子孫”).干寶는 東晋의 史學家文學家로서, 字는 今升이고 新蔡(지금의 河南省 소재) 출신이다. 학문에 열중하였는데 陰陽術數를 좋아하였다. 元帝 때 佐著作郞領修國史로 있으면서 『晋紀』 20권을 지어, 西晉 司馬懿에서 愍帝까지 53년간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晋紀』의 전문은 현전하지 않고 淸代 黃奭의 輯本이 『漢學堂叢書』에, 湯球의 輯本이 『廣雅書局叢書』에 수록되어 있다. 干寶는 『晋紀』 외에 『搜神記』도 찬술였는데, 前代의 책에서 견문한 것 가운데 神靈 怪異한 故事들을 편집한 것으로, 六朝 隋唐時代에 성행한 소위 怪志小說의 초기형태이다. 原書는 오래 전에 산일되었고, 현전본은 後人이 『法苑珠林』, 『太平御覽』 등에서 채록한 것이다. 槃瓠의 故事에서 보듯 『後漢書』에서 干寶의 저작내용과 유사한 것이 많은 점으로 봐서, 劉宋代 『後漢書』 찬술과정에서 干寶의 저작이 많이 참조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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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高辛: 중국의 전설적인 五帝 중 네 번째 帝嚳. 高辛氏로 불리는 경우는 帝嚳 외에 帝摯가 있는데, 帝嚳의 아들이다. 史書에 ‘高辛氏’라고 하는 경우 대체로 帝嚳를 가리킨다. 帝嚳의 姓은 姬, 이름은 俊, 祖父는 玄囂, 父親은 蟜極으로, 선왕 顓頊은 그의 伯父로 알려져 있다. 古文獻에는 ‘帝俊’으로 칭해지기도 하였는데, 『山海經』 「大荒南經」에는 帝俊은 中容, 晏龍, 黑齒, 季釐 등의 子族이 있다고 되어 있다. 전설상 그가 共主로 추대되자 지금의 河南省 偃師市로 알려진 亳을 도읍으로 木德의 帝가 되었다고 한다. 이에 상당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던 共工氏가 嚳이 帝에 오른 것에 불만을 품었는데, 울분에 싸여 머리를 不周山에 부딪혀 天柱가 부러지면서 大地가 東南으로 기울게 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共工氏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帝嚳은 火正 黎로 하여금 共工의 반란을 평정하도록 하였지만, 黎는 실패하고 돌아왔다. 帝嚳은 黎를 처형하고 동생 吳回를 火正으로 임명하여 다시 共工氏를 토벌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共工氏를 처형하였다고 한다(『史記』 卷40, 「楚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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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犬戎: 중국 고대의 種族名으로 나타나는데, ‘獫狁’ 혹은 ‘西戎’이라 칭하기도 한다. 西周 중기부터 현재의 陝西, 甘肅 일대를 근거로 출현하지만 주왕실에 의해 제압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周王室이 쇠약해진 共王, 懿王, 孝王, 夷王시기에는 주왕실의 입장에서 겨우 방어하는 상황이었다. 周宣王시기 尹吉甫, 南仲 등을 파견하여 獫狁을 정벌하였지만, 宣王 말기 이후에는 오히려 獫狁의 활약이 두드러져 幽王시기에 犬戎은 申國과 繒國을 도와 周王室을 공격하여 멸망시킨다. 이처럼 犬戎은 주로 西北의 종족으로, 이후 나타나는 西南夷나 蠻과의 관련성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犬戎이 구체적인 종족명 외에 중국의 古文獻에서 異民族을 비하하는 칭호로 사용된 경우도 많은데, 南蠻과 관련한 犬戎의 활동에 대해 구체적인 정황은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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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帝: 秦始皇 이래 漢代에서는 천하를 통치하는 군주에 대한 칭호로 쓰이게 되는데(『史記』 「秦始皇本紀」, “秦故王國, 始皇君天下, 故稱帝.”; 『說文解字』 “帝, 諦也. 王天下之號也.”), 이와 함께 後漢代 이후 道家類 서적에서는 ‘天神’, ‘上帝’, ‘天帝’ 등 神的 존재에 대한 칭호에도 쓰이고 있었다. 史書의 역사적 표현법으로는 三代 때에 ‘帝堯’, ‘帝乙’ 등 죽은 군주에 대한 칭호로 사용되고 있었다(『禮記』 「曲禮」上, “天王登假, 措之廟, 立之圭, 曰帝.”). 甲骨文에서 주로 ‘禘’와 통용되어 제사의 대상으로 쓰이고 있는 것을 보면, 殷代에는 죽은 군주에 대한 칭호로 제사의 대상으로 나타난 관념임이 분명하다. 이것이 秦代에 현실적인 군주에 대한 직접적인 칭호로 확대되고, 한편으로는 제사의 대상인 神的 관념이 별도로 확대되어 도교적인 표현법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즉, 帝嚳시기에는 당시의 군주에 대한 칭호로 ‘帝’가 직접 사용된 것이 아니었고, 진한시대에 당시의 개념에 근거하여 殷代 이전의 성왕적 군주를 칭하는 편의적인 표현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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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吳將軍에 대한 일화는 『後漢書』 이전에는 晋代에 저술된 『搜神記』에 처음 나타난다. 그러나 현전하는 『搜神記』는 일실되었다가 唐代 다시 편집되었기 때문에, 『後漢書』와의 선후관계는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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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鎰: 중량의 단위로서 20兩 혹은 24兩에 해당하는데, 戰國末 이후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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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家: 秦漢時代 夫婦 단위의 가족관계를 중심으로 국가권력에 의해 통치 대상의 단위로 설정된 ‘戶’와는 달리 보다 큰 범위로 ‘家門’ 혹은 ‘宗族’을 의미하는 말이다. 戰國末 戶의 지배체제가 성립되어 가기 이전에는 강한 결집력을 가진 정치 경제 그리고 생활공동체의 의미를 가졌다가, 秦漢시대에는 법적 구속력은 없이 단순히 심정적 일체감을 중심으로 정치 사회생활 방면에서 동질성을 유지하는 정도의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高辛氏시대의 관념으로 본다면 ‘家’는 거의 소규모 부족 단위와 가까운 것으로, 帝에 의해 ‘萬家’를 사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개념이 아니다. ‘邑’은 周代에는 侯國, 혹은 先君宗廟가 있는 都와 비교하여 宗廟가 없는 취락을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서 ‘家’는 사실상 ‘戶’ 정도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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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전체적으로 포상의 내용이 당시의 시대상황과 맞지 않은데, 唐代 杜佑가 이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通典』 卷187, 「邊防」3, 「南蠻」上, “按黃金周以前爲斤, 秦以二十兩爲鎰, 三代以前分土, 自秦漢分人. 又周末始有將軍之官. 其吳姓宜自周命氏. 曄皆以爲高辛之代, 何不詳之甚!(살피건대, 黃金은 周 이전에는 斤을 사용하였는데, 秦代 20兩을 鎰로 삼았다. 三代 이전에는 토지를 나누어 주었고, 秦漢時代 때부터 인민을 나누어 주었다. 또, 周末에 비로소 將軍의 관직이 나타났다. 吳氏 姓은 마땅히 周왕실로부터 명명된 氏名이다. 范曄은 이를 모두 高辛氏시대라고 하였으니. 그 치밀하지 못한 것이 어찌나 심한지!).”실제 같은 고사가 실려 있는 『搜神記』에는 “贈金千斤, 封邑萬戶”라고 하여 중량의 단위는 시대상황에 더 가깝게 표현되어 있고, 封邑은 ‘戶’로 하여 보다 현실적으로 파악하였다. 『玄中記』에서는 ‘封三百戶’라고 하여 보다 더 현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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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槃瓠와 관련된 고사는 출처에 따라 내용에 약간씩 차이가 있다. 李賢注에 인용된 『魏略』에서는 槃瓠의 출생에 관해 다른 서술하고 있다. 高辛씨는 老婦가 있어 王室에서 살았다. 귓병이 들었는데, 후벼서 긁어내니 누에고치 같은 것이 나왔다. 부인이 단지에 넣어 소반으로 덮어 놓으니, 잠시 후에 개로 변하였는데, 무늬가 오색이라 槃瓠라고 이름하였다. (“魏略曰: “高辛氏有老婦, 居(正)[王]室, 得耳疾, 挑之, 乃得物大如繭. 婦人盛瓠中, 覆之以槃, 俄頃化爲犬, 其文五色, 因名槃瓠.”)이에 비해 『藝文類聚』에 인용된 『玄中記』에서는 ‘槃護’로 표기되면서 高辛氏와의 관계에 대한 또다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玄中記』에 이르기를, 狗封氏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高辛氏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시집을 가지 못하였다. 犬戎이 난을 일으키자, 帝는 이를 토벌하는 자에게 아름다운 딸을 처로 삼게 하고 300戶를 봉해 주겠다고 하였다. 帝는 槃護라고 불리는 개가 있었는데, 3개월이 지나자 犬戎을 죽여 머리를 가져왔다. 帝는 [약속을 어기면] 백성을 가르칠 수 없다고 하여 딸을 [槃護의] 처로 삼았다. 會稽에서 東南으로 2만 1천리를 흘러가면 바다 가운데 토지를 얻을 수 있는데, 사방 3,000里의 땅을 봉하였다. 아들을 낳으니 개가 되었고, 딸을 낳으니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다. (『藝文類聚』, 卷94, 「獸部」中 〈狗〉, “玄中記曰: 狗封氏者. 高辛氏有美女, 未嫁. 犬戎爲亂, 帝曰: 有討之者, 妻以美女, 封三百戶. 帝之狗名槃護. 三月而殺犬戎之首來. 帝以爲不可訓民. 乃妻以女. 流之會稽東南二萬一千里. 得海中土. 方三千里而封之. 生男爲狗. 生女爲美女.”) 이야기의 전체적인 구성은 『後漢書』와 비슷하지만, 내용이 비교적 간략하고, 특히 槃護가 高辛氏의 딸을 거느리고 山谷이 아니라 會稽 밖의 바다 가운데 섬으로 갔다고 한 점이 큰 차이이다.한편, 『搜神記』 卷14에도 槃瓠에 관한 고사가 실려 있는데, 槃瓠의 출생에 관해 『魏略』과 유사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나머지의 문투와 내용은 『後漢書』와 매우 유사한데, 부분적으로 표현이 더 상세하다. 『魏略』은 曹魏시 魚豢, 『玄中記』는 晉 郭璞, 『搜神記』는 東晉시 干寶가 撰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槃瓠의 출생에 관한 『魏略』의 고사와 高辛氏시기 槃瓠의 활동에 관한 『玄中記』의 이야기가 합해져 『搜神記』의 기록이 이루어지고, 劉宋代 范曄은 이를 轉載하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원래의 『搜神記』가 亡佚되고 현행본은 후대에 보충하여 다시 쓰였다는 사실과 『搜神記』의 내용과 표현이 『後漢書』에 비해 상세하고 구체적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현행본 『搜神記』의 내용은 후대 『後漢書』를 참조하여 첨가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玄中記』와 『搜神記』는 역사서라기보다 魏晋南北朝시에 유행하였던 志怪小說類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러한 내용이 史書에 포함된 것에 대해 唐代 杜佑는 『通典』에서 이를 전재하면서 그 근거가 없으며 ‘放誕不經’하다고 비판하고 있다(『通典』 卷187, 「邊防」3 『南蠻』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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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帝皇: 천하를 직접 지배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秦代에 처음 ‘皇帝’의 관념이 나타난 이후의 개념으로, 漢代 이후 자주 쓰였다. 역시 고대의 실제 쓰여진 개념이 아니라 『後漢書』 편찬시의 관념으로 나타난 칭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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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南山: 李賢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금 辰州 盧溪縣 서부에 武山이 있다. 黃閔의 『武陵記』에 이르길, “산이 높아 가히 만린이 된다. 산 중턱에 槃瓠石室이 있는데, 가히 수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가운데에 石床이 있는데, 槃瓠의 行蹟이다.”라고 되어 있다. 생각컨대, 山窟 앞에 石羊과 石獸가 있고, 기이한 古蹟이 더 많다. 望石窟은 크기가 3간의 집과 같은데, 멀리서 보면 하나의 돌이 개의 형상이다. 蠻의 풍속으로 계속 전해 오는데, 槃瓠의 像이라고 한다(今辰州盧溪縣西有武山. 黃閔武陵記曰: “山高可萬仞. 山半有槃瓠石室, 可容數萬人. 中有石床, 槃瓠行跡.” 今案: 山窟前有石羊·石獸, 古跡奇異尤多. 望石窟大如三閒屋, 遙見一石仍似狗形, 蠻俗相傳, 云是槃瓠像也.). 盧溪縣은 현재 湖南省 盧溪縣 武溪鎭으로 縣內에 巫水가 지나고 있다. 『武陵記』는 현재 전해 오지 않는다. 다만, 『後漢書』 李賢의 注와 『通典』에서 杜佑 自註, 『通志』 본문 등에서 한두 군데 인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北宋初까지는 일부나마 전해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南方地域의 山水와 植物에 관한 것으로 보아 武陵의 地理志인 것으로 보인다. 黃閔은 『隋書』 「經籍志」에 瑩陽山水를 서술한 『神壤記』를 찬했다는 기록이 나타나는데, 달리 그의 이력은 확인되지 않는다. ‘南山’에 대해 杜佑의 『通典』 自註에서 “國의 남쪽에 있는데, 五溪의 中山이다.(在國之南, 卽五溪之中山)”라고 하였다. 五溪는 『水經注』에 의하면 武陵縣의 雄溪, 樠溪, 酉溪, 潕溪, 辰溪,를 가리키는데, 이곳은 蠻夷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이들을 ‘五溪蠻’으로 부른다고 한다. 사료에 따라 雄溪, 蒲溪, 酉溪, 沅溪, 辰溪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현재 湖南省 武陵縣의 지역에 위치한다. 安徽省 九華山지역에도 蠻夷가 살고 있는 五溪가 있는데, 서로 별개의 지역이다. 湖南省 五溪는 현재 주로 苗族들이 거주하고, 安徽省에는 侗族, 苗族, 瑶族, 土家族 등이 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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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僕鑒’과 ‘獨力’: 李賢은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으며, 그 당시 유통본에 ‘鑒’이 ‘竪’로 되어 있는 것이 있는데, 억지로 견강부회한 것이라고 하였다(僕鑒, 獨力, 皆未詳. 流俗本或有改 ‘鑒’字爲 ‘豎’者, 妄穿鑿也. 結音髻.).‘僕鑒’과 ‘獨力’은 李賢의 주석 이래 그 의미는 파악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최근 覃聖敏은 壯族語를 통하여 그 의미를 추적하였다. 槃瓠는 현대의 瑤族의 祖先으로 알려져 槃瓠와 관련된 문제는 瑤族語를 통하여 그 의미를 추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覃聖敏은 『後漢書』에 나타나는 南蠻之地는 古代 越人의 활동지역으로 古代越語가 사용된 것으로 파악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古代越語는 현대 狀族語로 계승되었다는 기존의 연구를 근거로, ‘僕鑒’과 ‘獨力’도 現代 狀族語의 발음을 통하여 유추하였다. 이에 따라 ‘僕鑒’의 ‘鑒’은 狀族語로 ‘gam’, 즉 ‘岩洞’의 의미이고, ‘僕’은 ‘布’와 마찬가지로 狀族語에서 ‘bu’로 발음되는 人稱冠詞로 파악하였다. 그래서 ‘僕鑒’은 ‘동굴 속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獨力’에서 ‘獨’은 고대 사서에서 가끔 나타나는 ‘都’와 마찬가지로 狀族語에서 ‘du’로 발음되는 人稱冠詞이고, ‘力’은 狀族語에서 ‘lek’으로 발음되면서 ‘어린아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추정하였다(覃聖敏 1984).이에 따르면 “爲僕鑒之結, 著獨力之衣”은 “동굴에서 사는 사람들이 하는 모양으로 머리를 묽고, 어린애와 같은 (蠻夷의 짧은) 옷을 입었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전체적인 문맥은 보다 분명해진다고 할 수 있는데, 언어학적 기원과 계승의 문제가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고, 단어 역시 발음에 의한 추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유사한 예가 확인되기 전에는 확정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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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侏離: 李賢은 “蠻夷의 말소리이다.”라고 하였는데(侏離, 蠻夷語聲也.), ‘侏離’는 蠻夷 언어의 발음이 잘 구분되지 않아 알아듣기 힘든 것을 설명하는 의성어로서, ‘朱離’, ‘兜離’라고도 쓴다. 한편으로는 西南夷의 음악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周禮』 「春官」 〈鞮鞻氏〉, “掌四夷之樂” 賈公彦 疏 『孝經緯』 “西夷之樂曰侏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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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李賢은 특별히 우대하였기 때문에 부역을 면제하였다고 하였다. 또, 『刑州記』를 인용하여 그 위치를 밝히고 있는데, “沅陵縣의 酉溪 입구에 上就, 武陽 2鄕이 있다. 오직 이들만이 槃瓠의 자손으로 狗種이다. 2鄕은 武溪의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優寵之, 故蠲其賦役也. 荊州記曰: “沅陵縣居酉口, 有上就·武陽二鄕, 唯此是槃瓠子孫, 狗種也. 二鄕在武溪之北”). ‘狗種’이라는 표현은 槃瓠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舊唐書』에서는 吐蕃에 대해 ‘狗種’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舊唐書』 卷194上, 「突厥」上, 「毗伽可汗」), 개를 토템으로 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唐以前까지 나타난 『荊州記』는 3종이 확인된다. 晋代 中書郎 范汪과 劉宋 盛弘之, 역시 劉宋代 郭仲產의 저술이다. 『史記集解』에 范汪 『荊州記』가 인용되고 있는데, 范汪은 『後漢書』 찬자인 范曄의 조상으로서 그의 이력이나 이후 史書에서는 그가 저술하였다는 『荊州記』는 확인되지 않는다. 范汪은 東晋初 고위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禮學과 관련된 활동을 많이 한 인물로서 『隋書』 「經籍志」에는 『尙書大事』 『范氏家傳』 등을 저술하였던 인물로 『史記集解』의 오류로 보인다. 郭仲産은 『述異記』에서 劉宋 元嘉, 孝建 연간에 생존하였던 인물로 확인할 수 있는데 『秦州記』, 『湘州記』 등도 저술하였고, 『荊州記』는 『新唐書』 「藝文志」에 『郭仲産荊州記』가 기재되어 있다. 『後漢書』 李賢注에는 『秦州記』가 한 차례 인용되어 있다. 盛弘之는 그의 이력이 확인되지 않고, 오직 『隋書』 「經籍志」에 『荊州記』가 등재되어 있는데, 여기에 “宋 臨川王 侍郞 盛弘之撰”이라고 기록된 것이 그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그의 『荊州記』는 『史記正義』, 『後漢書』 李賢注에 수차 “盛弘之荊州記曰”로 인용되어 있다. 李賢注에서 단순히 ‘荊州記曰’로 되어 있는 부분도 盛弘之의 『荊州記』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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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精夫: 일정한 지역 단위로 구분되는 蠻部族 휘하의 소규모 집단 우두머리를 가리킨다. 『後漢書』「南蠻西南夷傳」에서는 “零陽蠻 五里精夫”, “武陵蠻 精夫相單程”등의 표현이 나타나는데, 이에 관한 기록은 오직 『後漢書』와 이를 인용한 『通典』에서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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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姎徒: 李賢은 『說文解字』를 인용하여 ‘姎’은 여인의 자칭으로서 ‘나’를 의미한다. 음은 烏와 郞의 반절이다. 이 앞부분은 모두 『風俗通』에 보인다고 하였다(說文曰: “姎, 女人自稱, 我也” 音烏朗反. 此已上並見風俗通也). 그러나 고대 남방 蠻夷의 추장을 ‘精夫’라 칭하고 상호 ‘姎徒’로 불렀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은 현존하는 『風俗通義』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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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여기서 ‘지금’이라는 시점은 『後漢書』 편찬 시점인 劉宋代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集解』는 『南史』 권79 「夷貊列傳」 下와 『隋書』 권31 「地理志」 下를 인용하여 그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李賢은 干寶의 『晋紀』를 인용하여 武陵 長沙蠻을 설명하였다. “武陵, 長沙, 廬江郡의 夷는 槃瓠의 후손이다. 五溪에 흩어져 거주하고 있다. 槃瓠는 산의 험준함에 의지하여 매번 해를 끼치고 있다. 물고기와 육류를 섞어서 먹고, 나무통을 두드리며 부르짖으며 槃瓠에 제사지낸다. 일반적으로 ‘赤髀’, ‘橫裙’이라고 불리는 자들은 槃瓠의 자손이다(干寶晉紀曰:“武陵·長沙·廬江郡夷, 槃瓠之後也. 雜處五溪之內. 槃瓠憑山阻險, 每每常爲害. 糅雜魚肉, 叩槽而號, 以祭槃瓠. 俗稱 ‘赤髀橫裙’, 卽其子孫”).干寶는 東晋의 史學家文學家로서, 字는 今升이고 新蔡(지금의 河南省 소재) 출신이다. 학문에 열중하였는데 陰陽術數를 좋아하였다. 元帝 때 佐著作郞領修國史로 있으면서 『晋紀』 20권을 지어, 西晉 司馬懿에서 愍帝까지 53년간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晋紀』의 전문은 현전하지 않고 淸代 黃奭의 輯本이 『漢學堂叢書』에, 湯球의 輯本이 『廣雅書局叢書』에 수록되어 있다. 干寶는 『晋紀』 외에 『搜神記』도 찬술였는데, 前代의 책에서 견문한 것 가운데 神靈 怪異한 故事들을 편집한 것으로, 六朝 隋唐時代에 성행한 소위 怪志小說의 초기형태이다. 原書는 오래 전에 산일되었고, 현전본은 後人이 『法苑珠林』, 『太平御覽』 등에서 채록한 것이다. 槃瓠의 故事에서 보듯 『後漢書』에서 干寶의 저작내용과 유사한 것이 많은 점으로 봐서, 劉宋代 『後漢書』 찬술과정에서 干寶의 저작이 많이 참조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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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고신씨(高辛氏)
지명
장사, 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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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만(長沙蠻)과 무릉만(武陵蠻)의 기원 자료번호 : jo.k_0003_0116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