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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정복사업을 크게 일으키고 백제를 침공함으로써 한강 유역을 둘러싼 쟁탈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게 되었다. 고구려의 남하정책이 본격화된 것은 광개토왕 다음 왕인 장수왕 때로, 장수왕은 427년(장수왕 15)에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고 남하정책을 단행하여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였다.
475년(개로왕 21) 고구려의 장수왕이 군사 3만명으로 침입하여 왕도 한성을 포위하자, 개로왕이 성문을 빠져 나와 달아나다가 고구려군에게 살해당하였다. 그리하여 백제의 왕도 한성은 함락되고 한강 유역은 고구려에게 점령당하였다. 고구려는 이곳에 한산군(漢山郡)을 설치하고 북한성(北漢城)에 남평양(南平壤)을 설치하여 별도(別都)를 삼아 뒤에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길 때까지 77년간 영토로 삼았다.
475년(개로왕 21) 고구려의 장수왕이 군사 3만명으로 침입하여 왕도 한성을 포위하자, 개로왕이 성문을 빠져 나와 달아나다가 고구려군에게 살해당하였다. 그리하여 백제의 왕도 한성은 함락되고 한강 유역은 고구려에게 점령당하였다. 고구려는 이곳에 한산군(漢山郡)을 설치하고 북한성(北漢城)에 남평양(南平壤)을 설치하여 별도(別都)를 삼아 뒤에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길 때까지 77년간 영토로 삼았다.
이처럼 남평양 일대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의 상징으로, 호로고루성(瓠蘆古壘城)이나 아차산 일대의 보루군(堡壘群) 등 당시의 군사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백제와 고구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례대로 점령하면서 삼국의 유물과 유적이 고루 분포해 삼국시대의 생활상과 전략적 요충지로서 이 일대가 지닌 위상을 여실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