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일본-조선-중국의 은 교역망

2. 일본-조선-중국의 은 교역망

조선과 명 간의 무역은 사행무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사행무역에서 은으로 사오는 중국 물품은 진사(眞絲), 채단(綵緞) 등 생사와 비단이다. 수입품의 측면에서 본다면, 조선도 일본과 마찬가지 양상이다. 명은 사라능단(紗羅綾緞) 등 각종 비단을 다량 생산하고 있었다. 사치품의 수입은 1520년대에 들어오면서 급증하는 추세였다.주 483
각주 483)
이태진(2007), 「16세기 국제교역의 발달과 서울상업의 성쇠」, 이태진 외, 『서울상업사』, 서울 : 태학사, 133쪽.
닫기
당시 함경도의 은이 한없이 생산되는데도 서울에서 은값이 10배나 오른 것은 모두 중국으로 가버리기 때문이니, 국가의 큰 근심거리라고 할 정도였다.주 484
각주 484)
『중종실록』, 중종 21년(1526) 3월 22일.
닫기
이처럼 함경도 단천 등 국내 광산에서 생산되는 은의 대부분은 명으로 유출되었다.
16세기에는 명과의 사무역이 발달하였다. 사무역의 발달은 조선 국내의 사치풍조의 성행과 그에 따른 사치품 수요가 증대한 데 기인하였다. 사치를 주도한 것은 복식과 혼수에서의 중국산 고급 비단인 사라능단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다음 사료에서 잘 볼 수 있다. “근래 사치가 날로 심해지고 이익이 생기는 근원이 날로 열려서 혼사에 이르기까지 다른 나라의 물건이 아니면 혼례를 치를 수 없을 정도이다. 경사대부(卿士大夫)가 다투어 사치를 일삼고 노복하천(奴僕下賤)까지도 당물(唐物)을 쓴다. 게다가 왜은이 유포되어 시전을 가득 채우고 있다. 북경에 가는 사람들이 공공연히 은을 싣고 가는데, 한사람이 3천 냥 이상을 가져간다. 심지어 공무역할 포물(布物)을 상인에게 맡기고 은을 바꾸어 간다. 상인은 그 포물을 보관하고 앉아서 돌아오는 행차를 기다렸다가 그 포물을 되돌려주고 이윤을 취한다.”주 485
각주 485)
『중종실록』, 중종 35년(1540) 7월 25일.
닫기

이러한 중국산 사라능단 수입의 대금은 은으로 결제하였다. 당시 조선은의 품질이 뛰어났다. 특히 ‘단천은’은 품질이 좋은 은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였다.주 486
각주 486)
『중종실록』, 중종 11년(1516) 5월 29일 「中原人 每稱銀之品好者 曰端川銀」
닫기
16세기 이후 연은분리술의 개발로 국내 은 생산량은 증가하였다. 그러나 사무역의 발달은 계속적인 은 부족을 초래하였다. 조선 국내 은의 고갈과 은가등귀로 상인들은 새로운 은의 출처를 찾아야만 했다. 이는 잠채(潛採)로 나타났다.주 487
각주 487)
한상권(1983), 「16세기 對中國 사무역의 전개-은무역을 중심으로-」 『김철준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서울 : 지식산업사.
닫기

1547년을 끝으로 중국과 일본 간의 조공무역이 단절되면서, 일본-조선-명 교역망이 더욱 활발하여, 일본은의 조선 유입이 더욱 증가하였다. 일본에서 조선에 오는 사절은 1523년경부터 외교보다는 무역을 주목적으로 하는 사절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양상을 보인다.주 488
각주 488)
무라이 쇼스케 지음·이영 옮김(1998), 『중세 왜인의 세계』, 서울 : 소화, 180쪽.
닫기
『중종실록』에서 1523~1542년 일본 사절이 가져온 물품과 그 값으로 가져간 면포량을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표1 16세기 전반 일본 사절의 공무역 물량과 가격
시기사신전체물량값(면포)중종실록비고
1523일본국왕사 2,000동18-7-28(갑오)1동=50필
1525일본사후추 8,900근 20-5-6(갑자)
1525일본사후추 9,980근, 주홍 1,880근, 침향 2,188근, 용뇌 28근, 수우각 1,000개, 대랑피(大狼皮) 10장1,185동20-8-19(병오)주홍, 침향, 용뇌는 전체물량 중 1/3만 구입.
자단향 구입거부.
1525일본국사오매목(烏梅木)1,063동20-9-25(신사)
1525 石硫黃 20-10-8(계사)
1525일본국사
경림동당
(景林東堂)
1,700동20-11-12(정묘)
1528소이전사
(小二殿使)
우피 23-7-17(병술)
1528 후추, 수우각, 유황430동23-8-3(임인)
1528일본국왕사
일악동당
(一鶚東堂)
700동23-12-7(갑술)
24-2-22(무자)
1538소이전사
(小二殿使)
은 315근480여동33-10-29(기사)전체물량 중 1/3 구입, 갑도 1/3 지급
1542일본국왕사
안심동당
(安心東堂)
은 80,000근 37-4-20(경오)
37-7-17(을축)
전체물량 중 15,000근 구입하여함
〈표 1〉에서 보듯이, 1525년 일본국왕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가 보낸 사절 경림동당이 조선에 왔다. 이 사절은 후추9,980근, 주홍 1,880근, 침향 2,188근, 용뇌 28근 등 많은 물품을 가져왔다. 조선에서는 이 가운데 1/3만 공무역하도록 하였다. 자단향 150근은 국내에서 구할 수 있으므로 무역하지 않았다. 물소뿔 1천개, 대랑피 10장은 모두 무역하였다. 이 물건값은 목면 1,185동, 즉 59,250필에 해당한다.
〈표 1〉에서 공무역 물품을 보면, 1528년까지는 후추, 유황, 물소뿔, 가죽류, 주홍, 침향, 용뇌 등으로 다양하지만, 1538년부터는 은으로 바뀐 점이 주목된다.주 489
각주 489)
이태진(2007), 125~129쪽.
닫기
1538년에 온 일본사절에 대해, “ 이번에 온 왜인도 은만 가져왔을 뿐, 다른 물품은 가져오지 않았다.”주 490
각주 490)
『중종실록』, 중종 33년(1538) 8월 19일.
닫기
라고 할 정도로, 은은 가장 중요한 무역품이었다.
1539년에는 내수사 서제(書題)인 박수영(朴守榮)이 중국산 채단과 백사를 몰래 가지고 제포(薺浦)에 가서, 조정 일을 핑계삼아 일본은을 무역한 후 중국에 보낸 일이 있었다. 박수영을 시정인(市井人)이라고 지칭한 것으로 보아,주 491
각주 491)
『중종실록』, 중종 34년(1539) 10월 23일, 24일.
닫기
그는 상업에 종사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일본은에 대한 밀무역이 증가하여, 이를 법으로 금지하였다. 위반자는 사형이었다. 그러나 생명을 담보하면서 일본은의 밀무역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일본은의 밀무역을 주도했던 상인은 서울상인인 경상(京商), 그 중에서도 부상대고(富商大賈)들이었다.주 492
각주 492)
무라이 쇼스케 지음·이영 옮김(1998), 197~200쪽.
닫기

이처럼 1530년대 이후 조선은 공무역, 밀무역을 통해 다량의 일본은을 수입하였다. 그래서 1540년경에는 일본은이 유포되어 서울의 시전에 가득 찰 정도가 되었다.주 493
각주 493)
이태진(2007), 125~129쪽.
닫기
수입된 일본은은 조선 국내에도 유통되었지만, 상당수는 중국산 생사와 고급 비단을 수입하기 위해 명으로 수출되었다.
명의 책봉체제를 전제로 형성된 사대와 교린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통교관계는 1510년 조선에서의 삼포왜란, 1511년 포르투갈의 말래카 점령, 1523년 중국에서의 닝보의 난 등을 기점으로 점차 쇠퇴해 갔다. 중화제국인 명의 쇠퇴에 따라, ‘책봉-조공[감합]-해금’을 일체화한 공적인 통교시스템이 붕괴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교류 자체가 쇠퇴한 것은 아니다. 국가간의 관계를 축으로 하는 교류에 대신하여, 비합법적이고 다민족적이며 때로는 폭력이 수반된, 그리고 더욱 대규모의 교류가 등장하게 된다. 다양한 해상세력이 이 새로운 양상의 교류를 담당하는 주체로서 등장하였다.주 494
각주 494)
무라이 쇼스케 지음·이영 옮김(1998), 220~222쪽.
닫기

16세기 동북아시아 3국은 중국의 생사, 비단, 도자기, 조선의 곡물, 면포, 은, 일본의 구리, 은 등의 상품을 중심으로 상호 교역체계를 발전시켰다. 이 체계에 류큐상인이 해상을 통해 3국을 잇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다가 16세기 중반에 포르투갈 상인이 등장하여, 그들이 일본과 중국을 잇는 역할을 대신하면서 류큐상인의 역할은 퇴조하였다.주 495
각주 495)
이태진(1991), 68쪽.
닫기
이러한 16세기 동아시아 교역망을 형성하는 중심축에 일본은과 아메리카은이 위치하고 있었다. 특히 16세기는 ‘일본은의 시대’, 즉 ‘회취은의 시대’였다.

  • 각주 483)
    이태진(2007), 「16세기 국제교역의 발달과 서울상업의 성쇠」, 이태진 외, 『서울상업사』, 서울 : 태학사, 133쪽. 바로가기
  • 각주 484)
    『중종실록』, 중종 21년(1526) 3월 22일. 바로가기
  • 각주 485)
    『중종실록』, 중종 35년(1540) 7월 25일. 바로가기
  • 각주 486)
    『중종실록』, 중종 11년(1516) 5월 29일 「中原人 每稱銀之品好者 曰端川銀」 바로가기
  • 각주 487)
    한상권(1983), 「16세기 對中國 사무역의 전개-은무역을 중심으로-」 『김철준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서울 : 지식산업사. 바로가기
  • 각주 488)
    무라이 쇼스케 지음·이영 옮김(1998), 『중세 왜인의 세계』, 서울 : 소화, 180쪽. 바로가기
  • 각주 489)
    이태진(2007), 125~129쪽. 바로가기
  • 각주 490)
    『중종실록』, 중종 33년(1538) 8월 19일. 바로가기
  • 각주 491)
    『중종실록』, 중종 34년(1539) 10월 23일, 24일. 바로가기
  • 각주 492)
    무라이 쇼스케 지음·이영 옮김(1998), 197~200쪽. 바로가기
  • 각주 493)
    이태진(2007), 125~129쪽. 바로가기
  • 각주 494)
    무라이 쇼스케 지음·이영 옮김(1998), 220~222쪽. 바로가기
  • 각주 495)
    이태진(1991), 68쪽. 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일본-조선-중국의 은 교역망 자료번호 : edeah.d_0004_0020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