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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물 무역의 발달

2. 해산물 무역의 발달

음식의 종류가 많다는 뜻의 팔진(八珍)이 송대에 오면, 실제로 8종류의 진미를 열거하게 된다. 청대가 되면 더욱 확대되어 4종류 8진미, 즉 32가지 진미를 갖춘 연회요리가 등장한다. 그것이 만주족과 한족의 대표적인 음식재료를 모은 코스요리 ‘만한전석(滿漢全席)’이다. 4종류 8진미는 산팔진(山八珍), 금팔진(禽八珍), 초팔진(草八珍), 해팔진(海八珍)이다. 18세기가 되면 연회석요리가 체계화되었다. 연회석요리는 만한전석을 으뜸으로 연채석(燕菜席), 어시석(魚翅席), 해삼석(海蔘席), 하건석(蝦乾席), 삼사석(三糸席) 순서였다. 연회요리의 대부분은 마른 해산물을 주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소(燕巢, 제비집)는 태국에서 오는 선박이 가져왔다. 상어지느러미, 해삼, 전복의 산지는 광둥·푸젠 등 중국 연해지역도 있지만, 대부분은 동남아시아, 일본이었다. 당시 청은 고급 식재료를 탐욕스럽게 갈망했던 사회였다. 대량의 마른 해산물을 수입하기 시작한 청은 바다의 교역 형태를 바꾸었다.주 581
각주 581)
上田信(2005), 349~3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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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선이 해산물을 수입한 것은 1683년 기록에 처음 보인다. 광둥선이 말린 해삼[乾海蔘, 煎海鼠], 말린전복[乾全鰒, 干鮑]을 구입해 갔다. 그러나 1666년에 샴선이 가다랑어포[鰹節] 등을 수입해 간 사실도 있으므로, 일본이 해산물을 수출한 역사는 오래되었다. 1680년대 이후 구리와 함께 주요 수출품이었다.주 582
각주 582)
山脇悌二郞(1964), 222~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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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8세기 이후, 구리에 대신하여 중국이 요구한 새로운 구매품은 해산물이다. 이 가운데서도 주목되는 것은 말린해삼, 말린전복, 상어지느러미이다. 모두 청대에 활발하게 요리되기 시작한 ‘해선(海鮮)요리’의 중요한 재료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이 3품목을 툭하 ‘다와라모노산삥[俵物三品]’ 또는 ‘다와라모노’라고 불렀다. 다와라모노는 짚으로 포장한 상품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일본은 ‘다와라모노산삥’으로 증산에 적극적이었다. 중국인은 해산물을 상하이, 닝보, 난징 부근에서 팔았다. 특히 말린해삼은 수요가 높았다. 이외에 한천, 곤포, 가다랑어포 등 다른 해산물의 수출도 실시되었다. 이들은 ‘다와라모노’와 구분하여 쇼시키[諸色]라고 불렀다. 1715년 쇼토쿠신레이 이후 금, 은, 구리에 대체하여 해산물 수출에 의한 무역결제가 장려되었다.주 583
각주 583)
谷口規矩雄 편·정성일 옮김(1997),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 4, 서울 : 신서원, 287~288쪽 ; 小川國治(1973), 『江戶幕府輸出海産物の硏究-俵物の生産と集荷機構-』, 吉川弘文館 ; 荒居英次(1975), 『近世海産物貿易史の硏究-中國向俵け輸出貿易と海産物-』, 吉川弘文館 ; 山脇悌二郞(1964), 222~223쪽 ; 任鴻章(1988), 219~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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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물 생산지는 주로 일본의 동북 지역이다. 간토[關東], 시코쿠[四國], 기타규슈[北九州]도 생산되었다. 1742년부터 그 집하 체제의 재편이 행해지기 시작하였다. 1744년에 나가사키의 해산물 도매상인에게 해산물을 집하하는 특권이 주어졌다.주 584
각주 584)
任鴻章(1988), 219~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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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쿠후가 새로운 수출상품으로 해삼 생산을 독려하기 시작했던 1744년에 수출된 해삼의 총량은 31만 7천근(약 190톤)이나 되었다. 바쿠후의 요청에 가장 잘 부응한 것은 기카규슈, 세토 내해, 노토를 중심으로 한 도카이[東海], 이세·시마, 홋카이도의 다섯 해역이었다.주 585
각주 585)
쓰루미 요시유키 지음·이경덕 옮김(2005), 『해삼의 눈』, 서울 : 뿌리와이파리, 3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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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5년에는 다와라모노카이쇼[俵物會所]가 발족하였다. 이 카이쇼는 후에 나가사키가이쇼에서 독립하였다. 1785년에는 바쿠후 스스로가 해산물의 전국 집하에 착수하여 직구입을 하였다. 나가사키부교에게 해산물 행정을 통제하게 하고, 나가사키에 해산물관청을 설치하여 전국 집하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고 전국 어촌에 해산물 생산액을 강제로 할당하였다. 해산물의 생산 수출체제가 완비되어 1864년까지 해산물 3품목이 연간 수출량은 40만근 이상을 유지하였다. 많을 때는 연간 80만근 전후였다. 이러한 막대한 수출액은 수출품의 비율을 변화시켰다.주 586
각주 586)
任鴻章(1988), 219~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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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본의 무역동향에 따라, 말린해삼은 조선에서도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쓰시마번은 1763년 말린해삼으로 물소뿔을 매입하고 싶다고 나가사키부교에게 요청하였다. 이 요청은 말린해삼 15,000근을 나가사키에 더 보낸다는 조건으로 허락되었다. 쓰시마번은 이 증가분 15,000근을 확보하기 위하여 말린해삼 수입을 도모하였다. 그 이후 조선의 말린해삼 수출은 더욱 증가하였다.주 587
각주 587)
小川國治(1973), 200~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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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 소[宗]씨문서인 『일대관매일기(一代官每日記)』에 의하면, 말린해삼은 1844~1849년의 6년간에 총 691괘(掛)가 수출되었다. 부산 초량왜관의 도중상고인 의여(宜汝, 의여는 자, 본명 미상) 박서방이 283.5괘(掛), 자범(子範, 자범은 자, 본명 미상) 정(鄭)아무개가 250괘로, 두 사람이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 정자범은 오위정 정윤중(鄭允中, 윤중은 자, 본명 미상)의 아들로 1846년 6월 당시 그해 봄철에 입송할 말린해삼 목표량을 초과하는 좋은 실적을 올렸다. 정자범은 정윤중의 뒤를 이어 대일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다.주 588
각주 588)
정성일(2000), 168~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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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삼은 경상도 통영, 거제, 남해 등지에서 많이 생산되었다. 『통영지(統營志)』(규장각도서 10976)장시조를 보면, ‘해삼도고(海蔘都賈)’를 별도로 기술하고 있다. 해삼은 거제와 고성 두 읍의 특산물인데 개성상인과 동래상인이 오랫동안 구매하였다고 하였다.주 589
각주 589)
김동철(1998), 「조선 후기 왜관 개시무역과 동래상인」 『민족문화』, 21집, 민족문화추진회, 7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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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린해삼은 조선에서 일본으로 수출되었다가, 다시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조선산 말린해삼이 쓰시마-나가사키를 거쳐 중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해삼의 길’은 18~19세기 동아시아 교역망의 중요한 루트였다.

  • 각주 581)
    上田信(2005), 349~351쪽. 바로가기
  • 각주 582)
    山脇悌二郞(1964), 222~223쪽. 바로가기
  • 각주 583)
    谷口規矩雄 편·정성일 옮김(1997),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 4, 서울 : 신서원, 287~288쪽 ; 小川國治(1973), 『江戶幕府輸出海産物の硏究-俵物の生産と集荷機構-』, 吉川弘文館 ; 荒居英次(1975), 『近世海産物貿易史の硏究-中國向俵け輸出貿易と海産物-』, 吉川弘文館 ; 山脇悌二郞(1964), 222~223쪽 ; 任鴻章(1988), 219~221쪽. 바로가기
  • 각주 584)
    任鴻章(1988), 219~221쪽. 바로가기
  • 각주 585)
    쓰루미 요시유키 지음·이경덕 옮김(2005), 『해삼의 눈』, 서울 : 뿌리와이파리, 360쪽. 바로가기
  • 각주 586)
    任鴻章(1988), 219~221쪽. 바로가기
  • 각주 587)
    小川國治(1973), 200~201쪽. 바로가기
  • 각주 588)
    정성일(2000), 168~172쪽. 바로가기
  • 각주 589)
    김동철(1998), 「조선 후기 왜관 개시무역과 동래상인」 『민족문화』, 21집, 민족문화추진회, 72~73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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