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1. 한국
한국에서는 현재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란 용어는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조선왕조실록』에는 ‘임진왜란’으로 용어화되어 기록된 사례가 없다. 『선조실록』에 ‘임진년의 왜적[壬辰之倭賊]주 330, 『인조실로』에 ’임진년의 변[壬辰之變]주 331, 『효종실록』에 ‘임진년의 난[壬辰之亂]주 332’ 등의 사용례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당시에 정부차원에서 확실한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임진왜란’이란 용어가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1614년에 완성된 이수광(李晬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이다.주 333윤근수(尹根壽)의 『월정선생문집(月汀先生文集)』과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隧錄)』에서도 문장 가운데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어 1776년 이긍익(李肯翊)이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서 항목의 제목으로 사용한 이후 일반화되었다.주 334대한제국기의 중등역사 교과서나 일제강점기의 역사서에는 ‘임진난(壬辰亂)’으로 표기되었다. 예컨대 이 전쟁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를 한 최남선은 ‘임진난’이라고 명명하였다.주 335가까이로는 해방 후인 1946년, 김성칠(金聖七)이 『조선역사(朝鮮歷史)』에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란 용어를 항목의 제목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한국사학계에서 임진왜란은 학술용어로 정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주 336현재 한국학계에서 ‘임진왜란’, 혹은 ‘임진·정유왜란’이라고 사용하는데, 전자만으로 통용하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1592년 발발해서 1597년의 재침까지를 포괄하는 7년간의 전쟁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조선과 일본 및 명의 중앙정부가 직접 참여한 국제 전쟁이라는 점에서 ‘왜란’이란 호칭은 국제적인 학술용어로는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주 337
사전적인 의미로 난(亂 ; revolt)이란 “정통정부의 권위에 대한 비정통집단의 도전행위”이며, 전쟁(戰爭 ; war)은 “국가 간의 군사적 충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조선·일본·명 사이에 벌어진 이 사건은 각 국의 정부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행위였다. 정통정부의 군대 사이에 일어난 대규모 군사적 충돌인 만큼 ‘난’이 아니라 ‘전쟁’이었다. 조일전쟁 혹은 조·명 연합군과 일본 간의 국제 전쟁이었던 것이다. 중세 동아시아 3국간의 국제 전쟁이자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닌 사건에 대해 우리는 아직까지도 ‘임진년에 왜인들이 일으킨 난’이라는 뜻으로 ‘임진왜란’이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전쟁 중에 문물과 민간인의 약탈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을 ‘국가적 규모의 왜구’라고 성격 규정하는 학설도 있기는 하다.주 338그러나 그것이 이 전쟁의 전부는 아니다.
임진왜란이란 명칭이 정착되게 된 배경에는 17세기에 풍미한 조선중화주의의식에 입각한 일본이적관(日本夷狄觀)과 청이적관(淸夷狄觀)에 기인한 바가 크다. 여기에 전쟁의 피해에 의한 적개심이 더해져 사건 자체를 ‘왜란’으로 격하시켜 버린 것이다.주 339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라 ‘오랑캐의 무도한 무장 집단에 의한 군사적 난동’정도로 애써 그 실상을 외면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일본의 전쟁도발에 대한 책임을 규정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일본의 침략은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한 사대교린의 국제질서를 깨트리는 행위이며, 조선의 은혜를 배반하는 명분 없는 도발행위라는 도덕적 판단도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이 ‘왜란’이라는 용어는 일본의 야만성에 대한 적개심과 도덕적 관점이 재재되어 있으며, 전쟁이 책임소재를 밝혀준다는 점에서 일정한 의의가 있다.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임진왜란이란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는 이유는 일본에 대한 전통적 비하의식과 함께 일제의 강점에 대한 적개심, 해방 후에도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청산을 하지 않는 일본의 자세에 대한 비판적 의식 등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쳐 30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침략을 했고, 명의 원군이 10만 여 명, 그리고 조선군과 의병부대 30여만 명을 합치면 미증유의 규모인 국제 전쟁이다. 7년간에 걸친 대규모 국제 전쟁을 도적떼들의 난동 정도로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또 ‘일본’이란 정식 국호가 있음에도 굳이 ‘倭’라는 비칭을 사용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국제전쟁으로서의 성격과 의의를 지니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한 역사 용어에 민족감정이 개입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이러한 관점은 국제정세와 사건의 실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방해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전쟁이 아니라 ‘왜란’이었기 때문에 ‘평정되었다’라는 사고방식이 주를 이루었으며, 승패개념 또한 애매해졌다. 외국군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물리친 승전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하였다. 또 이러한 시각과 논리는 수군의 승리와 의병전투의 전략적 의미, 군선과 화약의 우세 등에 대한 객관적 분석과 인식을 방해하였다. 이른바 국난극복사관 내지 순국사관(殉國史觀)의 함정이기도 하다.주 340이 전쟁을 국난극복사가 아니라 전쟁사적 시각에서 봐야하는 까닭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임진왜란’으로 용어화되어 기록된 사례가 없다. 『선조실록』에 ‘임진년의 왜적[壬辰之倭賊]주 330, 『인조실로』에 ’임진년의 변[壬辰之變]주 331, 『효종실록』에 ‘임진년의 난[壬辰之亂]주 332’ 등의 사용례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당시에 정부차원에서 확실한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임진왜란’이란 용어가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1614년에 완성된 이수광(李晬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이다.주 333윤근수(尹根壽)의 『월정선생문집(月汀先生文集)』과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隧錄)』에서도 문장 가운데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어 1776년 이긍익(李肯翊)이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서 항목의 제목으로 사용한 이후 일반화되었다.주 334대한제국기의 중등역사 교과서나 일제강점기의 역사서에는 ‘임진난(壬辰亂)’으로 표기되었다. 예컨대 이 전쟁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를 한 최남선은 ‘임진난’이라고 명명하였다.주 335가까이로는 해방 후인 1946년, 김성칠(金聖七)이 『조선역사(朝鮮歷史)』에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란 용어를 항목의 제목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한국사학계에서 임진왜란은 학술용어로 정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주 336현재 한국학계에서 ‘임진왜란’, 혹은 ‘임진·정유왜란’이라고 사용하는데, 전자만으로 통용하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1592년 발발해서 1597년의 재침까지를 포괄하는 7년간의 전쟁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조선과 일본 및 명의 중앙정부가 직접 참여한 국제 전쟁이라는 점에서 ‘왜란’이란 호칭은 국제적인 학술용어로는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주 337
사전적인 의미로 난(亂 ; revolt)이란 “정통정부의 권위에 대한 비정통집단의 도전행위”이며, 전쟁(戰爭 ; war)은 “국가 간의 군사적 충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조선·일본·명 사이에 벌어진 이 사건은 각 국의 정부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행위였다. 정통정부의 군대 사이에 일어난 대규모 군사적 충돌인 만큼 ‘난’이 아니라 ‘전쟁’이었다. 조일전쟁 혹은 조·명 연합군과 일본 간의 국제 전쟁이었던 것이다. 중세 동아시아 3국간의 국제 전쟁이자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닌 사건에 대해 우리는 아직까지도 ‘임진년에 왜인들이 일으킨 난’이라는 뜻으로 ‘임진왜란’이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전쟁 중에 문물과 민간인의 약탈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을 ‘국가적 규모의 왜구’라고 성격 규정하는 학설도 있기는 하다.주 338그러나 그것이 이 전쟁의 전부는 아니다.
임진왜란이란 명칭이 정착되게 된 배경에는 17세기에 풍미한 조선중화주의의식에 입각한 일본이적관(日本夷狄觀)과 청이적관(淸夷狄觀)에 기인한 바가 크다. 여기에 전쟁의 피해에 의한 적개심이 더해져 사건 자체를 ‘왜란’으로 격하시켜 버린 것이다.주 339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라 ‘오랑캐의 무도한 무장 집단에 의한 군사적 난동’정도로 애써 그 실상을 외면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일본의 전쟁도발에 대한 책임을 규정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일본의 침략은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한 사대교린의 국제질서를 깨트리는 행위이며, 조선의 은혜를 배반하는 명분 없는 도발행위라는 도덕적 판단도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이 ‘왜란’이라는 용어는 일본의 야만성에 대한 적개심과 도덕적 관점이 재재되어 있으며, 전쟁이 책임소재를 밝혀준다는 점에서 일정한 의의가 있다.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임진왜란이란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는 이유는 일본에 대한 전통적 비하의식과 함께 일제의 강점에 대한 적개심, 해방 후에도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청산을 하지 않는 일본의 자세에 대한 비판적 의식 등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쳐 30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침략을 했고, 명의 원군이 10만 여 명, 그리고 조선군과 의병부대 30여만 명을 합치면 미증유의 규모인 국제 전쟁이다. 7년간에 걸친 대규모 국제 전쟁을 도적떼들의 난동 정도로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또 ‘일본’이란 정식 국호가 있음에도 굳이 ‘倭’라는 비칭을 사용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국제전쟁으로서의 성격과 의의를 지니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한 역사 용어에 민족감정이 개입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이러한 관점은 국제정세와 사건의 실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방해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전쟁이 아니라 ‘왜란’이었기 때문에 ‘평정되었다’라는 사고방식이 주를 이루었으며, 승패개념 또한 애매해졌다. 외국군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물리친 승전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하였다. 또 이러한 시각과 논리는 수군의 승리와 의병전투의 전략적 의미, 군선과 화약의 우세 등에 대한 객관적 분석과 인식을 방해하였다. 이른바 국난극복사관 내지 순국사관(殉國史觀)의 함정이기도 하다.주 340이 전쟁을 국난극복사가 아니라 전쟁사적 시각에서 봐야하는 까닭이다.
- 각주 330)
- 각주 331)
- 각주 332)
- 각주 333)
- 각주 334)
- 각주 335)
- 각주 336)
- 각주 337)
- 각주 338)
- 각주 339)
- 각주 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