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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소장 근대한국문서

별첨자료Ⅳ : 만주와 한국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

Отношение России к Маньчжурии и Корее
  • 구분
    보고서
  • 저필자
    체레반스키 В.П.
  • 발송일
    1906년 (1906년 미상)
  • 문서번호
    ГАРФ,ф.543,оп.1,д.190,лл.32-35об.
  • 원소장처
    러시아연방 국립문서보관소
  • 대분류
    정치/외교(국제문제)
  • 세부분류
    국방·군사/국제관계/외교정책/동맹·조약·협정
  • 주제어
    러한관계, 러만관계
  • 색인어
    청국, 블라고베센스크, 만주, 유럽열강, 극동, 러시아, 만주, 황해, 하얼빈, 여순항, 북만주, 프리아무르스크, 람즈도르프, 알렉세예프, 로젠, 요미우리, 일본, 북경, 한국, 서울각서, 모스크바 의정서
  • 형태사항
    7  , 타이핑  , 러시아어 
별첨자료Ⅳ : 만주와 한국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주 001
번역주 001)
본 번역문은 1906년 체레반스키 В.П.가 작성한「러시아와 일본의 무력충돌이전 러시아의 청국 및 일본정부와의 교류관계 개관」(소장처: ГАРФ,ф.543,оп,1,д.190,лл,1-55об.)에 첨부된 별첨자료Ⅳ의 전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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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청국의 몇몇 주(州)에서 소요 사태가 발생했는데 제국 전체로 확산되었으며 수도마저 소요에 휩싸였습니다. 이곳에서 정부군 부대들이 혁명의 무리들에 합류하였으며, 이들은 외국공사관들을 포위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같은 해 일부 정규군이 가담하고 있는 청국의 혁명 무리들에 의해 블라고베센스크가 공격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이는 러시아가 청국을 향한 전쟁을 시작할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청국에 대해 평화 애호적이며 우호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러시아의 원칙이 승리했으며 러시아는 혁명과 투쟁하는 북경정부에 도움을 주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도움을 주기 위해 러시아 군대는 만주의 몇몇 지역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아시아인들뿐만 아니라 유럽열강들에게 우리의 행동에 반대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했습니다. 러시아는 만주를 임시 점령하면서 만주를 자국 영토로 편입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를 반박하기 위해 1902년 3월 26일 협약에 있는 조항들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 협약에 포함되어 있는 러시아의 양보 조치는 일본과 청국으로 하여금 극동의 러시아 군사력이 허약하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청국은 만주 개척에 미치는 러시아의 영향력에 적대적으로 대항하면서 적극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만주에서 러시아 군대를 밀어내는 것은 생산능력이 저급하고 가난한 나라에서 자신들의 제품과 생산품을 판매하려고 하는 열강들의 이익과도 완전히 맞아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만주의 문호 개방 정책은 이곳에서 러시아의 상업과 공업을 밀어내게 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으며 정치적 전망이 보다 명확해 질 때까지 철군을 멈추게 했습니다. 상공업적 이익과 러시아의 영향력 훼손 가능성과는 별개로, 우리가 만주점령을 중단하면 집과 땅이 없고 경작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 지역의 대다수 주민들이 격렬한 폭동을 일으킬 것은 뻔했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지배계급이 계획하고 의도하고 있는 더 없이 좋은 상황이었습니다. 우리 군대를 청국인들로 구성된 군대와 일본인 교관들로 교체하는 것은 우리와 여순의 연락로를 단절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여순은 장기간의 포위 가능성에 대비한 식량공급 및 준비가 아직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만주에서 두 방향으로 펼쳐진 2천 베르스타주 002
번역주 002)
베르스타(верста)는 과거 러시아의 길이 단위로 1 베르스타는 1,067m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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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넘는 철로를 부설한 러시아는, 이 철로를 방자한 이곳 청국인의 탐욕을 채워주는 운명에 처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철도는 그 자체로 끝 지점들 간의 거리단축이라는 위대하고 귀중한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철도가 우리의 평화로운 황해 진출 계획에 심각한 파탄을 가져왔다는 사실은, 철도가 이미 수억 루블을 집어삼켰을 때에서야 겨우 명백해졌습니다. 즉 우선, 이 철도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실카와 아무르 강 유역에 대한 개척의 불가피성을 가로막았습니다. 그 다음 이 철도는 러시아로 하여금 러시아의 철도사상 가장 거대한 이 시설을 유지, 보존하는데 많은 힘을 쏟게 했습니다. 만주로부터 철군 가능성과 필요성 사이에 동요가 발생하였습니다. 한쪽에서는 노골적인 애국주의에 호소하는 제안을 했으며, 다른 쪽에서는 러시아의 우위와 철도의 거대한 이익의 중요성에 기초한 제안을 했습니다. 비록 만주를 완전히 방치하는 것이 러시아의 대규모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에 부합하지 않을지라도, 만주를 제국의 영토로 편입시키자는 제안에 정부 지배 계층은 공감하지 않았습니다.
철도가 파괴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이 철도에 뛰어난 군대를 투입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보호 업무는 2만 5천명으로 무기의 「1단어 판독불가」로 편성된 국경수비대가 맡도록 결정되었습니다.
한편으로, 만주에서의 철군을 강력히 요구하는 외교적 압력은 점점 더욱 강고해져 갔습니다. 청국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제국왕조의 무덤들이 있는 묵덴주 003
번역주 003)
현재의 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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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우리가 점령하고 있었고, 천자의 제국을 쐐기처럼 파고 들어가서 북경의 거의 인접한 곳까지 다가가 있는 상황에 대해 청국은 무관심하게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쉽게 황해에 도달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수천 베르스타라는 공간에서 취약성을 드러내면서, 우리의 아킬레스건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여순항은 자신에게 주어진 희망을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여순항 유역을 깊이 파는 것은 일반적인 항만설비로는 불가능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다 밑 토양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준설기도 굴착펌프도 들어가지 않는 암석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순항은 우리 함대의 적당한 정박지가 되지 못했고 우리 함대는 이 후에 판명된 것처럼 적의 습격을 허용하는 노출된 장소에 정박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불리하게 형성된 극동 상황은 다음의 두 가지 결론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1) 철도건설이 끝날 때에 철도건설에 들어간 비용을 반환받고 철도를 청국에 넘기며 아무르 강 후방으로 다시 물러난다. 그리고 2)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철도를 우리의 손에서 놓치지 않기 위하여 만주북부를 이런 저런 형태로 러시아에 편입시킨다. 이론적으로 가능한 세 번째 결론인 만주 전역을 러시아에 편입시키는 것은 우회적으로도 정치적 심의의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만주를 완전히 방치하고 아무르 강 뒤편으로 귀환하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베어 자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아주 자연스럽게 불안이 나타납니다. 즉 청국인들의 블라고베센스크에 대한 공격이 아무르의 모든 선(線)에서 반복되지 않는다고 누가 보증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군사력이 강력하게 발전되어 있었다면, 만주를 점령한 뒤 우리의 자력으로 만주를 지키는 것이 해결하지 못할 과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악수(惡手)를 둔 행동은 다른 열강들이 청국제국의 여러 지역을 점령하는 동기로 작용했습니다.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의 외교적 사고는 이를 고려한 적이 없었습니다. 한편, 아무 권한도 없는 만주의 다른 지역을 점령하는 것은 우리의 지배 영역을 보호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황인종이 프리아무르 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은 이 지역을 러시아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을 방해했고 러시아 근로자들에게 이길 수 없는 경쟁을 야기 시켰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이러한 경쟁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으며, 당연히, 러시아는 계속되는 저가의 보수(報酬)경쟁이 먼 변경지역인 이곳에 침투하는 것을 막아야만 했습니다.
이 모든 상황들을 논의한 후, 우리의 군 당국은, 1901년 7월 30일 육군대신이 람즈도르프 백작에게 보낸 서신에서 알 수 있듯이 북만주 한 곳과 길림성의 남쪽지역만을 계속 점령하는 것이 유용하다는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그리고 만주지역에서 철군할 경우, 필요한 예비부대로 보충, 강화된 국경수비대가 하얼빈에서 여순항에 이르는 남쪽의 철도만을 홀로 보호하기로 예정되었습니다.
이 계획이 승인될 경우에 대비하여 육군부는 철군 계획을 세웠습니다. 게다가 산해관(山海關)-신민진(新民鎭)철도와 영구 간선을 청국정부에 넘기자고 폐하께 청원하여 1901년 7월 5일 재가를 받았습니다. 군 당국은 1902년 묵덴성에서 우리 군의 철수가 가능하다고 예상했으며, 마찬가지로 1903년에는 길림성 남부지역에서 우리 군을 철수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정치적 사건들이 진행과정을 가까이에서 보아온 우리의 외교당국은, 그들이 작성한 ‘만주에 대한 청국과의 합의안’에서 1903년에 만주 전역에서 우리 군대의 완전한 철군을 의무조항에 넣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육군대신은 이 계획에 원칙적으로 반대했습니다. 육군대신은 1901년 8월 12일 람즈도르프 백작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가 이전에 확고히 주장했던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계속되는 협상과정에서 러시아는 만주에 대해 논의할 대상자는 오로지 만주의 직접 소유자인 청국제국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러시아에게 만주에서의 철군문제를 해명하라고 지속적으로 제의했습니다. 이와 관련된 요미우리 신문의 기사(1903년 5월 6일자)에 따르면 일본 내에는 세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1) 이 영토는 다른 나라의 소유이기 때문에 일본은 만주문제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 2) 만주를 중립지역으로 만들어야 한다. 3) 비록 전쟁이라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만주에서 러시아를 몰아내야 한다. 전쟁과 관련하여, 러시아 지지자인 오사키는 [1단어 판독불가] 신문에 기사를 실었는데(1903년 5월 12일자), 그는 만주전쟁은 무조건 반대하며, 그 누구라도 한국에서의 일본의 이해관계를 침해한다면 우선 그 적과의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했습니다.
러시아는 정치무대에서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국제법상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만주 철군에 대한 일본의 제안를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1903년 말 이 제안들은 협박성을 띤 요구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1903년 10월 30일자 로젠 남작의 전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일본정부는 만주 문제가 발생한 초기부터 우리 정부가 취하고 있는 원칙적 입장에 직접 그리고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로젠 남작은 전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도처에 소문이 무성하여, 일본은 만주문제를 정리하려고 러시아와 협상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아무리 평화를 사랑한다고 해도 극동의 평화 유지는 러시아가 양보하여 이 문제에 관한 협상에 동의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일본정부는 양보의 길을 단념한 듯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협하는 것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 그런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 전문에서 알 수 있듯이 양측 모두에게 양보란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 어려움이 얼마나 컸는가는 1903년 11월 5일자 시종무관장 알렉세예프의 전문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전문에서 그는 일본에게 유리하게 수정한 답변안의 내용과 관련하여, 로젠 남작의 입장에 동의한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전문에서는 일본이 영국과 미국 대표의 공감과 지지를 얻어 북경과 서울에서 러시아에 반대하여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청국과의 합의 하에 [2단어 판독불가]이 다가왔음을 예견할 수 있다고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거액의 러시아 자본을 만주 철도부설에 쏟아 부으면서 자신의 입지를 고수했습니다. 동시에, 한국의 중대한 이익은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한국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청국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대륙에 확고한 발판을 다지고, 한국을 점령하면서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이해관계와 직접 충돌하려 한다는 것이 러시아에게 명백해졌습니다.
전쟁이 끝나면서 시작된 평화협상에서 우리 측의 간섭으로 일본의 계획은 무산되었고 한국 왕조에게는 확실한 독립이 주어졌습니다.
이렇듯, 일본의 명백한 침략성은, 일본과의 전쟁이 시작되면 청국은 러시아에게 배타적 권리를 제공하고, 이에 따라 러시아는 청국을 침략하는 시도들로부터 청국을 보호할 의무를 가진다는 내용의 1896년 러중 비밀협약의 체결을 수월하게 했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 외무부가 잘 알고 있듯이, 러시아가 취한 이러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일본 원수 야마가타는 1896년 대관식 경축행사 차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한국의 분할에 대해 우리와 합의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단 일본은 수도인 서울에서 남쪽 끝까지만 자신들이 보유하고, 서쪽과 동쪽에 있는 항구들을 포함하여 한국 영토의 큰 부분을 러시아에 양보할 의향이었습니다.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규정된, 한국의 독립을 해치려는 모든 시도를 배척하면서, 러시아는 한국에 대해 러시아와 일본이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내용의, 1896년 5월 28일 의정서 조인에 동의했습니다. 양국은 한국에서 동일한 수의 군대를 갖고 건설권 및 전신선 보호권 등을 가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의정서의 비밀조항에 의해 양국은 한국에 심각한 분규가 발생할 경우, 한국 정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들에 대해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이 합의는 도쿄정부의 열망을 만족시키지 못했고, 도쿄 정부는 모스크바 의정서를 다른 조약으로, 즉 도쿄정부에 보다 더 유리한 조약으로 대체하려 했습니다. 만주에서는 러시아가, 한국에서는 일본이 영향력을 갖는다고 영향력의 경계를 확정하는 것이 도쿄정부의 목표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진행된 의견교환으로 합의점을 찾았는데, 이 합의에 따라 도쿄정부는 1898년 4월 13~15일 서울각서주 004
번역주 004)
1898.4. 로제-니시협정(도쿄협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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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모스크바 의정서는 불가침의 효력을 갖는다고 확증했습니다. 결국 한국 문제와 관련하여 새로운 협약을 맺으려 했던 1900년, 1901년, 1902년의 일본의 제안은 러시아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아서 다른 이유를 들어 거부되었습니다.
따라서 언젠가 공명정대한 역사가 한국의 독립과 관련하여 러시아의 법적 태도를 비난한다면, 이 비난은 압록강 유역에서 반 공식적인 반 민영기업의 사업에 실패로 인한 것일 뿐입니다. 물론, 일본의 요구에 대한 답변 통지가 다소 지체되었던 것도 비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만주는 일본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기 때문에 일본은 정치적 맥박의 고동을 보다 빠르게 하라고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러시아 측이 지체한 것은 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본군과 함대는 일본의 요구를 지지하기 위해 이미 전투태세에 돌입한 상태였으나 전투가 벌어진 당시 러시아의 병력은 여전히 전장에서 수만 베르스타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 번역주 001)
    본 번역문은 1906년 체레반스키 В.П.가 작성한「러시아와 일본의 무력충돌이전 러시아의 청국 및 일본정부와의 교류관계 개관」(소장처: ГАРФ,ф.543,оп,1,д.190,лл,1-55об.)에 첨부된 별첨자료Ⅳ의 전문임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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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스타(верста)는 과거 러시아의 길이 단위로 1 베르스타는 1,067m임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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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8.4. 로제-니시협정(도쿄협정)임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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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첨자료Ⅳ : 만주와 한국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 자료번호 : kifr.d_0002_0070_0040